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혜인/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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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용혜인의 정치 활동을 정리한 문서.


2. 정계 입문[편집]


파일:84378147.jpg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평범한 삶을 꿈꾸던 용혜인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치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1]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600만 명의 서명을 모았지만, 당시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원내정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2016년 만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노동당 비례대표 1번 후보로 나왔는데, 기본소득 30만원과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허나 노동당 득표율이 저조하여 낙선했다.

2018년 겨울 신지혜, 신민주, 서태성과 함께 기본소득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노동당을 변화시키겠다는 기조를 내세우며 당 대표단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전체 당원 중 19%에 불과한 2030 청년당원들이 대표단으로 선출되는 이례적인 사례였다. 당대표가 된 후 시대 변화에 맞춘 당명 개정과 당 혁신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대회에 올라간 당명 개정 안건이 부결되면서, 대표를 사퇴하고 기본소득당 창당 운동에 돌입한다.

이후 2019년 8월 24일에 기본소득당 창당을 위한 위크숍을 열고 기본소득당 창당을 결의한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대부분 기본소득당 창당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점쳤다. 기본소득 자체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생경한 정책이었고, 원이슈 정당도 녹색당 외에는 한국정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였기 때문. 본인 역시 창당이 적어도 몇 년은 걸릴 수 있다고 각오하며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창당을 선택한 이유는, 좌우 이분법적 진영정치를 떠나 정책과 비전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당을 준비하며 했던 인터뷰에서 가치와 진영을 중심으로 나뉜 현재의 한국정치에서 “좌도 우도 아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기본소득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 기본소득당 창당 및 제21대 총선[편집]


파일:기본소득당창당대회용혜인.jpg

불가능할 것이라던 세간의 예상을 깨고 6개월 만에 2만 명의 당원을 모아 2020년 1월 19일 기본소득당을 창당하고 초대 상임대표로 추대되었다. 국내 최초로 온라인 창당을 시도했던 것이 창당의 성공비결로 꼽힌다. # 여담으로 창당대회가 본인의 결혼식보다 더 떨렸었다고. #

창당 직후 제21대 총선 대응에 뛰어들었다. 선거법이 개정되고 맞는 첫 총선이니만큼 다양한 제정당들과의 선거연합을 모색했고 3월 20일 기본소득당은 더불어시민당 선거연합정당 합류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 용혜인은 해당 결정에 대해 “한국 사회 기본소득제 실현과 개혁정치의 확장이라는 실리를 얻기 위한 담대한 결정”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2020년 3월 23일에 더불어시민당 비례후보 5번에 배치됐고 당선돼 원내에 입성했다. 제20대 총선과 이번 총선의 결과를 생각하면 실리적 판단을 했다는 평가.

2020년 5월 12일에 더불어시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제명이 확정됐고[2] 그 다음 날인 5월 13일에 기본소득당으로 복귀했다. 복당하며 "기본소득당이 펼치고자 하는 새로운 정치를 국회에서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4. 출산과 육아[편집]


2020년 10월 16일, 임신 7주차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 현장에서 동료의원들에게 직접 축하를 받기도 했다 이로써 장하나 전 의원, 신보라 전 의원에 이어서 임기 중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세번째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정감사 기간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로 유산방지 주사를 맞기까지했다고 한다.#

2021년 5월 8일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 출산이 알려진 후 문재인 대통령, 김상희 국회부의장,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축하가 쏟아졌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탄희 의원은 출산 소식을 알리는 SNS 게시물에 직접 ‘축하합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현역 국회의원은 출산휴가가 보장되지 않기에, 국회의장의 허락을 얻어 2달 동안 출근과 재택근무를 병행했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상 출산 전후 휴가기간이 90일 이내인 것을 감안했다고.

2021년 7월 5일, 생후 59일 된 아들과 함께 국회로 출근했다. #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 유모차를 끌고 등장했던 용혜인의 복귀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복귀 첫 날 기자회견에서 본인이 발의한 ‘국회 회의장 아이동반법’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했다. [3]

5. 제21대 국회의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용혜인/정치 활동/제21대 국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1. 이태원 압사 사고 국정조사 특별위원[편집]


이태원 압사 사고 발생 직후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이자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며 이태원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2022년 11월 1월, 이태원 참사 이후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정부 보고만 받고 이상민 행안부 장관에 대한 질의가 금지당하자 항의하며 퇴장했다.

이태원 참사 관련 박희영 용산구청장거짓 행적에 대해 계속 잡아냈으며 관련기사 관련기사 박희영 용산구청장을 국민의힘 윤리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했다.


2022년 12월 1일, 국정조사 특위 위원으로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해당 간담회에서 유가족이 서울시가 유가족 명단 없다고 거짓말 했다고 비판하자, 다음날 서울시의 "유족 간 연락처 공유 불가" 매뉴얼을 확보해 유가족의 증언을 직접 확인했다.

국정조사에서 유가족을 향해 (야당이랑) “같은 편이네, 같은 편이야”라고 비아냥거리던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을 향해 “최소한의 인간성도 잃어버렸다”라고 일침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2차 기관보고에서 참사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다 삶을 등진 희생자A의 어머니의 편지를 읽었다. 참사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됐음에도 여전히 희생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담당 기관의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있는 조치,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특위 차원에서 엄중히 촉구하고 마련해나가겠다고 했다. 이후 2023년 1월 3일 행정안전부가 A학생을 희생자로 공식 인정하며 공식 사망자 통계가 159명으로 변경되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관련 혐의로 구속 중이던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단체카톡방에 "헌법 위에 떼법, 그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는데 저는 국민정서법으로 구속됐다"고 메시지를 올렸다고 공개했다. 해당 청문회에서 유가족과 국민에 사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박희영 용산구청장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해당 청문회에서 서울시의 초기 대응 실패를 지적하며 오세훈 시장단의 책임을 묻기도 했으며,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책임 방기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거짓말을 밝혀내고 비판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마지막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법위반 사실을 드러냈다. # 참사 당시 ‘재난관리주관기관’을 정했냐는 용혜인의 질문에 처음에 정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던 이상민 장관은,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재난관리주관기관을 행정안전부로 정한 것”라고 말을 바꿨다. 재난안전법 상 행안부 장관이 재난관리주관기관을 정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 그러나 이상민 장관 답변대로 행안부가 재난관리주관기관으로 정해진 것이라면 참사 직후 중수본을 설치했어야 할 법령을 위반한 셈이 된다. 이는 국정조사 보고서에도 이상민 장관의 구체적인 법 위반 사실로 기재되면서 이상민 장관이 탄핵소추가 되었던 핵심근거로 작용했다.

국정조사를 마친 용혜인은 국정조사 질의 중 핵심 10가지를 추려서 국정조사 특별의정보고서를 발행했다.

또한,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마감을 앞두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권리 회복을 위해서는 특검과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정조사가 끝난 이유도 있지만 특수본의 '꼬리자르기식 셀프 수사'의 한계를 지적했다.

5.2.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편집]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줬다. 청문회 이전부터 용혜인-김행의 대결을 기대하는 여론이 컸다. 뉴스하이킥에서 몇 차례 토론을 벌이며 명장면(?)을 만들었기 때문.

김행이 부회장으로 있는 ‘위키트리’가 자극적이고 2차가해성 기사를 양산해 돈을 벌어온 황색언론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위키트리에서 낸 성범죄 관련 기사제목을 하나하나 읽던 용혜인은 “혐오감이 들어서 입에 다 담지를 못하겠다”고 말했다. “혐오 장사로 돈을 번 거다”라는 용혜인의 지적에 대해 김행은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라며 유체이탈 화법을 시전했다. 언론 전반의 문제지, 위키트리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 #

그러자 용혜인은 2차 질의에서 인터넷 언론 4804곳 중에 위키트리가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과 현황에서 4년 내내 1~2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를 가져와, 위키트리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또한 위키트리의 선정성 기사를 김행이 직접 공유하며 ‘정말?’이라고 코멘트를 단 페이스북 게시물을 공개했다.

이어 김행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현장에서 도망가는 일명 ‘김행랑’ 사태가 벌어지면서 더욱 논란이 커졌다.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중에 도망가는 것은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한다. 결국 후보자 본인이 10월 12일 서면을 통해 자진 사퇴의사#를 밝히면서 김행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종료되었다.

5.3. 기본소득 입법과 사회적 양극화 해소 노력[편집]


소병훈, 허영기본소득에 우호적인 의원들과 ‘국회 기본소득 연구포럼’을 창립해 책임연구의원을 맡았다. 기본소득 공론화법, 기본소득 탄소세법, 기본소득토지세법을 차례로 발의했다.

생활고로 인한 청년의 자살 앞에서 용혜인은 “감세만능론과 시장지상주의, 선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더 많은 국민을 망망대해에서 육지로 이끌 수 있을텐데”라면서, “연이은 국민들의 죽음 앞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기본소득을 공약해온만큼, 기본소득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인천계양을 선거에서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를 기본소득 동료로서 국회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응원을 보내는 한편, 더불어민주당 기본사회위원회 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연합의 22대 총선 공약에도 첫출발 기본소득이 포함되었다.

2020년 7월 30일 국민의힘 윤희숙 전 의원이 자신이 임차인이라며 종부세법에 대해 찬성하는 토론을 하자, 8월 4일 윤희숙 의원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여 종합세법 일부개정 법률안 표결을 앞두고 반대 토론에 나섰다. "저는 임차인입니다."[4]로 시작하는 이 반대 토론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꽤 유명해졌다. 같은 임차인인 처지지만 윤 의원과는 반대로 부동산 3법을 옹호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통합당 의원들을 비판했다. # 특히 MBC 스트레이트 보도 등을 통해 부동산 차익을 크게 본 것으로 나타난 주호영원내대표를 상대로 “23억의 불로소득을 아까워하지 마시고,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십년 월급을 모아야만 내집 마련이 가능한 서민들의 대표자가 되어달라.", "4평짜리 최저 기준[5]의 삶을 살아가는 국민의 대표가 되어달라"고 호소했다. ##

2020년 9월 22일, 2020년도 4차 추가경정예산#고용보험기금운용계획변경안 표결에서 유일하게 모두 반대표를 던지고 반대토론을 했다.#, # 2차 긴급재난지원금을 긴급고용안정지원금 형식으로 선별지원하기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합의한 데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2년 정기국회 첫 날인 9월 1일, 횡재세를 발의했다.

용혜인 의원안은 우선 정유사만이 아니라 은행에도 횡재세를 부과한다. 한국의 횡재세 논의는 석유정제업에 집중돼 왔지만, 횡재세의 성격상 초고금리 상황에서 초과이득을 누리는 산업 부문에 은행을 빼놓을 수 없다. 용혜인 의원안은 또한 처음 시도되는 세법임을 감안해 위헌 시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규정을 두었다. 횡재세가 기존 법인세와 중복 과세되는 경우 횡재세액에서 차지하는 법인세액을 공제하는 규정을 두었고(이중과세 위헌 관련), 초과이득이 너무 커서 횡재세액이 법인세액보다 많이 나올 경우 그 초과되는 액수는 횡재세액에서 차감하도록 하였다.(과잉금지 위헌 관련). 이로 인해 명목세율은 50%이지만 실효세율은 최대 30%를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용혜인 의원안은 횡재세 세수를 초과이득공유기금으로 편재하여 금융 및 에너지 취약 계층을 지원 용도로 사용토록 하였다. 이는 횡재세가 단지 증세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유럽의 연대 기여금처럼 재분배 세제로 기능하고, 이로써 저소득층과 서민의 지지 속에서 증세가 힘을 받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관련 기사


5.4. 일 가정 양립 입법 활동[편집]


우리 모두는 어린이이거나, 어린이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첫 순간에 느리고 서투르며,

언제나 처음 배우는 일에 미숙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빠르고 능숙하고 성숙한 사람들만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느리고 서툴고 미숙해도 괜찮은 사회입니다.

2023년 5월 4일 아들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2021년 7월 5일 생후 59일된 아들과 함께 여의도 국회에 출근했다. #1 #2

2021년 8월 4일, 인터뷰를 통해 육아와 직업활동 사이에서 죄책감으로 고민하는 워킹맘들에 대해 우리사회가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30대 워킹맘으로서, 육아엄빠 연차휴가보장법, 육아엄빠 불이익 방지법을 발의해서 일·가정양립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현재의 저출생 위기를 극복하려면 아이를 돌보는 일이 개별 양육자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책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23개월 된 아들과 함께 선 노키즈존 반대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해당 기자회견 직후 워킹맘들의 커다란 지지를 보낸 반면,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자영업자들의 반대 여론 역시 일었다. 이에 대해 용혜인은 MBC 백분토론에서 영업장 보험 지원 등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짚으면서도 “중요한 것은 국가가 노키즈존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6. 제22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본인과 소속 정당인 기본소득당의 인지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시작하여, 의정활동에서 최상위 랭크를 유지하는 등으로 자신의 인지도와 평가까지 뒤바꾼 국회의원이며, 차기 선거에서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2024년 2월 1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회민주당, 열린민주당과 함께 연합정당인 개혁연합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윽고 2월 3일 새진보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아무래도 기본소득당이 용혜인을 제외하면 인지도가 높지 않은 정당이다 보니, 선거연합을 통해서 세를 불리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새진보연합이 더불어민주당, 진보당과 함께 더불어민주연합이라는 선거 연대를 결성하게 되면서 기본소득당의 원내 재진입이 확실시되었다.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해 당선안전권인 6번을 받았다. 이변이 없으면 비례대표로만 재선 국회의원에 오르는 기록을 쓰게 된다. 참고로 조배숙이자스민이 비례대표를 두 번 경험한 국회의원이다. 물론 본인의 활동 정당이 아닌 남의 정당에 기생하는 것만으로 비례대표로 재선되는 경우는 헌정사상 최초이며, 비례위성정당의 사실상의 주인인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비례위성정당 비례대표만으로 재선을 노리는 경우는 김예지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6] 김예지는 지역구를 살펴보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용혜인만큼의 논란은 나오지 않는다. 실제 비례대표의 입법 취지가 사회적으로 소수자에 해당하는 집단의 이익 대변을 위한 것인만큼 실제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은 오히려 비례대표 출마에 적합한 인재로 볼 수 있다.[7]

위성정당 비례 연임이라는 비판에 대해 용혜인은 "기본소득당이라고 하는 작지만 선명한 정치를 더 크게 키워내기 위한 고민 속에 내린 선택"이라며 "제한적인 조건들 속에서 더불어민주연합의 승리, 기본소득당의 성장 등을 위해 여러 동료와 토론했고 그 과정에서 당이 내린 최선의 선택"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 아무래도 지난 국회에서 짧은 시간동안 전국구로 인지도를 쌓아올린 용혜인이니만큼 기본소득당에서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긴 어려웠던 듯 하다. 비례대표 명단을 확정한 다른 정당들[8]에서 탈당과 이탈이 속출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당내 이견차는 딱히 없는 듯.

[1] 무엇보다 이 당시 용혜인은 위에서 언급된 ‘가만히 있으라’ 운동으로 인해 기소를 당하여 형사법정을 드나들었던 시절인지라, 공무원시험에 기껏 합격한다 한들 유죄판결로 인해 당연퇴직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기 때문. 에 의하면 첫 기소가 2014년 10월 31일이라는데, 세월호참사 발생 이후로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것 같진 않다. 참사 발생 이후에 침묵시위 등 가만히있으라 운동을 주도하며 접은 듯[2]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원 소속 정당으로 복귀하려면 더불어시민당에서 제명당해야 했고 그래서 합당에 반대한다는 형식적인 성명을 조정훈 의원과 함께 냈다.[3] 남녀 의원이 24개월 이하 영아를 불가피하게 직접 돌봐야 할 때, 국회에서 중요한 안건을 논의해야 하는 경우에 회의장에 영아를 동반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 이미 미국과 유럽은 모유수유도 하는 의원도 흔히 보인다.[4] 용 의원은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은평에 있는 빌라에 전세를 살고 있다고 한다.[5] 이명박 정부가 정한 최저 주거기준이 1인 가구 기준 14평방미터로 4평 정도라고 한다.[6] 비례대표로만 무려 5선을 한 김종인 대표도 연임은 하지 않았으며, 비례 재선인 이태규, 박선숙 또한 연임은 하지 않았다.[7] 김예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번 했기 때문인지 비례대표 명부 15번으로, 당선가능권이긴 하지만 안전권은 아닌 번호를 받았다. 용혜인의 경우는 민주당으로부터 비례위성연합정당 비례대표 명부에 3자리를 제안받고 본인을 제일 앞자리에 셀프 공천했다.[8] 특히 개혁신당의 경우에는 소속 의원인 양향자가 탈당을 시도했었고, 류호정 같은 경우에는 후보직을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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