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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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외교관이자 제44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인간선언 초안과 일본 신(新)헌법 초안을 작성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외교관 시절[편집]
1872년 오사카부 맛타군 카도마이치반촌 농가에서 태어났다. 농가 출신이지만 형도 그도 공부를 잘했는데, 형인 시데하라 다이라는 교육행정관과 대북제국대학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시데하라 기주로는 관립 오사카 중학교를 거쳐 구제 제3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하였으며, 1895년 제국대학(현 도쿄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896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외무성에 들어간다. 이후 1915년 외무차관에 올랐다. 당대의 일본 외교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외무대신만 네 번(제40-41, 43-44대)을 지냈던 외교계의 거물이다. 국제협조와 능동적인 대처로 일본의 이익을 최대한 지키자는 국제협조 노선의 창시자. 그가 주장한 국제협조 노선은 오늘날 일본에서 기본적인 외교전략으로 통한다. 당시 외교독자노선을 주장했던 다나카 기이치 총리의 '다나카 외교'에 빗대어 그가 주장한 외교노선을 '시데하라 외교'(Shidehara Diplomacy)라고 부른다.
1921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1930년의 런던 해군 군축조약 등 여러 굵직한 조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해왔다. 국제 협약에서 일본이 최대한 손해보지 않는 쪽으로 협상을 주도해 실현시켰고 중국에 대해 시데하라 외교라 하여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는 온건외교를 행하였다. 그 때마다 연약한 외교라며 욕을 있는대로 얻어먹었고 와카쓰키 내각 퇴진 이후 상기한 다나카 기이치의 강경 내각이 들어서면서 중일갈등이 심화되었다. 1931년에는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피격당해 국정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임시로 총리대신 권한대행을 했다. 하마구치 총리는 116일만에 직무에 복귀했으나 피격 후유증으로 인해 피격당한 지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총리대신 대리 활동 중 시데하라 기주로는 제국회의에서 심각한 말실수를 범했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두고 '천황의 비준이 되어 있다'라고 발언했다가, 천황에게 정치적 책임을 전가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졸지에 '통수권 간범', 즉 통수권을 침해한 것으로 몰리게 되었다. 일단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도 유임은 했으나 1931년에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함에 따라 시데하라 기주로도 외무대신을 사퇴하고 그 후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했다. 1932년에 5.15 사건이, 1936년에 2.26 사건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통수권 간범'으로 비난받은 시데하라 기주로로서는 정말 적당한 시기에 은퇴한 셈이다.
이렇게 아예 잊혀져 버리는 듯 했으나 일본의 패전 이후 그의 화려한 외교 경력을 눈여겨본 쇼와 덴노에 의해 궁내성의 영어교사로 복직했고, 이내 대(對) 연합군 최고사령부 협상에 관한 권한을 전면 일임받아 정계에 다시 돌아온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정세에 어둡고 언어도 잘 안 통해 고민이 많았는데, 때마침 시데하라가 인간선언 초안과 일본 신헌법 초안을 영어로 작성해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내놓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정세에 밝고 영어도 잘하는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하게 되었다. 마침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개기던 황족 출신 총리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압력을 못 이기고 사임하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후임 총리직을 시데하라에게 맡겼다. 총리 권한대행을 맡은 지 무려 십여 년만에 진짜 총리가 되었다.
2.2. 총리 시절[편집]
총리 취임 직전 일화가 하나 있는데, 시데하라가 총리로 내정되고[2] 점령군의 승인을 받고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신임을 받던 요시다 시게루 당시 외무대신이 리처드 서덜랜드(Richard Sutherland)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장을 만났다. 서덜랜드는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시데하라의 나이가 일흔 정도라는 대답을 듣자, 나이가 많은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영어는 할 수 있나?" 라고 물어왔다는 장면이 요시다의 회고록에 등장한다.
본디 외교관 출신이었던 시데하라는 영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몹시도 좋아하여 평소에도 달달 외웠다고 하는데, 이렇게 무시를 당한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더글러스 맥아더와 첫 접견에서 보란 듯 베니스의 상인의 한 구절을 달달 읊었다고 한다.
그가 총리로 있으면서 한 가장 대표적인 일은 인간선언 작성과 신헌법 제정이었다. 특히 제9조, 일명 평화헌법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3] 그 두 가지 외에는 특기할 업적없이 조용히 총리직을 수행하다가,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 1946년 총선거에서 승리하자 총리직을 사임했다. 다만 정계를 은퇴하진 않았고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선 무임소 국무대신을 지내다 복원청(復員庁) 총재 겸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이듬해인 1947년에는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4] 진보당 제2대 총재를 지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 결성에 참가한 뒤 중의원 제40대 의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1951년 3월 10일 만 78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여담[편집]
시데하라 기주로는 총리로서의 재임 시기 자체는 짧았지만, 외무대신으로서 일본 외교계에서 큰 영향을 발휘했던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인 마사코(雅子)와는 런던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혼인하였다. 장인은 미쓰비시그룹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이다. 그러므로 24대 총리를 지낸 가토 다카아키와는 동서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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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리 권한대행 수행. (1930년 11월 14일 ~ 1931년 3월 10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피격을 당하여 입원한 날부터 직무에 복귀하는 날까지 외무대신으로서 116일간 권한대행을 맡았다. 사실 하마구치 총리가 연혁상으로는 여전히 현임이었기 때문에 엄밀히는 권한대행이 아니라 '임시 대리'가 되어야 했지만 워낙 입원 기간이 길어 사실상 권한대행으로 활동했다. 하마구치 총리는 일단 극적으로 살아서 치료를 받았으나 완치되지도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하는 바람에, 피격당한 지 10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2] 시데하라 내각의 조각이 무산되면 2순위로 요시다 외무대신이 지명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요시다는 후임 총리에 오른다.[3] http://news.donga.com/sub/3/02/20160813/79731475/1 [4] 1926년부터 1947년까진 귀족원 의원을 지내며 정치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