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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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중종 ~ 광해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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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76년(성종 7년) |
사망 | 1552년 5월 31일[1] 율리우스력 5월 21일. (음력 명종 7년 4월 28일) |
재임기간 | 제66대 영의정 |
1549년 6월 26일[2] 율리우스력 6월 16일. 율리우스력 9월 18일. (음력 명종 4년 5월 21일 - 명종 6년 8월 19일) | |
봉호 | 1570년(선조 3) 추탈. |
시호 | 1570년(선조 3) 추탈. |
본관 | 덕수 이씨 |
자 | 문중(文仲) |
호 | 경재(敬齋) |
부모 | 부친 - 이의무(李宜茂) 모친 - 창녕 성씨 성희(成熺)의 딸 |
부인 | 김진(金震)의 딸 |
자녀 | 장남 - 이원우(李元祐) 장녀 - 안응원(安應元)의 처 |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2. 생애[편집]
윤원형과 함께 문정왕후 시대를 대표하는 간신. 윤원형과 엮어 이흉이라고 불렸다.[4]
또는 심통원이나 이량을 묶어 3흉이라 불렀다. 3간이라는 하위호환도 있는데 이는 임백령, 정순붕, 정언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종 시대에는 심정, 이행, 김극핍을 3간이라 불렀고, 김안로, 허항, 채무택을 3흉이라 불렀다. 이중 이기를 제외하면 모두 말년이 좋지 못했다. 이들 말고도 윤춘년도 윤원형의 개로 맹활약했지만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사생활은 의외로 검소했고 학문적 소양도 꽤 있는데다가 윤원형이 탄핵됨과 동시에 낙향해 생을 마쳐 같이 엮이지 않는다. 윤춘년은 말년에 미쳐 무당 굿이나 하고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1496년(연산군 2)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6위로 급제하였으며#, 1501년(연산군 7) 종9품 전력부위(展力副尉)로서 식년시 문과에 3등 15위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26년(중종 21) 중추부 동지사를 역임할 때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37년(중종 32)에 예조 참판이 되고 5년 후에는 순변사 도원수가 되며 1545년(명종 즉위)에 우의정에 올라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에서 대윤의 세력을 꺾었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된다. 1552년(명종 7) 사망한다. 당시 그를 향한 탄핵이 빗발치던 시기라 화를 입을만한 상황이었는데 딱 맞게 고통없이 자연사했다.
이기의 동생은 권신 이행으로 심정의 편을 들어 김안로를 공박하다가 역으로 당해 유배지에서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여담으로 본관이 덕수 이씨라서 율곡 이이의 종조부(작은할아버지)이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이기와 가까이 지내다가 아내 신사임당의 충고를 듣고 이기를 멀리한 덕분에 후일 윤원형, 이기의 세력이 몰락한 후에도 무사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문과에 급제한 문신인데도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을 하지 못하고 무관직과 외관직을 했다는 것이 꽤 특이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3. 둘러보기[편집]
조선 역대 집권자 · 집권 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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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5월 21일.[2] 율리우스력 6월 16일.[3] 율리우스력 9월 18일.[A] A B 1570년(선조 3) 추탈.[4] 또는 심통원이나 이량을 묶어 3흉이라 불렀다. 3간이라는 하위호환도 있는데 이는 임백령, 정순붕, 정언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종 시대에는 심정, 이행, 김극핍을 3간이라 불렀고, 김안로, 허항, 채무택을 3흉이라 불렀다. 이중 이기를 제외하면 모두 말년이 좋지 못했다. 이들 말고도 윤춘년도 윤원형의 개로 맹활약했지만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사생활은 의외로 검소했고 학문적 소양도 꽤 있는데다가 윤원형이 탄핵됨과 동시에 낙향해 생을 마쳐 같이 엮이지 않는다. 윤춘년은 말년에 미쳐 무당 굿이나 하고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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