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의 지구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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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남부의 아흐와르
: 생물다양성 보호지역과 메소포타미아 도시 유적 경관

الأهوار جنوب العراق: تعد هذه المسطحات المائية مثالاً على التنوّع البيولوجي والمناظر الخلّابة لمدن بلاد الرافدي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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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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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이라크 남부의 아흐와르[1]
영어
The Ahwar of Southern Iraq[2]
아랍어
الأهوار جنوب العراق[3]
프랑스어
Les Ahwar du sud de l’Iraq[4]
국가·위치
이라크 무탄나, 디카르, 마이산, 바스라



등재유형
복합유산
등재연도
2016년
등재기준
(iii)[5], (v)[6], (ix)[7], (x)[8]
지정번호
1481



𒂍𒋼𒅎𒅍
Ziggurat of Ur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우르에 위치한 달의 신 난나에게 바쳐진 지구라트. 당대에는 에테멘니구루라고 불렀다. 수메르어로는 '기단에서 영(靈)이 창조되는 신전'이라는 뜻.


2. 상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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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복원도.

원래 기원전 21세기 경에 처음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부서졌고,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완전히 흙더미가 되어버렸다. 이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보니두스 왕이 재건했다. 신바빌로니아의 쇠퇴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쇠락과 함께 이 재건한 신전마저 다시 무너졌고, 그렇게 폐허로 남아있던 신전 유적을 1920년대에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 경이 다시 재발굴했다. 1980년대에는 사담 후세인이 정권 강화 홍보를 위한 목적으로 파사드와 정면 계단을 복원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현재 우르 유적에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건축물로 꼽힌다.

신전 자체는 기원전 21세기 우르 제3왕조의 건설자 우르남무 왕이 축조하기 시작했다. 신전에 봉헌된 신은 달의 신 난나.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거대한 지구라트였는데 길이 64m, 너비 45m, 높이 30m 이상의 상당한 크기였다. 물론 우르남무가 지은 지구라트는 기단만 남아있기에 추측에 불과하긴 하지만. 지구라트의 규모가 워낙 커서 우르 지구라트는 아들 슐기 왕 시대에 들어서야 완공된다. 슐기 왕은 우르 제3왕조 최고의 명군으로, 메소포타미아 일대 전역을 정복하고 스스로를 신으로 여겼다. 그 정도로 당시 우르의 위상이 높았기에 우르의 중심이었던 지구라트 역시 대단히 규모가 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슐기 왕 사후 우르 제3왕조가 시름시름하다가 결국 지역 패권을 잃고 몰락하며 지구라트도 무너진다. 엘람인들을 비롯한 이민족들이 연달아 우르를 공격해 약탈하며 지구라트도 크게 훼손당했던 것. 그러다가 기원전 6세기 들어서야 신바빌로니아가 들어서 전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평정하며 다시 우르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신바빌로니아의 6대 국왕 나보니두스는 무너진 우르의 지구라트를 기존 3단 피라미드에서 7단 피라미드 형태로 개축해서 다시 재건했다.

나보니두스가 복원한 이후 나름대로 랜드마크 역할을 하며 좋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신바빌로니아도 역사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고, 이후 5세기 경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완전히 종결되며 우르 지구라트도 완전히 버려졌다. 우르 지구라트는 인근 주민들의 석재 채집장 따위로 활용되다가 아예 기억에서 잊혀졌고, 1850년 들어서야 영국인 탐험가 윌리엄 로프투스에게 발견된다. 이후 1850년대에 처음 현장발굴작업이 이루어졌고, 1920년대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대영박물관의 후원 하에 레너드 울리 경의 주도로 대대적 발굴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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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이 80년대에 지구라트를 개축하기 전과 후의 비교모습.

1980년대에는 이라크사담 후세인 정권에서 정권 홍보 목적으로 우르 지구라트를 개축했다. 자신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연관성을 드러내고 정권 홍보의 목적이었던 것. 이때 반쯤 무너졌던 정면 파사드와 계단이 모두 복구되었다. 하지만 후세인 정권이 얼마 지나지 않아 9.11 테러 사태 당시 미국에게 되지도 않는(...) 깡을 내세우다가[9] 이라크 전쟁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이 전쟁으로 우르의 지구라트 역시 폭격과 총탄 자국으로 상당히 훼손되었다. 후세인은 미군 폭격기가 지구라트 등 고대 유적은 차마 함부로 폭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어서 이라크 전투기를 지구라트 바로 옆에 배치하는 짓을 저지르기까지 했다.[10] 게다가 이전 걸프 전쟁으로 인해 생겼던 상흔마저도 남아있는 바람에 현재 우르 지구라트에는 약 400여개가 넘는 총탄 자국이 파여있다고 한다. 이후 지구라트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기지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이라크 정부 하에서 조금씩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보존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현재 약 3단 정도가 남아있다. 가장 아래 단은 우르 제3왕조 시대 만들어진 원형이고 두번째와 세번째 단은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새로 개축한 것이다. 지구라트를 이루는 벽돌들의 크기는 대략 11.5 x 11.5 x 2.75 인치이며 그 무게도 개당 14kg이나 된다. 벽돌들 사이에는 역청을 발라 고정했다. 워낙 지구라트의 크기가 커서 맨 아래 기단만 해도 72만 개의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계단과 각진 파사드, 정면 대부분은 후세인 정권에서 복원한 것. 전성기 시절에는 맨 위에 푸른색 유약 벽돌로 이루어진 난나 신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 장식용 푸른색 벽돌 파편 몇몇 개뿐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엿볼수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구라트를 지을때 겉면을 덮은 벽돌에만 유약을 발랐고 속을 채우는 벽돌을 유약이나 방수 처리를 하지 않은 그냥 말린 벽돌이었다. 그래서 습한 여름이나 우기에는 내부 벽돌들이 눅눅해지는 바람에 붕괴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건축가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라트 겉면에 구멍을 깊게 뚫었다. 이렇게 하면 이 구멍을 통해서 코어 벽돌들의 습기가 증발해서 빠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지구라트의 테라스에는 빗물을 아래로 빼내기 위해 특별히 만든 배수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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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물다양성 보호지역과 메소포타미아 도시 유적 경관[2] : Refuge of Biodiversity and the Relict Landscape of the Mesopotamian Cities[3] : تعد هذه المسطحات المائية مثالاً على التنوّع البيولوجي والمناظر الخلّابة لمدن بلاد الرافدين[4] : refuge de biodiversité et paysage relique des villes mésopotamiennes[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7] 육상, 민물, 해안 및 해양 생태계와 동·식물 군락의 진화 및 발전에 있어 생태학적, 생물학적 주요 진행 과정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일 것[8] 과학이나 보존 관점에서 볼 때 보편적 가치가 탁월하고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포함한 생물학적 다양성의 현장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큰 자연 서식지를 포괄[9] 당시 테러로 눈이 반쯤 돌아간 미국은 테러 배후를 쥐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이때 전세계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설설 기었는데, 심지어 그 북한마저도 누구보다 빠르게 테러를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눈치없는 후세인이 신의 천벌을 받았다라는 초대형 어그로를 끄는 바람에 미국은 안그래도 마음에 안들던 후세인 정권을 이번 기회에 아주 작살내기로 결정한다.[10] 참고로 후세인의 이 계획은 거의 실패했다. 전쟁 도중 미국은 약간의 유적 훼손을 감수하고라도 이라크 전투기들을 폭격해 작살냈고 이는 오히려 지구라트에 훼손이 가는 결과만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