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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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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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明史
중국 정사 24사 중 하나이다. 《명사》는 홍무제 주원장이 대명을 건국한 1368년부터 숭정제 치세인 1644년까지 277년간의 역사를 기전체로 엮은 중국 정사이다.
2. 편찬 과정[편집]
《명사》의 찬술은 이미 1625년, 명사관(明史館)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풍전(馮銓)이 중심이 되어 편찬을 진행했지만, 당시 명조와 청조가 영원성에서 대격돌을 벌이는 시점에서 정상적인 편찬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명나라의 관련 사료를 수집했을뿐 그외의 진전은 없었고, 이마저도 곧 중단되었다. 명나라가 아직 존속했던 시기에 《명사》를 찬술 시작했다는 것은, 정사의 편찬이 이전 왕조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섰을 때 편찬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명나라의 운이 다했다는 프로파간다적인 성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665년, 명나라가 완전히 정리되고 나서야 청나라는 다시 명사관의 업무를 재개하도록 했으나, 당시 청의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수하고 있어서 다시 중단되었다.[1]
《명실록》을 상당 부분 참고할 수 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실록이 명나라의 멸망으로 편찬되지 않아 숭정제 재위 기간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당대의 공문서 및 저보(현대의 관보에 상응) 등의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도 편찬 작업이 지연된 한 원인이었다.
《명사고》는 《횡운산인명사고》(橫雲山人明史稿)라고도 하는데 만사동(萬斯同)이 실질적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1703년, 만사동이 죽자 왕홍서는 만사동의 원고를 인수하여 삭제, 정정하고 합병해서 자기의 작품으로 올렸다.
《명사고》(明史稿) |
3. 구성[편집]
명사(明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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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本紀) 24권, <지>(志) 75권, <표>(表) 13권, <열전>(列傳) 220권, <부록>(附錄) 1권, 총 33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의의와 평가[편집]
청나라의 저명한 역사가 조익(趙翼)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근대의 여러 역사서 가운데 《명사》와 같이 완벽한 것은 없었다. 대개 60여 년을 경과한 다음에 일을 끝냈으니, 예로부터 역사 편찬에 이처럼 시일이 오래 걸리고 깊이 공들인 적은 없었다. 또 강희 연간에 편찬되어 전 왕조와 시간적으로 멀지 않으므로 사적(事迹)의 근원과 결말이 진실을 많이 담고 있고, 또 수십년 걸려 참고하고 정정했으며, 첨가하거나 삭제하고 분리하거나 합쳤음으로 사실은 더욱 상세해지고 문장은 더욱 간결해졌다. 또 시비(是非)가 오랜 후에 확정되어 집필자가 그 사이에 은폐함이 없어 더욱 근거 있고 신빙성 있게 되었다”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 권31 <명사>
《명사》는 강희제의 주도하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정밀한 검정을 통해 위와 같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중국 관찬사서의 한계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는 감추거나 왜곡했다.[3]
일부 역덕들이 중국 당국이 펴내는 《청사》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국의 다른 관찬사서들도 거의 같은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명사 장헌충전은 청나라 황제들의 의도에 따라 '수구기략(綏寇紀略)'이라는 사료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그러나 '수구기략'의 저자인 오위업은 당시 성도지현을 역임했다가 장헌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오계선의 집안사람이라 그 사실성이 크게 의심되는 사료다.
주목할만한 특징으로, 《명사》는 24사에 포함되는 역대 사서 중 유일하게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된 《실록》이 거의 온전하게 현전한다. 때문에 다른 사서들과 달리 내용을 《명실록》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서 《명실록》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고 어떤 식으로 축약되었는지, 변형이 일어난 내용이 있다면 어느 내용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사실 명사가 편찬된 시기 쯤 부터는 굳이 정사에 의존하지 않아도 정사의 바탕이 된 각종 풍부한 문헌들이 많이 남아 있을 시기이기 때문에 명나라 역사 연구에 꼭 명사만을 의존할 필요가 없고 다른 사서를 같이 참고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려사 연구 한정으로 여말선초 시기를 잘 알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다.
5. 링크[편집]
위키문헌 - 명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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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실록》을 상당 부분 참고할 수 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실록이 명나라의 멸망으로 편찬되지 않아 숭정제 재위 기간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 당대의 공문서 및 저보(현대의 관보에 상응) 등의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도 편찬 작업이 지연된 한 원인이었다.[2] 《명사고》는 《횡운산인명사고》(橫雲山人明史稿)라고도 하는데 만사동(萬斯同)이 실질적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1703년, 만사동이 죽자 왕홍서는 만사동의 원고를 인수하여 삭제, 정정하고 합병해서 자기의 작품으로 올렸다.[3] 일부 역덕들이 중국 당국이 펴내는 《청사》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국의 다른 관찬사서들도 거의 같은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4] 명사 장헌충전은 청나라 황제들의 의도에 따라 '수구기략(綏寇紀略)'이라는 사료에 근거하여 작성했다. 그러나 '수구기략'의 저자인 오위업은 당시 성도지현을 역임했다가 장헌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오계선의 집안사람이라 그 사실성이 크게 의심되는 사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