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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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외교관. 정치인. 제47대 총리(1948년 3월 10일~10월 15일).
집권기간 자체는 7개월 남짓으로 얼마 되지 않지만, 전후 자유당-민주당의 8년 간의 분열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일본 정치사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2. 생애[편집]
2.1. 총리 이전[편집]
1887년 교토부에서 태어났다. 귀족원[2] 의원의 아들로 어렸을 적부터 엘리트 과정을 밟았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었다. 최초의 근무지는 러시아 제국으로, 러시아 제국의 영사관보로 파견되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유럽 여러 나라에 부임하며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당시 막장으로 치닫던 군부식 일방외교에 질려서 1930년에 임명된 벨기에 대사를 마지막으로 1932년 45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돌아와 입헌정우회에 입당했다. 이후 중의원에 당선되며 외교관 시절 쌓은 안목으로 외교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의견을 피력하는 등, 주로 외교 방면으로 활동해왔다.
일본의 패전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와 자유당을 결성했다.[3] 하토야마가 패전 전에 문부대신으로 입각했었던 사실 때문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활동 금지 크리를 먹었는데, 그때 하토야마가 요시다에게 자유당을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아시다 히토시는 자유당 창립멤버였던 자신에게 자유당 대표직이 돌아올 거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어긋나버리자 요시다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7년 요시다 시게루와 의견 충돌로 지지 세력과 함께 일본자유당에서 집단 탈당해 일본민주당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보수노선을 구축했다. 이것 때문에 보수층의 표심이 갈라져서 요시다 시게루는 결국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자유-민주-사회 3당이 미묘한 의석 수를 유지하는 3당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는 두 사람이 흡사한 정치노선을 지향하고 있었기에 요시다-아시다의 연합 정권이 출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일단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험악했다. 자유당과 일본민주당 내에서도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요시다 시게루와 아시다 히토시는 결국 서로 연합하지 않았고, 총리 자리는 결국 일본사회당의 가타야마에게 돌아갔다.
새로 총리가 된 가타야마는 집권을 위해 일단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에게 접근해 연립정권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요시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아시다는 가타야마와 대학동기였었던 점[4] 과 요시다의 반응을 전해 듣고는 일본사회당에 붙기로 결심한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맡는 등 꽤 대우를 받았지만, 일본사회당이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어버리자[5] 연립정권을 먼저 깨고 사임해버렸다.
2.2. 총리 시절[편집]
결국 사회당이 완전히 분열하고 가타야마가 사임을 하자 그의 일본민주당과 사회당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6] 을 합하면 가장 큰 세력으로 떠올랐고[7] , 그는 가타야마의 후임으로 자연스럽게 새로운 연립정권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총리 취임 시부터 그의 임기는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먼저 요시다 시게루가 아시다의 총리 취임에 이의를 제기하며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클레임을 걸면서 총리 지명 선거를 열 것을 주장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중참 양원에서 총리 지명 선거가 열리는 촌극을 빚었다. 게다가 요시다는 당시 참의원에서 근소하게 아시다를 앞섰다. 그러나 중의원에서는 아시다가 승리했기에, 중의원 우선 원칙에 따라 아시다는 겨우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거기에 요시다 시게루와 가까웠던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아시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면서, 이전 가타야마 데츠처럼 그가 원하는 제도를 통과시키기 매우 힘들었다. 아시다 본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신임을 얻으려 "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원하는 한도 내에서 제도를 개혁할 것이다"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지만, 요시다와 결탁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그를 듣보잡 취급했다.
거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아시다를 강타한 정치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쇼와 전공 사건이었다. 쇼와 전공이라는 회사에서 정부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대규모의 비자금을 뿌린 사건이었는데,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물론이고 아시다 내각의 인사들에게도 비자금이 전달되어 아시다 내각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때맞추어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이 대대적인 내각 불신임안을 요구했고, 결국 아시다는 7개월의 짧은 총리직을 마감해야 했다. 게다가 총리에서 물러난 직후에는 쇼와 전공 사건의 영향으로 아예 체포됐다. 그러나 1958년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스캔들 논란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질수 있었다.
총리 퇴임 이후에는 외교관 경험을 되살려 외국의 역사서를 저술하는 활동을 하였고, 1959년 도쿄도 미나토구의 자택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화려한 청장년 시기를 보냈으나 말년이 상당히 불운했던 인물이었다.
3.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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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무대신 겸임[2] 일본 제국의 상원(上院), 현재는 참의원(參議院)으로 개편되었다. 하원(下院)은 예나 지금이나 중의원(衆議院).[3] 요시다 시게루가 이끌었던 그 자유당이다.[4] 가타야마와 아시다 히토시는 둘 다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의 동기였다. 사적으로 아시다와 가타야마는 이념에 관계없이 꽤 친했었다고 한다. 아시다가 죽자 가타야마가 달려와 추도 연설을 읽어줬을 정도였으니.[5] 가타야마 데쓰는 우파사회당에 속했다.[6] 일본사회당(1945년) 내 우파 파벌인 우파사회당.[7] 그러나 2당이었던 요시다의 자유당과 의석 수가 몇 석 차이로, 매우 근소하게 앞서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일본 사회당은 반반으로 나뉘게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