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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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jpg
이름
테오도라 두케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
(Θεοδώρα Δούκαινα Κομνηνή Παλαιολογίνα)
출생
1240년
사망
1303년 2월 25일
아버지
요안니스 두카스
어머니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남편
미하일 8세
자녀
마누일 팔레올로고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안드로니코스 2세, 안나 팔레올로기나,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에우도키아 팔레올로기나,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아우구스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황후.


2. 생애[편집]


1240년요안니스 3세의 남동생이며 세바스토크라토르(Σεβαστοκράτωρ)를 역임한 이사키오스 두카스 바자테스의 아들인 요안니스 두카스와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가계는 동로마 제국 후반기를 주름잡은 앙겔로스 가문, 두카스 가문, 그리고 콤니노스 가문이 결합한 황족이었다. 요안니스 두카스는 테오도라가 어렸을 때 사망했고, 어머니 역시 1250년대 초에 사망했다. 요안니스 3세는 동생의 손녀인 그녀를 친손녀처럼 아꼈다고 하며, 1253년 군사귀족이며 제국군 총사령관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1254년 즉위한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을 심하게 견제하였고, 미하일은 룸 술탄국에 망명하거나 감옥에 투옥되는 등 갖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테오도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두 아들 마누일과 안드로니코스를 잇달아 낳았다.

1258년 8월 테오도로스 2세가 사망한 후, 아직 미성년자인 요안니스 4세가 황위에 올랐다. 테오도로스 2세는 요르요스 무잘론과 무잘론의 형제들을 섭정으로 지명했지만, 귀족들은 테오도로스 사후 8일만에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 형제들을 살해하고 미하일을 섭정으로 추대했다. 그 후 미하일과 테오도라는 1259년 1월 1일 이후 왕관을 쓰는 등 최고 권력자로 각인되었고, 1260년경 딸 이리니를 낳았다. 1261년 8월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한 후, 네번째 아이를 임신한 테오도라는 남편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가 총대주교로 복귀한 후, 미하일은 아야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녀도 대관식에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1261년 가을 콘스탄티노스를 낳았다.

그런데 테오도라는 곧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당대 역사가 피키메레스에 따르면, 미하일은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유배형에 처한 뒤, 요안니스 3세의 미망인이자 시칠리아 국왕 만프레디의 누이인 호엔슈타우펜의 안나를 아내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안나가 유부남과 결혼할 수는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자, 미하일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테오도라와 이혼하려 했다. 테오도라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자 아르세니오스 총대주교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아르세니오스는 미하일에게 압력을 가했고, 결국 미하일은 1261년 12월 안나가 시칠리아로 가도록 허락했다. 그가 안나와 결혼하려 했던 까닭은 불확실하다. 만프레디와 결혼 동맹을 맺으려 했을 수도 있고, 요안니스 3세의 미망인과 결혼함으로써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의 호응을 받아내길 희망했을 수도 있다.

미하일과 테오도라는 곧 화해했고, 1263년경 아들 테오도로스를 낳았으며, 그 후에도 두 딸 안나와 에우도키아를 낳았다. 미하일은 이외에도 두 명의 사생아를 낳았는데(마리아와 에우프로시나), 그중 마리아는 1265년 일 칸국의 초대 군주 훌라구 칸과 결혼하러 가다가 도중에 훌라구가 죽어버려서 아들 아바카 칸과 대신 결혼했다. 마리아는 후에 시어머니가 죽고 난뒤 몽골식 이름을 얻었는데, 데스피나 카툰이라 불리었다.

남편 미하일 8세의 통치 기간(1259-82) 동안 테오도라의 정치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몇가지 사례가 있다. 1269년, 그녀는 딸 안나를 세르비아의 국왕 스테판 우로스 1세의 아들인 스테판 밀루틴과 결혼시키기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278년 미카엘 2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미하일 쿠트룰레스의 결혼도 주선했다. 1279년에는 딸 이리니를 불가리아의 국왕 요안니스 3세 아센과 혼인시키는 문제에 대해 남편에게 조언했다. 한편, 테오도라는 극형에 처해질 예정인 신하들을 구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1280년, 그녀는 황제를 비방한 혐의로 고발된 칼로이다스라는 신하에게 자비를 베출어달라고 청했다. 칼로이다스는 테오도라의 간청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대신 눈이 멀고 코가 잘려나갔다. 또한 반역 혐의로 고발당했던 사촌 미하일 스트라테고풀로스를 실명형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마하일과 테오도라는 황제와 황후로 즉위했을 때부터 수도원 공동체의 복지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파트모스와 렘비오티사 수도원의 기록보관소에는 1259년에서 1281년 사이에 작성된 많은 문서들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는 도데카니사 안스미르나 지역의 수도원 재산이나 특권에 대한 황제와 황후의 개입을 증명하는 법령들이 존재한다. 이 법령들 중 일부는 황후가 직접 포고한 것으로, 원본에는 황후의 도장이 찍혀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테오도라는 콘스 섬을 사유재산으로 인정받았으며, 그곳의 관리 책임을 직접 맡았다. 테오도라는 코스 섬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코스 섬에는 성 구세주 수도원이 있었는데, 해적과 도적들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이에 테오도라는 1259년 이 수도원의 관리 권한을 파트모스 수도원장 요안니스에게 맡기고, 가능한 빠른 시일에 수도원을 복구하도록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271년 복구가 완료되었을 때, 테오도라는 올리브 나무와 참나무 몇 그루를 수도원에 심도록 하였다.

1262년 테오도라는 스미르나 근처에 있는 렘비오티사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게라시모스의 요청에 응하여 모든 권리, 특권, 면책권을 확인하는 호리스모스를 발행하였다. 1270년 또는 1285년에 존 코메스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 이 수도원에 하기아라고 불리는 재산을 주었다. 이렇듯 테오도라는 종교시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관대하게 대했다. 당대 동로마 성직자 출신 역사가들은 그런 그녀를 "제국의 선조들과 함께 권력을 공유하는 황후"라고 묘사하며, 그녀가 발표한 법령들이 훗날 황후들이 발표한 법령의 표준이 되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테오도라는 학문을 지원하고 필사본 제작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한 직후, 그녀는 수사 아르세니오스에게 페르시아 철학자 알-자나티의 기하학 작품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라고 의뢰했다.

1274년, 미하일 8세는 리옹 공의회에서 선포한 교리를 수용하여 정교회가톨릭을 연합시키기로 했다. 테오도라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는 1275년 미하일의 교회 결합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요한이라는 이름의 수도자가 테오도라의 영적 스승이라고 기술했다. 하지만 테오도라는 남편에게 결심을 바꾸라고 설득할 힘이 없었고,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교회 통합 정책을 지지하는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황족 구성원들, 특히 미하일의 여동생인 에우도키아는 교회 통합 정책을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공공연히 표명했다. 미하일은 교회 통합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수도자들을 강력히 탄압했고, 이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이로 인해 1282년 미하일이 사망했을 때, 그의 가족 외에는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1282년 가을 미하일이 트라키아에서 마지막 원정에 착수했을 때, 테오도라는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수도에 남아있으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리하게 출진하였고, 12월 11일 라이데스토스 근교에서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정교회 인사들은 통합정책을 강요한 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기에 장례식을 거부하였고, 그의 유해는 잠시 암매장되었다가 셀림브리아의 한 교회에 이장되었다. 이렇게 미하일 8세가 사망한 후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아버지가 받아들인 리옹 공의회의 결정을 반대하기로 했다. 또한 미하일의 누이 에우도키아는 미하일이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을 거라고 선언했다.

남편의 뜻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가 남편과 함께 파문당했던 테오도라는 남편의 영혼을 구원하고 싶다는 소망과 정교회로 복귀하고 싶다는 열망 사이에서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1년간 장고 끝에 1283년 제1차 블라허나이 공의회에서 "가톨릭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정교회를 따르겠으며,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겠다는 정교회의 처분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녀는 그 당시 심각한 의심을 가졌던 것은 인정했지만, 사안의 중대성과 기독교 영혼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해악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며 과거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에 정교회는 그녀를 신자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딥티코스(diptyque)[1]에 재등재했다.

테오도라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사이가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후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무척 슬퍼했고, 장례식을 후히 치러줬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가 형제들을 박대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그는 어머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로스에게 전제군주라는 호칭을 내려주길 거부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가 1293년 님파이온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었을 때 가택 연금에 처했다. 역사가 그레고라스는 안드로니코스가 1299년 테살로니키로 가서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자기 딸을 결혼시키는 문제를 논의했을 때, 테오도라가 콘스탄티노스의 석방을 주선하려 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는 끝내 어머니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1303년 초 중병에 걸린 테오도라는 2월 25일에 사망했다. 안드로니코스는 사망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라고 명하고, 몇년 전에 그녀의 무덤으로 쓰기로 정해진 성 요한 성당에 안치하게 하였다. 장례 연설은 로고테스 직책을 맡은 테오도로스 메토치테스가 맡았다. 그의 연설문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테오도라 황후를 추모하며"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메토치테스는 그녀가 죽기 전에 수도원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했다. 장례식찬송가, , 횃불이 한데 어울러졌으며, 고위 관료, 성직자, 수도자들이 참석했다. 다만 진눈깨비가 내리는 바람에 거리가 진흙탕이 되어버려서 많은 불편이 있었다고 한다. 관은 며칠간 립스 수녀원에서 보관하다가 성 요한 성당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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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교회 주교들의 명단이다. 성찬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딥티코스에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대를 독립교회의 합법적인 수장으로, 또는 아예 독립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