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야마 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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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46대 총리다.
불과 소수 연립 내각으로 집권했으나, 최초의 일본사회당 소속 총리이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총리는 무라야마 도미이치.[1] 또한 일본에서 몇 안 되는 기독교인 총리이기도 하다. 전후의 혼란 속에 겨우 9개월 보름간 집권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와카야마현 출생.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가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동향 사람이었던 군함행진곡의 작사가 도리야마 히라쿠(鳥山啓, 1837-1914)의 집에서 하숙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YMCA의 기숙사 일부를 빌려서 일본농민총동맹의 변호사로 활동했다.
당시 점점 군국화되어 가는 일본을 보며 사회 개혁파로 젊어서부터 정치 참여를 시도했는데, 1926년 사회민중당을 결성했고 1930년에는 사회민중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뒤 1942년까지 계속 당선되며 중의원 활동을 했지만, 1941년 도조 히데키의 집권 이후 비판 세력을 제거, 숙청하던 도조에게 말 그대로 찍혔다. 이후 사회민중당은 반국가단체로 몰려 강제 해산 당했고, 가타야마는 도조 내각과 태평양 전쟁을 반대하는 지하 활동에 참가했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2.2. 정치인 활동[편집]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일본사회당을 결성해 서기장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947년 요시다 내각이 연합군과 노동조합에 끌려다니다가 지지도를 잃고 총선거에서 2당으로 내려앉았고, 가타야마가 속한 일본사회당이 1당이 되었다.
1947년 당시 사회당의 의석 점유율은 미묘한 수준이었는데, 사회당이 1당이 되었지만 단독 내각을 꾸리고 유지할 만한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쳤다.[2] 그리고 3당이었던 일본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 우파였기 때문에, 가타야마는 요시다가 아시다와 연합해 연립 내각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했고 자신이 총리직에 오를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타야마의 예상과 달리 요시다와 아시다의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요시다가 오히려 총사퇴하고 물러나 버리자 총리 자리가 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이던 그에게 돌아갔다. 가타야마는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옆에 있던 당 간부에게 매우 당황해하며 말했다고 한다. "이거 큰일 났네."
2.3. 총리대신[편집]
가타야마는 총리에 지명되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연립 내각 협상에 들어갔다. 그는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국민협동당과 3당이었던 우파 민주당을 포섭해 연립 내각을 이루기로 합의는 했지만, 각료 자리를 어떻게 나눠 줄 것인지에 대한 협상이 총리 취임 시기까지 마무리되지 못했다. 결국 총리였던 가타야마가 임시로 전체 각료직을 겸임(!)하고 취임했다. 패전 후의 일본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파와 연합했지만 일단은 좌파 성향이었던 가타야마 내각은 집권 후 여러 가지 개혁을 주도했다. 패전 이전의 일본 법과 제도에 대해서 축소해 개정하거나 철폐했고, 일본사회당의 주도로 이루어진 탄광 국유화 정책은 꽤 긍정적으로까지 평가될 만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가타야마가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이 속한 집권 사회당의 분열에서 초래되었다.
연립 정권이었으나 일단 최대 정당을 형성한 일본사회당은 가타야마의 집권 이후 분열되기 시작했다. 사회당 안에서 좌우파로 갈라진 계파가 대장성에서 제출한 세금 인상안을 놓고 격돌했고[3] , 결국 원래부터 우파였던 민주당이 연립 정권을 깨고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참상에 가타야마는 책임을 묻고 사임을 했고 민주당이 사회당 우파와 손을 잡아 새로운 연립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고 아시다 히토시가 총리직을[4] 받으며 다시 연립 정권이 시작되었다.
이후 사회당은 결국 좌우로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다. 그러나 1955년 우파인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자유민주당으로 합당하여 보수 대연합을 실현시키자, 이에 자극받아 다시 통합하여 집권 자민당 vs 제1야당 사회당의 일명 55년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사회당 내 노선 투쟁이 다시 벌어져서 결국 사회당 내 우파 일부 계파가 1959년에 민사당으로 떨어져 나갔다.
여담이지만 가타야마 데쓰도 민사당 창당에 나섰지만 1963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그대로 정계 은퇴를 하였다. 이후 1978년 5월 30일에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인은 노환. 고별식은 이틀 뒤인 동년 6월 1일 그가 사망한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자택에서 기독교식으로 거행되었다.
그래도 총리직 사퇴 후에도 전직 총리로서 원로로는 대우받은 것인지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안보투쟁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이시바시 단잔 전 총리와 함께 사퇴를 권고하는 등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3. 선거 이력[편집]
4. 기타[편집]
오늘날 가타야마 데쓰라는 사람은 성품 자체는 상당히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되지만, 그의 성품과 지도력으로는 사회당 내부의 분열을 막기가 힘들었고 총리 재직 시기도 사회당 내부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면이 있다. 우연찮게도 그의 뒤를 이어 일본사회당의 두번째 총리이자 마지막 총리가 된 무라야마 도미이치도 유사한 평가를 받았다.
Hearts of Iron IV에서는 일본이 문민 정부 강화 루트를 타서 민주주의 내전이 시작하면 민주주의 측 지도자로 등장한다. 일본 민주 내전이 발발하면 한국, 만주국이 독립한다.[5] 서양 열강으로부터 동남아 식민지의 관리 권한을 넘겨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는 왠지 모르게 초상화가 하정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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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 사회당이 다시 여당이 되기까지는 46년이 걸렸다.[2] 총 466석 가운데 144석, 3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3]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이 인상안을 찬성하는 가운데, 사회당 좌파가 날치기로 부결을 시켜버렸다. 그걸 안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이 빡쳐서 중의원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의사봉 레이드를 뛰었다.[4]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과 불과 몇 석 차이로 총리직을 받을 수 있었다.[a] A B C
[5] 사실 오류인 게 일본 공산당은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에 공산 내전 시 독립하는 건 몰라도 민주주의는 식민지 독립에 별 관심 없었다. 당장 게임 내 지도에서 아프리카를 보면 대다수 지역이 민주 국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다. 게임 내에서 공산 내전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는 건 일본 공산당의 세력이 약해서 그렇다 쳐도 민주 내전 시 독립하는 건 서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내전의 혼란기에 떨어져 나왔다고 하면, 만주국은 강덕제의 지휘 아래 관동군만 어떻게 하면 되지만 한국은 미나미 지로의 조선총독부가 아니면 국내에 지배적인 파벌은 전무했다. 당장 독립군도 국내에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꽉 쥐는 형태면 모를까. 한국은 자연적으로 이승만이 집권한다.
[5] 사실 오류인 게 일본 공산당은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에 공산 내전 시 독립하는 건 몰라도 민주주의는 식민지 독립에 별 관심 없었다. 당장 게임 내 지도에서 아프리카를 보면 대다수 지역이 민주 국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다. 게임 내에서 공산 내전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는 건 일본 공산당의 세력이 약해서 그렇다 쳐도 민주 내전 시 독립하는 건 서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내전의 혼란기에 떨어져 나왔다고 하면, 만주국은 강덕제의 지휘 아래 관동군만 어떻게 하면 되지만 한국은 미나미 지로의 조선총독부가 아니면 국내에 지배적인 파벌은 전무했다. 당장 독립군도 국내에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꽉 쥐는 형태면 모를까. 한국은 자연적으로 이승만이 집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