박희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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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희수 sk.jpg

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시절
3. 은퇴
4. 연도별 주요 성적


1. 아마추어 시절[편집]


대전고 시절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했으며 투수로서 공은 딱히 빠르지 않았지만 정확한 제구력과 구위를 선보였고, 타자로서는 타격 정확성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였다.[1] 실제로 2학년 때까지는 고교야구 내 좌완 유망주로 주목받기도 했고 청소년대표에도 선발됐으며 연고 팀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빈약했던 대전고의 투수진 탓에 홀로 많은 이닝을 소화해야 했고, 이 때 무리한 탓인지 정작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3학년 때 팔꿈치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2학년 시절에 비하면 구위가 떨어졌다. 덕분에 전국대회에서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2] 정민혁이 박희수와 대전고 동기였지만, 정민혁은 고교 시절 1년 유급하여 윤규진, 정현석(정형순)과 같이 졸업했다.[3]

결국 고3때 당한 부상과 전국대회 실적 미비 등 이유로 인해 연고 팀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지 못했고,[4] SK 와이번스의 2002년 2차지명 6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프로 입단과 대학 진학을 두고 고민하던 중, 박희수의 대전고 선배이자 동국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이던 한대화의 권유로 동국대학교로 진학했다.[5]

고등학교 때부터 코너워크와 구위 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으나 상술한 팔꿈치 부상이 대학 입학 후에도 박희수를 괴롭혔고, 결국 1학년 때 팔꿈치 수술을 받고 2학년 때까지 공을 던지지 못하는 등 한대화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후 3학년 시절인 2004년부터 나름 구속도 오르고 고교 시절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줬지만, 공교롭게도 이 때는 자신을 데려온 한대화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떠난 후였다. 그래도 3~4학년 때는 동국대 입학 당시 기대만큼 대학리그 내에서 잘 활약해 줬지만 앞선 부상 이력 등으로 인해 예상보다는 적은 계약금 5,000만원에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었다.[6]


2. 프로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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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스프링캠프에서의 모습.[7]
2006년 데뷔해서 5경기에 출장했었지만 승패 없이 2.1이닝 ERA 7.71라는 성적을 기록한 뒤 더 이상 출전하지 못했었다.

그 후 2008년에 상무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1, 2군을 왔다갔다 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이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투수였다. 오죽하면 팬들이 트레이드 카드로 생각할 정도였다.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오죽하면 시즌 초 노경은[8], 김재환이랑 트레이드하자는 글도 올라왔다. 심지어 제춘모와 묶어서 트레이드하자는 말이 나왔었다.


2.1. 2010 시즌[편집]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모습을 드러내며 패전처리용 투수로 기용되어, 큰 각도의 커브를 구사하며 놀라운 탈삼진 능력을 보여주어 팬들을 설레게 하였고 김성근 감독도 패전처리가 아닌 승리조 계투에 포함시킬 의향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에 조금 부진하면서 다시 2군으로 갔다. 좀 지나서 알려진 내용이지만 김성근은 박희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쓰려고 롯데의 박종윤을 비롯해[9] 여러 팀을 찔렀으나 이때까진 1군 실적이 적어 무산되었다.


2.2. 2011 시즌[편집]


정통 오버핸드에서 스리쿼터로 폼을 깔끔하게 살짝 교정한 뒤 구속과 제구력이 좋아져서 2군 마무리로 상당히 좋은 성적을 내자(20이닝 평균자책점 0.80) 1군에 콜업되었다. 처음에는 패전처리로 나왔으나 피칭 내용이 괜찮아서, 1군 필승계투급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SK의 중요한 좌완불펜인 정우람, 고효준이 군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에 박희수의 성장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팬들이 기대하는 선수 중 하나다.

2011년 6월 17일에 7회부터 등판하여 2이닝 무실점으로 막아 데뷔 후 첫 승을 했다. 하지만 그날 경기 내용이 내용인지라 (9회 초의 상황과 세이브 포수 최정) 묻혔다. 그래도 그 이후로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9월 9일 롯데전에서 10회 초에 올라와 손아섭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으나 10회 말에 팀이 2점을 내주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KIA 타이거즈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에 나와 3이닝 1홀드 3피안타 1볼넷 5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011년 10월 23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1로 앞선 5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2번타자인 손아섭을 상대로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하지만 스코어 6:1로 벌어진 6회말에는 전준우에게 안타, 이대호에게 볼넷, 홍성흔에게 1타점 2루타를 맞고 스코어 6:2, 무사 2, 3루 상황에서 강판되었다.
다음 투수 정대현이 첫 타자인 강민호에게 2타점 2루타를 맞는 바람에 박희수의 실점과 자책점이 올랐고, 결국 이날 박희수는 ⅓이닝 20투구수 2피안타 1볼넷 1탈삼진 3실점 3자책점을 기록하고도 홀드를 따냈다.

박희수는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5경기 중 3경기에 나와 3⅔이닝 2홀드 4피안타 3볼넷 1사구(死球) 4탈삼진 4실점 4자책점 평균자책점 9.82를 기록했다.

박희수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2⅓이닝 1패 4피안타 4볼넷 1사구(死球) 3탈삼진 4실점 4자책점 평균자책점 15.43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2011년 포스트시즌에서 첫 타자나 선두타자를 거의 출루시켜서 경기를 어렵게 풀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플레이오프 4차전까지는 그래도 선방했으나 플레이오프 5차전부터는 실점을 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포스트시즌의 성적이 안 좋게 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처음 겪는 포스트시즌이다보니 체력이 방전된 듯했다.

박희수는 2011년 포스트시즌 14경기 중 8경기에 등판하여 9이닝 11피안타 8볼넷 2사구(死球) 12탈삼진 9실점 9자책점 평균자책점 9.00, 3홀드 1패를 기록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67이닝 4승 2패 1세이브 8홀드 ERA 1.88를 기록하면서 최상급 계투진으로 성장하였다.


2.3.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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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시즌 최다홀드 기록을 경신한 박희수[10]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희수/선수 경력/201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혹사로 인해 부상이 생겨 약 한 달 동안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11] 결국 2012년 최강의 불펜투수의 위치를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다.

또한 9월 27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33홀드를 기록함으로써, 기존에 권오준이 가지고 있던 한국 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홀드 기록을 경신하였다. 이 기록은 2015시즌 안지만이 37홀드로 경신, 2019년 김상수의 40홀드로 또 다시 경신하게 된다.[12]

너무 많이 출장한 탓인지 140km/h 중반대까지 나오던 구속이 130km/h 후반~140km/h 초반으로 떨어져 좀처럼 회복이 안되고 있다. 겨우내 이 점을 구단과 코칭스탭에서 잘 관리해주지 않는다면 내년 시즌이 위험해보인다.

시즌 최종 성적은 82이닝 8승 1패 6세이브 34홀드 ERA 1.32를 기록하며 지난 해에 이어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2.3.1.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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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즌에 앞서 2012년 보여준 활약으로 인해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하여 2경기에 등판.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참가한 투수 가운데 제 몫을 다한 몇 안되는 투수가 되었으나 타이중 참사 덕에 빛이 바랬다.

대표팀에서 돌아오자마자 통증을 호소해 검사를 받았더니 6주 진단이 나왔다. 이로인해 박희수가 시즌 초반 등판이 힘들어지게 되면서 정우람마저 군입대를 한 상황인 SK에게는 악재로 다가왔다. 박희수의 부상은 최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에서 무리한 것이 원인이 됐다. 또한 박희수는 대표팀에서 테이핑을 한 채 진통제를 먹고 경기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3년 3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WBC 대회 이전부터 계속 있어왔던 통증이었고 재활캠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탓에 회복이 더딘 상태로 WBC 대표팀에 합류했다고 한다. 합숙, 훈련 기간에도 통증은 있었지만 박희수는 첫 태극마크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서 부상 사실을 류중일 감독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WBC때문에 부상을 입은걸로 비춰지자 류중일 감독에게 미안해했다. 관련기사


2.4. 2013 시즌[편집]


정우람이 군대를 가는 팀 사정으로 말미암아 팀의 마무리 투수로 낙점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희수보다 경험이 많은 정우람도 마무리 보직을 맡으면서 무리하게 구속을 끌어올리려다 제구력이 무너지면서 평균자책점이 올라갔는데 이런 점에서 심히 걱정된다. 박희수 외에 딱히 마무리 투수를 맡을 만한 투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WBC가 끝난 후 박희수가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여 검진한 결과 팔꿈치 인대 손상이 발견되어 6주 진단을 받았다. 이로인해 시즌 초반 SK는 심각한 전력 타격을 입게 되었다. 2013 WBC 최대 피해 선수 중 한 명. 시즌 초반 마무리는 송은범이 맡았다. 정우람은 군대로 튀고, 송은범은 5월 6일 트레이드를 통해 기아로 탈출한 상황에서 박희수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5월 2일 시즌 첫 콜업되어 5월 4일 한화전에 시즌 첫 등판했다. 초반 잠시 불안한 모습을 연출하며 반짝한 선수가 되나 싶었으나, 2012년의 모습을 보여주며 건재함을 알리고 있다.

7월 9일 기준 21경기 1승 11세이브(2블론) 23.1이닝 15피안타 19삼진/8볼넷 방어율 2.31로 마무리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지만...팀이 침체기를 걷고 있다.

7월 16일 문학 넥센전에서 6-5로 앞서고 있던 9회초 등판했다. 1주일만에 등판한 경기였는데, 오래 쉰 탓인지 유한준에게 볼넷을 내주며 제구가 안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허도환이 진루타를 쳐 1사 2루상황. 이후 문우람에게 연속으로 볼 세개를 던지며 솩팬들을 불안에 빠트렸으나, 이후 스트라이크 3개를 잡아냈다. 6구째 한가운데 꽂히는 공이 압권. 박희수의 배짱을 볼 수 있는 투구였다. 그리고 대타 박헌도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김광현의 승리를 지키고 본인도 시즌 12세이브를 수확했다.

8월 들어서 진해수가 호투하고 있는데 그에게 조언을 해 준 결과라고 한다.

9월 들어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만수가 걸핏하면 등판시켜 연투하는 상황이 많았고, 그 여파인지 블론을 몇 차례나 기록. 9월 11일에는 KIA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내줬고, 9월 12일 경기에서는 9회초 2아웃에서 역전 3점 홈런[13]을 내주며 패전투수가 됐다.

시즌 후 연봉협상에서 난항을 보이다 결국 2천만원 오른 1억 9천만원에 계약을 마쳤다. 2013시즌 SK 불펜의 희망이었지만 부상으로 투입이 늦어지고 후반기 중요한 2경기에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한게 2억원 선을 넘지 못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시즌 최종 성적은 47.2이닝 1승 2패 24세이브 1홀드 ERA 2.27 을 기록했다.


2.5. 2014 시즌[편집]



파일:박희수 2014.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희수/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즌 최종 성적은 20.2이닝 1승 2패 13세이브 ERA 3.48 을 기록하면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시즌 중반 어깨 염증으로인한 재활로 인해 시즌 아웃되면서 다소 아쉬웠던 한 해.


2.6. 2015 시즌[편집]


당초 재활에 도입할 시점만 하더라도 빨리 복귀할 수 있을것이라 예상되었는데 재활 과정에서 연거푸 통증을 느끼며 재활이 길어졌고 결국 2015년 전반기를 넘기게 되었다. 의학적으로는 더이상 어깨에 문제가 없다하는데도 자꾸 통증을 느꼈기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주치의에게까지 가서 괜찮다는 판정을 받고 재활에 다시 돌입했다고 한다. 7월 11일에 더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고 재활 과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8월 11일 드디어 실전 경기에 투입되었다. kt wiz 2군과의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1이닝을 소화했고 무실점으로 호투하였다. 최고구속은 138km/h로 빠르지 않았으나 투심과 포심만으로 두개의 삼진을 뽑아내었다고 한다. 같은달 14일 한화 2군과의 두번째 경기에서도 포심과 투심만 던지며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번에도 최고구속은 137km/h로 140km/h를 넘기지 못했다.

그리고 8월 17일, 마침내 1군 엔트리에 복귀했다. 여론은 너무 일찍 올린 것이 아니냐는 게 지배적이지만, 기사에 따르면 들쭉날쭉한 퓨처스경기에서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것 보단 1군에서 감각을 조율하는게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이로써 SK 팬들은 430일 만에 문학구장에 등판한 박희수를 볼 수 있게 됐다. 이 날 9회초 2사 5점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해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고 복귀전을 마쳤다. 김현수를 상대로 4개의 공을 던지며 2루땅볼을 유도했는데 칼같은 바깥쪽 제구와 특유의 투심도 선보이면서 팬들의 정신승리 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8월 20일 10회 말 등판했는데, 팀이 1점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 박병호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다.

8월 21일 경기의 9회에도 등판하며 연투를 하게되었는데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였다. 다만 현저하게 떨어진 구속은 걱정거리.

8월 25일 부상당한 김광현을 대신해 데뷔 첫 선발로 등판한다. 팬들은 어깨 조심하라며 난리중. 왼손이라면 신재웅도 있으나[14] 왜 하필 박희수 인지는 불명. 다행히 1.1이닝 3k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마운드를 채병용에게 넘겼다. 하지만 팀은 0:1로 패하고 말았다.

12월 6일 결혼한다. 박동희의 이 칼럼도 주목받는 중.

시즌 최종 성적은 10이닝 2홀드 ERA 5.40을 기록했다.


2.7. 2016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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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등판해서 공을 던지고 있는 박희수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희수/선수 경력/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기존 마무리 정우람이 FA 자격을 얻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자, 2016 시즌 SK의 새로운 마무리로 낙점되며 2014년 이후 2년 만에 마무리를 다시 맡게 되었다.

5월까지 평균자책점 0을 찍는 등 전반기에는 맹활약을 했으나 후반기에는 조금 부진했고,[15] 시즌 막판에는 등판 기회가 제대로 없었으나, 부상 복귀 첫 해 치고는 나름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사에 따르면 2016시즌 최고의 불펜 자원중 하나였다고 한다.

시즌 최종 성적은 54.2이닝 4승 5패 26세이브 ERA 3.29를 기록하면서 부진했던 지난 시즌에서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3년 만에 올스타전에도 참가하였다.


2.8. 2017 시즌[편집]


올 시즌부터는 마무리 자리를 서진용에게 내주고 셋업맨으로 돌아갔지만 서진용의 부진으로 인해 다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대와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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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최종 성적은 38이닝 2승 6패 8세이브 9홀드 ERA 6.63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로우 시즌.



2.8.1.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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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활약으로 인해 WBC 대표팀에 소집되어 2013년 이후 4년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으나, 막상 서울 라운드에서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팀 역시 1라운드 탈락하였다.

2.9. 2018 시즌[편집]


3월 18일 1이닝 6피안타 3실점으로 3점차 리드도 못지키며 팀의 승리를 날려먹고 말았다. 135에 머무르는 포심 구속으로 인해 투심도 영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힐만 감독이 마무리를 박정배로 낙점했기 때문에 패전조로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다

3월 28일 kt wiz와의 원정 2차전에 시즌 첫 등판하여 2이닝 2피안타 2사사구 무실점 투구를 했지만 팀은 8-5로 패배하였다.

3월 31일 한화 이글스와의 원정 3차전에 1이닝 2피안타 1볼넷을 기록했으나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하고 백인식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4월 3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홈 1차전에 9회초 팀이 13-3으로 리드하고있는 상황에 등판하여 1이닝 3타자 2삼진의 좋은 투구를 보여주며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4월 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등판하여 1이닝 1피안타 1볼넷 2탈삼진 무실점 피칭을 선보였다.

4월 11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 등판하여 1이닝 2탈삼진 퍼펙트 피칭을 했다.

4월 14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 1이닝 1사구 1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하며 이닝을 마무리 했다.

4월 18일 kt wiz와의 경기에 1이닝 무피안타 1볼넷을 기록했다.

4월 24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1차전에 등판하여 1 2/3이닝동안 2피안타 2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다.

4월 26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3차전에 정영일윤희상이 4실점을 하며 두산에게 5-4로 추격 당하고있는 8회초 1사 2루 상황에 SK의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2/3이닝동안 1볼넷 1사구를 던졌지만 실점하지않으면서 팀을 위기상황에서 구해냈다. 시즌 첫 홀드를 기록했다.

4월 29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원정경기에 등판하여 0이닝 2피안타 1실점을 하며 부진했다.

5월 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원정경기에 7회초 등판하여 1이닝 2피안타 2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5월 4일 경기 전에 말소되었다.

6월 1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를 앞두고 1군에 등록되었다.

6월 2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군 복귀 후 첫 등판을 가졌는데, 구속이 전성기 시절 구속이던 142km/h가 나왔다. 이날은 8회 등판해 1이닝을 깔끔하게 틀어막고 내려갔다.

7월 17일 기준 평균자책점 0.89을 기록하고있다. 시즌 초반 직구 구속이 130km/h를 기록했고 현재도 예전만큼 구속이 나오지 않음에도 매우 좋은 성적이다. 흠좀무...

시즌 종료 후 WAR은 김태훈, 신재웅에 이어 팀 내 불펜 WAR 3위이다.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를 플레이오프와 똑같이 사용해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고, 우승반지도 받지 못하였다. 하필 왕조시절이 끝날때쯤 포텐이 만개해서 준우승만 두번 보고 굴릴대로 굴려졌는데, 올해는 나름 좋은 성적[16]을 거두었음에도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해 우승반지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은 팬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엔트리에 포함되었지만 부진했던 서진용과 한 경기도 기용되지 않은 이승진을 대신해서[17] 엔트리에 들어갈 만 했다는 의견도 많다. 선수 본인도 아쉬움이 클듯.

시즌 최종 성적은 33이닝 1승 2패 4홀드 ERA 3.27을 기록했다.


2.10. 2019 시즌[편집]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1차 스프링캠프에 참가했으며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2차 스프링캠프에도 참가했다. 정세영 기자의 말에 따르면 연습경기[18]를 하다 왼 발목을 접질렸다고 하며 붕대를 감고 불펜 투구를 했었다고.

개막엔트리에는 들지 못했으나 4월 5일 정영일과 함께 콜업되었다.

4월 13일 기아와의 경기에서 연장 12회말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결국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 시즌 최초의 무승부게임이 된 건 덤.

이후 엔트리에서 말소되어 2군경기에 등판하다 5월 28일 문승원이 종아리 부상으로 내려가며 콜업되었다. 2일 뒤인 5월 30일 kt와의 경기에 등판해 1.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6월 8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 삼성 라이온즈 세번째 투수로 나와서 공민규에게 7구 안타, 김성훈에게 2구 좌익수 플라이 아웃, 김상수에게 몸에 맞는 볼, 구자욱에게 땅볼출루, 김헌곤에게 3구 플라이로 1.0이닝 14투구수 (S:10, B:4) 1피안타 4사구 1로 마무리를 지었다.

6월 9일 세번째 투수로 나와서 이학주에게 4구 1루수 땅볼아웃, 박해민에게 볼넷, 최영진에게 1루수 플라이아웃으로 잡아냈고 공민규에게 5구 안타, 김상수에게 중견수 플라이아웃으로 1.0이닝 18투구수 (S:18, B:8) 1피안타 4사구 1로 마무리를 지었다.

6월 10일 엔트리에 말소되었다.

6월 21일 콜업되어 두산전 14-1로 앞선 9회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이닝 수는 적지만 안정적인 모습으로 자기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6월 27일 LG전 0.2이닝 1볼넷 1피안타로 무실점.

6월 28일 삼성전 패배 상황 등판해 1이닝 16구 2K .

6월 30일 삼성전 패 상황 16구 2피안타 1실점(비자책)

7월 2일 롯데전 승리조 1이닝 10구 1피안타 1K 무실점

7월 5일 두산전 0이닝 13구 2피안타 1실점(비자책)

7월 7일 두산전 추격조 1이닝 12구 1피안타 무실점

7월 9일 한화전 0:0 상황 1이닝 15구 2볼넷 무실점

7월 12일 키움전 패전조 1이닝 13구 1K 무실점

7월 13일 키움전 2점차 리드 0.1이닝 6구 1K 무실점 1홀드[19]

7월 16일 LG전 0.1이닝 7구 1볼넷 무실점 1홀드

7월 18일 LG전 패전처리 1이닝 1피안타 21구 무실점

전반기 성적 16경기 14이닝 2홀드 ERA 0.00

7월 26일 승리조 롯데전 0.1이닝 2피안타 1자책 13구

7월 27일 롯데전 4:0 리드 9회 등판 1이닝 무실점 12구

8월 15일 KIA전에 7:5 리드를 하고 있던 9회 말 2사 만루 위기에서 등판했다. 앞서 정영일이 세이브 기회를 위기로 만들고, 하재훈이 무조건 휴식하는 상황에서 등판했다. 첫 타자에게 3루 강습 타구로 내야 안타를 내줘 1점을 허용했지만 다음 타자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으면서 2017년 9월 30일 한화 전 이후 약 2년 만의 세이브에 성공했다. 기록은 0.1이닝 1피안타 무실점.

9월 28일 2회초 선발 박종훈에 이어 등판했으나 2개의 안타만을 허용하고 내려갔다. 분식회계에 성공하여 0이닝 1실점 무자책.

이후 더이상의 등판없이 시즌을 마무리하여
28.2이닝 ERA 1.57 평균자책점 1패 1세이브 2홀드를 기록했다.


2.11. 2020 시즌[편집]



파일:박희수 2020.jpg

5월 5일 개막전 엔트리에 등록되어 1군에서 시즌을 시작한다.

그러나 개막전 바로 다음날에 1군 엔트리에서 말소 되었다.

5월16일 1군에서 말소된 최준우 대신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다.

5월 22일 5회초 김주한 다음 투수로 나와 안타를 내줬지만 3삼진을 잡으며 한이닝을 삭제했다. 6회 볼넷을 내주고 박민호 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다.하지만 박민호가 3사사구를 내주며 1실점을 하는 바람에 1자책 패전투수가 되었다.

구속은 떨어졌지만 130 중반대의 투심으로도 삼진을 잡아내는 등 여전히 1군에서 통할 정도의 피칭을 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28게임 24.2이닝 1패 ERA 5.47. 시즌 내내 1-2군을 오가며 확실하게 중용되지 못한 모습이다. 승, 세이브, 홀드를 통틀어 하나도 챙기지 못한 것도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세부 성적의 경우 FIP가 4점대인 등 얼핏 보면 예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지만, 승패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 시즌에는 타이트한 상황에서의 투구 자체가 많지 않았기에 성적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더라도 하락세는 감추기 힘든 상황이다.

시즌 종료 후 팀에서는 은퇴 후 코치 연수를 제안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해외 코치 연수가 힘든 상황인 것도 있는데다가 본인이 현역 연장을 원해, 11월 6일 상호 합의 하에 자유계약으로 방출되었다. 선수 본인은 우선 개인 훈련을 하면서 타 구단의 영입제의를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몸 상태가 좋기 때문에 어떻게든 새 팀을 구해 선수로써 조금 더 뛰어보려는 의지가 있는 모양. 내년이면 38세가 되는 고령이긴 하지만 일단 좌투인데다 경험이 많은 선수이기 때문에 그를 원하는 팀이 있을 수도 있다.

SK 구단 역시 현역 연장을 원하는 박희수의 의지를 존중해 타 팀의 영입제시가 있을 때까지 최대한 기다려 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타 팀으로 이적하지 못할 경우 코치로라도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긴 셈인데, 아직까지는 SK와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은 모양.

11월 27일 윤희상의 인스타를 통해서 유소년 야구교실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3. 은퇴[편집]


하지만 끝내 새 팀을 찾지 못했고,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코치직을 수락하면서 2020년 12월 25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 그가 현역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47번은 오원석이 물려받았다.

김태우 기자에 따르면 SK 구단 내부 규정을 충족한 박희수도 은퇴식 대상 선수이며, 2021 시즌 내에 관중 입장이 허용되는 시기를 보고, 은퇴식 행사를 추진할 전망이라고 전해졌으나,[20] 상무의 투수 코치로 부임하면서 은퇴식을 치르지 못하게 됐다.

2021년 10월 14일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현역 시절 동료인 김재현과 함께 비공식 은퇴식이 진행되었다. 감사패, 선수 피규어 등 선수단 선물 증정식이 있었으며, 단체 기념 촬영도 진행되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6
SK
5
2⅓
0
0
0
0
0.000
7.71
7
0
3
1
2
2
4.286
2007
1군 기록 없음
2008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9
2010
14
17⅔
0
0
0
0
0.000
4.58
23
2
7
15
9
9
1.698
2011
39
67
4
2
1
8
0.667
1.88
40
3
33
76
19
14
1.045
2012
65
(5위)
82
8
1
6
34
(1위)[21]
0.889
1.32
52
2
30
93
12
12
0.963
2013
43
47⅔
1
2
24
(5위)
1
0.333
2.27
31
1
14
46
12
12
0.923
2014
21
20⅔
1
2
13
0
0.333
3.48
17
1
12
29
8
8
1.210
2015
14
10
0
0
0
2
0.000
5.40
13
3
9
12
6
6
2.100
2016
51
54⅔
4
5
26
(3위)
0
0.444
3.29
43
3
31
37
23
20
1.262
2017
48
38
2
6
8
9
0.250
6.63
49
8
23
29
29
28
1.794
2018
35
33
1
2
0
4
0.333
3.27
35
1
18
30
14
12
1.52
2019
34
28⅔
0
1
1
2
0.000
1.26
29
1
16
14
9
6
1.47
2020
28
24⅔
0
1
0
0
0.000
5.47
28
4
10
26
16
15
1.54
KBO 통산
(11시즌)
397
426⅓
21
22
79
60
0.488
3.00
367
29
206
408
158
142
1.28
[1] 이 당시 몇몇 프로 스카우터들은 투수와 타자 양쪽으로 활약하던 박희수의 모습을 보고 타자로 자리잡으면 중장거리 타자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고, 박희수를 지명한 김바위 SK 스카우터 역시 투수와 타자 어디든지 성공할 거라고 내다봤다고 한다.[2] 2001년 대통령배에서 열세라는 예상을 비웃듯 제춘모의 광주상고에 1회전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경기고와의 2회전에서 패했다.[3] 대전고는 대전 내 유일한 고교야구 팀인 탓에 전국대회(대통령배, 황금사자기, 청룡기, 화랑대기, 대붕기, 무등기, 미추홀기 등)에 늘 예선 없이 자동으로 본선에 갔다 보니 전국 본선만큼이나 치열한 지역 예선을 겪어보지 못해 다른 학교에 비해 경기력이 좋지 못하다는 말이 예전부터 많았다. 윗동네 충남예선 북일고-공주고 대결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하다는 평까지 있었다.[4] 이 당시 한화는 청주기계공고 언더핸드 투수였던 신주영을 1차 지명으로 뽑았다.[5] 체육교육학과 2002학번으로 입학했으며 동기생은 우타자 송광민였다.[6] 당시는 2차지명 유효기간이 현재(2년)처럼 정해져있지 않아 고3 선수를 지명해놓고 대학 진학을 시킨 뒤 기량에 따라 대졸 후 입단 또는 지명권 포기를 했었다. 대학교 내내 기량 향상으로 많은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는 케이스도 있고, 고교 또는 대학 졸업반 때 울며 겨자먹기로 구단 측에서 짜게 제시하는 계약금을 받아들이는 선수도 있었다.[7] SK는 그룹 CI 개편으로 인해 2006년 시즌 시작 직전 유니폼을 붉은 색으로 변경했다.[8] 그러나 2011년부터 노경은이 불펜으로 각성하고 2012년 선발로 각성하면서 이런 소리는 쏙 들어갔다.[9] 김성근이 롯데에 박종윤과 트레이드를 제안했지만 롯데 측에서 트레이드 카드를 보고 바로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소문이 있다. 만일 성사되었다면 안 그래도 투수조 막내가 한동한 김광현일 정도의 노쇠화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박희수가 롯데에서 포텐이 터졌다면 롯데는 먹튀이승호와 정대현을 FA 시장에서 사오지 않고도 마무리나 필승조를 보강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검증된 즉전감을 선호하는, 부정적으로 보면 당장의 성적에 눈이 멀어 선수 육성을 등한시하는 김성근 감독의 성향이 반영되었음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덤으로 그 1루수는...[10] 이 기록은 2015시즌 안지만이 37홀드로 경신, 2019년 김상수의 40홀드로 또 다시 경신하게 된다.[11] 그가 잠시 재활군에 내려간 사이 팀 성적이 쭉쭉 내려갔다. SK 와이번스가 각종 타격지표에서 하위권을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페넌트레이스 2위를 달성할 수 있었던 건 다 그의 노력 덕분이었단 의미.[12] 다만 2015년부터 한 시즌이 144경기로 늘어났음을 감안해야한다.[13] 2013년 유일한 피홈런이었다.[14] 신재웅은 LG 시절 선발 경험도 있다.[15] 키스톤의 미친 실책의 탓도 있다.[16] 상기했듯 불펜 WAR 3위이다.[17] 이 두 선수는 각각 92년생, 95년생으로 앞으로 SK에서 뛸 날이 많지만, 박희수는 83년생으로 뛸 날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다.[18] 이 경기로 추정된다 [19] 여담으로 이 날은 박희수의 생일이었다.[20] 마찬가지로 2021 시즌에 은퇴식을 치뤄야하는 박정권, 채병용과는 각자 다른 날에 은퇴식이 추진될 예정이다.[21] 당시 종전 최고 기록인 2006년 권오준의 32홀드를 넘어 역대 한 시즌 최다 홀드 기록. 현재는 2019년 김상수의 40홀드, 2015년 안지만의 37홀드, 2022년 정우영의 35홀드에 이어 2021년 장현식과 나란히 공동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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