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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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구열
2. 애서가
3. 성품
4. 정치
5. 장수
6. 외모
7. 인간성
7.1. 아버지 영조
7.2. 할아버지 영조
7.3. 시아버지 영조
7.4. 남편 영조
7.4.1. 정성왕후
7.4.2. 숙의 문씨
7.4.3. 정순왕후
7.5. 동생 영조



1. 학구열[편집]


맛있는 음식은 한때 배부르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학문의 자미(滋味)[1]

는 일생동안 배부르게 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29년 5월 20일


손자인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태종, 세종, 문종, 정조와 같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명이다.[2] 그리고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왕위에 올라 웬만큼 기반을 다진 후에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3] 영조의 경연 사랑에 비견될 군주는 성종, 중종 정도인데, 이 둘은 적어도 본인 스스로는 죽을 때까지 '모범생 왕' 이미지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 영조는 자타공인으로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쌓은 말년까지 경연에 열중했으니 천성이 공부를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2. 애서가[편집]


영조는 소설과 잡기를 즐겨 읽었는데 이는 손자 정조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영조 말년인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기록하고 있다.

비망기(備忘記)로 심상운에게 전교하시길:

아! 금년의 혹심한 가뭄은 팔순 나이에 처음 보는 것이라, 애태우고 근심하노니 이 또한 헐후어(歇後語)로다. 고인이 말하길,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옛 한나라의 근 100년 기업(基業)은 삼로동공(三老童公)에서 비롯되었으니, 비록 연의(演義)이기는 하나 서한연의의 한 제목인 '부로(不老)를 논하여 한왕이 덕을 펼치다.'에서 그 모습을 그리게 했고, 또 말하기를 '황구(黃耉)에게 조언의 말을 구해야지 이를 놓아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로(耆老)가 어찌 전폐(殿陛)에 오를 수 있으랴? 내 오늘 지영처(祗迎處)에서 마땅히 볼 것이니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가히 치신(致身)할만한 자들을 모두 오게 해 기다리게 하라.

하셨다.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16일


실제로 영조 50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서 죄인을 방면하고 지맥을 살펴보는 등의 조치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인다. 그런데 영조는 그런 상황에서 평소 즐겨읽던 소설인 서한연의의 한장면을 떠올렸던 것 같다. 재밌게도 해당 내용을 떠올리고 신하들에게 지나가듯이 언급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소설 속의 한고조에 이입하여 직접 소설 속의 모습처럼 신하들에게 가뭄에 대한 대책과 조언을 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하루 차이로 영조가 신하들에게 가뭄에 대한 대책과 조언을 구했다는 기사가 있기도 하다.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하교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0년 5월 17일


사실 승정원일기에서 영조와 신하들의 문답, 혹은 경연 내용을 보면 영조가 심심치 않게 서한연의, 삼국지연의, 동한연의[4]를 언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때 사도세자에게 자기가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연의를 읽는 모습을 보았는데, 맥성에서 관우가 패하고 죽는 장면에서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걸 보있다고 말한적도 있다.

나는 번저(藩邸)[5]

로부터 입승하여 비록 사사로이 여항(閭巷)의 일을 알았으나 부모님의 병환을 보살필 때가 많았던 까닭에 또한 두루 알지 못하였다. 너는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러한 곳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러하다면 비록 부녀자가 언서(諺書)[6]를 읽을 때에도 시비(是非)와 현우(賢愚)의 나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싯적에 어떤 부녀자가 삼국지를 읽다가 맥성의 일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

승정원일기 영조 27년 3월 2일


거기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아플 때는 병석에서 낮잠으로 시간을 죽이지 말고 소설이나 잡기류를 권장하는걸 보면 영조란 인물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던 것 같다. 심지어 신하들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어명을 내린적도 있었던 듯.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중에 소일(消日)하는 방법으로는 혹은 소설이 있고, 혹은 잡기가 있으니, 나는 이 두가지를 하지 않고서는 과연 소일하기가 어렵다. 유신(儒臣)에게 읽도록 명하여 이를 들으면 오히려 낮잠을 자는 것 보다 나으니 침전에서 인접하여도 또한 무방하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길:

이 또한 반드시 무방한 것은 아니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22년 6월 27일


손자인 정조가 소설이나 잡기류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던걸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면모라 하겠다.


3. 성품[편집]


이와 같이 학구적인 면과는 다르게 성격은 매우 옹졸하며 급하고 감정에 기복이 심했으며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7] 입도 더러워 실록에는 영조의 말을 차마 들어담아 적지 못할 말씀이라고 쓴 일이 여러번 나온다. 그러니까 육두문자 욕을 조정 중신들 앞에서 대놓고 갈겼단 것이다. 특히 영조의 손자였던 정조 또한 욕을 달고 사는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성격은 영조의 형인 경종이나 아버지인 숙종,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그러나 영조의 무서운 면은 이와 같이 격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에는 끝간데 없을 만큼 냉정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조 시대의 정치사 전반에서 잘 드러나는 편인데, 특히 사도세자를 죽여버릴 당시에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고, 사도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며 후속 조치를 내리는 모습은 대단히 치밀하고 신중한 모습이다.

참고로 야사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피휘 사건을 보면 상당히 대인배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영조의 이름에 들어가는 밝을 금(昑)은 백성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만약 임금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백성들이 피휘를 하느라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개명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영조는 40여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물론 어찌어찌 이름이 알려졌는지, 어느 날 승지가 영조 앞에서 상소문을 읽던 중 금(昑)자를 발견하고 머뭇거리자, 괜찮다고 허가한 후, 피휘 적용 범위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참고 기사 다만 근거가 야사이고 애초에 개명하는 방법이 있는데 피휘 적용 범위를 논하는 것을 보면, 실화는 아닐 가능성이 있다. 당장 후술할 인간성 항목만 봐도 영조가 이런 대인배적 행실을 보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4. 정치[편집]


이 나라는 노론·소론의 조선이 아니라, 바로 나의 조선이다.[8]

조선왕조실록 영조 30년 8월 18일

철저한 정면돌파형으로 잔수보다는[9] 정공법을 선호했기에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박살내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자료 준비를 철저히 하고[10] 명분도 다지고 최후 수단도 강구해놓은 다음 정면 돌격하는 스타일이라 막기도 힘들고 막아낸다고 해도 피해가 큰 경우. 이건 세제 시절인 경종 치세 때부터 확립된 경우다. 신축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개박살나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태롭게 되자 이런 정면 돌파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11] 군주까지 오른 사람이라 왕이라는 위치에서 정공법 펴면 당하는 신료나 당파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벽서 등으로 음해하거나 반란 같은 수밖에는 없었다.

한편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 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 성격의 변덕이 심하고 강퍅하며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때가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12]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13] 과거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전하께서 궁녀를 너무 많이 뽑으시는 거 아닙니까?"라는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걸 본 영조가 "내가 임금인데 궁녀도 맘대로 못 뽑냐?"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현필 사건은 당대에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왕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조 13년, 실록에는 한 신하가 이현필을 처벌하라고 간언하면서 "과거 급제에 눈이 멀어서 왕을 능멸한 역적을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몇 달을 끌다가 영조가 그냥 봐주고 합격시키는 선에서 끝났는데, 지방의 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합격이 취소되다가 결국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영조 40년) 벼슬이 다시 회복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정조에게 힘을 실어줄 때는 무력을 쓰겠다고 화를 내고 협박하기도 했다. 전례가 있다며 중대하지 않은 건은 세손에게 전부 맡기고 중대한 건은 세손과 같이 처리하겠다고 발언하자, 홍인한을 비롯한 대신들이 크게 반대했다. 특히 홍인한은 승지의 앞에 서거나 영조의 발언을 대놓고 곡해하는 등, 처절하리만큼 문자 그대로 온몸을 던져 막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화를 내며 욕을 퍼붓다가,[14] 끝내 성질을 못 이기고 전례가 무엇인지 직접 설명한 후, 이래도 정말로 깨닫지 못한다면 조금 쉬어야겠다며 미리 대기시켜놓은 상협련군을 들여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후에 신하들에게 호령하자, 홍인한을 비롯한 신하들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모두 굴복하여 전례가 있는 줄 정말로 몰랐다고 변명한다.


5. 장수[편집]


영조는 조선 역대 국왕들 중 가장 통치 기간이 길며(52년) 또 가장 장수한 왕(81세)이기도 하다.

조선 임금들의 수명은 대체로 (사회적 지위를 감안하면) 영 길지 못한 편이었다. 주 원인으로는 혹사 수준의 업무량과 빡빡한 일정[15], 상대적으로 부족한 운동량, 과도한 식사량과 (고려말에 유목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식 위주로 편중된 식단, 현대보다 부실한 의료[16] 등 여러 가지가 종합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탓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오늘날 사람들보다 탄수화물어마어마하게 많이 섭취했다. 그 당시의 밥그릇 크기는 지금의 국사발보다도 훨씬 컸는데, 하층민이야 무지막지한 육체노동과 신선한 부식류의 부족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지배계급인 양반을 넘어 무려 나랏님조차도 푸짐한 식사량을 고집했다. 오히려 이런 대식 문화가 수라상에는 더욱 심해져서, 하루에 올라오는 수라만 해도 무려 5끼에 달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사무를 봐야 하는 왕에게는 건강을 해칠 만큼의 식사량이었다.

가령 세종대왕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무조건 고기를 외치는 육류 애호가로 하루라도 수라상에 고기가 없는 날이 없었는데, 비만당뇨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불과 54세에 승하하였다.

이에 비해 영조는 간결하고 적은 양을 최대한 맛있게 먹는 것을 선호했고 다른 왕들이 5끼를 먹던 것과 달리 하루 3끼만 먹는 등 소식을 했다. 밥은 현미을 섞은 잡곡밥을 즐겨먹었으며, 반찬도 매우 단순했고 입맛을 돋우는 간결한 진미 한두 종류를 곁들인 정도였다. 심지어 여름에는 물밥, 고추장, 굴비만으로 구성된 식단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조선 국왕들의 식단에 비해 육식이 적고 채식[17]의 비율이 매우 컸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오히려 왕이 먹는 수라상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닐까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냈다고.

무엇보다 영조가 선호한 "단순한 진미"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음식들이었던 것 또한 그의 장수에 큰 기여를 했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기름기가 많고 맛이 풍성한 민어를 즐겼으나, 영조는 기름기 없이 꾸덕꾸덕하게 말린 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영조가 특히 즐겨 먹었던 식재료로는 송이버섯, 전복, 새끼 등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귀한 음식들이지만 역대 조선 국왕들이 즐긴 수라 반찬들에 비하면 비교적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음식들이다. 그 외에도 영조는 고추장[18]을 좋아했는데, 말년에는 고추장 없이는 입맛이 안 돈다고 할 정도였다. 고추장은 영조의 간결한 식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입맛을 돋우기 위한 다른 복잡한 반찬이 없어도 고추장 하나면 해결되니, 조선 국왕의 고질적인 과식 완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영조가 절제되고 검소하게 먹었다는 인식이 있는데, 사실 영조는 소식가였을지언정 별로 검소하진 않았다. 영조는 온갖 고급 식재료를 즐겼으며, 특히 전복같이 귀하면서 신선도를 유지하기 힘든 음식을 즐겼고 마치 이거 하나로 간소하게 먹으니 검소하게 먹는 것처럼 위장하는 고추장도 당시엔 흔한 음식은 아니었다.

또한 영조는 빠듯한 국왕의 하루 일과로 인한 부담을, 하루 생활을 매우 규칙적으로 보냄으로써 극복했는데, 그중에서도 식사의 경우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만 했다. 신하들과 중요한 사안을 의논하거나, 심지어 강연을 하던 중에도 식사 시간이 되면 신하들을 내버려두고 식사를 하러 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남겨진 신하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조는 젊은 시절부터 나름대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운동을 즐긴 탓인지 체력도 상당히 튼튼했던 것 같다. 이처럼 건강미를 뽐내던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샌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19] 즉, 식단 조절과 운동 등의 철저한 건강 관리가 있었기에 그만큼 장수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6. 외모[편집]


영조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꽤 꽃미남 임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외모를 계집스러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현대 기준의 꽃미남은 기생 오라비 취급을 받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단 이말은 걸러 들어야 할 것이, 어디까지나 이성을 끌어당기는 육체적 매력과는 거리가 한창 먼 사대부 남녀 이미지에 안 맞아 그렇다는 것이지, 이성의 마음을 떨게 하는 매력적인 외모로는 딱이었다. 이런 외모는 어머니의 영향이 큰 듯하다.[20] 즉 실제로 이성적인 매력이야 어쨌든, 공식적인 발언을 할 때 '얼굴이랑 몸매가 중요하지!' 라고 할수는 없으니 '참하면서 지성과 덕을 갖춘...' 이라고 하는 것이지, 결국 예쁜 사람 좋아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특히 조선 왕실의 경우는 왕비의 기준은 이성적인 매력이 아니라, 후손을 많이 남길 수 있는지, 조신하고 현숙하게 왕이 될 남편을 조용히 잘 보필할 수 있는지와 같은 외양적인 기준이 아닌 내면적인 기준을 더 강조했기 때문에, 더더욱 세간에서 거론되는 미적 기준과 차이가 매우 컸다. 가슴이 큰 여자는 안 된다느니 하는 것도 당시로는 현모양처 상을 요구하던 기준을 외면에 적용시켜서 나타난 사례다. 현대에 들어서야 로열 패밀리들도 변화하는 시대와 사상을 받아들여 누그러진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 그런 잔재들이 남아있긴 하다.


7. 인간성[편집]


왕으로서의 평가를 제외한 인간적인 면에서 영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는데, 특히 유교 국가인 조선의 군주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가장으로서는 완전히 낙제점이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충효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윗사람도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살해한 것 역시 명백한 패륜이다. 게다가 총애하던 며느리의 상 중에 고인의 시중을 들던 궁녀 숙의 문씨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상 기간임에도 후궁으로 맞이하는 등 아무리 왕이라도 할 지라도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조차 지키지 않았던 것.

사실 패륜 행위 자체는 영조 말고도 조선사에서 여럿 있었다.

  • 창업군주이자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를 쿠데타로 밀어내고 이복동생들을 죽인 태종.
  •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통성이 있던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나중에 죽인 세조.
  • 할머니에게 폭언을 하고[21] 성종의 후궁이던 귀인 정씨, 귀인 엄씨을 폭행으로 죽게 만들었으며 그 소생의 자식이자 이복동생이던 안양군, 봉안군까지 사사한 연산군.
  • 서장자 복성군작서의 변의 범인으로 몰리자 유배를 보냈다가 결국 사사시킨 중종.
  •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
  • 며느리 민회빈 강씨와 손자들을 죽게 만든 인조.

그러나 인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왕들은 영조보다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을 훨씬 많이 아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며,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다.

  • 태종은 자기 자식들에게 만큼은 자애로워서 인간말종짓만 하고 다니는 양녕대군을 끝까지 비호했다. 물론 쿠데타로 부왕을 몰아냈던 인물 답게 자신을 직격하는 양녕의 상소를 받고는 폐세자 시키긴 했지만.
  • 세조는 부인인 정희왕후금슬이 좋아서 후궁도 거의 들이지 않았고 손자들까지 평등하게 대하던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 연산군조차도 자신의 가족 만큼은 무척 아꼈다. 생전 폐비 신씨[22]를 무척이나 아껴 그녀의 충언을 듣지 않을지언정 질책하지도 않았으며, 신씨에 대해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고, 폐위 후 죽기 직전 "중전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애처가였다. 또한 자식을 무척이나 아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연산군과 그의 첩 장녹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영수는 연산군 일기에 대놓고 '매우 사랑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 중종 역시 복성군의 성장 과정에서 그를 학대했다는 기록도 없고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으며, 어쩔 수 없이 사사 명령을 내릴 때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 광해군은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일 때문에 신하들에게 비판을 받으며, 이로 인해 폐모살제를 저지른 폭군이라는 명분으로 폐위 당했다.[23] 다만 영창대군은 부왕, 인목왕후의 삽질과 이후 관련 고변이 들어왔기 때문에 살려두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친형 임해군은 살인·강도 같은 강력범죄는 기본이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도 경악할 정도의 막장 갑질 행각을 함경도 백성들에게 일삼으며, 귀부인 하나를 첩으로 삼기 위해 그 귀부인의 남편인 도승지 유희서를 죽이는 등 지은 죄가 워낙 많은 사람이라 오히려 신하들이 제발 사형을 시키라고 더 원성이었으며,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도 적어도 임해군을 죽인 걸 가지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또 광해군도 가장으로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7.1. 아버지 영조[편집]


사도세자 건만 해도 이미 한국사 최악의 아버지라는 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지경. 아버지가 아들을, 왕이 왕자를 죽인 사건 자체는 왕조 국가에서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다.[24] 그런데 왕자를 좁디좁은 뒤주에 가둬 죽이는 일은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유례가 없는 엽기적인 사건이다.[25] 심지어 영조와 비슷한 케이스에서 왕, 즉 아버지들은 최소한 자신들이 원하여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니거나, 아들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하는 현실에 고통스러워 했거나 괴로워한 경우가 많다.[26]

더 충격적인 것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동안에도 영조는 아무렇지도 않게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등의 일상생활을 하였으며,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영조는 죽을 때까지 아들을 죽인 것을 슬퍼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정말 인간으로서 실격이다. 영조가 직접 쓴 사도세자의 비문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영조는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아들이 비뚤어진 이유가 본인 때문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결국 자식을 차별하고, 학대해서 미치게 만들어 놓고는 마음에 안 든다며 아들을 잔혹하게 살해한[27] 영조는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오륜을 어긴 막장부모이자, 패륜 군주이다. 사도세자의 사도라는 시호가 영조가 아들을 죽인 후에 슬퍼하여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임오화변 시점의 사도세자는 심각해진 양극성장애[28] 탓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다닌 상황이니 왕이 되면 안 될 인물은 맞았다[29]. 이는 그의 생모 영빈 이씨와 친아들 정조도 인정했던 부분.

문제는 그렇다고 아들을 끔찍하게 굶겨 죽이면서 살해했어야 하냐는 점인데, 옹호측은 이 방식을 고른 것은 그냥 죽여버리자니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여 사약이나 참수 같은 공식적인 사형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자결을 강요했으나 이것도 신하들이 막아 불가능했고,[30] 감옥에 가두면 세자의 어머니 영빈과 여동생 화완옹주[31], 세자빈, 신하들이 몰래 음식을 갖다줄게 뻔하니 결국 죽음을 유도하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사도세자가 끔찍하게 죽어야 했던 것은 왕실이라는 입장이 만든 비극인 것이다.

문제는 영조가 자그마치 8일이나 가두워 죽였다는 점에서 사도세자를 죽이는 과정에서 영조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거기에 처음부터 뒤주에 가둬 죽일것을 고려한게 아니라 처음에는 자결로 처리하려고 했다가 일이 틀어지자 뒤주로 급하게 바꾼 건데 그런데도 자그마치 8일을 가두워 죽여버린것을 생각하면 그놈의 편집증적인 행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사도세자의 양극성장애를 촉발시키고 악화시킨 장본인이 영조인지라, 영조가 아버지로서는 기본도 안 되었던 인물이었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기에 필요이상으로 너무 잔혹하게 죽여버린 나머지 영조 생전부터 임오화변 관련자를 비방하며 사도세자의 옹호론이 나왔으며 결국 이것이 영조 사후 직후부터 임오화변 관련자들의 반란으로 터져버리고 그 여파로 시벽파 갈등과 증손자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기틀을 잡았다는 점은 영조의 행태가 조선왕조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몇몇 딸들은 매우 아꼈지만 아들인 사도세자나 딸인 화협옹주에겐 참으로 비정하고 못난 아버지였다.

좀 더 상세히 기술하자면 대체로 아들은 미워했고, 에게는 죽고 못 살았다. 즉 희대의 딸바보. 《한중록》의 묘사에 따르면, 자녀들 중 몇몇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화협옹주) 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고(ex. 화평옹주, 화완옹주). 또 영조가 화협옹주를 미워했다고 묘사하나, 저자가 시누이들을 싫어했던 혜경궁 홍씨라 신뢰성이 의심되는 상황. 화협옹주가 위독할 때 친히 달려갔다는 기록도 있으며, 결국 화협옹주가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죽자 슬퍼하긴 했다. 권력과는 상관없는 딸이기에 미워했음에도 아들만큼은 아니었던 것. 자세한건 화협옹주 참고.

영조의 자식 차별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어 잠시 한방에 있었는데, 그걸 영조가 보고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서 사도세자에게 생난리를 쳐댔고, 사도세자는 기겁하여 창문을 통해 달아나야 했다. 싫어하는 자식과 좋아하는 자식이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한 것. 그렇다 하더라도 영조의 반응은 지나친 데가 있기에 둘이 근친상간 관계였고 이를 영조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가 하는 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후 기록에서 영조가 예전처럼 화완옹주는 아끼지만 사도세자는 필사적으로 갈구고 구박하는 모습을 보면 이 둘이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중록에서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라는 기록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이는 단순히 남매인 두 사람이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진 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영조는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를 극도로 미워했으나, 그에 비해 화완옹주화평옹주는 무척이나 아꼈다. 상술했다시피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했던걸 볼 때 차별의 수준이 평범한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는 걸 한번에 알수 있다. 추가로, 영조는 정신병이 있었다고 하여 때만 되면 를 씻은 물[32]을 싫어하는 자식들이 사는 쪽으로 흘려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종의 강박증세도 있었던 셈이다.

사도세자가 눈병에 걸려 책을 마저 읽지 못했다고 하자, 오히려 꾀병을 부린다며 아들을 불러내서 크게 화를 내며 혼냈다. 허나 화완옹주와 화평옹주에겐 자그마한 일로도 지극히 정성을 다해 직접 병문안까지 갈 정도였다.

미움받은 자식들인 사도세자나 화협옹주는 대접이 종친들(방계 왕족)보다도 못했는데, 실록을 보면 이광정이라는 가난한 종친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종친의 의무를 다한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가 종친은 벼슬을 할 수 없다는 규칙까지 깨며 벼슬을 제수하며 아꼈다고 한다. 친자식을 촌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친척보다도 못하게 취급한 것이다.

실록과 한중록을 교차 검증해 볼 때 아들에 비해 딸들을 지나치게 아꼈다. 아내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자, 신하들이 결사반대 했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00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화순옹주가 남편이 죽고 따라 죽기 위해 곡기를 끊었을 때도 친히 행차해서 말렸다[33]. 다만 이때 영조가 미음을 먹으라고 명령하자, 억지로 마셨다가 곧 토해버려서 영조는 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탄식하며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화순옹주단식 14일 만에 죽었는데,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려[34]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에 '불효요 불충이다'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은 것도 비슷한 시기라 이 시점에서 화순옹주를 정려하면 화완옹주도 순사(殉死)를 하라는 뜻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화순옹주는 결국 정조 대에 정려된다. 딸 중에서는 미워했다던 화협옹주도 위독했을 때는 한걸음에 달려가 밤을 새워 딸의 곁을 지켰고, 결국 그녀가 죽었을때는 크게 슬퍼하며 죽은 뒤에도 밤늦게까지 환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35] 뿐만 아니라 평소에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는 시집 보내고 나서도 아예 궁에서 살게 했다. 그야말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강의 딸내미바보.

사도세자는 광증이 생기기 전에는 양녕대군 급 인간말종까진 아니었지만, 유학 공부를 썩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영조는 세자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여러차례 실망을 드러냈고, 아들이 공부를 할 때 영리한 면모를 보이면 매우 기뻐했다. 영조가 아들을 꾸짖고 닦달하기 시작한 시기도 사도세자가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부터이다. 영조 자신부터가 선왕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최고 정적으로서 왕세제 시절부터 소론측과 대립했고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자랐는데다, 다른 남자 혈족들 또한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였을 터라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로 본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36] 그러나 머리는 좋아 보이지만 학업을 멀리하는 아들이 정적으로 보이긴 어렵고 그냥 사도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에, 영조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결부되면서 차차 발전하여 나중에는 죽일 정도로 미워진 것일 가능성도 크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성향도 잘 맞지 않았다. 영조가 몰아붙여도 사도세자는 자기 변호도 하지 못했다.

영조가 아들 교육에 조급했던 것은 사도세자가 늦둥이였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 왕들은 환갑(60세)을 넘기기 힘들었는데 사도 세자는 영조가 40세가 넘어서야 태어났다. 영조가 다른 왕들처럼 50대에 죽으면 세자는 10대에 왕이 되는 것이니, 영조는 세자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사도세자의 후계자 교육에 열을 올리며 그를 과하게 몰아붙였으나 세자는 총명한 머리에 비해 공부에 대한 열의가 모자랐다. 이를 영조가 이해하지 않고 몰아붙이기만 하면서 결국 세자는 정신병에 걸리고, 영조는 그런 자식을 계속 학대하다가 결국 살해하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사도세자를 공식적인 처벌이 아니라 이런 정신나간 수단을 써서 처리한 것이다. 훗날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긴 해도 생부가 역적이자 서인으로 남을 순 없으니 죽기를 기다렸다가 즉각 사도란 시호를 내려서 사도 세자가 미쳐서 그런 거지 역적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었고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도 단순히 폭발하여 날뛴 것 치곤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졌다. 순전히 정조에게 '죽어 마땅한 죄인의 아들' 이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기 위해서.

아무튼 자기 아들에 한해서는 극심한 강박 증세를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까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까이는 대표적인 오점인 임오화변 덕에 영조는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물로 여겨진다. 영조가 열심히 국정에 임했고 여러가지 업적이 많음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건 이 탓인 듯. 사실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그 아들을 잘해주지 않고 핍박하다가 죽음으로 내몰 때 보인 태도는 상당히 완고했다.

사도세자를 끝내 사사한 일로 아들을 미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작 정빈 이씨 소생인 장남 효장세자는 총애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조숙하고 총명한 모습을 보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효장세자가 갑작스런 병으로 10세에 요절했을 때 몹시 애통해했다고.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 변화를 감안하면 효장세자 역시 사도세자처럼 장성했을 경우 영조의 그에 대한 총애가 한결같았을지는 미지수이다.

사실 단순히 자식을 학대한 정도를 넘어 집요하게 심성을 망가뜨려 엽기적으로 죽인 경우는 한국사 뿐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아들 2명을 죽이고 남은 왕위 계승자를 포함한 자식들을 심심하면 두들겨 팼던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한 수준.[37]

현대 한국의 부모들도 자신의 자녀에게 영조처럼 공부를 과하게 강요하고, 자녀의 역량보다 기대치를 높게 잡으면서 학대하다가 자녀의 인생을 오히려 망쳐버리는 사례가 상당히 빈번하기 때문에 반면교사로 자주 언급된다. 교육학적으로도 자녀가 스스로 교육에 대한 흥미와 긍정적 감정을 가지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게 중요하지, 자녀가 공부를 못 한다고 욕하고 압박하기만 하면 오히려 공부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서 더 상태가 안 좋아지기 마련이다.


7.2. 할아버지 영조[편집]


자식들도 저렇게 차별했는데 당연히 손주들이라고 공평하게 사랑했을 리는 없다. 의소세손이나 정조[38]를 비롯한 혜경궁 홍씨를 어머니로 둔 적손들에게는 엄청난 사랑을 주었지만, 사도세자의 후궁 소생인 서손들에게는 그 어떤 사랑조차 주지 않았고 오히려 박대했다.

예를 들자면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난 은언군은신군이 사소한 잘못을 했을 뿐인데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린 손자들을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결국 이들 중 한명인 은신군은 유배지에서 죽어버렸고 은언군은 재위 말년에 가서야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못해 풀어준다. 사도세자경빈 박씨 사이에서 난 청근옹주의 경우에도 부마가 확정됐음에도 길례를 3년이나 미루다가 겨우 치뤄주었다. 오죽하면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후궁과 그 소생들에게 질투하지 않는 이유를 한중록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경모궁께서는 겁만 내셔서 어찌할 줄 모르시니, 그 와중에 나까지 투기하면 경모궁께서 황겁하신 중 근심하셔서 병환이 몇 층이나 더하실 줄 알리오.


요약하자면 사도세자의 후궁들을 영조와 사도세자가 너무 심하게 박대해 본처인 혜경궁이 동정심을 가지고 챙겨줄 정도로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은언군이 태어났을 때 혜경궁 홍씨에게 '왜 너는 투기조차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여자냐?'라고 따로 혼내기까지 했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투기를 하는 걸 큰 죄악으로 봤고 정실이 후궁이나 첩실들에게 투기를 안 하면 오히려 품위가 있다고 칭송하는 사회적 분위기였음을 감안하면 영조가 어딘가 상당히 뒤틀린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숙빈 임씨가 자신의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가 두려워서 어떻게든 임씨의 아이를 지우려고 발버둥쳤다. 너무나도 비틀린 부자 관계이며, 이를 통해 영조가 자기 아들을 얼마나 막 대했는지를 알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조는 손자들을 집요하게 죽인 면에서는 인조와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영조가 귀양보낸 서손들은 10대 후반~20대의 나이로 그 당시엔 꽉 찬 성인이였기 때문에 어린 적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조보단 덜 욕먹을 만한 짓거리였다. 서손들이 본인의 입지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군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유난히 아들의 서자녀들에게만 가혹했던 이유는 그 생모들이 전부 다 양반가 규수출신의 간택후궁이 아니라 미천한 신분이여서 정을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후궁들은 죄다 궁녀 아니면 평민/천민 출신이었으며, 간택후궁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영조가 서손들을 그 정도로 싫어한 것은 그 아이들이 결국 사도세자가 저지른 비행의 결과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가 후궁을 들일 때마다 격노하며 세자를 크게 질책했다. 숙빈 임씨, 경빈 박씨도 그랬다. 못마땅한 세자가 불건전한 방식으로 들인 후궁일 뿐더러, 신분조차 미천한 며느리들 소생의 서손들이 좋게 보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영조 본인의 어머니 신분이 천하다는 컴플렉스가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심리로 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은 자신과 닮은 대상에게 공감을 느끼고 잘 챙겨주는게 일반적이지만, 그 사람이 자신과 닮은 부분이 자기가 혐오하고 감추고 싶은 자신의 컴플렉스에 해당한다면 오히려 그 대상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보편적인 심리 행태이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후궁과 아이들을 챙긴 건 정조였다. 특히 정조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매번 역모에 휘말려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음에도, 단식 투쟁까지 하면서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지키려고 애썼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한번 동침하고 잊어버린 궁녀도 다시 찾아내 시호까지 부여했을 만큼 아버지의 가족들을 지키려 들었다.

위 각주에서 말했듯 영조는 적손인 의소세손과 정조도 처음엔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의소세손은 자신의 적장손이자 후계자로서 안 귀할 수가 없었을 텐데, 가장 총애한 딸 화평옹주의 상중에 탄생해서 싫어했다고 한다.[39] 이후 의소세손에게 화평옹주와 똑같은 점이 있는 걸 보자 화평옹주의 환생으로 여기고 아꼈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다. 뒤이어 태어난 정조도 처음에는 화평옹주의 상중에 잉태된 아이라고[40] 싫어했으나, 날이 갈수록 총명한 모습을 보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여워했다.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정조의 재능을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위 기간 말기에 치매가 의심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졌을 때도 정조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굳건했다.

일단 자기 아들을 이해할 생각도 안하며 미친듯이 몰아붙이기만 하여 광증을 앓게 만들고 신하들이 강력 반대했음에도 뒤주에서 굶겨죽인 사람이니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마도 강박증이나 편집증 증세가 심각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41], 만일 이 증세가 조금만 더 심했으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있다. 만약 정조가 처신을 개판으로 했으면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는데 정조의 이복 형제들이자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형제가 폭발한 영조에 의해 모조리 유배를 가서 은신군이 귀양지에서 병으로 죽고 은언군은 영조가 죽는 날까지 풀려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 이면에는 풍산 홍씨 일가와 경주 김씨 일가의 대립이 있었고 경주 김씨 측이 왕손들과 친한 풍산 홍씨를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 자기 친손자들이 처신을 엉망으로 했단 이유로 이렇게나 엄벌하여 고생시키고 죽게 만들 정도면 정조라고 마냥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학업에 열중하고 술과 여색을 멀리하며 효심까지 보여주는 등 영조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했고 훗날 영조가 죽기까지 십수년 간 총애를 받으며 꾸지람이나 질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말년에 폭삭 늙어 앓아눕고 치매로 추정되는 상태까지 이르렀음에도 정조에 대한 신뢰만은 굳건했을 정도.

야사에선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맹꽁이 서당》에서는 정조가 읽고있는 책 내용에 영조가 싫어하는 내용(첩의 아들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이 있었는데 정조가 얼떨결에 거짓말로 그 부분만 가렸다고 말하자 영조가 확인차 가져와보라고 했고 이를 가져다 주려던 홍국영이 무언가 이상한걸 느껴서 그 부분만 가리고 가져다 주어서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42] 물론 어디까지나 야사일뿐, 이미 영조 자신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인 시점에서 정조를 죽였다간 정통성이 있고 유능한 후계자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정조가 약간의 실수를 한다고 실제로 죽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직접 해코지했을 가능성이 적다는 거지, 정조가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을 경우 자기 딴엔 손자 사람 만든답시고 사도세자에게 한대로 정신병적 갈굼 풀코스를 시도하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다. 훈육을 가장한 학대로 사실상 유일한 아들을 미치광이로 전락시키고도 반성 하나 없었던 인물이 손자에게는 발전된 교육태도를 보여주리라 기대하기도 어려우니까.

사도세자를 죽인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잃은 정조에게 미안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은 여러 번 보인 일이 있다. 손자 앞에서 '네 아빠를 죽인 건 대의를 위해서다. 문제 있냐?'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그랬는지 홍계희, 김상로가 나쁜 놈이라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도 했는데 정작 사도 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는 영조가 홍계희, 김상로 보고 세자를 옹호한다고 벌을 주었고 실제로 그들이 사도세자를 압박한 정황은 없다. 게다가 그런 발언은 정조가 훗날 내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죄없이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나중에 남인이 이게 다 노론 때문이다!를 외치는 도화선이 되었고 훗날의 이덕일 음모론의 최고 떡밥이 되었다.


7.3. 시아버지 영조[편집]


시아버지로서도 영조는 낙제점을 받아 마땅하다. 영조의 며느리로는 장남 효장세자의 정실 현빈 조씨, 차남 사도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 측실인 숙빈 임씨경빈 박씨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차별 대우도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첫날밤도 치루지 못하고 14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 현빈 조씨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두 자식[43] 중 한 명이라고 하고, 현빈의 사망 이후에도 생일을 챙길 정도로 매우 아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경우 정실이기도 하고 세손 정조에 대한 애정이 그 어머니에 대한 애정으로도 이어져서 아껴주었지만[44], 임씨와 박씨는 제대로 후궁 대우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다. 어찌나 박대가 심한지 앞서 언급했듯이 홍씨조차 동정심을 갖고 이들을 챙겨줬을 지경.


7.4. 남편 영조[편집]



7.4.1. 정성왕후[편집]


여자의 남편으로서도 좋지 않았다.[45][47] 정실인 왕비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부부 금슬이 매우 나빠서 안 좋을 것을 넘었다. 영조와 정성왕후 부부의 사이가 최악인 건 적어도 궁궐 내에서는 공공연했고,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정성왕후를 제대로 대우해주고 따른건 아들인 사도세자[48]와 그의 친모인 후궁 영빈 이씨였다.[49]

야사에는 결혼 첫날 밤에 정성왕후가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습니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 이게 그렇게나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 최씨는 궁녀인지 무수리인지 현대까지 논란이 분분할 정도로 출신이 불분명하며,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는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1명이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라고 발언하기도 했다.[50] 영조는 서덕수 덕분에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정성왕후는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담증 가지고 엄살부린다"며 씹어버렸고 그녀의 병세와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대전 내시에게 대신 보고하여 영조가 진찰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고받을 정도였다. 영조는 심지어 정성왕후의 환갑 잔치 때도 찾아오지도 않으며 파토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게 한이 맺혀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했을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로는 정성왕후도 나름 장수했는데 1757년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 65세였다.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도 단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724년에 왕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바꿔 말하면 그 오랜 세월을 비정한 남편한테 철저하게 무시당하면서 살았고 최후까지도 남편이 박대했으니 더욱 불행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위의 손 일화는 야사에 불과하지만 정성왕후와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아내의 장례는 내팽개치고 사위의 문상을 먼저 갔다는 걸 보면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51] 명색에 일국의 국모이자 조강지처의 죽음은 본체만체 하고 일개 서녀에 불과한 옹주의 남편을 우선시하는 행태에, 신하들과 대간들까지 경악하며 행차를 결사 반대했지만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며 강행했다.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정순왕후 김씨눈치를 본 탓이다.[52][53]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려고 빈 자리를 마련했다.[54]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거기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55]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는데 정작 영조 본인이 자신이 총애한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이었다.


7.4.2. 숙의 문씨[편집]


영조는 궁녀와 후궁 관리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예시로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나온 후궁 숙의 문씨가 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한테 대들며 말대꾸를 하는 장면은 놀랍게도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조선 왕실의 후궁들 중에서도 으뜸인 빈의 지위에 앉은 영빈 이씨에게 일개 숙의 따위가 대든다는 것은 내명부의 위계 질서를 완전히 흐트리는 짓이다. 오죽하면 <사도>에서도 실제 역사에서도 숙의 문씨의 오만방자한 짓거리에 분노한 당시 대비였던 인원왕후가 벌로 그녀의 회초리를 때렸을 정도. 이를 볼 때 후궁과 왕비를 비롯한 내명부의 관리도 제대로 신경쓰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제일 문제인 건 숙의 문씨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도 숙의 문씨가 악랄한데 영조만 못 알아차리고 숙의 문씨를 총애했다는 점이 언급된다. 결국 숙의 문씨는 정조가 즉위한 뒤에 폐서인이 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한중록>에서도 "숙의 문씨가 영조의 아들을 낳으면 세자가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던가, "숙의 문씨의 간악함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왕(영조)만 모른다"는 말이 돌았다는 등이 적힌걸 보면 과장이나 거짓이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완전히 뻥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봤을 때 국왕인 영조의 총애만 믿고, 거의 모든 왕실 일원들을 으로 돌린 숙의 문씨의 처신이 그만큼 엉망이었던 것도 의미한다.


7.4.3. 정순왕후[편집]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았다.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는 주위에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 뜨악할 일이지만 왕비가 죽으면 지존을 내조할 내명부의 수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반드시 정실을 들여야 했고 왕이 늙었다고 왕비 후보들이 왕 나이에 맞춰서 늙어있을리는 없기 때문에 왕은 초혼이든 재혼이든 10대 중후반의 배우자를 맞아야 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나이 많은 남성이 어린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금기시되거나 뒷말이 나올 행위는 아니었으며 그래서 왕의 어머니 뻘인데 왕보다 어린 경우[56]도 왕왕 있었다.[58] 후궁들 중에 경력(?) 좀 되고 출신과 배경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이를 뽑아 승격시키면 안 되는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영조가 숙종 이전의 왕이었다면 문종-현덕왕후, 성종-정현왕후, 중종-장경왕후의 전례가 있어서 되었을지도 모르나 영조 시기는 숙종이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지한 이후였으므로 불가능했다. 다시 고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주 예전 임금도 아니고 영조의 부왕이 내렸던 조치였고 영조 본인도 최소한 정치적인 면에서는 연산군 수준으로 막나가는 왕이 아니었기에 고치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영조의 후궁들 중에는 왕비에 오를 수 있을 만한 배경을 갖춘 간택후궁이 없었기 때문에 후궁의 왕비 책봉 금지법이 없었더라도 영조는 계비를 새로 간택해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경우에는 그냥저냥 아내 대우는 해주었지만 그뿐이었고 무관심했다.


7.5. 동생 영조[편집]


동생이자 세제로서의 영조에 대한 평가는 조금 애매한 편이다. 우선 당시 상황만 놓고 보면 형 경종과 동생 영조는 도저히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 사이였다. 당장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왕이고,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어 경종이 거의 반강제로 세제로 책봉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죽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다름아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였다. 심지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있는 등, 정치적 상황만 보면 오히려 철천지 원수나 정적에 가까워 보였다.

게다가 경종과 영조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건이 있기도 했는데, 신축환국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게다가 뒤에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해 영조가 역적 수괴로까지 몰릴 뻔하기도 했다.

이처럼 절대 형제간에 불화가 없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잉군 시절 영조에게 단풍 잎사귀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경종은 동생을 끝까지 보호하며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영조 역시 뒤에 계속해서 그를 황형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그리워하고 회상하는 듯한 묘사가 실록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설령 불편한 관계였더라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우애가 아예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1] 자양분도 많고 맛도 좋음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어 '재미'의 어원이다.[2] 공교롭게도 문종을 제외하면 다들 나름 한 성격하기로도 유명한데, 문종도 그 태종과 세종의 직계인데다 밀덕 기질까지 있었을 정도로 武에 관심이 많은 인물답게 통념처럼 유약한 왕이 전혀 아니였다.[3] 사실 조선왕들 중에서 가장 경연에 게을렀던건 광해군으로 재위기간이 15년인데 경연을 한 횟수가 15번이 안 된다. 반면 경연을 게을리했을 것 같은 연산군은 의외로 세자릿수다. 이는 연산군이 무오사화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왕이었고 갑자사화 이전에도 마냥 막장왕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4] 동한 세조 광무제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5] 유력자의 저택. 잠저창의궁 시절을 말한다.[6] 언문으로 된 글.[7] 눈물을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숙종, 경종과 관련된 곳만 갔다 하면 숙종과 경종이 그립다고 울었으니 수신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건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였다.[8] 붕당정치에서 벗어나 군주 중심의 정치 운영을 추구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9] 이처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신하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는걸 선호한 왕은 세종이 대표적이고, 반대로 막후에서 정치적 공작을 더 많이 썼던 왕으로는 중종, 선조 등을 들 수 있다. 태종의 경우 두가지를 병행했다.[10] 한 사례를 들자면, 노론 이의연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측 인사들을 죄주라는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해 영조와 소론이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소론 이거원이 이의연을 죄줄 것을 청하면서 "논어에 이르기를,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의연의 죄를 명백하게 바룬다면 차후로는 절로 이런 흉소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영조는 "공자가 말하기를, ‘덕으로 이끌고 예로 가지런하게 하며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고 하였으니, 덕과 예가 위이고 법과 형벌은 그 다음이다."라고 응수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얘기는 논어 위정편에 나온 것으로서 이거원이 문장의 일부만 가지고 와서 얘기할 때, 영조는 문장 전체를 예시로 들었다. 또한 공자는 이 문장 이전에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덕치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따라서 영조의 주장은 근거와 출처가 확실하고, 덕치를 중시하는 유학자의 입장까지 고려한다면 소론 측의 주장보다는 영조의 주장이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의연은 이 일로 절도에 유배당했으나, 소론은 이광좌, 조태억 같은 영수들과 사헌부, 사간원이 죄줄 것을 청하고서야 유배를 보낼 수 있었다.[11] 다만 삼수의 옥이 터져 역적 수괴로 몰리자 그때는 그야말로 데꿀멍했다. 바로 거적을 깔고 "나같은 놈이 세제라니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페세제를 청했다. 경종의 보호로 왕위를 잇게 되긴 하지만.[12] 정확히는 무강(武講)[13] 동시대 인물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당시 뜸을 들인 초관인 홍건이란 자가 몰라서 그런거다 지레짐작하고 볼기를 쳤는데, 후에 홍건이 넌지시 영조의 답이 진작에 틀렸으나 일부러 모른 척 했다고 일러주었다. 신하들 앞에서 망신을 살 뻔한 영조는 그의 배려에 감동해 지방 수령으로 올려주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기서 영조가 금주령 기간에도 몰래몰래 술을 마신 증거가 나오는데, 저 당시 송절다를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기술돼있다.[14] 실록에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라고 표현되었지만, 영조의 성격, 실록의 완곡한 표현, 그리고 전례 등을 감안하면 욕설로 보인다.[15] 수면시간이 평균 5시간 정도였다.[16] 실록을 보면 왕이 종기 때문에 고생하거나 끝내는 승하했다는 기록이 제법 나오는 편인데, 종기의 원인은 대부분 하나로 못박기 어려운 다양한 감염성 질환인 경우가 많은지라 말 그대로 '기타 등등'이다. 그러나 당대의 위생 및 의학적 한계와, 과로와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약해지기 쉬움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일이 유난히 많다 보니 유전적으로 면역 계통에 결함이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17] 사실 신선한 채소라는 것이 현대와 같이 유통과 냉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에는 상당히 귀한 것이었기에, 귀족이나 왕족이 아니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것이었다. 헌데 조선 국왕의 수라는 지나치게 화려한 나머지 오히려 채소가 희귀한 문제가 있었다.[18] 균형잡힌 식사를 했으며, 영조가 앓아 누웠을 때 사도세자가 구해 온 고추장에 감격한 것을 계기로, 이후 고추장을 매우 즐겨 먹었다고 한다.[19] 실제로 장수하는 노인들은 검은 머리가 다시 나거나 이가 다시 나는 사례가 드물지만 종종 보인다고 한다.[20] 여담으로 가슴이 큰 여자 역시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고 한다. 다만 왕실에서 그렇게 여겼을 뿐, 일반적인 조선시대 미의 기준으로는 가슴이 큰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21] 폭행했다는 것은 야사이지만 왜 친모를 죽이셨냐며 폭언했다는 기록은 실록에도 있다.[22] 후궁, 나인들에게조차 존댓말을 할 정도로 품성이 온화하였다. 이를 본 사관들조차 위엄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답답해 하며 안타까워했다. 이후 연산군이 폐위 및 유배되자 자신도 주상의 곁으로 가게 해달라며 애걸하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23] 사실 광해군의 폐위 사유가 폐모살제만은 아니다. 이미 명과 후금 사이에서 애매한 외교적 조치와 조선이 아직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앓던 상태에서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있던 중에 폐모살제가 결정적인 명분이 된 것이다.[24] 다만 조선에 한정해서는 희귀한 일이 맞다.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적자이든 서자이든 왕자를 죽인 왕은 단 두 명 뿐이다. 복성군을 죽인 중종, 그리고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이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인조를 포함해도 세 명이다.[25] 이때의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확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국가 공식적인 죄인으로써 죽게하는 것보다 그냥 편법으로 죽여서 정조의 정통성 시비 논란을 최대한 덜려고 한 정치적 목적이 있다.[26] 비슷하게 아들을 죽인 엽기적인 군주는 러시아의 이반 4세가 있다. 그는 집안 문제로 황태자와 다투다가 그만 흥분해서 몽둥이로 구타했는데,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반은 아들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으며 홧김에 흥분해서 정줄 놓고 패다가 죽여버린 것이고, 마침 이반 본인도 정신병 환자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조는 애당초 사도세자를 작성하고 죽여버릴 목적으로 뒤주에 가두었고, 맨정신이었다. 다만 이반 4세도 아들을 구타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영조마냥 제정신으로 죽였다는(정확히 보면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27] 영조가 사도세자를 비정상적으로 학대한 것은 실록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28]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가 유력하다. 한중록을 보면 아주 교과서적인 조울증 증상을 보인다.[29] 문제는 이 원인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떼어놓고 칭찬 없이 기른 영조 때문인 것.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 총기를 보였다고는 하나 문보다는 무에 재주가 있었고 영조는 이런 사도세자를 못마땅히 여겼다. 이때문에 안그래도 어린 시절 때문에 불안정하던 정신질환이 터져버린 것[30] 사실 자결이 성사되는 것이 영조로서는 베스트였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자결하여 명예는 지켜진 것이니 정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신하들 입장에서 그런 영조에게 순순히 따라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명색이 신하인데 조선의 유교법상 왕이 죽을 죄가 없는 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걸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것도, 그런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세자를 말리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된다.[31] 당시 사도세자의 형제들은 화완옹주만 제외하고 모두 사망한 뒤였고, 화완옹주는 오빠 사도세자와 우애가 깊은 사이였다.[32] 영조는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귀를 닦았다고 전해진다.[33] 남편을 따라 순사해야한다는 왜곡된 유교 의식을 따른 건 아니고, 친어머니 정빈 이씨를 어릴 적에 여읜 것때문에 가족에 대한 정을 느끼지못하고 외로움을 타던 차에, 하필 남편까지 죽어버리자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서 그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34] 효자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문을 세우는 것. 효자문이나 열녀문 등이 있다.[35] 문제는 정작 그런 화협 옹주가 죽은지 1달도 안되어 선위 파동을 일으켜 화협옹주와 우애가 깊었고 그녀의 죽음에 상심이 컸던 사도세자를 빈사 상태에 몰아넣는 짓거리를 하였다.[36] 선조와 광해군의 경우도 그러하듯 정통성이 부족한 왕과 세자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긴장관계는 있다.[37] 공교롭게도 영조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모두 부모나 남편으로서는 완벽히 실격이었지만 군주로서는 명군이었다.[38] 사실 의소세손도 가장 사랑했던 딸 화평옹주의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정조 역시 친형 의소세손의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처음엔 안 좋아했다. 그나마 의소세손은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100일 전후에 원손으로 책봉할만큼 총애했지만(혜경궁도 이건 과하다고 평할 정도) 고작 2살에 요절했고, 정조는 갈수록 성장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문무까지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영조를 크게 만족시키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아끼기 시작했다.[39] 어린 나이에 초산을 한 혜경궁 홍씨의 산후조리를 돕는 영빈 이씨에게 죽은 딸은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40] 정조의 친형 의소세손이 3세에 요절했을 때,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임신 중이었다.[41] 영조는 스스로 왕으로써의 업무 수행이나 건강 관리, 유교적 군왕의 모습을 보이는데에 있어서도 병적으로 철저했다. 강박적인 성격이 무조건 부정적이라고 보긴 힘들고 좋게 발현된 부분과 안 좋게 발현된 부분이 매우 뚜렷한 것.[42]조선왕조 500년》에서는 한층 더 과격한 연출을 했다. 영조는 화완옹주에게서 세손(정조)이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일기장을 가져오게 했으며, 홍국영은 세손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구절이 있는 부분을 아예 찢어내 버린 것. 영조는 일기장을 펼쳐들고 찢어낸 자국이 많은 것을 의아해하다가 '할바마마의 옥체 미령하시어(할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걱정이 많다'는 구절을 읽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화완이, 그 못된 것이 모함을 한 게야"라는 말을 곁들여 정조를 물러나게 한다. 정조가 동궁으로 돌아오자 홍국영은 일기장을 사사로이 보고 훼손한 죄를 청하기 위해 한나절 동안 정조의 눈치를 보며 문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이후는 다 아시는 대로 정조와 홍국영의 약속이 오간다.[43] 다른 한명은 화평옹주.[44]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혜경궁이 유일하게 영조에게 질책받았던 일도 혜경궁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후궁을 도와준 일 때문이었다.[45] 영조도 최악의 남편이지만, 영조보다 더 최악의 남편은 아버지 숙종이다[46] 물론 반발은 거셌다. 아무리 비정상적으로 들어온 계비라지만 어쨌든 들어오고나서 투기를 어느정도 넘어갈수 있는 정도로 한거 이외에 문제점이 없었던데다 이미 시어머니이자 왕대비인 명성왕후의 3년상을 치르고, 폐위 당시에도 법적 시증조모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국상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다.[47] 그런데 숙종 당시의 정황, 시각, 해석 등에 따르면 오히려 숙종과 동급이거나 영조가 더 최악이다. 일단 숙종은 정비 인경왕후와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3년상은 못치렀지만 그것도 사실 치르려 한것을 모후인 명성왕후의 압력으로 인해 못치른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의 빽으로 들어온 계비가 바로 인현왕후이다. 당연히 정이 없는게 너무나도 당연했고, 정비의 3년상도 치르기 전에 들어온 왕비라 일찌감치 폐위까지 할법한것을 어머니이자 왕대비 명성왕후, 법적 증조모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 두 왕실어른의 눈치를 봐서 어쩔 수 없이 폐위만 못시킨 것이고, 실제로 그를 보여주듯이 장렬왕후가 사망한지 불과 1년만에 폐위시켰다.[46] 그래도 이쪽은 5년후 갑술환국을 기점으로 복위시키면서 비위도 맞춰주고, 복위후에 왕비 대우도 분명 제대로 해주었다. 그런데 영조는 별 잘못도 없이 멀쩡히 들어온 조강지처를 말실수 내지 친척의 잘못 하나를 꼬투리 삼아 33년이나 홀대하였다. 이정도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할때 보인 막장행동들과 동급이거나 어찌보면 더 악질인 셈이다.[48] 사도세자의 적모로서 사도세자를 영조의 학대로부터 보호하고 그를 잘 대해주었기에 사도세자 역시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사이가 좋았다.[49] 영조는 정성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영빈 이씨는 매우 총애했다.[50] 이 말을 세상에 알린게 영조이므로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51] 심지어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영조 본인은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네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52] 다만 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이유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두려워해서 그런게 아니라 죽기 직전에 정순왕후를 찾을 정도로 그녀와 친밀해서 그랬을 것이다.[53] 나중에 문정왕후중종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는 모양.[54] 그래서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 봉분은 중앙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왼쪽의 빈 공간이 바로 영조가 묻힐 예정이던 자리.[55]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56] 예컨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 등.[57] 단종 때 일어났던 이른바 '황표정치'나 계유정난 등도 다 왕실에 어른이 하나도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누구 하나라도 있었다면 수렴청정을 통해 어린 왕을 보호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작해야 혜빈 양씨나 안평대군 정도가 다였다. 혜빈 양씨는 후궁에 불과했고, 안평대군도 수양대군과 대립했을 뿐 수양대군의 동생이라 항렬상 별 차이도 없다.[58] 계비를 안 들였을 경우 유력 왕족에 의한 피바람이 발생될 확률이 높다. 명목상 왕실 어른이 있으면 유교 국가인 조선상 경거망동을 하기 힘든데 광해군이 폐위된 가장 큰 이유가 폐모살제라는 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계비를 안 들였다 를 본 조선의 왕은 다름아닌 세종문종인데 2명 중 1명이라도 계비를 들였다면 단종이 무기력하게 쫒겨날 확률이 적었을 것이다.[57] 정순왕후 김씨가 괜히 최근에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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