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자유주

덤프버전 :



프로이센 자유주
Freistaat Preußen

파일:프로이센 자유주 주기.svg
파일:프로이센 자유주 주장.svg
주기
주장
위치

파일:프로이센 자유주 위치.svg

1918년 11월 9일 ~ 1947년 2월 25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프로이센 왕국
서베를린[1]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W]
니더작센[W]
슐레스비히홀슈타인[W]
헤센[W]
라인란트팔츠[W]
동베를린[2]
브란덴부르크[O]
작센안할트[O]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O]
튀링겐[O]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칼리닌그라드

폴란드 인민 공화국
서부 지역

역사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1932년 프로이센 쿠데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1947년 해체

지리
위치
중부 유럽
주도
베를린
면적
293,938km²
인문환경
인구
38,175,986명(1925년)
언어
독일어
종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
독일인
경제
통화
렌텐마르크

1. 개요
2. 역사
3. 역대 주총리



1. 개요[편집]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이다.


2. 역사[편집]


프로이센 왕국은 통일 과정 중에 있었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하노버 왕국 등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대대적으로 늘렸으므로, 통일 이후에도 독일 제국 전체의 2/3를 차지하며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독일·프로이센의 이중 구조는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존속하였다.

관할하는 구역이 워낙 넓다보니 지역별로 정치성향의 차이가 컸는데, 동프로이센포메른, 브란덴부르크 등 프로이센 동부 지역의 경우 보수적이고 군국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 특성상 나치당 집권 전까지 우익 성향의 독일 국가인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었으며, 1930년 이후 이 지역의 민심은 나치당으로 향하게 된다. 이를 제외한 프로이센 지역에서는 독일 사민당이 대체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었고, 특히 1928년 주의회 선거에서는 라인란트와 북부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등 가톨릭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얻은 중앙당과 안정적인 연정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프로이센 주의회와 주 총리 직책은 독일 사민당(SPD)이 장악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프로이센은 독일 사민당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1932년 선거에서는 나치당이 승리했지만 과반을 확보하지는 못했고, 나치당과 공산당이 서로 반목했기 때문에 사민당-중앙당 연정이 소수정부로 지속되었다. 이 상황을 싫어하던 우익 정치인 프란츠 폰 파펜은 자신을 임의로 프로이센 자유주 총독으로 임명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이를 프로이센 쿠데타라고 부르며, 이 사건으로 인해 독일 사민당은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독일의 경찰은 각 주 단위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1933년 나치당독일 국가인민당과 함께 히틀러를 총리로 한 연립 내각을 구성하면서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총독이 된다.[3] 이로서 독일의 2/3를 차지하는 광대한 프로이센의 경찰력이 나치당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lag_of_Prussia_1933.svg.png
[4]
뭔가 딱봐도 사악해졌다
나치 독일 시대에 이르러 연방제는 폐지되었으나 프로이센 정부는 존속하였다. 하지만 지방자치가 유명무실해져서 의미는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로이센은 민족주의 및 전쟁 분위기는 물론 배후중상설까지 앞장서서 지지해서 나치 성장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오해로 인해 해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배경이 있는데 서방 연합국은 나치즘의 기반과 원동력이 프로이센 정신과 프로이센 군부이며, 심지어 나치즘이 프로이센의 "군사 지배"의 최신 표현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구 프로이센 지방에서 나치당 지지자가 많았고 나치들이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치즘에 대한 지지는 프로이센 외 독일 지역에서도 매우 깊게 뿌리 박혀 있었고[5] 특히 나치당의 학살 범죄의 연루된 최고위 인사들은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같은 프로이센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남독일 출신들이 많았다.[6] 즉, 프로이센이 나치에 부역한 건 맞지만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정신이 그 자체로 특별히 나치에 열광적인 부역을 하게 만든 건 아니라는 말씀. 물론 프로이센이 주축이었던 독일 국방군이 나치에 열광했던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이지만 발키리 작전에 참가한 사람 중에 3분의 2 정도가 프로이센 출신, 그것도 유서 깊은 군사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토록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목숨을 걸고 반나치 운동을 한 동기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7] 그중에서도 자유와 윤리를 중시하는 프로이센 정신과 전통에 기반한 이상주의적인 동기 또한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즉 군국주의로 대표되는 프로이센의 부정적인 유산들을 나치들이 악용한건 사실이지만, 반대로 반나치 저항 인사들의 사상적인 기반도 프로이센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서방 연합국의 편견, 그리고 적잖은 숫자의 현대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독일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향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공존했던 양면의 동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전후처리에서 유독 프로이센만 매우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연합국 중에 프로이센에 그나마 호의적인 국가가 의외로 소련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련은 영미와 달리 오랫동안 프로이센과 호의적인 교류를 이어왔기 때문에, 프로이센 융커들로 대표되는 독일 군부와 나치당 사이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련은 1944년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시도를 처음부터 높이 평가했고[8], 프로이센의 완전 해체를 끝까지 반대했던 승전국 또한 소련이었다. 물론 이는 정치적 계산이 크게 들어갔지만, 나치한테 가장 심하게 당한 나라 중 하나가 소련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9]

연합국 군정기를 거치며 오데르강·나이세강 동쪽폴란드령이 되었고, 동프로이센 북부 지역[10]은 소련에 병합되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동프로이센 전체를 소련이 차지하거나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차지하려 했지만, 관대하게(...) 동프로이센을 절반으로 나눠 북부 지역은 소련이 병합했고, 남부 지역은 동부 강역(크레시)의 대토보상의 차원에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원래 여기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고, 중세 동방식민운동 이래 형성되었던 프로이센주는 소멸하였으며, 더불어 프로이센을 비롯한 동부 독일과 중유럽, 동유럽의 주변 독일어권은 깔끔하게 증발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를 프로이센으로 개칭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고 한다.


3. 역대 주총리[편집]


파일:프로이센 자유주 주장.svg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
바이마르 공화국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파울 히르슈
오토 브라운
아담 슈테게어발트
제5대
제6대
제7대

오토 브라운
빌헬름 마르크스
오토 브라운
나치 독일
제8대
제9대
프란츠 폰 파펜
헤르만 괴링
프로이센 국왕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62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62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11:02:12에 나무위키 프로이센 자유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 독일 재통일 때 주권이 서독에 반환되어 동베를린과 통합해 도시주 베를린이 되었다.[W] A B C D E 독일 연방 공화국의 연방주[2] 소련의 점령지. 동독 정부 수립 직후 동독에 반환되어 동독 수도로 기능하였다. 독일 재통일 때 서베를린과 통합해 도시주 베를린이 되었다.[O] A B C D 독일 민주 공화국의 연방주. 1952년 연방주가 폐지되어 관구로 대체되지만, 독일 재통일 직전에 부활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 괴링은 역대 프로이센 지역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프로이센 출신이 아니며, 무려 프로이센의 라이벌 지역인 바이에른 출신이었다.[4] Gott mit uns! : 신의 가호와 함께![5] 나치당이 바이에른에서부터 발흥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6]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에른스트 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하인리히 뮐러, 헤르만 괴링,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모두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라인란트)와 한스 프랑크(바덴), 카를 브란트(알자스-로렌), 요제프 멩겔레(울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러시아), 루돌프 회스(바덴) 또한 정통 프로이센 출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악명 높은 나치들 중에 프로이센 출신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마르틴 보어만, 아돌프 아이히만 등이 있긴 하지만 독일(오스트리아 포함)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프로이센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나치당 지도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적었다.[7] 아르투어 네베 같은 학살자 기회주의자들도 일부 가담했다.[8] 서방에서는 전후에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9] 출처: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마티, 2020), 886-893쪽[10] 현 칼리닌그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