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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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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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계 입문 전
3. 정계 입문 후
3.1. 진보정당 시절
3.2. 민주당 합류 이후
3.2.2. 조국 국면에서의 민주당과의 반대 발언
3.2.3. 박원순 관련 발언
3.2.4. 이승만, 박정희 관련 발언
3.2.5. 대선 출마 선언 및 모병제 주장
3.2.6. 박성민 청년비서관 옹호
3.2.7. 전당대회 당대표 후보 출마
3.3. 2023년


1. 개요[편집]


정치인 박용진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정계 입문 전[편집]


파일:젊용진.jpg
1971년 4월 17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번암지서 관사에서 아버지 박구희(1941년생)와 어머니 송복순(1943년생)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집성촌이 있는 장계면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거주하다가 부친의 근무지가 전주시로 변경되면서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전주진북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 1979년 부친이 서울로 전근하면서 서울화계초등학교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1989년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의 고2 시절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수호 선생이 결성 주도 인물로 구속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학교 동기생들과 교내 시위를 주도한다. 고등학교 내내 1987년 6월 항쟁 이후 분출된 정치, 사회의 민주화 흐름에 민감한 시절을 보냈다.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학년 때이던 1991년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5월 정국의 말미에 그의 대학 선배인 김귀정이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용진은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으로 찾아간 뒤 장례가 마무리 될 때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 서총련산하 북부총련 의장직에 선출된다.[1] 그해 6월 벌어진 전국철도기관사협의회와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의 연대 파업[2]을 지원하던 도중 구속되어 첫 번째 감옥 생활을 경험하였다. 100여 일의 수감생활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총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그해 12월에 현역으로 입대하여 1997년 2월 부산 53사단 해안레이더 기지에서 복무를 마치고 만기 제대하였다. 제대 후 1997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기 위해 복학한 뒤 김귀정추모사업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3. 정계 입문 후[편집]



3.1. 진보정당 시절[편집]


대학 졸업 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정치부장으로 일하다가, 1997년 9월 결성된 국민승리21에 언론부장으로 파견되었다. 대선을 마친 뒤 전국연합을 그만두고 권영길을 따라 진보정당 운동을 계속했다. 국민승리21에서 언론부장, 조직부장, 기획부장, 청년사업부장, 청년실업대책본부 상황실장, 대표 수행비서 등을 겸직하며 진보정당 건설에 힘썼고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2000년 1월 문화일보가 선정한 '차세대 리더 100人'으로 선정되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인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만 29세의 나이로 도전하여 서울 강북구 을에 출마했다. 13.3%의 득표율로 7명의 후보자 중 3위를 기록하였으며 이는 민주노동당의 서울 지역구 출마자 중 최고 득표율이었다. 그 후 최고위원 격인 전국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노동운동을 대표하던 정윤광 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과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 등이 그의 경쟁상대였다.

2001년 3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전국민중대회’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었고, 2년 1개월 후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1주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피선거권을 회복하지 못해 2004년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원내 3당이 된 민주노동당은 그를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총선이 끝나고 한 달 뒤 복권되었다. 그때부터 2007년 12월 대선 선대위 대변인까지 중앙당에서 활동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에 반대했지만 진보신당이 창당되자 합류[3], 진보신당 후보로 다시 서울 강북을에 출마했으나 11.8%의 득표율로 통합민주당 최규식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10년 진보신당 부대표가 되었다.

3기 진보신당 지도부 중 유일하게 야권대통합에 동의했다. 2011년에 '진보대통합'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2011년 9월 25일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진보정당을 출범한다"고까지 합의가 되었으나, 뒤이어 열린 진보신당 당대회가 합의안을 부결함으로써 결국 '진보대통합' 논의는 무산되었다. 이에 지속적으로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던 그는 진보신당을 탈당하였고 통합진보당 동참 역시 거부했다.


3.2. 민주당 합류 이후[편집]


진보신당 탈당 뒤 문성근 등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 운동에 합류하여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을 맡았다. 혁신과통합이 결성한 시민통합당 지도위원으로 창당에 함께했다.

시민통합당이 민주당과 통합해 만든 민주통합당에서 최고위원 선거에 도전해 컷오프를 통과했으나 당선에는 실패했다. 그 후 민주당 대변인, 홍보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의 당직을 지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서울 강북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서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대선 경선 국면으로 흐르자, 안희정 당시 충남도지사를 공개 지지하였다.# 이후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20대 국회 2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합류, 전략기획부대표직을 맡고 있다. 20대 국회 전반기 정무위원회와 운영위원회에 소속되어 있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와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7년 국정감사에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를 제기해 금융당국의 과세 결정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꾸려진 더불어민주당 이건희 과세 TF의 간사직을 맡았다. 또 꾸준히 현대자동차의 세타2엔진 결함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에 현대차로부터 2017년 5월 리콜 결정과 10월 국정감사에서 세타2엔진에 대한 무한보증 약속을 이끌어냈다.

2018년 9월 21일 국회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 중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기업 가치를 평가한 안진회계법인과 삼정KPMG의 보고서가 부풀려 작성된 것을 문제삼았다. 사실상 금융위원회의 묵인이 있었다는 정황도 확인했다.

초선 임기 동안 대표발의해 통과시킨 주요 법안은 다음과 같다.
  •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53조의2: 금융 분쟁조정 시효의 중단 조건 규정
  • 공인회계사법 제37조의2: 회계법인의 분할·분할합병 근거 및 절차 규정

21대 총선에서는, 바로 지역 단수공천을 받으면서 재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64.45%의 압도적인 득표율[4]을 얻어 미래통합당 안홍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20년 6월 9일, 대북전단과 관련해 "삐라가 온다고 흥분하기 전에 종이떼기 몇장 가지고 체제가 흔들릴 정도면 반성 좀 해야한다"고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비판했다.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려는 여당 움직임과 대조되어 소신 발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

2019년 6월 12일, 홍콩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조슈아 웡이 "한국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님께서 최근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홍콩과의 연대의 뜻을 밝혀주셨다"며 "한국 민주화에 직접 참여하셨던 박용진 의원님께서 연대해주셔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감사를 표했다. #

2020년 6월 18일, 제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코스피 3000법'이라고 명명했다. 전자투표제와 집중투표제[5]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다중대표소송제[6] 도입 등으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이다.[7] # 하지만 이 법안에 대해 기업 경영권 위협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문서 참조.

2020년 7월 6일, 문재인 정부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면서 "임대사업자가 시장에 미치는 순기능을 인정해야 한다"며 "재개발·재건축을 억누르지 말고 공급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 화제가 되었다. 그러면서 "청년이나 신혼부부를 위한 작은 아파트라도 적극 공급하고 신도시 정책도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는 6.17 부동산 대책이 나온 이후, 6월 23일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8]와의 대담에서 나온 발언이다. # 그동안 재벌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시각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부동산 문제에서는 보수진영과도 어느 정도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는데 주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을 비롯한 의혹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덕분에 예비 경선에서 지명도가 가장 떨어지는 후보임에도 양승조, 최문순 두 도지사를 누르고 본 경선까지 진출했지만 이후 당내 이재명 대세론 때문에 역풍을 맞기도 했다.[9] 하지만 최종 1.55%, 4위로 경선을 마감했다. 경선 이후에는 다른 후보들과 함께 대한민국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제20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패해 야당이 된 후 처음 열리는 전당대회에 당대표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진영논리를 위해 악성팬덤과 정치훌리건, 좌표부대에 눈을 감는 민주당이 돼선 안 된다"며, "계파와 팬덤의 수렁을 넘어, 민주당이 하고 싶은 정치를 찾자. 민심이 우선하고 상식이 지배하는 민주당, 다른 의견을 포용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민주당, 다시 자랑스러운 민주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당대표 선거 출마가 유력한 이재명 의원을 상대로도 "어느덧 지금 민주당에는 패배를 향한 공포와 특정인을 향한 절망적 기대감만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로 저격하기도 했다.

당대표 선거 출마 선언 이후 KSOITBS 의뢰로 전국 성인 남녀 1,002명에게 진행한 민주당 대표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35.7%를 기록한 이재명 의원의 뒤를 이어 16.8%로 2위를 기록했다.# 이후 발표되는 여론조사들에서도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는 이재명 의원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두 자릿수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7월 28일 진행된 컷오프를 통과하고 이재명 의원, 강훈식 의원과 본경선을 치르게 됐다. 이재명 후보의 지지세가 워낙 막강한만큼 강훈식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강훈식 후보 측에서 단일화에 다소 거리를 두는 모양새라 쉽지는 않은 상황.

결국 강 후보가 단일화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단독 사퇴하고 끊임없는 네거티브로 인해 당내 비호감도도 높아지면서 최종 22.23% 득표율로 참패했다.#


3.2.1.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유치원 3법 발의[편집]



2018년 10월 12일 페이스북을 통해 2013~2018년까지 감사적발 유치원 수, 적발 건수, 금액 기본통계 엑셀 파일과 2014~2018년 감사결과 보고서, 감사결과 리스트 엑셀 파일 자료를 공개했다. 이를 통해 비리 유치원 명단이 드러나며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참고. 정무위원회에서 교육위원회로 옮긴 지 3개월도 채 안 돼 보란듯이 '큰 거 한방'을 날리면서 아래 출신성분+무수한 논란으로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진보적 민주당 지지층에게조차 쌓여왔던 어그로를 한방에 초기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박용진은 이 일로 인해 2018년 국정감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었고 순식간에 깡세고 할 말은 하는 의원으로 인지도가 굉장히 높아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박용진 빼고 아무도 일 안 했다고 보면 될 정도로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일을 잘 했다고 평가가 나왔을 정도. 2018년 10월 23일에는 '유치원 3법'으로 잘 알려진 '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에 대한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또한 이 일은 결과적으로 박용진이 여당 의원으로서 정부 관료인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크게 지원한 셈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유치원3법은 2020년 1월 13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통과되고 나서 감격스러워하며 동료의원들의 축하를 받고 같은 교육위원들과 포웅을 하며 기뻐했다.


3.2.2. 조국 국면에서의 민주당과의 반대 발언[편집]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의 부정입시 의혹이 불거져 여론이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이 조국 보호 일변도의 모습을 보이는 중 조국 후보자에게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면 결단이 불가피하다며 소신 발언을 했다. #

이후 유시민이 조국을 옹호하면서 조국 반대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자유한국당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며 비판하자, 편들어주는 건 고맙지만 오버하지 말라며 비난, "유시민의 20대나, 박용진의 20대나, 지금 20대나 피의 온도는 똑같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얘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

이에 대해 같은 당 전재수 의원은 "우리가 정치를 하면서 때를 알고 나서야 하지만 나서더라도 말은 가려야 하지 않나, 민주당원이 아니면 조국 후보자에 대해 말도 못 하느냐, 자네 발언이 어떻게 악용되는지 주변을 둘러보라, 제발 오버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조국을 지지하는 친문 지지자들도 박용진 의원을 향해 비토와 더불어 1만건에 달하는 문자폭탄을 날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조국에 대해 비판 혹은 반대하는 민주당 정치인들도 공격대상이 됐다. #

금태섭 의원이 공천 경선에서 떨어지자 반조국 인사들에 대한 보복이라는 보수 진영의 주장이 나왔으나,[10] 박용진과 함께 조국 전 장관에 대해 비판했던 배재정, 김현권 같은 의원들은 정상적으로 공천을 받았다. 조국 관련한 여파가 없진 않으나 금태섭이 워낙 지역구 관리를 안 해왔다는 평이 대다수다. 이후 금태섭이 경고 징계를 받고 뒤늦게 통보받는 사태가 일어나자 직접적으로 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3.2.3. 박원순 관련 발언[편집]


박원순 서울시장 자살 사건과 관련해 7월 14일 오전 <한국방송>(KBS) '김경래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박 전 시장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은 가지만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는 충격적이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며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이후 대책 마련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면서도 “당 차원의 진상파악과 대책 마련이 있어야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

또 "서울시라고 하는 직장·기관에서도 진상조사와 직장 내 유사 사례 재발 방지 노력이 있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으로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3.2.4. 이승만, 박정희 관련 발언[편집]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래를 볼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며 평가를 하자# "하다 하다 친일파 논리를 대입하느냐", "조응천, 김해영과 함께 당을 떠나라", "국민의힘으로 가버려라", "그래서 정의당[11]에서 온 쓰레기는 받으면 안 된다'' 등의 많은 비판을 받았고, 최민희, 황교익 등도 가세해 박용진을 비판했다.

이전에도 백선엽에 대해 민주당 지지층과의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3.2.5. 대선 출마 선언 및 모병제 주장[편집]


대선출마 선언을 하면서 현행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모병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남녀 모두 40~100일간 군사훈련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기사


3.2.6. 박성민 청년비서관 옹호[편집]


2021년 6월 24일, 박성민 청년비서관 임명 논란 당시 박성민 청년비서관 임명을 옹호했다. 박용진은 "청년 비서관이라는 역할에 청년 당사자가 가는 건 적절하다"면서 "청년 최고위원으로 발탁돼 민주당 안에 있었을 때 당내 쓴소리를 눈치 보지 않고 했고 또 소신 있게 발언했다"고 치켜세웠다.#


3.2.7. 전당대회 당대표 후보 출마[편집]


제5차 전국대의원대회에 당대표 후보로 출마하였다. 상대 당대표 후보는 이재명.

당내 비이재명 세력이 약해진 상황 속에서 이재명 후보와 맞붙는 상황이 만들어져, 본의 아니게 박용진이 비이재명 세력의 대표주자로 여겨지게 되어 반이재명, 이낙연 지지층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12]

결국 이재명 후보와 55.5%p의 큰 차이로 낙선하여, 당대표 후보 등록 이전부터 대세론으로 지배적이었던 이재명 후보와의 격차를 유의미하게 좁히지 못했다. 대선 경선에 이어 당대표 후보로 인지도를 올린 것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당대표후보로 2위를 기록하였다.


3.3. 2023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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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L이 주류인 한총련에서 지구총련 의장을 PD계열이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사례.[2] 87년 민주화 뒤에도 노조 파업이 명목상의 합법화인 지라, 노조 탄압은 계속됐으며, 김대중 정부 들어서야 노조 파업이 사실상 합법화가 됐다.[3] 창당발기인 336명 중 한 사람이었다.[4] 21대 총선에서 서울의 49개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들 중 강남구 병유경준 미래통합당 후보(65.38%) 다음으로 높은 득표율이다.[5] 1주에 대해 선임되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서 100주를 가진 주주가 있다면, 기존에는 이사 후보로 A, B, C 3명이 출마했을 때 각각의 후보에 대해 찬성/반대 1표를 던질 수 있었는데,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나머지 후보에게 표를 안 주고 한 후보에게 300표(100주 × 3명)를 몰아줄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소액주주가 자신이 원하는 후보에게 집중적으로 표를 줄 수 있게 된다.[6] 대표소송은 이사 등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주주가 회사를 대표하여 행하는 소송으로, 현행 상법상 회사 주식의 100분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만 소를 제기할 수 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7] 참고로 이 상법 개정안은 2016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었던 김종인 현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이 대표발의했던 법안이다. #[8] 부동산 공급 확대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학자이다.[9] 주로 비 민주당 지지층과 이낙연 전 총리 지지층이 박용진 의원에게 호감을 가지고, 이낙연 전 총리 지지자들을 제외한 민주당 지지층은 이재명 후보를 과하게 공격한다고 박용진 의원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10] 참고로 보수성향은 아니지만 진보논객 진중권 역시 금태섭이 공천에서 떨어진 것에 친문성향 지지자들이 조국을 비판하는 금태섭을 일부러 다른 후보를 선택해서 떨어뜨린 게 아니냐는 의견을 표현한 적도 있었다.[11] 박 의원은 정의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 출신이다.[12] 박용진 자체는 반이재명 성향보다는 소장파인 비이재명 성향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