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크랜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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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드워드 스테니우스
제2대
워런 오스틴
제3대
헨리 캐벗 로지
제4대
제리 워즈워스


제5대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제6대
아서 골드버그
제7대
조지 볼


제8대
제임스 러셀 위긴스
제9대
찰스 W. 요스트
제10대
조지 H. W. 부시
제11대
존 A. 스컬리


제11대
존 A. 스컬리
제12대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제13대
윌리엄 스크랜턴
제14대
앤드루 영



제15대
도널드 맥헨리
제16대
진 커크패트릭
제17대
버몬 A. 월터스
제18대
토머스 R. 피커링


제19대
에드워드 J. 퍼킨스
제20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제21대
빌 리처드슨
제22대
리처드 홀브룩

제23대
존 네그로폰티
제24대
존 댄포스
제25대
존 볼턴
제26대
잘마이 카질라드


제27대
수전 라이스
제28대
서맨사 파워
제29대
니키 헤일리
제30대
켈리 크래프트

제31대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제38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제13대 UN주재 미합중국 대사
윌리엄 워런 스크랜턴
William Warren Scranton


파일:WilliamScrantonPortrait.jpg

출생
1917년 7월 19일
미국 코네티컷주 매디슨
사망
2013년 7월 28일 (향년 9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시토
재임기간
제13대 UN주재 미국 대사
1976년 3월 15일 ~ 1977년 1월 19일
제38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1963년 1월 15일 ~ 1967년 1월 17일
연방하원의원(펜실베이니아 10구)
1961년 1월 3일 ~ 1963년 1월 3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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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정당


가족
배우자 메리 로우 체임벌린 (1942년 결혼)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3세[1]
학력
예일 대학교 (B.A./L.L.B.)
서명
파일:스크랜턴서명.jpg
'군사 경력
복무
미국 육군[2]
1941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위
참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와 유엔 주재 미국 대사직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 워런 스크랜턴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어머니 매리언 마저리 스크랜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크랜턴 가문은 부시 가문,캐벗 로지 가문같은 정치인 가문으로 대대로 정치,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매리언 스크랜턴도 펜실베이니아 공화당의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 내 영향력이 강했다.[3] 스크랜턴은 어려서부터 주 정치인들과 만나면서 정치 경험을 쌓았다. 예일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정치 동아리 활동을 했고 미래의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만나 친구가 된다.

예일대 로스쿨 과정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한다. 전쟁 중에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후방에서 조종사를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끝나자 전역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연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존 포스터 덜레스, 크리스티안 허터(Christian Herter)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면서 외교 경험을 쌓는다. 1960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등록된 민주당원이 공화당원보다 5만명이나 많은 민주당 강세 지역인 펜실베이니아 10구에 온건파 공화당원으로 출마한다. 험지인데다 당의 지원도 부족했지만, 현직 민주당 하원의원이던 스탠리 A. 프로콥(Stanley A. Prokop)을 활발한 선거운동과 청년 유권자들의 지지로 17,000표라는 큰 차이로 꺾고 승리한다. 스크랜턴은 공약대로 중도주의적인 하원의원 활동을 하였다. 시민권, 사회보장 확대, 최저임금 인상, 평화봉사단 창설에도 긍정적이었다. 공화당원답게 재정 지출에는 보수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에 54%나 찬성표를 던져 언론으로부터는 "케네디 공화당원"이라는 별명을, 펜실베이니아 유권자들에게는 높은 지지율을 얻는다.

파일:스크랜턴타임지.jpg

1962년 10월 19일 타임지 표지
1954년 이후 주지사를 2연속으로 민주당에게 뺏겨 경쟁력이 있는 후보를 고민하던 펜실베이니아주 공화당에게 중도적인 스크랜턴은 최고의 주지사 후보였다. 1962년 중간선거에서 스크랜턴-레이먼드 P. 셰이퍼(Raymond P. Shafer)[4] 조는 민주당 리처드슨 딜워스(Richardson Dilworth)[5]-스티븐 맥캔(Stephen McCann)조에게 대승한다. 그의 주지사 임기 중 실업률이 7.5%에서 3.6%로 떨어졌고, 주의 평균 임금도 증가했다. 주 교육,커뮤니티 칼리지에도 자금 투자가 확대되었다. 필라델피아 교외 지역인 체스터 카운티에 위치한 학교의 인종 통합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성공적인 주지사 행정으로 스크랜턴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권주자로 꼽힌다. 초기에는 대선 경선 출마에 미온적이었지만[6] 넬슨 록펠러의 경선 선거운동이 캘리포니아 경선 패배로 무너지자 골드워터의 지명을 필사적으로 차단하려 한[7] 온건파 공화당원들의 추대를 받아 경선에 공식 출마한다. 스크랜턴의 지지자들은 에버렛 더크슨을 포섭하려 하거나[8] 전당대회에서 골드워터의 대의원을 빼내 배리 골드워터의 대의원 과반 확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한다.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부통령 후보로도 예상되었으나 뉴욕주의 보수파 하원의원 윌리엄 E. 밀러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9] 대선 본선에서 강경 보수파 골드워터에 혐오감을 느낀 온건 공화당원 다수가 골드워터 지지를 거부했다.[10] 그러나 스크랜턴과 스피로 애그뉴 등 일부 온건 공화당원들은 본선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했다.# 결국 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북부 지역에서 골드워터는 대패한다.[11]

남은 주지사 임기 중에는 주지사 연임 금지 규정 철폐를 지원했다.[12] 주지사 임기가 끝난 뒤에는 지역 활동에 힘쓴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고 닉슨 행정부 국무장관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한다. 대신 중동 특사직을 수락한 그는 미국의 중동 정책 변화를 촉구했다.[13]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후 닉슨의 요청을 받아 캠퍼스 불안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학의 무질서,폭동과 예방 방안을 제시한 스크랜턴 보고서를 작성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하자 후임 제럴드 포드의 대통령직 인수인계를 도왔다. 1976년 3월 전임 대사 패트릭 모이니한(Patrick Moynihan)이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사임하자 포드 행정부의 주 유엔 미국 대사에 임명되었다. 스크랜턴은 전임 대사들과는 달리[14] 미국 우월주의보다 인권에 대한 헌신과 중재적인 태도로 많은 제3세계 국가와 미국의 적대 국가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15]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사를 그만두고 공직에서 은퇴한다. 2000년에는 같은 공화당 주지사 톰 리지에게 펜실베이니아 창립자상을 수상받았다. 2013년 7월 28일 96세의 스크랜턴은 뇌출혈로 사망한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6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펜실베이니아 10구


97,012 (54.76%)
당선 (1위)
초선
1962
미국 주지사 선거
펜실베이니아
2,424,918 (55.39%)
초선

4.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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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대 펜실베이니아 부지사[2] 미국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로 복무[3] 23년간 공화당 전국위원으로도 활동했다.[4] 스크랜턴과 예일대 동문으로 펜실베이니아 23대 부지사(1963~1967), 펜실베이니아 주지사(1967~1971)을 지낸다. 스크랜턴과 동일한 온건파 공화당원이었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의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다.[5] 필라델피아 시장(1956~1962)[6] 다만 부통령 후보를 제안하면 수락하겠다고 했다.[7] Stop Goldwater[8] 더크슨을 일리노이주의 "Favorite Son"(홈스테이트에서만 출마하는 경선 후보,전당대회에서는 타 후보에 획득한 대의원을 몰아준다.)으로 올리려 했으나 당사자가 거부하고 일리노이 경선에서는 골드워터가 승리한다.[9] 부통령 후보는 일반적으로 당내 통합을 위해 대통령 후보와 다른 지역/성향을 가진 후보가 뽑힌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레이건(캘리포니아-보수파)/부시(텍사스-온건파) 조합이 있다.[10] Never Goldwater[11] 공화당 창당 직후부터 텃밭이던 뉴잉글랜드 농촌,교외 지역에서도 린든 B. 존슨이 압승한다.[12] 최종적인 법안 통과는 그의 후임 주지사 때 완료되어 후후임 주지사부터 재선이 가능해졌다.[13]이스라엘에만 매몰된 정책 대신 다각적인 접근을 옹호했다. 물론 유대계 미국인들은 반발했다.[14] 같은 온건 공화당원이었던 헨리 캐벗 로지도 UN 대사로서의 행보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지원한 과테말라 쿠데타를 옹호하는 등 타국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임 대사 패트릭 모이니한도 시온주의 비판에 격렬히 반발했다.[15] 이번에도 스크랜턴 부통령 후보 제안이 나왔으나 보수파 밥 돌이 부통령 후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