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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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유도.png   야이~ㅎㅎㅎ 그래서 만화 안볼거야?에 대한 내용은 영조(작가) 문서를, 류큐 왕국의 왕 에이소(英祖)에 대한 내용은 에이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width=40
조선의 역대 국왕
20대 경종 이윤

21대 영조 이금

22대 정조 이산

http://105.imagebam.com/download/ob9iVv3P9-RiGT1tJUU5hg/45438/454371285/%3F%3F_%3F%3F%3F.PNG?width=300
묘호
영종(英宗) → 영조(英祖)
시호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
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
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
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
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1]

장순(莊順)
본관
전주(全州)
능묘
원릉(元陵)

이금(李昑)

광숙(光叔)

양성헌(養性軒)[2]
출생
한성 창덕궁 보경당
사망장소
한성 경희궁 집경당
배우자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아버지
조선 숙종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 崔氏)
종교
유교 (성리학)
생몰기간
음력
1694년 9월 13일 ~ 1776년 3월 5일
양력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81년 5개월 22일.)
재위기간
음력
1724년 8월 30일 ~ 1776년 3월 5일
양력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51년 6개월 6일, 1만 8,816일.)

조선의 역대 왕세제
경종 이윤 (왕세자)

영조 이금

진종 이행 (왕세자)

1. 개요
3. 치적
4. 가계
5. 한계
7.1. 경종 독살설?
7.2. 영조의 노망?
8. 창작물에서
8.1. 사극
8.2. 만화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역사상 가장 무서웠던 정치괴물.
그러나 자식을 미치게 만들고 끝내 죽여버리기까지 한 잔혹한 아버지.

조선의 제21대 국왕. 숙종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고, 결정적으로 경종 시대 신임옥사를 거치며 즉위 이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러 야사나 일화에서도 평생 컴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비록 31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조선 왕 재위기간 중 가장 긴 장장 52년[3]을 재위했고,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군주[4]다. 장기간 집권하면서 치적도 많이 남겼지만 말년에는 여러 비판점도 제기된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임오화변(사도세자가 숨진 사건)이다. 영조는 당시 69살(재위 38년째)로 역대 최고령으로 재위한 상태였으나, 그러고도 14년을 더 살았다. 한마디로 정말 오래 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중적으로는 탕평책사도세자의 아버지로 유명한 왕이다. 정책, 정치는 크게 성공했지만 가정사는 패가망신했다.이때 영조도 무척 잘못을 했다. 이제는 손자인 정조에게도 평생 상처를 줬다. 과장을 좀 보태면 정조 이후 조선이 크게 흔들리는 씨앗을 남기고 죽었다.

왕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옷을 재활용한 왕이다. 이게 뭔 소리냐면 임오화변 후의 정조의 세손 책봉식 때 특별히 자신이 세제 책봉식때 썼던 것들을 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5]. 물론 중종도 옷을 아껴입기도 했다.

2. 영조/생애[편집]



3. 치적[편집]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파간 세력 불균형으로 직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이고 삼수의 옥을 계기로 노론을 압박한) 소론을 박살내려 했으나 영조의 반대 등으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경드라이브를 걸었고 영조는 이에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시켜버렸다. 물론 등용된 것은 온건파인 완론 소론이었지, 준론 소론은 아니었다. 이후 벌어진 준론 소론과 남인이 합세한 이인좌의 난에서 이 완론 소론은 난을 집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남은 준론 소론 잔당들의 난리법석에 서서히 소론의 세는 위축되었고 결국 노론이 집권하게 된다.

일부 드라마 등에서는 영조가 실권없이 노론에게 떠밀려다닌 군주로 묘사되긴 하지만 이는 실상과 정반대다. 민진원, 정호를 비롯한 강경파 대신들이 죽은 영조 10년 이후로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유척기를 비롯한 외골수들은 끝까지 토적을 외치면서 탕평을 무시했지만 그런 이들의 주장에 혹해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바로 조정에서 대숙청의 바람이 불곤 했다.

영조의 즉위 초반에는 노론이 탕평하자는 영조의 말도 듣지 않고 열받은 영조에게 정미환국 한방으로 날아가고 소론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영조 즉위 중후반부에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으면서 집권 노론이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이 미친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6]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한방에 날아갈 뻔하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결국 영조는 경주 김씨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나머지 명문가들을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 놓았고 영조 말은 당파가 붕괴되고 척신 정치로 귀결된다.

통치기간 동안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의 재위기에 완전히 수습되어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고 식사는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사치스런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한 것도 영조대 부터다.[7][8] 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순조대쯤에야 사대부나 민가에까지 정착하게 된다.

또한 연과 여(왕과 왕비가 타는 가마)에 원래는 으로 칠을 하던 것을 주석으로 대체하게 하기도 했다.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수십년 간 금주령[9]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조 본인도 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 본인은 "오미자차였다"고 변명했다. 또한 말년에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말이 좋아서 차였지. 이것도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사실상 술이나 마찬가지였다.[10]

비록 영조가 술을 즐겨 마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83세까지 장수한 왕이었으며,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통치기간이 길었던 왕이었다. 영조가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젊었을 적부터 경종을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반대세력으로부터 암살같은 위협이 있을까 염려하여 먹는 것을 조심하면서 경계했고, 스스로 음식조절을 잘 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이라서 잔병으로 고생하지도 않았고, 선대 왕들이 하루에 5번을 먹는 수랏상을 3회로 줄여서 쓸데없이 과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가 얼마나 소식했느냐 하면, 여름에는 그냥 물밥에 고추장 굴비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반적인 수랏상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수라를 먹을 때 현미을 섞은 잡곡밥을 즐겨 먹었으며, 평소에 주로 먹는 반찬으로 육식을 적게 하고 채식 위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오히려 왕이 먹는 수랏상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닐까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게다가, 운동을 좋아해서 승마, 달리기, 국궁 같은 거칠고 격한 운동들을 즐겼기 때문에 더욱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활쏘기 실력이 유전이 되었는지, 그의 손자 정조는 "이성계의 현신"이라 불릴 정도로 어려서부터 각종 무예와 활쏘기에 능하여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정조 역시 왕세손 시절부터 끊임없이 주변의 반대세력으로부터 암살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스스로 무예를 연마하면서 힘을 기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4. 가계[편집]


  • 정비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 - 1757년)
  • 계비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 후궁 :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11월 16일)
    • 장녀 :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년 4월 22일 - 1718년 4월 8일)
    • 장자 : 진종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 차녀 :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3월 8일 - 1758년 1월 17일)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 후궁 :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 삼녀 :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 사녀 : 옹주(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 오녀 :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 육녀 :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 칠녀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 차자 : 장조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 1월 21일 - 1762년 윤5월 21일)
    • 팔녀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
  •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10월 16일 - 1780년 10월 5일)
    • 구녀 : 옹주(翁主, 1735년 9월 19일 - 1736년 9월 3일) - 조졸
    • 십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 - 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 후궁 :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미상 - 1776년 8월 10일)
    • 십일녀 :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년 3월 3일 - 1821년 9월 3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 십이녀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 - 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5. 한계[편집]


우선 아래에서도 보듯 아버지로서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즉위 과정 자체도 불안했고 정적들인 소론 강경파들이 전부 소멸된 후에도 이에 관련된 컴플렉스가 매우 심해 아들인 사도세자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엄하게 키우다가 사이가 벌어져 뒤주에 아들을 가둬 죽이는 임오화변의 비극을 일으키며 이 때문에 후에 왕위를 잇는 정조에게도 정치적,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주게 된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물 수는 없는 노릇.

거기에 숙종 시절의 환국,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완전히 금이 간 노소론의 피터지는 싸움에서 민진원, 정호, 유척기 등의 노론 명문가 출신 거물들이 토적을 외치면서 소론을 모두 죽일 것을 요구하고 탕평을 단호히 거부하자 이들에게 완전히 질린 나머지 말끝마다 떽떽거리는 이들 대신에 말 잘듣는 이들로 조정을 교체하기 위해 유학에서 반드시 금지하는 척신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시작이 홍봉한이었고 종9품 말직에 불과했던 홍봉한은 7년 만에 훈련대장에 임명될 정도로 커졌으며 영조 46년까지 조정을 지배하는 실세가 된다.

나중에는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떠올랐고 종국엔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이 손을 잡고 영조 말년을 지배했다. 이들의 권세가 매우 커서 당대에도 비판이 많았고 가장 강력하게 이들을 배척한 이들이 김종수를 비롯한 노론 청명당의 선비들이었다. 영조 사후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처형되었고 김귀주 등은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홍봉한은 이미 완전히 실각한 상태에서 목숨만은 보전했다. 그리고 이들을 대신하여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역시 정조에 의해 숙청됨에 따라 척신정치는 완전히 청산되었지만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척신정치를 청산했던 본인인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영조의 단점은 주로 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편인데 사실 영조 치세의 업적도 대부분 재위 전반기의 젊었던 시절에 몰려 있으며 이때는 영조의 정통성 문제로 왕권도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들끓던 시기이기도 해서 노년에는 안 그래도 독선적인 모습이 더 강해지는 경향까지 보인다. 게다가 노환으로 고생하는데도 권력욕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된 것.

덕분에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엇갈린다. 명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에 초점을 맞춘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군호인 연잉군으로 부르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11]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사초를 폐기한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 연산군, 영조가 사초를 왜곡 혹은 폐기한 왕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제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12]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 때 호조판서 이정제가 나서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고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시황의 분서와 다를 바 없는 사상초유의 '사초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재위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만약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첫 황제는 고종황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됐을 것이지만 건재했던 청나라가 가만히 있었을지는…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후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영조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5월 12일

또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이에 대한 설명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한 설명


6. 어진[편집]


파일:attachment/yongjoseja123.jpg
파일:attachment/yongjourjin123.jpg
연잉군 시절 영조
조선 영조의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원본이다.[13]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 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http://105.imagebam.com/download/ob9iVv3P9-RiGT1tJUU5hg/45438/454371285/%3F%3F_%3F%3F%3F.PNG?width=300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 전신어진.

파일:tA7ctno.png
열성어진의 영조의 초상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14]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시대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수술을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매부리코와 치켜올라간 눈매 등 두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비슷하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7. 영조/인물[편집]




7.1. 경종 독살설?[편집]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15][16],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또한 영조 31년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17]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18]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린 다 안다!" 등 대놓고 우릴 죽여라! 라고 개겼다.[19]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20][21] ,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22] 사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23]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확실히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긴 하다. 경종 독살건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말을 못한바람에 소론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실록에 기록이 되었다.

영조는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것이 많았는지 영조 31년(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에게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24]얼마나 억울했으면

몇가지 덧붙이자면 당시에도 감과 게장이 상성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고, 영조가 읽었던 책들중에서 의학서적이 있었는데 그 의학서적에도 감과 게장의 관계는 아주 잘 나와있다.


7.2. 영조의 노망?[편집]


아무래도 조선 왕조의 왕 중에 최장기 집권, 최장수 기록을 세운 왕인데다가 가뜩이나 성격이 왈가닥에 편집증적이었던지라 결국 노망이 난듯 보이는데, 이에 관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그 신하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그 신하가 충신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내면서,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 하며 연못물에 빠져죽겠다 하여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계속 서 있었다.[25] 그래서 결국 그 신하를 귀양보내기로 했는데… 영조가 그제서야 연못에서 걸어나오고 궁에 입궐하면서 껄껄 웃으며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하고 그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보낸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를 '노망났나?'하면서 수군댔다고 한다. 어머니 사당에 자주 간다고 간하는 신하도 유배, 마누라 죽은 것도 팽개치고 사위 보러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도 유배, 사도세자 운운한 신하는 사형. 사실 영조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면서 닥치는대로 신하를 벌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을 거두는 행위는 젊은 땐 좀 덜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 내내 이랬다. 말년에 영의정만 미친듯이 갈아치우기도 했다. 게다가 세손을 이미 후계자로 삼아 후계구도가 탄탄했고, 영조의 왕권 또한 오랜 세월끝에 굳게 다져졌기에 상왕으로 있던 태종처럼 거리낄 것이 없어 일부러 그런 점도 있다.

영조 노년에 신하로 생활하는 것은 매우 고달팠을 법 한데 생각해보자. 장유유서의 유교사회에서 임금이 환갑을 넘어 장수한 노인인데다가 둔하기는 커녕 머리회전과 눈치가 빠른 정치고수이다. 게다가 머리회전만 빠른게 아니라 툭하면 울고 툭하면 화내고 툭하면 짜증을 내며 자기 감정마저 수싸움에서 밀고 들어온다. 나이가 많으니 자연히 경험도 많고 수읽기에도 능한 정치괴물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오죽했으면 임오화변 때도 '저 영감 또 시작이구나. 저러다 곧 풀어주겠지??' 하고 처음엔 궁인들이 뒤주를 열고 세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조는 결단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며, 사도세자가 숨진 까닭도 주도면밀한 계략 때문이었다.


8. 창작물에서[편집]



8.1. 사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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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이산의 이순재, 우측이 대왕의 길의 박근형.

  • 사극에서는 어째 본인이 주역이 되기보다는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정조에 관련해서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장희빈이 주인공인 사극에서 아역으로 등장하곤 한다. 많은 배우들이 영조를 맡았지만 그 중 《대왕의 길》의 박근형과 《이산》의 이순재 포스가 절륜. 특히 박근형 씨는 실제 영조의 어진과 거의 판박이의 얼굴이라 싱크로율이 높은 것도 특징. 박근형 씨는 영조의 세제 시절을 연기하기도 했다. 몇 분 정도만 등장했고, 바로 영조 시절로 넘어갔지만 대역 쓸 생각은 못했던 건가. 《동이》에서 아역배우 이형석이 어린 영조로 출연했는데 영특한 모습과 어린아이 특유의 귀여움으로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회에서는 청년 영조 역으로 《탐나는도다》의 얀으로 알려진 이선호가 잠깐 출연했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전국환이 출현했다.

  • 사극 홍국영에서는 최불암이 영조로 분했다.

  • 유준상박문수로 등장했던 MBC의 《어사 박문수》에서는 조민기가 영조를 연기했는데,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운동을 좋아했던 사실을 반영했는지 격구를 하는 장면도 있을 정도.

  •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한석규가 영조 배역을 맡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력과 아들 사도세자를 맡은 이제훈과의 파파로티 조합 때문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강한 신권에 시달리는 불쌍한 왕으로 등장하여 역덕들은 이미 통곡할 지경. 배우의 연기력만은 역시 한석규란 말이 나오긴 했다.


  • 이준익 감독의 2015년작 영화 《사도》에서는 송강호가 영조 역을 맡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송강호 배우 인생상 첫번째 상류층 캐릭터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중하류층 인물들.

  • 대박에서는 여진구가 맡았다. 그리고 무려 주연이다.[26]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영조의 치세가 아닌 메인 주연인 대길이 이인좌에게 맞써 싸우는 스토리라 이인좌의 난을 진압할때까지만 진행된다.

사실 치세가 너무 길어서, 영조를 주인공으로는 사극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만약 만든다면 《야인시대》와 《연개소문》의 선례를 따라 젊은 시절과 늙은 모습을 각각 다른 배우가 맡는 게 좋을 듯.


8.2. 만화[편집]


  • 야뇌 백동수》에서 등장하는데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로 하지만 차마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임수웅을 시켜서 미리 탈출시켜놓고 노론에게서 구출하는 계획을 세운다.

  • 정조 시대가 주된 배경인《타임 인 조선》에서도 과거편에서 짧게 등장한다. 아들 사도세자를 향해 그 죄상을 열거하며 죽으라고 호령하는 장면으로. 그것도 손주가 보고 있는 앞에서.


9. 관련 문서[편집]




[1] 고종 때 묘호를 변경하면서 존호를 추가했다.[2] 이 호는 영조가 재위 전에 살던 사가(잠저)인 창의궁의 한 누각 이름으로 부왕 숙종이 지어주었다. 영조는 이를 그대로 자기 호로 썼다.[3] 평균 재위기간의 2배 하고도 14년, 조선왕조 519년 역사 중 영조 혼자서 무려 1/10을 차지한다. 아버지 숙종도 조선역사상 두번째로 재위가 길었기때문에(46년) 부자합치면 조선왕조오백년중 100년 1/5를 차지한다.[4] 숙종(46년), 고종(44년), 선조(41년), 중종(38년)이 뒤를 잇는다.[5] 물론 애초에 옷이 떨어지면 기워 입을 만큼 아끼긴 했다.[6] 둘 모두 소론의 초기 영수들이다.[7] 그러니 사극에서 영조대 이전시대에 쪽진머리를 한 것은 모두 고증오류이다. 하지만 가체로 인한 여배우들의 목의 부담 때문에 그런것도 있다 하니 이제는 하나의 사극 트렌드가 된듯도 하다. (하긴 그 당시에도 가체가 무거워 목이 부러져 죽은 사례가 있었으니…)[8] 다만 가체를 금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행사 땐 가체를 착용하는 것이 맞다.[9] 재위기간(1724~1776)을 포괄하였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다행히도 후에 권좌에 오른 정조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즉시 금주령을 해제하고,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쿨하게 씹었다.[10] 김관주의 상소에서 영조가 다리병으로 고생할때 송다를 써여했는데 홍봉한이 금주령 기간이라고 거부한것이 나오는데 차라면 왜 홍봉한이 금주령을 들먹여 막았겠는가[11] 사육신세조수양대군이라는 군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과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현대에도 평가가 나쁜 조선 임금들은 즉위 이전의 군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 이성계이방원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쪽은 쿠데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태어날 당시에는 왕이나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을 뿐이기도 하고...[12] 1689년의 기사환국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13] 다른 것은 모두 이모본 또는 복원본이다.[14]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15]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16] 아래에 나오는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영조에게 친국을 당하던 소론 선비가 "너는 숙종대왕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영조(박근형 분)가 "그럼 내 얼굴을 자세히 봐라!"라고 하고, 영조의 얼굴을 본 선비가 울부짖으며 "참으로 숙종대왕의 용안과 똑같소이다. 신을 죽여주소서 흑흑." 하는 장면이 나온다.[17] 경종이 죽은 해. 즉 네가 선왕에게 게장 먹여 독살한거 다 안다! 라는 조롱이다.[18] 영조 31년 신치운의 심문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19]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의 친국 정도를 빼면, 아니 실록에서는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31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릴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이라 칭하지 않고 라고 칭하면서 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20] 실록에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잘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먹은 후에 복통과 설사가 계속되었다고.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안 그래도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21]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만드는 중간 중간 간장을 따라내 가열해서 염도를 최대한 올려 주는 작업을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그것도 가열되지 않아 소화에 더 큰 에너지가 드는),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중인 환자에게 먹일 만한 음식은 아니다.[22]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23]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조는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즉 그 긴 통치기간 내내 시달린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황을 소론 측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인좌의 난.[24] 천의소감은 영조가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즉위 할때부터 나주 괘서 사건까지 정치적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책이다. 책의 집필 목적이 영조의 정통성을 밝혀 왕권을 안정화 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쉽게 말하면 경종독살설을 변론하기위한 책이라고 보면된다. [25] 참고로 이때가 한겨울이었다. 까딱하면 동상도 걸리는 날씨이니 신하들이 애가 탔을 것이다. 게다가 발만 잠긴다고 해도 노인이라면 자칫 사소한 감기로 인한 폐렴이나 동상 후유증으로 사망할 여지가 있다.[26] 다만 메인 주인공은 본인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버려진 왕자인 대길(장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