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이 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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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헝가리의 작곡가, 민속음악학자, 교육자.
2. 생애[편집]
헝가리의 케치케메트에서 태어났다. 철도원이었던 아버지[2] 와 어머니 모두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많은 악기를 접하였다. 그래서인지 집에서는 실내악을 자주 연주하였다.
1898년에 16살의 나이로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을 작곡하였는데, 신문에서는 매우 호평하였다. 단 이 작품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작곡가가 되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얘야, 작곡가는 남자의 직업이 아니다."라고 충고를 하였다. 코다이는 음악을 포기하려면 변호사와 교사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코다이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1900년에 18살이 된 코다이는 독일어문학을 전공했고 다른 언어도 같이 공부했다. 그와 동시에 음악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905년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으로 코다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때 코다이는 버르토크 벨러와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을 후원하던 샹도르 엠마도 있었다.[3] 이 세 명의 사람의 모토는 바로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다.[4]
1906년에는 관현악곡 여름의 저녁을 작곡했고 이 작품을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했는데, 이 음악에 매료된 토스카니니는 그 이후로 코다이를 열렬하게 후원하였다. 학구열이 강했던 코다이는 파리 음악원에서 청강생으로 강의를 들었으며 여기서 드뷔시의 음악을 접했다. 드뷔시의 현악 4중주에 감명을 받은 코다이는 드뷔시 현악 4중주의 선율을 가지고 피아노곡 드뷔시 동기에 의한 명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1909년에는 첫 번째 현악 4중주인 현악 4중주 1번을 작곡하게 된다. 이 곡의 연주를 맡은 4명의 학생들은 무료로 100회 이상 연습을 하여 공연을 성사시켰다. 100일 모여 연습한 이 4명의 학생은 헝가리 현악 4중주단이 되었고, 이 학생들이 연주한 날은 헝가리 현대음악의 날로 지정되었다.
1910년에는 자신의 후원자였으며 자신보다 19살 연상인 엠마 샹도르와 결혼했다.[5]
코다이는 이 시기에 민요 3천여 곡이나 악보를 옮겼으며, 그 때부터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주,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8을 작곡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에 현악 4중주 2번도 작곡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휩쓴 후 헝가리는 소련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다.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있던 코다이는 자신의 음악교육에 대한 철학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음악교육 정책을 준비했으나 얼마 안 돼서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사상 검증을 받은 코다이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으며 지위도 격하되었다.
1923년에는 부다페스트 50주년 기념제를 위한 오라토리오 헝가리 시편을 작곡하게 되었다. 이 때 헝가리는 당시 교육에 대하여 ''어린이들은 문맹보다 나쁜 교육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음악을 모르는 것은 글을 읽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라고 비판하였다.
1926년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를 완성하였고, 나중에 이 중에 긴 곡을 골라 같은 이름의 모음곡으로도 만들었다.
민족음악을 연구한 성과가 193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1930년에는 마로스체크 춤곡을, 1933년에는 갈란타 무곡을, 1939년에는 민요 ‘공작이 난다’에 의한 관현악 변주곡을 작곡하였다. 그 외에도 1932년에는 오페라 베짜는 방을, 1939년에는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같은 해에 종교음악 테 데움도 작곡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친구인 버르토크 벨러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코다이는 헝가리에 끝까지 남아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게 되었다, 교장, 장학사 등의 직책을 거쳐 헝가리 음악가 연맹 총재가 되었다. 코다이는 돈이 없는 학생을 위해 음악 특수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개혁에 매진하였다.
1944년에는 작은 미사곡을 작곡하였고, 1953년에는 리스트 음악 아카데미 종업식에서 연설을 하였다. 첫번째 부인이 사망한 이듬해인 1959년에는 무려 58세 연하였던 당시 19세의 학생 사롤타 페체리(1940~)와 결혼한다. 두 번의 결혼이 모두 예사롭지 않았는데, 늘그막에 결혼을 한 코다이는 갑자기 창작열을 불태워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다.[6] 죽기 1년 전인 1966년에는 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Laudes Organi를 작곡했으며 노구를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강의와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67년, 코다이는 84세라는 긴 나이에 노환으로 생을 마쳤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작곡을 거의 하지 않았던 코다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음악계는 잃은 것이 많지만, 교육계는 얻은 것이 많다."라는 말을 했다.
3. 작품의 특징[편집]
생애가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수가 많지 않은데, 작곡 못지 않게 음악 교육과 행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음악 외에도 언어학/문학/철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코다이를 단순히 음악가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계속 수정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작품도 여러 버전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모로 음악 동료였던 버르톡 벨러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데, 코다이는 현대적인 음악수법을 적극 도입한 버르톡과 달리 후기 낭만주의 경향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작풍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의 초기 기악곡은 인상주의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며 무신론자였던 버르톡과 달리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음악도 다수 남겼다.[7]
코다이도 버르톡처럼 헝가리의 민속음악과 헝가리적인 소재(하리 야노슈 등)들을 적극 도입하기는 했지만 민속적인 소재를 활용하는 수법도 버르톡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버르톡이 민속음악의 선율 리듬 화성 등 세부적인 요소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해체해서 구조적으로 인용을 했다면 코다이는 전통적인 대위법과 화성법의 바탕 위에 헝가리 민속음악의 요소(선율, 리듬, 선법체제 등)를 도입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20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음악사조가 아니라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와 동유럽 등에서 유행했던 민족주의 음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래서인지 21세기 현재 그의 음악은 버르톡만큼 자주 연주되고 인용되지는 않는다.[8]
대신 그가 남긴 음악교육이나 음악이론에 대한 논문과 저서들은 상당히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4. 주요 작품[편집]
4.1. 오페라[편집]
- 하리 야노슈
- 베 짜는 방
4.2. 관현악[편집]
- 여름의 저녁: 이 곡을 지휘한 토스카니니에게 헌정하였다.
- 갈란타 춤곡
- 마로스체크 춤곡
- 민요 ‘공작이 난다’에 의한 관현악 변주곡
-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 교향곡 C장조
- 부수음악 종달새의 노래
- 극장 서곡
- 하리 야노슈 모음곡: 같은 이름의 오페라에서 편곡한 것이다.
4.3. 실내악[편집]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
- 현악 3중주를 위한 간주곡
- 현악 4중주 1번 C단조 Op.2
- 첼로소나타 Op.4
-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주 Op.7
- 현악 4중주 2번 Op.10
-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세레나데 E플랫 장조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헝가리 론도
4.4. 피아노[편집]
- 드뷔시 동기에 의한 명상 [9]
- 9개의 소품 Op.3
- 7개의 소품 Op.11
4.5. 독주[편집]
4.6. 가곡[편집]
- 4개의 노래
- 2개의 노래 Op.5
- 마지막 노래 Op.6
- 5개의 노래 Op.9
- 3개의 노래 Op.14
4.7. 합창[편집]
- 헝가리 시편
- 짧은 미사
- 테 데움
- 슬픔의 성모
- 그 외의 합창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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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의 이름 표기 방식과 같은 성+이름 순서이다.[2] 이 때문에 이사를 자주 가야 했다.[3] 이미 남편이 있었지만 사망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작곡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남아 있다.[4] 다만 버르토크는 이후 헝가리 이외에도 더 많은 지역의 민족음악을 수집하는데 주력하게 되면서 헝가리 음악 위주로 창작과 연구를 했던 코다이와는 차이를 보였다.[5] 엠마 샹도르는 결혼 후 코다이와 무려 48년간 잘 살다가 1958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 내내 코다이의 든든한 동반자였으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6] 이 교향곡은 '토스카니니를 추억하며'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Symphony in memoriam Toscanini). 샤롤타 코다이는 2022년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으며 남편의 음악과 음악관련 저작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7] 그래서인지 코다이의 초기 종교음악(1904년에 작곡된 Este 등)에서는 르네상스풍의 다성음악(polyphony)적인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8] 성향자체가 보수적인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코다이는 전업 음악가였던 버르톡과 달리 음악교육자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버르톡처럼 급진적인 수법을 과감하게 도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9] 드뷔시의 현악 4중주에 감명을 받고 쓴 곡.[10] 첼로곡 중 가장 어려운 곡으로 이 곡을 꼽는 사람도 있다[11]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와서 나름대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