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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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Flavia Valeria Constantina)
출생
315년 로마
사망
354년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
어머니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배우자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자녀
아나스타시아

1. 개요
2. 생애
3. 성녀가 되다



1. 개요[편집]


로마 제국아우구스타.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기의 로마 제국 동방의 카이사르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황후.


2. 생애[편집]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막시미아누스의 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로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헬레나가 있었다. 335년경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의 아들 한니발리아누스와 결혼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한니발리아누스를 'rex regum et gentium Ponticarum(폰토스인의 왕중왕)'으로 삼아 흑해 연안지대의 관리를 맡겼다.

그러던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붕어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생전에 친자식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아우구스투스(정황제)로 세워 제국을 3개로 분할하고,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에게 특정 지역의 영토를 다스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 형제는 유언장에 따라 제국을 3개로 분할하면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달마티우스에게, 폰투스를 한니발리아누스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 해 여름,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황족들을 모조리 도륙냈다.(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한니발리아누스는 이 사건으로 피살되었고, 당초 한니발리아누스의 황후 신분이었던 그녀는 순식간에 모든 직위를 상실한 미망인으로 전락했다.

그 후 13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녀는 350년 1월 마그넨티우스가 서방의 황제 콘스탄스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자 아우구스타로 복위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일리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베트라니오에게 이 사실을 전한 뒤 황제를 칭하고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권했다. 베트라니오는 일단 카이사르를 칭한 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이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카이사르를 칭했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에데사에서 베트라니오의 편지를 접한 뒤 사산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는 한편 베트라니오에게 왕관을 보내면서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인정하겠다고 전한 뒤 군자금을 보내고 도나우 강변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런데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자금과 물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연이어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그의 의도를 의심해 요구를 점차 들어주지 않자,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이아에 도착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공동으로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안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자신의 딸을 콘스탄티우스 2세와 결혼시키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는 베트라니오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를 따랐던 이들의 직책을 유지하는 것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다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제국 서방의 영유권을 마그넨티우스와 베트라니오에게 넘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의 협상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베트라니오에게 별도로 사절을 보내 자신과 협력한다면 황제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여동생을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베트라니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다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손을 잡았다. 콘스탄티우스는 나이소스, 시르미움, 또는 세르디카에서 베트라니오의 군대와 연합했다. 그러나 350년 12월 25일 베트라니오의 장교들을 포섭해 일리리아 군단이 자신을 유일한 황제로 받들게 만들었다. 베트라니오는 급히 몸을 땅에 던지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자비를 빌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보라색 휘장을 가져간 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후 "아버지"라 부르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후 그를 사면하는 대신 지휘권을 박탈하고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그렇게 베트라니오를 제압한 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한편 자신을 대신해 동방을 경영할 이로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낙점했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는 337년 황족들이 대거 피살당할 때 아버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살해당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이복 동생 율리아누스와 함께 오랜 세월 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두 형제를 석방시킨 뒤 갈루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한 후 여동생 콘스탄티나와 결혼시키고 카이사르에 선임했다. 갈루스의 즉위식과 콘스탄티나와의 결혼식은 351년 3월 15일에 시르미움에서 거행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와 갈루스는 352년, 353년, 354년 3차례에 걸쳐 집정관을 공동으로 맡았다. 그러나 갈루스는 독자적으로 장관을 임명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오로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지정한 장관들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갈루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안티오키아로 이동한 뒤 제국 동방을 통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콘스탄티우스 2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녀가 갈루스의 마음 속에 박혀 있던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며 그녀를 "필멸의 에리니에스"라고 지칭했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갈루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많은 부유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여 '마법'을 써서 유죄로 확정짓고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353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탈라시오스가 자연사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도미티아누스를 새 총대주교로 임명하여 안티오키아로 보냈다. 또한 그는 갈루스와 함께 동방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서쪽으로 빼냈다. 갈루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을 의심해 이러는 거라 여기고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도착한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궁정에 쓰이는 물품에 일일이 간섭하자 그만 폭발했다. 갈루스는 근위병들에게 도미티아누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한 뒤, 장교 몬티우스에게 도미티아누스 처형을 감독하라고 명령했다.

필로스토르기오스에 따르면, 몬티우스가 "총대주교 처형은 부황제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라고 반대하자, 콘스탄티나가 몬티우스를 손수 붙잡아서 끌어내렸다고 한다. 갈루스는 몬티우스와 도미티아누스를 고문한 뒤 처형했다. 몬티우스는 죽기 전에 에피고노스와 에우세비우스가 자신과 한 편이었다고 진술했다. 이로 인해 철학자인 실리키아의 에피고노스와 에메사 출신의 웅변가 에우시비우스가 법정에 소환되었다. 두 사람 모두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는데, 에피고노스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 자백했지만 에우세비우스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갈루스는 이 두 사람 역시 처형했다.

354년 봄, 콘스탄티우스는 발렌티아에서 안티오키아의 재판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시 그는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알레만니족과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알레만니족과 화해한 뒤 밀라노로 이동했다. 이후 측근들을 불러모아 갈루스의 처우를 논의했다. 그는 갈루스를 소환하기로 마음 먹고, 사절을 보내 출두 명령을 내렸다. 콘스탄티나는 오빠 콘스탄티우스를 설득하기 위해 먼저 떠났지만, 비티니아의 카에니 갈라카니에서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갈루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연이은 소환령에 못이겨 밀라노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풀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나와 갈루스 부부 사이에서 딸 아나스타시아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이 아이가 부모를 잃은 뒤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성녀가 되다[편집]


콘스탄티나는 이탈리아식 이름 '콘스탄차(Costanza)'로서 가톨릭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는 중세 민간 전승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는 불치병에 걸린 딸 콘스탄차를 로마의 성 아그네스의 무덤으로 보내 기도하게 했다. 그녀는 곧 치유받은 뒤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후 갈리카누스라는 로마 장교와 약혼했는데, 약혼자가 전장에 나섰을 때 기독교인인 파울루스와 요한을 시종으로 보냈다. 갈리카누스는 이 두 시종에게 감화되어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 그녀는 갈리카누스와 결혼하기 전에 했던 결혼에서 낳은 두 딸 아티카와 아르테미아를 기독교로 개종시켰고, 나중에는 평생 순결을 지킬 것을 서약하고 수녀로 살게 했다. 이후 그녀는 이집트의 순교자 메나스의 유해를 발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그 유해가 있던 장소에 교회를 건축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나, 아티카, 아르테미아는 16세기에 교회 전승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그녀의 유물을 새로운 제단 아래 놓게 했다. 오늘날 그녀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은 로마의 산타 콘스탄차 교회에 있다. 그녀의 축일은 2월 18일이며, 아티카와 아르테미아의 축일은 각각 1월 28일과 2월 17일이다. 또한 세 모녀는 2월 25일과 6월 25일에 함께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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