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레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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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왕국 12대 군주
보스포로스 욍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7대 군주

Πολέμων | 폴레몬 1세
제호
한국어
폴레몬 1세
그리스어
Πολέμων
라틴어
Polemon I
존호
바실레프스
가족
제논(아버지)
뒤나미스(첫째 아내)
피토도리다(둘째 아내)
아르탁세스 3세(장남)
폴레몬 2세(차남)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딸)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8년
재위 기간
기원전 37/36년 ~ 기원전 8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폰토스 왕국 제12대 국왕,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7대 국왕.


2. 생애[편집]


프리기아의 라오디케아 시에서 그리스인 철학자 제논의 아들로 출생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군이 샤한샤 오로데스 2세의 장남 파코로스 1세와 로마에서 귀순한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앞세워 로마를 공격했다.(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파코로스 1세는 시리아를 공략한 뒤 유대 속주로 남하했고,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소아시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많은 도시가 속절없이 파르티아군에 귀순했지만, 제노와 아들 폴레몬은 라오디케아를 끝까지 사수했다. 기원전 39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서 동부 지중해 세계를 관장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처단하고 파르티아군을 격파했다. 안토니우스는 폴레몬의 공적을 인정하여 킬리키아 일부와 리카오니아 남부 일대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37년 아르사케스가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폰토스 왕을 칭하자, 안토니우스는 이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그와 코마나의 니코메데스에게 아르사케스를 토벌하게 했다. 두 사람은 아르사케스를 한 요새에 몰아놓고 포위 공격했다. 기록이 부족해서 언제 함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황상 기원전 37년 하반기나 기원전 36년 초에 요새가 함락되고 아르사케스는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폴레몬은 안토니우스에 의해 폰토스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했다.(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와 함께 파르티아의 속국인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수도 프라아스파 요새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 그는 안토니우스의 부관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와 함께 수송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4세가 지휘하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수송부대를 기습 공격해 오피우스는 전사하고 수송부대는 몰살당했다. 그는 파르티아군에 생포되었지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원정 실패의 원인을 아르타바스데스 2세에게 돌려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을 때 협력했고,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가 파르티아와 동맹을 끊고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는 데 기여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소아르메니아 영토를 넘겨줬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내전을 벌일 때, 그는 파르티아의 침략으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차례로 자살하자,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폰토스 왕위를 인정받았다. 기원전 26년 "로마인의 친구"로 공인된 그는 이에 보답하고자 폰토스 왕국내 모든 극장의 앞자리를 차지할 특권을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하사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보스포로스 왕국의 찬탈자 스크리보니우스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즉시 함대를 통솔하여 흑해를 가로질러 항해했다. 보스포로스인은 강대한 로마 제국과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에 스크리보니우스를 살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보스포로스 왕국의 지배권을 폴레몬에게 넘겨줬다. 이에 주민들이 스키타이계 왕들이 왕위를 이어받던 관례가 무너지고 외부인이 왕으로 등극한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14년 로마 함대를 이끌고 보스포로스로 진군해 반란군을 제압했다. 그는 주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과거 흑해 연안 일대를 평정하여 명성을 날렸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손녀이자 파르나케스 2세의 딸이며, 스크리보니우스의 아내였던 뒤나미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뒤나미스는 왕권을 포기하길 거부하고 기원전 13년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족들이 있는 크림 반도 내륙으로 도주했다. 이에 폴레몬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외손녀인 피토도리다와 결혼했다.

기원전 8년, 폴레몬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크림 반도 내륙 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돈 강 어귀에 있는 타나이스시를 파괴한 뒤 아스푸르기아노이(Aspurgianoi)족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여 생포된 뒤 피살당했다. 사후 보스포로스 왕국은 뒤나미스를 거쳐 아스푸르고스의 수중에 넘어갔고, 아내 피토도리다가 폰토스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피토도리다와의 사이에서 아르탁세스 3세, 폴레몬 2세,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를 낳았다. 아르탁세스 3세는 훗날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고, 폴레몬 2세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폰토스 왕이 되었다. 딸 안토니아 트뤼파이나는 훗날 오드뤼사이 왕국의 군주가 되는 코티스 3세와 결혼했고, 서기 12년 로메탈케스 1세가 죽어 왕이 된 코티스 3세의 왕비로 살았다. 서기 18년 코티스 3세과 함께 공동 왕으로 군림하던 로메탈케스 1세의 동생 레스쿠포리스 2세가 코티스 3세를 유인해 감옥에 가둔 뒤 살해하자,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키지코스로 망명했다. 서기 19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코티스 3세가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재판을 열 때 증인으로 출석해 레스쿠포리스 2세의 악행을 고발했다. 레스쿠포리스 2세가 유죄 판결을 받고 폐위된 뒤 장남 로마탈케스 2세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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