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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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南齊書
중국 정사 24사 중 하나이다. 『남제서』는 479년 고제 소도성(蕭道成)이 송 순제에게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한 후 502년 화제 소보융(蕭寶融)이 피살될 때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양나라 때 이부상서를 지낸 소자현(蕭子顯)이 기전체 방식으로 편찬했다. 원래는 『제서(齊書)』라고 불렀으나 북송 때 『남제서』로 사용했다. 원본은 60권이었으나 「자서」 한 권이 산일되어 현재는 59권으로 남아있다.
2. 편찬 과정[편집]
오균이 제사(齊史)를 편찬할 것을 황제에 올렸으나 거부당하고 소자현이 편찬을 스스로 맡았으니 『남제서』는 형식상은 사찬이나 관찬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약(沈約)과 위수(魏收)가 각각 『송서』, 『위서』를 스스로 편찬한 경우를 보듯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사관의 역할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자가 많았다. 따라서 당나라 때 형성되었다고 보는 설관수사(設官修史)가 이미 남북조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소도성은 등극한 후 1년 뒤 480년에 사관을 두기 시작했다. 남제에 대한 사서로는 단초와 강엄이 편수한 『제사(齊史)』가 13권이 있었는데 이로서 이미 10지가 만들어졌다. 양나라 때 편찬된 소자현의 『남제서』와 더불어 심약의 『제기(齊紀)』 20권, 오균의 『제춘추(齊春秋)』 등은 모두 『제사』를 참조하였다.[1]
소자현은 제나라의 건국자인 소도성의 손자로서, 특이하게 전 왕조의 자손이 그 왕조의 역사를 스스로 편찬한 유일한 예로 남아 있다.
3. 구성[편집]
본기(本紀) 8권, 지(志) 11권, 열전 40권으로 총 59권이다.
3.1. 본기(本紀)[편집]
- 본기 제1권 고제 소도성(상)
- 본기 제2권 고제 소도성(하)
- 본기 제3권 무제 무제
- 본기 제4권 울림왕 울림왕
- 본기 제5권 해릉왕 해릉왕
- 본기 제6권 명제 소란
- 본기 제7권 동혼후 동혼후
- 본기 제8권 화제 소보융
4. 의의와 평가[편집]
『남제서』는 양나라 때 찬술된 까닭과 편찬자 소자현이 종실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사서에 주관적인 입장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고제의 등극이 아름다운 선양 과정으로 미화되어 있는가 하면, 아버지 예장왕 소억(蕭?)의 활동이 극찬된 것은 소자현의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하지만, 양무제와 그의 부친 소순지의 이름을 냉정히 피휘(避諱) 한 점을 미루어 보아 소자현도 양의 신하로서 자세를 지키고 있다.
심약과 소자현은 동시대 인물로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는 곧 『송서』와 『남제서』가 비교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직업과 지위를 갖고 있었기에 남조의 문벌체제 호평이나 유불교를 함께 수용하는 종교 관념 등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의 체례도 「식화지(食貨志)」와 「예문지(藝文志)」가 빠진 것을 제외하면 『송서』와 거의 똑같다. 단 서술 방식에서 차이가 드러나는데 『송서』는 예와 제도 등의 연원을 한나라, 위나라 시대 또는 진나라 시대까지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가하면, 『남제서』는 철저히 제나라의 상황과 변화에만 초점을 두어 정리했는데, 두 사서 중 『남제서』가 더욱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종족집단의 통치에 대해서 『송서』보다 세세하게 풀어썼다.
열전편에서는 『송서』와 극명하게 쌍방을 이룬다. 『남제서』는 똑같은 유형의 인물을 전(傳)으로 편제하는 유서법을 채택하고 있지만, 『송서』는 대서법을 택하여 이루어져 있다. 청의 고증학자 조익(趙翼)은 『이십이사차기』에서 『남제서』는 과학기술자나 의술인 혹은 수절(守節)로 유명한 사람 등 특수한 부류의 인물들은 한 열전에 나열하여 더 많은 인물들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문계전(沈文季傳)」에서 당우지의 반란을 상세하게 기록한 점이나 「경릉문선왕자량전(竟陵文宣王子良傳)」에서 조세와 부역의 포, 건설, 개간 등에 대한 내용이 방대한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남제서』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있다.
5. 여담[편집]
- 가야가 열전으로 있는 유일한 중국 정사서이다. 479년[2] 가야 하지왕이 사절단을 보내 보국장군 본국왕으로 책봉됐기 때문. 이 하지왕은 가야 여러 나라 중 고령군의 대가야 왕으로 주로 추정된다. 5세기 후반 대가야는 호남까지 영향력을 뻗어 관련 유적을 다수 남길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기 때문이고 중국에 사신단을 보낸 것도 섬진강 유역을 장악해서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백제가 당대에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이 '남제서'에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동성왕 문서 참고.
6. 관련 고사성어[편집]
- 삼십육계(三十六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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