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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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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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10


LG 트윈스 등번호 61번
박철홍(1994~2001)

안치용(2002~2010)

김선규(2010~2015)
SK 와이번스 등번호 35번
이명기(2009~2010)

안치용(2010)

허웅 (2011)
SK 와이번스 등번호 23번
권용관(2010)

안치용 (2011~2014)

앤드류 브라운(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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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말년을 보낸 SK 와이번스 시절 찡긋
파일:/image/022/2015/05/05/20150505002696_0_99_20150506182203.jpg
이제는 본인이 천직이라고 말하는 해설위원
이름
안치용(安致溶 / Ahn Chi-young )
생년월일
1979년 2월 23일 (45세)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서울미성초 - 신일중 - 신일고 - 연세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고졸우선지명 (LG)
소속팀
LG 트윈스 (2002~2010)
SK 와이번스 (2010~2014)
해설위원
KBS N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5~)
등장곡
Baltimora - Tarzan Boy
응원가
LG 시절: 김아중-마리아[1][2]
SK 시절 : 쿨-또 자 쿨쿨[3][4]
원곡 미상[5]
Shaun Cassldy - Da Doo Ron Ron[6][7]
Bay Sity Rollers -Saturday night[8][9]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1. 2008 시즌 ~ 2009 시즌
2.3.1. 2010 시즌
2.3.3. 2012 시즌
2.3.4. 2013 시즌
2.3.5. 2014 시즌
3. 해설자 경력
4. 연도별 주요 성적
5. 여담



1. 소개[편집]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외야수. 現 KBS N 스포츠 해설위원.

별명은 밑에서 언급되는 난세영웅, 안쳐용, 치드래곤, 치디 등등.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1979년 2월 23일 출생으로 서울미성초, 신일중을 거쳐 고교야구 시절, 강팀 신일고에서 4번을 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었다. 모교인 신일고가 1997년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청룡기 3개대회 동시 석권을 기록할때 중심 타자로서 맹활약했고 청소년 대표팀에 콜업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97년LG 트윈스의 고졸우선 지명을 받았다. 그 해 서울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타자 3명이 신일고의 안치용, 배명고의 정현택,[10] 그리고 휘문고박용택이었는데, 그 3명을 모두 쓸어 담은 LG는 미래의 클린업을 얻었다고 좋아했고, 이 3명에게 많은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만큼 안치용의 고교 시절 위상은 전국구 급이었다.

그러나 프로 입단 대신 연세대학교의 러브콜을 받아 대학에 진학했고, 신입생임에도 연세대학교 야구부의 클린업 트리오를 꿰어찼지만, 처음 입학 때와는 달리 안치용은 끝을 모르게 부진하며 4번 타자로 입단해 9번 타자로 졸업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2.2. LG 트윈스 시절[편집]


연세대학교 졸업 후 LG 트윈스에 입단, 2002년 5월 12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데뷔하였으나 LG 유망주들이 늘 그렇듯이 그냥 그저 그런 성적만 보여주며 1, 2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열심히 훈련을 하던 선수가 아니었기에[11] 구단에선 그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방출하려 하였으나 2006년 LG의 감독으로 부임한 김재박 감독은 도하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 LG의 1.5군이 가진 연습 경기에서 안치용의 파이팅 넘치는 외야 수비[12]를 보고는 안치용을 더 지켜보자고 구단을 설득하였다.


2.2.1. 2008 시즌 ~ 2009 시즌[편집]


그리고 2008년 라뱅의 일본 진출, 박용택의 부진, 동수옹의 부상 등으로 중심 타선에 자리 잡은 안치용은 시즌 초부터 맹타를 휘두르며[13] 5월 한때 3할 5푼의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냈다. 6월 26일 삼성전에서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풀 타임 시즌 경험 부족으로 차츰 페이스가 하강, 1군 101경기에 출장하여 0.295의 타율과 7홈런, 52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때 얻은 별명이 난세의 영웅. 다만 난세를 평정할 만큼의 힘은 되지 않았는지(…) LG는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다.

시즌 말 트윈스 러브 페스티벌에서 퇴장을 당한다....[14] 물론 연출. 애초에 들어선 타석도 좌타석이다.

참고로 1군과 2군(2003년)에서 모두 사이클링 히트를 해 본 선수는 드문데, 이 선수는 그것을 해봤다는 것이 중요하다. 퓨처스 리그 기록은 기사화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드러날 일이 많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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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지금도 화자되는 봉산탈춤 수비를 선보이기도 했다. 얼쑤! (2009년이었는지 그 전이었는지 확인바람)

2009년에도 시범경기에서 연일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난세의 영웅 시즌2를 예고했으나,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한 극심한 타격부진으로 안쳐용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버린 반면, 부활한 박용택, FA로 들어온 이진영등에 밀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2009년 성적은 타율 0.237, 5홈런 30타점.


2.3.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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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는 기존 주전에다 이병규, 이택근이 또 추가되며 외야의 빅5가 완성되었으니 더더욱 출장 기회도 잡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7월 28일 4:3 트레이드로 권용관, 이재영, 최동수와 함께 SK 와이번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2.3.1. 2010 시즌[편집]


그리고 당일 벌어진 LG와의 경기에서 첫 타석에서 2루타를 기록했다. 당장 주전으로는 박재상-김강민-박정권, 백업에는 박재홍, 조동화, 임훈 등이 버티고 있는 SK 외야진을 뚫고 올라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의외의 선수 기용과 높은 적중률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이 있는 만큼 2007년 김재현, 2008년의 최정에 이은 신데렐라가 될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SK로 온 지 불과 3일 만인 7월 30일 KIA전에서 상대 투수 로만 콜론의 공에 왼손 약지가 골절되어 시즌 아웃되는 비극을 맞았다. 이적 후 끌어올리던 페이스가 언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지가 불투명해졌다.

다행히도 9월 11일 대전 한화전에 1군으로 조기 복귀했다. 당시 인터뷰에서는 "부상은 완치되었다. 문제는 타격감."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부상에서 회복한 모습. 이후 대타로 출전하다 17일부터 주전 외야수(우익수)로 출전, 최근 5경기서 0.462(13타수 6안타 1홈런)를 기록했다. 우려해오던 타격감은 오히려 절정의 모습을 보였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대수비로, 4차전에 김재현의 대타로 출전하여 1볼넷, 출루율 1.000을 기록한 게 전부였지만, 팀이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하여 생애 최초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2.3.2. 201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안치용/201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반기 SK의 난세영웅으로 활약했다.[15]


2.3.3. 2012 시즌[편집]


개막전부터 팀의 4번타자로 시즌을 시작, 4월 15일 한화와의 문학 홈 경기에서 선발 지명타자로 출장하여 팀이 7:0으로 이기던 2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브라이언 배스를 상대로 마수걸이 매운탕 한 그릇 솔로홈런을 쏘아 올렸고, 팀이 8:2로 이기던 6회말 1사 1, 2루에서는 2012 시즌 첫번째이자 KBO 역대 72번째 인사이드 파크 홈런[16]을 달성하며 팀의 11:6 승리를 견인 했다. 이날 3타수 2안타 2홈런 4타점 3득점을 기록.

하지만 이후 끝없는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4번타자에서 내려갈 타순은 내려간다 대타 요원으로까지 강등, 타격감까지 잃으며 폭풍삼진만 당하다가 결국 5월 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문학 홈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3:2로 지던 8회말 선두타자 대타로 나와 삼진을 당했다. 팀은 9회말 조인성의 대타 끝내기 투런포로 5:3으로 재역전승했지만, 결국 안치용은 그 다음날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으로 내려갈 때의 타율은 0.196, 안타는 11개에 삼진이 25개였다. 작년의 성적이 플루크였다는 소리까지 조금씩 나왔다.

곧 콜업되었고 5월 타율은 3할3리로 마감한다. 6월 16일 열린 대 한화 전에서 박찬호에게 3안타를 뽑아내며 박찬호 킬러임을 과시 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 현재, 타율을 .259 로 끌어 올렸다. 박재상의 부재로 꾸준히 좌익수로 출장 중인데 LG 시절의 봉산탈춤 수비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수비력을 보였다.

그러나 9월 7일에 있었던 KIA와의 경기에선 김광현 vs. 윤석민의 빅뱅이 예고되었으나, 안치용이 명불허전 쓰레기같은 예능수비를 작렬하여 필요 이상의 점수를 대량으로 허용함으로써[17] 결국 김광현은 멘붕하며 무너졌다. 타석에선 1타석 1볼넷을 골라내었다.


2.3.4. 2013 시즌[편집]


시즌 초반 2군에서 시작해서 1군으로 콜업된다. 하지만 포지션이 겹치는 김상현이 KIA에서 오면서 5월 9일부로 2군행, 오랜기간 2군에 머물다가 9월 엔트리 확대시 1군으로 복귀해서 9월 3일 LG전에서 복귀 첫타석 대타로 나와 역전 안타를 치며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3.5. 2014 시즌[편집]


1년 내내 2군에서 머물렀고, 1군에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10월 21일 이호준의 인터뷰로 뜬금없이 까였다. 이호준은 준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던 최경철을 칭찬하며 "SK 시절 안치용과 함께 살던 최경철은 훈련이 끝난 뒤에도 동네 놀이터에서 항상 1시간씩 타격 연습을 한 뒤 돌아왔다. 때문에 안치용은 항상 기다렸다 1시간 늦게 최경철과 식사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최경철이 연습할 동안 안치용은 쉬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이 기사의 베댓은 안치용을 까는 내용이 다수였다. 집에서 부랄 긁던 안치용 어벙벙행 까였다고는 하나 아직 그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그리고 2015년 새해가 밝은 지 12일 만인 1월 12일, 은퇴 결정을 했다.


3. 해설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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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조성환 해설위원과 함께 찍힌 사진

파일:external/cc5b24ec243b4af32c3f7798edff8e7490dc47d3954bec1e678835e1e78ed25b.jpg
김재현 코치와 대화 나눈 사진 형사아찌 같다.

은퇴 선언과 동시에 해설자로서의 변신을 선언했다.[18]

KBS N SPORTS에 영입되면서 해설자 데뷔를 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언변이 뛰어나다보니 시청자들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유머도 있고 목소리도 괜찮아 듣기 편하다는 평. KBS N SPORTS가 2015년에 영입한 의 새로운 해설위원 중 가장 낫다는 평가이다. 사실 한 분만 빼면 다 괜찮긴 하다 다만 조성환 해설이 성장세를 보여주고 본인은 언변에 비해 전문성에서는 좀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같은 방송사 송진우, 이용철 해설위원이 워낙 자격 미달이라 반사이익을 보는 것 아니냐는 재평가 여론도 조금 있었다. 그래도 몇몇 팀에 대한 편파 논란만 빼면 대체적으로 불호가 심하지 않는 합격점의 해설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단 삼용철과 송셀린보다야

한편 은퇴를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야구장비를 남김없이 전부 다른 선수들에게 줬다는 후문이 있다. 이 소식을 들었던 SK 와이번스 스태프들은 정말 독하다는 말을 했었을 정도.

단, SK 경기를 중계할 경우 분위기적인 편파 해설이 심하다는 의견이 있다. 아무래도 본인이 은퇴 전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팀이라 애정도 있겠지만,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정보 이외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성격이나 습관 등 사적인 정보들 역시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2015년 4강이 어느 정도 결정되고 5위 싸움이 치열하던 무렵 모든 방송사 해설자들의 5위 예측 발언이 주목된 적이 있었는데, 다들 롯데나 한화, 기아 등으로 할때 안치용 혼자 "저는 SK가 5위가 될 거 같다"며 SK를 한 달 넘게[19] 5위 후보로 주목하며 튀는 행보를 보였는데, 정말로 SK가 5위를 함으로써 안치용 혼자만[20] 예측이 맞게 되었다.

2015년 9월 16일 SK와 삼성의 경기를 중계하던 중 카메라에 나바로의 가족이 나오자 까매서 누가 동생이고 아버지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 뒤 아차 싶었는지 급히 사과를 했다. 다행히 크게 이슈는 되지 않고 묻혔다.

2017년 들어서는 KBS 해설진이 한 명 빼고 다 그렇듯이 썩 평가가 좋지 않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 언급했듯 조성환 해설이 계속 발전하는 해설을 보여주는 사이 별로 발전이 없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편파해설 문제가 친 김성근 기질과 합쳐져서 싫어하는 사람들진성칰팬들은 SBS의 안경현과 함께 해설계의 양대 노리타라며 상당히 싫어한다.

2018년부터는 조성환이 두산 베어스의 수비코치로 부임하면서 이용철, 장성호, 봉중근, 대니얼 김과 해설을 한다.

2018년 박태원 아나운서로 진행자가 바뀐 KBS 제1라디오 스포츠 스포츠의 코너 야구장 가는 길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그외 해설 중에 호수비 장면을 보고 '저 타구는 타구판단만 잘하면 충분히 쉽게 잡을 수 있는 타구인데 불안하게 잡는다'라고 말하며 호수비를 평가절하 하는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다. 본인도 수비는 별로 못했으면서 말이 많네...

그 외에도 한화가 청주 홈경기를 하는 경우 KBS청주방송총국 2라디오에서 라디오 중계를 맡고 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타율
경기수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사사구
삼진
2002
LG 트윈스
.000
1
2
0
0
0
0
0
0
0
0
1
2003
.119
37
42
9
5
2
0
0
7
4
4
12
2004
.103
22
29
5
3
2
0
0
5
1
6
11
2005
.143
13
7
1
1
0
0
0
0
0
0
2
2006
.071
20
28
2
2
0
0
0
0
0
3
8
2007
.222
12
18
2
4
1
0
0
1
1
1
4
2008
.295
101
370
46
109
27
3
7
52
7
39
79
2009
.237
90
224
29
53
5
1
5
30
3
28
47
연도
소속팀
타율
경기수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사사구
삼진
2010
SK 와이번스
.313
30
48
3
15
1
0
1
4
2
9
10
2011
.311
93
219
45
68
8
0
12
42
3
34
1
2012
.222
92
198
23
44
10
1
6
23
3
32
66
2013
.244
17
41
2
10
0
0
1
5
1
4
17
KBO 통산(12시즌)
.256
528
1226
167
314
56
5
32
169
25
171
313


5. 여담[편집]


  • 파일:attachment/b0051359_4e70eaa55b76c.png
안치홍과 자주 헷갈린다. 팀 동료였던 정근우안치의 응원가를 부르면서 놀리기도 했다.(…)SK의 안치용 안치용 안타치고 도루하고 해설위원으로 데뷔하고 시즌 시작 전 스팟 영상을 찍었는데 이름이 비슷한 안치홍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을 스스로 했다.안치'용'입니다. 안치'홍'은 군대갔어요. 2017년 kt wiz안치영이라는 신인 선수가 입단하게 된다(...) 안치용-안치홍-안치영 그 다음은 안치옹? 그래서 안치홍 안치영 모두 못 칠 때 별명은 안쳐용 확정.

  • 선수복장차림을 하지않았을 평상시에는 외모가 범상치 않아보여서 그런지 형사로 오해받을 때 있고, 정장차림으로 입으면 경호원으로 오해받곤 했다.지못미

  • 때론 해설할때 재미있는 아재개그를 한다. "고양이는 엔트리에 없는데??"

5회초 5:0으로 크게 앞서간 넥센 히어로즈 주자 1루, 2루 상황에 타석엔 주효상의 친 타구가 병살 타로 물려가자 주효상은 너무 천천히 달린 장면에..
경기를 빠르게 진행하려는 넥센, 물음표가 붙는 플레이

"지금 주효상 선수가 너무 쉽게 병살타에 물려가는 상황이 아닌것 같아요.."


(화면 리플레이로 강성철 캐스터의 부연설명에) "잠깐만요.. 볼께요.. 이게 1루에 사실은 접전이 되어야 하는 코스이잖아요? 특별히 부상이 없으면 (리플레이로 병살타 장면을 본 주효상) 이런 플레이는 아니죠!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거죠.. 이건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아웃카운트를 빨리 늘려서 5회를 빨리 마쳐야겠다는 생각인데.."


다만 경기는 9회까지 계속 진행되었고 롯데는 5회까지 6:0으로 뒤지는 상황에 역전을 시켜 6:8로 승을 거두었다. 넥센 팬들은 너무 심하게 편파적인 의견으로 볼수 있겠지만 때론 선배이기도 하기에 질책을 하는건 맞다.

  • 2017년 11월 KBS N에서 방송된 합의판정 이호준 편에서, 안치용에 관한 일화를 이호준이 재밌게 풀어내었다. 야식으로 보통 라면이나 국수를 먹는데 안치용은 고기를 구워먹는다던지, 운동을 마치고 사우나에 다같이 갔는데 안치용의 몸매를 보고 저주받은 몸매라고 했다던지 에피소드들을 마구 쏟아내었다.


[1] 안치용~ LG 안치용~ 안!치!용! 무!적!L!G! 안!치!용![2] 안치용이 떠나고 이후 정의윤이 물려받았..으나 결국 정의윤도 SK로 왔다.[3] 우리모두 안! 우리같이 치! 다같이 용! 와이번스 난세영웅! 와이번스 안!치!용! 와이번스 난세영웅! 와이번스 안!치용![4] 안치용이 은퇴한 다음에 SK로 이적한 정의윤한테 이 응원가가 잠시 넘어갔었다. 이로써 정의윤은 안치용의 응원가만 두 번 물려받았다.[5] 불!꽃! 투!혼! S!K!안!치!용![6] SK와이번스 안치용~ 라랄라라라 라라라×2 Hey~ Hey~ 안치용~×3 SK와이번스 안치용~[7] 이후 이 응원가는 조성우가 물려받았다.[8] SK의 안치용 안치용~ 안타치고~ 도루하고~X4[9] 뜬금 없이 왜 써져 있냐면 KIA 타이거즈 소속 안치홍과 굉장히 많이 헷갈렸기 때문(...) 동료 였던 정근우도 이걸로 놀렸다.[10] MBC 청룡, LG 트윈스 역사를 통틀어 게으르고 불성실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멘탈이 심각하게 개판이었다. 2군에서 햇빛에 얼굴이 타기 때문에 낮경기를 못하겠다며 경기 출장을 거부한 일화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결국 코칭스태프에게 단단히 찍혀서 쫓겨나듯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되었지만, 당연히 빛을 보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하였다. 참고로 박용택의 휘문고와 안치용의 신일고는 강팀이었지만, 정현택의 배명고는 정현택의 원맨팀이었다.[11] 본인이 회상하는 자신의 프로선수 시절, 여담이지만 안치용은 SK 시절에도 김성근의 훈련을 피해 대놓고 땡땡이를 쳤던 용자였다. 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사실 당시 LG코치였던 이순철도 먼 훗날 주간야구라는 방송에서 안치용은 신인때부터 자기관리 안해서 입단했을때 이미 심각하게 뚱뚱했다고 대놓고 디스했다. 물론 방송주제는 안치용이 아니라 박용택이었는데, 그를 신인때부터 본 이순철이 완벽한 근육질 몸관리를 신인때부터 한 박용택의 모습을 설명하다 보니, 그의 동기였던 안치용을 절로 비교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디스하게 된 것.[12] 우익수로 선발 출장 하였는데, 관중석으로 넘어갈 외야 플라이 타구를 전력 질주해서 잡는 멋진 호수비를 하였다.[13] 2002년에 데뷔했으나, 통산 첫 홈런은 2008년에 기록.[14] 아마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일 것이다......만 원조는 이쪽,그렇다고 홍성흔이 따라한건 아니지만, 정말 둘의 동작이 비슷했다.[15] 훗날 4년의 세월을 거쳐, 이 외부영입 출신 SK 난세영웅 계보는 2015년의 정의윤이 이어받게 된다.[16] 당시 우익수 정원석이 타구를 잡다가 펜스에부딪힌사이 홈에들어왔다.이때 임용수 캐스터의 홈으로오오오 홈으으으로오오오도 인상적이다 정원석은 그 부상으로 시즌아웃, 선수인생도 마감하였다. (엄지탈골)[17] 이상하게 KIA 타자들이 칠 때마다 타구가 좌익수 안치용 쪽으로 계속 갔다.[18] 몇년 전 인터뷰에서는 뛸 수 있을 때까지 뛰겠다고 말했다.[19] 그가 처음 아이 러브 베이스볼에서 예측을 말하던 당시에는 SK가 7위였고 한동안 5위를 하지 못한 채 6위와 7위를 오갔었다. 심지어 SK 팬들조차 5위를 어렵다고 봤던 시기. 그러나 안치용은 계속 5위 예측을 바꾸지 않았다.[20] 물론 추후 SK가 종료 2주 정도를 남기고 5위를 하자 그때부터는 5위가 SK일 거라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많이 나왔다. 예측 철새?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예언한 사람은 분명 안치용 혼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