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걸까, 구원받은 걸까. 아마, 이번 역시 닳아 없어져도 모를 터였다.
연안어귀 저 낙오된 자
연안어귀 저 낙오된 자
유창혁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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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만 28세. 일지매.
1999년 리즈 시절.
2011년. 후덕한 아저씨 다 되셨다.
1. 개요
2. 상세
그러다가 돌연 중학교 때 바둑을 2년 정도 그만두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불명. 바둑장학생으로 충암중학교에 진학했는데, 하필 집이
그 후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해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를 준우승했고, 얼마 뒤 프로 기사가 되었다.
만일 이창호가 아니었다면 유창혁이 조훈현 시대를 끝냈을 가능성이 높다. 신예 시절 양재호, 조대현과 함께 '신풍 3인'으로 불리며 조훈현, 서봉수를 이은 3인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신풍 3인은 조훈현과의 이벤트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호선과 정선을 오락가락하며 거의 호각에 가까운 실력을 뽐냈다. 이 대회에서 유창혁은 조훈현에게 정선으로만 두어 3전 전승, 조대현은 정선과 호선을 오가며 2승 1패, 양재호는 호선으로만 두게 되어 3패를 당했다. 그 바로 전 해에 있던 이벤트에서 '도전 5강'(서능욱 九단, 강훈 九단, 김수장 九단, 장수영 九단, 백성호 九단)이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낳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후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와 함께 '사천왕'으로 불리며 국내, 그리고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뽐냈다. 국내에서는 1994년과 1995년 전관왕의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던 이창호를 상대로 왕위전을 방어해내면서 이창호의 전관왕을 좌절시켰다. 아래 설명에도 나오듯이, 왕위전은 유창혁과 가장 우승 인연이 많은 국내기전이었다. 그래서 기사의 대표기전을 성 뒤에 붙여 부르는 풍조에 따라 조훈현-조국수, 서봉수-서명인과 같이 유창혁의 별칭은 유왕위였다.
또한 유창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1994년 후지쯔배를 우승하면서 당시 존재하던 모든 세계대회인 후지쯔배와 동양증권배, 응씨배를 모두 한 번씩 우승하게 된 조훈현 九단이 달성했다. 유창혁 九단은 2002년 LG배 세계기왕전을 우승하면서 당시 존재하던 응씨배, 후지쯔배, LG배, 삼성화재배, 춘란배를 모두 우승한 두 번째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달성 기사가 되었다. 2002년 당시 이창호 九단은 춘란배에서 우승하지 못하여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 참고로 조훈현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결승 상대는 유창혁, 유창혁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결승 상대는 조훈현.
그러나 2004년 2월 29일, 불우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1999년에 결혼한 부인인 MBC 아나운서 김태희가 새벽에 쓰러져 사망했는데, 사별 후 극심한 슬럼프를 보이며 다시는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일지매'라고 불릴 정도로 곱상하고 기품있는 외모도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후덕한 아저씨가 다 되었다.
이후 간혹 본선 무대에 올라가기도 했으나, 뚜렷한 성적은 내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 바둑리그 선수이자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고, 최규병 九단과 도장을 열어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2012년에는 최정 二단하고 짝을 이루어서 SG배 페어바둑 대회를 우승하기도 했다. 안 좋은 사건 이후로 해설자로 활약하던 사람이 갑자기 우승했기 때문에 뜬금포 취급을 받았다. (...)
전성기 때는 화려하면서도 탄력있는 바둑을 보여주어 팬이 많았다. 외모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고. 그의 장기는 특히 공격이었는데, 흔히 초보자들이 생각하는 공격은 돌을 때려잡는 것이지만 실력이 높아지면서 돌을 위협하면서 부수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 더 효율적인 공격임을 알게 된다. 유창혁의 공격은 같은 프로기사들마저 감탄하게 할 정도였는데, 가토 마사오의 공격이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위한 공격이었다면 유창혁의 공격은 상대를 위협하면서, 상대가 저항하면 정확히 급소를 탁탁 짚어가서 만신창이로 만드는 공격이었다. 행마가 아주 뛰어나고 급소를 보는 눈이 좋으며, 위에서 서술한 일류의 공격도 있고 해서 어떤 일본 바둑기사는 '만일 바둑에 질이 있다면, 유창혁의 바둑이 질로는 최고일 것이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유창혁은 주로 상금이 작은 국내기전보다는 국제기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래서 전성기에는 국내기전 성적보다 국제기전 성적이 더 좋은 경우도 있었다.[2]
또한 국내기전에서도 상대적으로 상금이 큰 기전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1991년 세계일보사가 최대 우승 상금을 내건 기성전을 열자 1회 준우승, 2회 우승, 3회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이후 왕위전이 기성전의 우승 상금과 같아지자 바로 왕위전의 결승에 진출하여 국내기전 10여 관왕에 빛나는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획득, 이후 왕위전의 상금이 인상되어 국내 단독 최대기전이 되자 이를 줄곧 방어해서 4연패를 했으며, 이후 왕위전과 우승 상금이 같은 국내 최대기전 테크론배가 창설되자 왕위를 이창호에게
또한 세계대회 4강에서 이창호의 발목을 가장 많이 잡은 기사로도 유명하다. 제1회 삼성화재배, 제2회와 제4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모두 이창호를 4강에서 꺾고 결승에 올라갔다. 하지만 세 번 모두 외국 기사에게 지면서 준우승을 했고, 그래서 바둑 팬들, 특히 이창호의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결승가서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왜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이기냐고. 이창호와 유창혁의 전적은 세계대회 본선이나 결승에서도 모두 이창호가 앞서지만 세계대회 4강에 한정하면 유창혁이 3승 1패로 앞선다.
몇몇 측면에서 서봉수와 포지션이 비슷하다. 엘리트코스를 밟은 이창호에 비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점, 청소년기에 뒤늦게 바둑을 접했거나(서봉수) 몇 년간 바둑을 그만둠으로써(유창혁) 가장 중요한 시기에 기량을 갈고닦지 못했던 점, 이창호의 독주시대에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점[3] 등.
덧붙여 1966년생으로 한국 프로 바둑계에서는 흔치 않은 60년대생. 이들이 10대 후반이나 20대가 되는 1980년대에 한국기원이 몇 년간 프로기사를 거의 선발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의 프로기사는 많지 않고, 실제로 50년대 이전 태생 기사들과 70년대 이후 태생 기사들 사이에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중요한 이유가 징검다리 역할을 할 60년대생 기사들이 적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70년대생 이후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90년대부터 1. 세계기전이 잇달아 창설되고 국내 기전의 숫자가 늘어나서 그 전과는 달리 바둑만 잘 두어도 생계를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기사 이외에도 다른 직업을 가져야만 생계가 유지되었던 50년대 이전 태생 기사들과는 달리 젊은 기사들의 연구열이 높아졌고, 2. 연구생 제도가 정착되어 입단하는 기사들의 연령이 대폭 하락하고 실력도 기존의 기사들보다 급격히 높아진 점, 3. 유창혁, 이창호를 중심으로 한 젊은 기사들의 연구회가 활성화되면서 어린 기사들이 연구회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어 이전 세대와 어울릴 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어든 점, 4. 사회 전반의 분위기 변화로 인해 젊은 기사들의 프로 의식이 높아진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50년대 이전 태생 기사들과 70년대 이후 태생 기사들 사이의 문화적 괴리는 중국에서도 관찰되고 일본에서도 한국과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나타나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 바둑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아지자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유창혁 九단의 쓴소리
현재는 바둑 해설과 함께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국제기전에서 대한민국 바둑 기사들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
2016년에는 전자랜드 프라이스킹 배 한국바둑의 전설[4] 에서 유창혁은 3국에서 처음 출천해 이창호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고 5국에서 서봉수에게 패했으나 이후 6국에서 조훈현, 9국에서 조치훈을 꺾으며 종합전적 3승 1패로 우승을 확정지었다.[5] 한국바둑의 전설 우승을 한 이후 인터뷰에서 한국 바둑은 절박함이 떨어진다고 다시 쓴소리를 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 1국에서 네이버로 중계되는 바둑TV 쪽의 해설을 맡았다. 이게 네이버에서 시청자 30만을 찍어버리는 바람에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되었다. 전반 복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알파고의 실수로 추정되는 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파고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나, 특히 후반에 들어가서 알파고의 연이은 실수로 이세돌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덕에 바둑TV와 네이버 시청자들은 끝나기 직전까지 이세돌이 이길 줄만 알고 마음 놓고 보다가 마지막 10분에 본의 아니게 반전을 겪으며 이세돌이 돌을 던지는 장면을 보게 되어... 완전히 낚였다. KBS는 물론이고
2016년 11월부터 한국기원 사무총장이 되었다.
한국기원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2018년 4월 터진 미투 운동 김성룡 성추행 사건을 덮으려 하였다는 의혹
2019년 3월 18일 월드바둑챔피언십 8강전에서 커제에게 패했다.
4월 17일 세계 시니어 대회 결승에서 위빈을 이기고 우승했다.
3. 사건사고
일요신문 취재에 의하면 유 총장은 과거 여자 기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골프 선수들은 성형수술을 통해 예뻐진다. (여자 기사들도) 좀 더 꾸미고 다녀라”라든가 “위리쥔(대만 출신 여자기사)은 너무 예뻐서 뽑았고, 마리아(러시아 출신 여자기사[8]
)는 못 생겨서 안 되고…”라는 등의 성차별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기사
4. 저서
- 유창혁의 실전파워 5단(1,2,3권) : 2013년 작. 절판되었다. 안습
[1] 부인 김태희는 2004년에 사망[2] 국내기전은 예선전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예나 노장 등 실력에서 차이가 나는 기사들과의 대결도 포함되어 있는 반면, 국제기전은 이미 32강이나 16강 등 본선 1회전부터 각국의 정상급 기사들만 출전하기 때문에 보통은 국제기전 성적이 국내기전 성적보다 좋지 않게 마련이다. 이창호도 국내기전에서의 승률보다 국제기전에서의 승률이 높았던 해는 한 해도 없다.[3] 이창호가 13관왕까지 하고도 전관왕을 하지 못한 건 유창혁이 이 시기에 왕위전 타이틀을 지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1980년대 서봉수처럼 이창호의 '유일한' 대항마였던 건 아니다. 이때는 이미 양재호, 최명훈, 목진석, 안조영같은 기사들이 이미 튀어나와서 허리층이 치열해졌을 때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양재호가 이창호한테 도전하고, 1990년대 후반에는 최명훈이 도전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목진석, 안조영, 이세돌이 튀어나온다.[4] 이 대회는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본인를 포함한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5명의 기사가 5인 풀리그 방식으로 대결을 펼쳐 우승자를 가린다.[5] 2월 14일 10국에 이창호가 조치훈을 이길 경우 동률이 되나 승자승 원칙에 따라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우승을 확정 지었다.[6] 유창혁이 이세돌 10억 날로 벌어서 좋겠다고 농담 따먹기 하고 있을 때 이미 유튜브 중계의 마이클 레드먼드 九단은 알파고가 거의 승리에 이른 것으로 보았으며, 한술 더 떠 니코니코 동화 중계에서는 끝내기에서 실수가 없는 한 알파고의 승리라고 못박고 있었다.[7] 이세돌 VS 알파고에 언급되었듯 좌상 vs 좌하 부분[8] 사실 우크라이나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