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뮬러 1/1956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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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6년 그랑프리[편집]
1956년 포뮬러 원 시즌은 7번째 FIA 포뮬러 원 시즌이다. 이 시즌은 1월 22일 아르헨티나 그랑프리를 시작으로 9월 2일 이탈리아 그랑프리 까지 총 8경기로 치러졌다. 이 시즌은 던롭, 파이어스톤, 에이본 러버, 피렐리, 잉글버트가 타이어를 공급하였다.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드라이버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스털링 모스가 2위, 피터 콜린스가 3위를 차지했다.
판지오가 우승했지만 전만큼 쉽진 않았고 치열한 챔피언 경쟁을 해야 했다. 마지막 경기였던 몬자 이탈리아 GP에서 콜린스는 그야말로 신사도가 뭔지 보여주는 장면을 연출한다. 판지오가 차 고장으로 리타이어하고[1] , 콜린스는 3위로 달리던 중이라 2위로 마칠 시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페라리의 세 번째 드라이버였던 무소는 판지오와 차를 공유하자는 요청을 거절했고[2] 챔피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콜린스가 핏스탑을 위해 들어왔는데...콜린스는 지켜보는 판지오를 보자 그 즉시 차에서 내려 판지오에게 차를 넘긴다. 판지오는 그 차를 받아 모스 뒤에 2위로 경기를 마치고 챔피언을 차지한다. 이후 왜 그랬느냐는 질문을 받자 콜린스의 대답은 'Because he deserved it'. 이후 콜린스는 엔초 페라리의 사랑을 받고 페라리에서 꾸준히 활동하나 1958년 뉘르부르크링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판지오와 엔초 페라리의 불화는 꽤나 심각했고 판지오는 다시 팀을 옮기게 된다.
2. 시즌 전 이적시장 & 소식[편집]
지난 시즌 르망에서 일어난 참사로 인해 메르세데스가 F1에서 철수하자 메르세데스의 주요 드라이버였던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스털링 모스는 각각 페라리와 마세라티로 이적하였다. 대부분의 라인업에는 변화가 없지만, 페라리는 영국의 기대주인 피터 콜린스를 추가로 영입함으로써 새 시즌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3. 1956시즌 라인업[편집]
4. 포인트 규정 변화[편집]
이번 시즌부터는 지난 시즌에서 조금 더 추가된 포인트 시스템이 적용된다. 대부분은 지난 시즌과 동일하지만, 차량 문제 등으로 리타이어 한 드라이버가 같은 팀의 드라이버들과 1번 이상 드라이버 스왑을 하였을 때, 그 드라이버의 포인트는 공유했던 차량 중 높은 순위로 들어온 차량의 순위대로 포인트를 획득한다.[3] 아울러, 포뮬러 2 클래스 차량으로 출전한 드라이버들은 설령 5위 안에 들거나 패스티스트 랩을 세웠을지라도 포인트가 반영되지 않는다.
5. 1956년 캘린더[편집]
6. 시즌 상세[편집]
6.1. 1R: 1956 아르헨티나 그랑프리 (아르헨티나 GP)[편집]
6.1.1. 퀄리파잉[편집]
판지오의 압도적인 퀄리파잉이었다. 홈 그랑프리이자 개막전에서 판지오가 팀메이트들을 2.2초 이상의 격차로 벌리며 폴 포지션을 차지하였다.
6.1.2. 레이스[편집]
레이스 초반은 카를로스 멘디테기와 스털링 모스의 환상적인 페이스 아래 마세라티 팀이 리드하였다. 판지오는 22랩 째에 연료 펌프 문제로 리타이어하며 홈 그랑프리 우승을 놓치는 듯 하였다. 그러나 29랩 째에 루이지 무소로부터 차를 넘겨받아 5위로 다시 트랙에 복귀하였고, 이후에는 장 베라를 추월하던 과정에서 한 번 스핀하긴 하였지만 무서운 스피드로 레이스 후반부인 67랩 째에 리드를 되찾고 그대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페라리의 카스텔로티는 기어박스 이슈로, 마세라티의 멘디테기와 모스는 각각 드라이브샤프트와 엔진 문제로 리타이어하며 불운을 겪고 말았다.
6.2. 2R: 1956 모나코 그랑프리 (모나코 GP)[편집]
연습 주행에서, 오언 레이싱 기구 팀이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BRM 섀시와 엔진으로 레이스에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엔진 문제로 인해 이번 경기는 참가를 철회하였다.
6.2.1. 퀄리파잉[편집]
판지오가 시즌 2연속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하였다.
6.2.2. 레이스[편집]
스타트 직후 모스가 빠른 스타트와 함께 일찍이 레이스 리더 자리를 빼앗았고, 일찌감치 판지오를 비롯한 후미권 드라이버들과의 격차를 벌려가며 크루징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판지오는 좋지 않은 레이스를 펼쳤다. 2랩 째에 그답지 않은 실수로 짚으로 된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잔해물을 늘어놓았고, 이로 인해 이를 피하지 못한 해리 쉘과 루이지 무소가 허무하게 리타이어 하고 말았다.
선두권에선 스털링 모스가 100랩 내내 1위를 유지하며 크루징에 성공, 시즌 첫 승을 완성하였고, 맹추격해온 판지오가 6.1초 뒤진 2위, 그리고 장 베라가 1바퀴 뒤진 3위로 들어오며 포디움을 구성하였다. 6랩 뒤쳐진
6.3. 3R: 1956 인디애나폴리스 500 (인디 500)[편집]
이 경기는 F1 원년 챔피언인 주세페 파리나의 마지막 경기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페라리 섀시로 출전한 파리나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며 자신의 F1 마지막 레이스를 마무리하며 F1 무대를 퇴장하게 되었다.
6.3.1. 퀄리파잉[편집]
6.3.2. 레이스[편집]
제 40회 인디 500의 우승은 팻 플래허티가 차지하였다.
6.4. 4R: 1956 벨기에 그랑프리 (벨기에 GP)[편집]
6.4.1. 퀄리파잉[편집]
판지오가 3연속 폴 포지션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라이벌인 모스와 콜린스 등을 4초 이상 누르고 압도적인 페이스를 보여준 것이 고무적이었다.
6.4.2. 레이스[편집]
빗길 속의 혈투, 영국의 젊은 신예의 데뷔 첫 승
레이스 시작 전, 많은 비가 이곳 스파에 내려 쉽지 않은 컨디션 속에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디펜딩 챔피언인 후안 마누엘 판지오는 스타트 미스로 5위로 내려앉았고, 스털링 모스가 레이스 리더 자리를 빼앗았다. 하지만 판지오는 5랩 째에 다시 선두로 치고 올라오며 2위인 모스와의 격차를 8초까지 벌렸다. 이후 10랩 째에, 2위였던 모스가 오 루즈 다리에서 차량의 리어 휠이 빠지는 바람에 리타이어하였고, 모스는 빠르게 피트 쪽으로 내려와 달려오는 페르디사와 드라이버 스왑을 하여 트랙에 복귀한다. 그는 한 바퀴 뒤진 6위였지만, 23랩 째에 레이스 리더인 판지오가 트랜스미션 문제로 리타이어하며 순위를 3위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판지오의 리타이어로 수혜를 본 드라이버는 피터 콜린스였다. 단숨에 넉넉한 격차로 레이스 리더가 된 콜린스는 크게 무리하지 않으며 크루징하였고, 그대로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며 본인의 F1 데뷔 첫 승을 이루어내었다. 홈 그랑프리를 맞이한 폴 프레레도 2위로 완주하며 조국에서 데뷔 첫 포디움을 기록하였고, 모스가 3위, 그리고 해리 쉘이 4위로 들어오며 반월에 F1 역사상 첫 포인트를 안겨다 주었다.
6.5. 5R: 1956 프랑스 그랑프리 (프랑스 GP)[편집]
프랑스의 슈퍼카 제조사인 부가티가 이번 경기 한정으로 F1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부가티는 이번 시즌 프랑스 GP에만 참가하였고, 이후에는 F1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울러, 콜린 채프먼[4] 이 반월 팀을 통해 처음으로 F1에 데뷔하였다.
6.5.1. 퀄리파잉[편집]
판지오가 인디 500을 제외한 모든 F1 그랑프리에서 연속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하는 기록을 이어나갔다.
5위를 차지했던 콜린 채프먼이 큰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F1 공식 데뷔전을 치룬 채프먼은 팀메이트인 마이크 호손과의 충돌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시즌아웃은 물론 더 이상 레이싱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6]
6.5.2. 레이스[편집]
피터 콜린스가 2연승을 질주하며 챔피언십 선두 자리를 유지함과 동시에 2위와의 격차를 벌려나갔다.
6.6. 6R: 1956 영국 그랑프리 (영국 GP)[편집]
이번 시즌은 다시 실버스톤 서킷으로 돌아와 영국 GP가 개최된다.
6.6.1. 퀄리파잉[편집]
스털링 모스가 홈 그랑프리에서 판지오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며 폴 포지션을 차지하였다. 올 시즌 인디 500을 제외한 F1 그랑프리에서 판지오를 제외한 드라이버가 폴 포지션을 기록한 첫 GP이다.
6.6.2. 레이스[편집]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시즌 2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선두인 피터 콜린스와의 격차를 단 1점으로 좁혔다.
6.7. 7R: 1956 독일 그랑프리 (독일 GP)[편집]
지난 시즌의 르망 대참사로 인해 2년만에 캘린더에 복귀한 독일 GP이다. 남은 2경기를 두고도 이번 시즌은 일찍이 챔피언이 결정되지 않은 F1 출범 이래에 가장 치열한 시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6.7.1. 퀄리파잉[편집]
폴 포지션을 두고 매우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판지오가 피터 콜린스를 상대로 길고 긴 뉘르부르크링에서 불과 0.3초 앞선 기록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하였다.
6.7.2. 레이스[편집]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2연승을 질주하며 챔피언십 선두 자리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아울러, 판지오는 이날 경기에서 그랑프리 시절 메르세데스의 헤르만 랭[7] 이 기록한 랩 레코드를 경신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6.8. 8R: 1956 이탈리아 그랑프리 (이탈리아 GP)[편집]
판지오가 콜린스를 상대로 8점 앞선 상황에서, 그가 리타이어하거나 낮은 순위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3연속 월드 챔피언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다.
한편, 요아킴 보니에와 볼프강 폰 트립스[8] , 그리고 레스 레스턴 등이 이번 최종전에서 F1 데뷔전을 치룬다. 하지만 폰 트립스는 연습 세션 도중의 사고로 차가 반파되어 퀄리파잉과 레이스에는 나서지 못했다.
6.8.1. 퀄리파잉[편집]
최종전의 퀄리파잉에서 판지오가 폴 포지션을 차지하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그의 챔피언십 라이벌인 모스와 콜린스는 3초 이상 뒤진 6위와 7위를 각각 기록하였다.
6.8.2. 레이스[편집]
4번째 정상을 맛보는 판지오, 그리고 콜린스의 멋진 신사도
나름대로 순항하던 판지오는 스티어링휠 축의 손상으로 인해 30랩 째에 피트에 차를 세워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변수에 챔피언십은 당시 좋은 순위와 함께 데뷔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이 유력해진 피터 콜린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페라리 팀은 이 문서의 첫 문단에서 서술되었듯이, 루이지 무소에게 먼저 판지오와 드라이버 스왑을 지시했지만 무소가 거절하였다. 이대로라면 콜린스에게 챔피언 타이틀이 돌아가는 상황. 그러나 35랩 째에, 피터 콜린스가 피트인 직후 차에서 내린다.
콜린스는 라이벌 드라이버들의 리타이어로 인해 포디움에 입성하기에 매우 수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판지오에게 차를 양보하였고, 그 자리에서 월드 챔피언 타이틀은 판지오가 가져가는 것으로 확정이 나고 말았다. 50랩에 접어들어 스털링 모스가 이탈리아 GP 우승을 차지하였고, 5.7초 뒤에 판지오가 들어오며 크게 기뻐하였다. 뒤이어 1바퀴 뒤진 론 플록하트가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며 F1 데뷔 첫 포디움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7. 챔피언십 포인트 순위[편집]
8. 총평[편집]
이번 시즌은 마지막까지 누가 챔피언에 오를지 예측할 수 있는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메르세데스의 F1 철수 이후, 다시 양강구도에 오른 페라리와 마세라티의 경쟁 속에서 페라리는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영국의 신예 피터 콜린스를, 마세라티는 스털링 모스와 장 베라 등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을 이어왔다.
전체적인 페이스는 판지오가 거의 압도해왔지만, 그는 시즌 대부분의 경기에서 차량 고장으로 리타이어하거나 부분 포인트를 획득하는 불운을 겪어왔다. 이 덕분에 그의 팀메이트였던 피터 콜린스가 생애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에 매우 가까웠고, 스털링 모스도 생애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 획득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즌 후반부에 차량이 안정되자마자 그는 연승 행진을 이어갔고, 최종전에서 또 다시 차량 문제로 순위를 많이 잃었지만 콜린스의 빛나는 신사도 덕분에 챔피언에 올랐다. 피터 콜린스는 자신의 손으로 월드 챔피언 타이틀 획득을 내려놓았지만, 그는 페라리 팀의 사랑을 받아 내년에도 팀에 잔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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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차는 카스텔로티가 차지해 8위로 마친다[2] 정작 무소의 차도 결국 판지오와 같은 이유로 리타이어했기에 오히려 판지오에겐 행운이었을 지도 모른다.[3] 1956 모나코 GP가 대표적이다.[H]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시트 공유로 포인트 나누어 부여.[F] A B C D E F G H 패스티스트 랩 달성으로 인한 1포인트 부여[X] 이미 2위로 완주하여 포인트를 획득했으므로 부여 X[4] 1960년대 로터스 F1 차량에 혁신적인 공기역학을 적용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사람 덕분에, F1은 뚱뚱한 섀시에서 점차 벗어나 프런트윙과 리어윙이 달린 현대 F1 차량으로 변하게 되었다.[5] 부상으로 인해 레이스 기권.[6] 이후 그는 레이서를 그만두고 레이스카 연구에 몰두하는 쪽으로 길을 바꾸었고, 그는 F1에서 혁신을 일으키는 인물이 된다.[7] 당시 17세[8] 이 둘은 1960년대 F1을 이끈 조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