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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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주 전투
通州戰鬪

시기
1010년(현종 원년) 11월 25일 ~ 12월 초
장소



고려 통주성 근교 삼교천(現 평안북도 선천군)



고려 통주성 (現 평안북도 동림군 고군영리)
원인
요성종의 고려 침공
교전국
고려
(수비)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조 (행영도통사)
지휘관

[[요나라|
]] 야율문수노(요 성종[聖宗]) >
참가자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현운 (행영도통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충(수제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노전[1](행영도통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노의(감찰어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양경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성좌
파일:고려 의장기.svg 노정(행영도병마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서숭(사재승)
파일:고려 의장기.svg 노제(주부)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훈(좌우기군장군)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계부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원
파일:고려 의장기.svg 신영한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질(중랑장)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홍숙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원귀(방어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사위(통군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거(진위부위)
파일:고려 의장기.svg 수견(별장)
참가자

[[요나라|
]] 야율분노
[[요나라|

]] 야율적로
[[요나라|

]] 야율홍고
병력
300,000명
200,000명[2]
피해
고려군 지휘부 궤멸
30,000여 명 전사
[3]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거란의 대승 및 고려의 대패
최고 지휘관 강조의 전사

영향
현종 나주로 몽진.
수도 개경의 함락으로 인한 각종 문화재 소실.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삼수채에서 초기 고려군의 승기
3.2. 거란의 지휘부 급습에 궤멸한 고려군
3.3. 완항령 전투의 승리
3.4. 통주성 방어 성공
4. 결과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서기 1010년, 제2차 여요전쟁에서 행영도통사 강조 휘하의 고려군 30만 명이 요성종 야율문수노가 이끄는 거란군 20만 명에 크게 패배한 전투이자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다.

앞서 교전이 벌어졌던 흥화진의 결사항전 덕분에, 요나라를 상대로 수적으로 크게 밀리지 않았고 실제로도 여러 전초전에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치명적인 방심 한 방에 고려군 지휘부가 공략당하여 허무하게 패배했다.

통주 전투는 전근대 기준 가장 큰 규모의 단일 회전이다. 기록에 나온 병력 규모가 정확하다는 전제하에,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한국은 6.25 전쟁 이전까지 이 정도 규모의 대병력이 동원된 기록이 단 하나도 없다.[4]


2. 배경[편집]


1009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후, 요성종이 이를 구실삼아 고려로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의 수가 무려 40만 명이나 되었다. 거란의 대군은 1010년 11월 중순 압록강을 도하하여 흥화진을 먼저 공략했으나 양규 휘하 고려군의 방어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어, 무로대에 200,000명의 병력을 견제용으로 남겨둔 채 남하했다. 남하한 거란군의 주력은 통주(현 선천군) 방면으로, 소규모의 기동부대가 귀주(현 구성군) 방면으로 이동했다. 귀주 방면으로 남하한 소규모 기동대는 11월 18일 고려군과 충돌, 최사위 휘하의 고려군을 패배시켰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파일:external/www.seoulnong.sc.kr/302-%EA%B0%95%EB%8F%996%EC%A3%BC.gif
▲거란(대요) 제국의 제6대 황제 성종 야율융서의 제2차 고려 침공


3. 전개[편집]



3.1. 삼수채에서 초기 고려군의 승기[편집]


제2차 여요전쟁 고려 행영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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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이부상서 참지정사
강조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이부시랑
이현운
병부시랑
장연우(張延祐)

행영도통판관(行營都統判官)
기거사인
곽원
시어사
윤징고(尹徵古)
도관원외랑
노전(盧戩)

수제관(修製官)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서경장서기
최충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
안소광(安紹光)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어사중승
노정(盧頲)
행영도병마판관(行營都兵馬判官)
병부낭중
김작현(金爵賢)
병부낭중
황보유의

좌군병마사
(左軍兵馬使)

중군병마사
(中軍兵馬使)

우군병마사
(右軍兵馬使)

소부감
최현민(崔賢敏)
예빈경
박충숙(朴忠淑)
형부시랑
이방(李昉)
좌군병마부사
(左軍兵馬副使)

중군병마부사
(中軍兵馬副使)

우군병마부사
(右軍兵馬副使)

소부소감
최보성(崔輔成)
예빈소경
이량필(李良弼)
형부낭중
김정몽(金丁夢)
좌군병마판관
(左軍兵馬判官)

중군병마판관
(中軍兵馬判官)

우군병마판관
(右軍兵馬判官)

흥위위녹사
고간(高幹)
대악승
김재용(金在鎔)
상서도사
고연경(高延慶)
사재주부
유백부(庾伯符)
내알자
류장(柳莊)

통군사(統軍使)
형부상서
최사위
통군부사(統軍副使)
호부시랑
송린(宋隣)
통군판관(統軍判官)
좌사원외랑
황보신(皇甫申)
시병부원외랑
원영(元穎)
휘하 장병
300,000명


통주에는 정변의 주역인 강조가 행영도통사로서 300,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있었다.[5][6] 11월 25일, 강조는 병력의 대다수를 통주성 서남쪽 청강의 지류 3개가 합쳐지는 삼수채에 배치했다. 이때 고려군은 병력을 3분하여, 강조의 본대는 하천이 모이는 합수목에, 나머지 2개 부대는 각각 통주성과 인근 산을 등진 형태로 진을 쳤다.

고려군의 배치는 정석적인 포진이었다. 《전쟁과 역사》의 저자인 임용한 박사도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오자병법》을 인용하며, 하천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배후 기지를 둔 포진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동절기여서 하천 자체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하천에 접한 언덕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해준다는 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서전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의 주력인 기병을 저지하기 위해 검차(劍車)를 전면에 배치하여, 거란군의 돌파를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보게 되었고, 지휘를 태만히 하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군영을 두고 삼수(三水)의 합류점에 웅거했으며 강조는 그 가운데에 머물렀다. 한 부대는 통주 근교의 산에 군영을 세우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 부근에 군영을 두었다. 강조가 검차(劒車)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거란군이 여러 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탄기를 했다.[7]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棊.)

- 《고려사》 <반역 열전> 1



3.2. 거란의 지휘부 급습에 궤멸한 고려군[편집]


파일:external/i57.tinypic.com/160ejxk.jpg}}}
2014년, 책 <고려전쟁 생중계>의 삽화[8][9]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

- 《고려사》 권 127 <열전> 40 - 반역 - 1


이렇게 방심한 강조가 탄기를 하는 동안 거란군의 장수 야율분노야율적로가 삼수채에 주둔 중인 고려군의 본군을 급습했다. 거란군 기병의 치고 빠지기로 고려군의 진영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보초병이 내습을 알렸지만 강조는

"입 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놔두라."

며 이를 일축했고, 결국 진을 돌파한 거란군에 의해 강조 본인이 생포되고 말았다.[10]

거란 임금이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이동시키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싸우다가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事) 이현운(李鉉雲)과 행영도통판관(行營都通判官) 노전(盧戩) 및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포로가 되었고,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 등이 진영에서 전사하니 아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거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해와 3만여 명의 아군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고려사》 <양규 열전> ##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했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 검차)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했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 지점에 있었던 (고려군) 진영을 격파했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했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

라고 했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

라고 하니, 강조가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

라고 했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했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했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이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했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고려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요성종 야율융서)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라고 하니, (강조가)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

라고 했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이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

라고 했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

라고 했다. 이때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했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김계부(金繼夫)·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

-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11]


더구나 이 거란군 기병의 강습 돌파로 행영도통부사 이현운, 행영도통판관 노전, 감찰어사 노의, 양경, 이성좌 등도 덩달아 포로로 잡혔고, 행영도병마부사 노정, 사재승 서숭, 주부 노제 등이 전사하는 등 고려군의 수뇌부가 일거에 증발해버리고 대다수의 고려군 병사들은 곽주 방면으로 무질서하게 도주하다가 순수 전사자만 무려 3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려의 야전군 자체가 일시에 붕괴해버린 것이다.[12]


3.3. 완항령 전투의 승리[편집]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던 고려군은 완항령까지 거란군에게 추격당했다. 이때 완항령에는 좌우기군장군 김훈과 김계부, 이원, 신영한 등이 매복해 있다가 도주하는 고려군을 추격해온 거란군을 기습, 추격을 막아내고 병력을 온존한 채 성공적으로 퇴각했다.


3.4. 통주성 방어 성공[편집]


삼수채의 대승으로 기세를 탄 거란군은 곧바로 통주성을 공략했다. 공격 전 삼수채에서 생포된 행영도통판관 노전을 합문사 마수와 함께 통주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으나,[13] 통주성을 방어하던 중랑장 최질과 이홍숙이 이들을 체포해 민심의 이반을 막았다. 방어사 이원귀, 부사 최탁 등과 함께 통주성을 지켜냈고, 거란군은 12월 5일까지 2주 넘게 통주성을 공격했지만 끝내 통주를 점령하지 못한 채 다시 남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00여 명을 이끌고 통주로 와서 흩어진 군사 1천 명을 수습했다.


4. 결과[편집]


통주 전투의 대패로 고려 야전군의 전력 대부분이 증발해버렸고, 이어지는 곽주 전투에서 곽주성이 함락되고 서경 전투에서도 동북면의 병력을 가까스로 동원하여 수성하는 처지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는 결국 현종이 수도 개경의 방어를 포기하고, 남쪽의 나주까지 몽진하는 수모를 겪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거란(요나라) 측은 생포한 강조를 이용해서 고려의 내분을 유도하려 시도했으나 강조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죽음을 택하면서 통주 전투의 대승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맨처음에는 회유했으나 오히려 "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는가?!"라고 일갈했으며, 이에 화가 난 요성종 야율융서가 가한 온갖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부하였던 이현운이 요성종의 꼬드김에 넘어가 투항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박차고 일어나 그를 걷어차면서 "너는 고려인인데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호통을 쳤다. 여러모로 고려의 충신들 덕분에 요성종의 계략에 차질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통주성 자체도 점령하지 못하여 남쪽의 곽주를 간신히 점령해 중간 기점으로 삼아야 했고, 결국 흥화진에서 거란군의 뒤를 밟아온 양규가 곽주를 탈환하고 요성종의 후방을 위협해 이를 신경쓴다고 거란군이 고려 영토 내에서 장기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개경을 일시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자체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 역사상 가장 큰 패전이자 한민족 전체의 역사에서도 규모면에서는 주필산 전투[14]칠천량 해전을 훨씬 뛰어넘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엄청난 대패인데도,[15] 인지도가 없다. 사실 이는 딱히 통주 전투만이 아니라 여요전쟁 자체가 현대에 다소 주목받지 못하는 감이 있기도 하며 칠천량 해전보다는 탄금대 전투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른 형태의 주력 병종과 전술을 사용하는 두 세력의 '회전' 형태였다는 점이라거나 지휘관이 전투에서 참패해 죽고, 주력군이 궤멸되는 전투로 인해 국왕이 피난까지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탄금대 전투와 유사한 점이 많다.[17][18]

한편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생포된 강조에게 목종의 혼령이 나타나서 강조가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빌었다고 한다. 물론 정말 혼령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강조가 목종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책을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듯 하다.

결과론적일지도 모르지만, 이 전투에서 현종의 가장 큰 정적이나 다름없던 강조와 수하들이 박살이 나고[19], 더 나아가 거란의 침공으로 반란을 일으킨 세력의 구성원들과 힘이 쓸려나가 그 세가 약해졌다. 현종의 입장에서는 정적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뜻대로 정치를 하기에 알맞은 환경이 되었으니 의외로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20]

그러나 훗날에 등장하는 우봉 최씨 무신정권은 강조의 몰락을 참고했는지, 몽골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은 나서지 않은 채 백성들의 피해를 수수방관하며 강화도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였다.

5. 대중매체[편집]



5.1. 천추태후[편집]


74 ~ 75회에서 다룬다.

거란군이 통주로 오자 강조는 삼수채에 진을 배치해하고 검차를 모는 병사들을 앞으로 전진시켜 막았고, 고려군의 기병들도 거란군의 기병과 싸워 한 차례 승리한다. 하지만 거란군에 투항한 이현운이 좌군에 있는 유방에게 중군의 강조가 위험하다는 거짓 보고를 해서 그쪽으로 가도록 유도하며, 그 틈에 거란군이 좌군을 무너뜨린다. 이에 고려군의 우군이 좌군을 구하려고 하자 매복한 거란군이 우군도 무너뜨리고, 이어서 거란군이 중군을 공격해 강조를 사로잡는다. 거란군이 통주성에 항복을 권유하고 고려군이 거부해 공격하지만 고려군의 저항이 거세 함락하지 못한다.


5.2. 고려 거란 전쟁[편집]



6회부터 8회까지 다뤘다.

6회에서는 이전 흥화진 전투에 가려지긴 했지만, 강조가 장수들을 이끌고 작전 회의를 하면서 통주성 앞 삼수채[21]에 진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7회에 접어들면서 강조가 노전과 노의를 검차진을 이끄는 선봉에 서게 하고 김훈을 좌익, 최사위을 우익에 배치한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진영을 보고 철갑기병을 돌격시키자 고려군은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검차를 앞으로 돌격시켜 기병의 움직임을 다 봉쇄한다. 이어서 물풀매로 돌을 던지고 검차 뒤에서 쇠도리깨와 장창으로 거란군 기병을 공격하며 기병들이 무너지자 소배압이 자국군을 다 퇴각시켰다.

이에 소배압은 고려군을 계속 공격하면서 아킬레스건이 무엇인지 샅샅이 찾기로 한다. 한편 야율분노는 소배압에게 모든 공을 뺏기기 싫어해 먼저 척후를 통해서 고려군의 약점을 찾아낸다. 그는 부하로부터 산을 타고 가면 고려군의 뒷편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듣게 되고 이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참수작전을 벌인다.

강조가 이현운과 함께 바둑을 두면서[22] 거란군과 싸울 대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군량미를 쌓아놓은 쪽으로 거란군이 기습했다는 것을 장연우에게 보고받자 자신이 가지 않고 문관 장연우에게 적을 막으라고 지시한다. 강조는 적들이 검차진을 흐뜨리려는 수작이라면서 후방에서 소란이 일어나도 대열을 유지하라고 지시하지만, 그 때 야율분노가 이끄는 거란군이 본진을 공격해 강조를 붙잡아 높이 매달고 고려군의 눈앞에서 고문을 한다. 최고 지휘관이 생포된 것을 목격한 고려 군사들 사이에 공황이 퍼지자 고려군은 이어지는 거란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붕괴되어 일방적으로 사냥당하거나 흩어지는 등 순식간이 부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우익에서는 강조가 붙잡힌 것을 확인한 최사위는 거란의 대군이 몰려오고 전열이 무너진 것을 보고받으며, 김훈은 자신이 추격하는 거란군을 막겠다며 병사들에게 곽주, 서경으로 보내도록 하고 기병을 보내 황제에게 전령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퇴각하기로 한다.

소배압은 자신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기습해 강조를 붙잡은 것을 질책하고 요성종이 원하시는 것은 강조가 아니라 고려임을 말하며, 군사들에게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해 소탕하라고 지시한다. 거란군이 고려군을 추격하는 것을 통주성에 최질이 보고 화살을 쏘아 거란군을 공격하면서 고려군을 들어오게 하며, 최질은 고려군이 오면 통주성으로 들어올 수 있게 성문을 열 수 있도록 지시한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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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거란에 의해 통주성으로 항복을 권유하러 온 이들 중 한 명으로 왔다가, 최질 등에게 잡힌 뒤 다시금 고려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2] 원래 400,000명이었지만 고려군의 방해로 인해 200,000명 씩 나누어 남하했다.[3] 거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해와 30,000여 명의 아군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중 ##[4]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를 상대로 싸운 여수전쟁여당전쟁의 병력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이 당시보다 더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5] 강조가 총괄하는 고려군 병력의 규모가 300,000명이고 실제로 통주 전투에 동원된 병력은 이보다 적었을 거란 해석도 있다. 반대로 보급 전력을 비롯한 황도 개경의 중앙군과 기타 각지의 상비군을 포함하면 총괄 병력은 400,000명을 상회했으며 따라서 동원 병력 역시 과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견해가 서로 상충한다. 임용한, 《전쟁과 역사2》 / (113p)[6] 고려보다 병력 동원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도 세종~세조 시기에는 총동원시 380,000명 이상의 대군을 징발할 수 있었고, 이 중 정병만 20,000명이 넘었으므로, 후삼국시대를 거친 병영국가의 면모를 잃지 않은 이때의 고려가 수십만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7] 국역본에서는 그냥 '바둑을 두었다'고 번역했다. 탄기(彈棊)라는 말이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국역본과 달리 '탄기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8] 야율적로의 우피실군 결사대가 고려군 최고 지휘관 강조를 담요로 생포해 묶어가는 것을 상상해 그렸다.[9]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의 일러스트 출처 블로그[10]고려사》에서는 이때 강조가 폐주 목종의 혼령이 일갈하는 것에 놀라 투구를 벗으며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했다.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강조가 목종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수를 후회한 것을 애둘러 표현한 걸로 보인다.[11]고려사절요》권 3 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12] 전근대의 전투에선 진형이 무너지고 나서부터, 사상자가 대거 발생했다.[13] 그런데 노전 같은 경우에는 고려 덕종 때까지 고위직에 오른 기록이 있고, 먼 훗날인 충선왕의 즉위년에는 노전과 더불어 서희, 양규, 하공진의 손자와 현손에게 관직을 주라는 내용의 교서를 충선왕이 내린 기록이 기재돼 있는지라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여요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다른 세 명처럼 공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가 있다.[14] 주필산 전투는 해당 문서를 보아도 알겠지만 오히려 피해가 더 적었고 최종적으로는 고구려의 본대가 승리했을 가능성이 있는 전투다.[15] 참고로 배우 최재성은 이 두 전투(칠천량 해전과 통주 전투)의 주인공들(원균강조)을 모두 연기했다.[16] 여기서 신립에겐 약간 억울한 것이 조선은 20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국가였다. 따라서 중앙군이라고 할 상비전력이 거의 없었으며, 지방군은 대다수 치안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기꺼해봐야 두만강 일대에서 약탈하러 오는 여진부족과 남해일대에서 출몰하는 왜구 정도를 막을 상비전력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국가에 오랜 전란으로 단련된 10만여명이 있고, 1만단위의 병력이 부대를 형성하여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상황이였다. 더구나 조선의 방비대책이 말그대로 실전과는 거리가 먼 상태<당장에 전란발생시 지방군들이 한지역으로 집결해서 중앙의 지휘관이 파견되어 움직이도록 되어 있음>였기에 집결한 조선군은 박살내면 일대가 무방비되었기에 전쟁초기 왜군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으며, 왜군 후방에서 적군이 저항한다는 개념조차 상실되었다.[17]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실권자인 강조가 스스로 출전해 어느 정도 장군직으로서의 경력으로 상대했으며, 패전했어도 결코 투항하지 않은채 죽었고 양규와 같은 충신들이 배후를 찔러버려 요성종의 제2차 침공은 단기간에 끝나버렸으며 제3차 침공때도 아주 통쾌하게 복수해 버렸다. 임진왜란이 꽤나 전쟁이 길어지고 이순신바다에서 선전하기는 했으나 지상에서는 흐지부지 질질 끌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까지 지속된 것을 보면 엄연히 차이가 있다.[16][18] 주필산 전투의 경우 조선 시대의 사학자들은 당 태종의 패배로 취급했고, 당나라의 기록에서도 안시성과 벌인 전투보다 주필산 전투로 난 피해가 더 많게 적혀 있는 것(물론 안시성의 경우 정말로 빼도박도 못 할 패배라서 피해가 축소 보고되었을 수는 있겠으나)으로 미루어 보아 주필산 전투가 한민족 초유의 대패처럼 여겨질 만한 사건은 아니다.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 초유의 대패라 할 만한 전투는 고구려군 1만 2천이 죽고 사로잡힌 뒤 수도까지 함락당하여 신생국가로서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정도였던 비류수 전투와 고구려의 운명을 가른 역대 초유의 대전인 금산 전투이다. 사실 규모만 놓고 본다면 금산 전투는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서도 초유의 대패로, 어쨌거나 3만 명 정도의 인명피해에 그쳤던 통주 전투와 달리 금산 전투에서는 고구려군 5만이 죽고 이후 남소성으로 달아났다가 추격전으로 1만 명 이상이 더 죽고 사로잡히는 수준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요동의 성 다섯 개가 한꺼번에 무너져 고구려의 명운이 결정되어 버렸다.[19] 전쟁 이후 조정에 남아있던 강조 측 인사들도 이듬해 1011년 현종에 의해 해도로 귀양보내졌다.[20] 물론 현종 입장에선 이 전투의 패배로 백성도 체면도 버려두고 도망을 쳐야 했고 나라도 멸망 직전까지 몰렸기에 원했던 바는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전쟁 후 나라를 재건시키고 힘을 비축해 귀주 대첩에서의 승리 후 평화기를 연 것은 순전히 현종 본인의 능력이었으므로 그 결과 자체만으로 현종에게 마냥 이득인 것은 아니었다.[21] 관련 언론 보도에는 대부분 이 삼수채를 '함경남도 삼수'라고 하는데, 이 당시 고려 영토로 보면, 위에 언급된 현 평안북도 지역에 해당한다.[22] 고려사에서는 탄기, 즉 알까기를 했다고 되어 있지만 영 모양새가 빠지는 놀이인지라 그냥 바둑으로 바꾼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