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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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브리그[편집]
1.1. 코칭스태프 이동[편집]
류영수 2군 감독이 삼성과의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한 정동진을 따라 태평양으로 팀을 옮겼다. 대신 박용진 코치가 2군 감독을 맡았다.
1990 시즌 후 계약이 끝났던 마티 코치를 다시 데려왔고, 타격코치로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있던 도이 마사히로를 영입했다.
1.2. 선수 이동[편집]
1991년 시즌 후 윤석환이 은퇴했고 이듬해 1992년 1월 OB 베어스 투수코치로 영입됐다. 나광남, 이문한, 최홍석, 홍성연 등도 방출돼 은퇴했다. 이문한은 이후 삼성 스카우트진에 합류해 스카우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한편 강종필은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1.3. 신인 지명[편집]
- 포지션은 지명 당시 기준.
2. 전지훈련[편집]
1991년 말에는 박용진 2군 감독과 이태일, 김상태, 최현준이 긴테쓰 버팔로즈 추계 훈련에 참가했다. 미국 교육리그에는 이선희, 손상득 2군 코치와 김인철, 허삼영 등 2명의 선수를 LA 다저스 소속으로 파견했다. 이 당시 평가가 좋았던 김인철은 선발로서 좀 더 많은 기회를 받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군 선수들은 오랜만에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 다저타운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투수 인스트럭터 외에는 1985년 전지훈련 때의 그 인스트럭터들이 그대로 합류했다. 미국에서 귀국하던 길에 일본 노베오카에서도 전지훈련을 실시했으나, 선수들이 시차 적응에 실패하면서 훈련 계획도 망쳤다.
3. 정규 시즌[편집]
전년도 투수 운용의 핵심이었던 김성길은 결국 70이닝을 소화하는데 그쳤고 당시 대학 최고의 타자로 손꼽힌 양준혁을 거르면서 뽑을 정도로 기대가 컸던 김태한은 겨우 3승만 기록했다. 하지만 계투진에서 오봉옥이 13승 무패로 김성길을 대신했고 선발진에서는 이태일이 13승을 기록했다.
타선에는 김성래와 이종두가 여전히 부상을 떨쳐내지 못했고,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영입한 베테랑들은 죄다 노쇠화로 부진했다.
결국 67승 2무 57패로 4위를 차지했다.
3.1. 선수 이동[편집]
5월 7일에 최해명과 이현택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박종철, 김기완, 이창원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트레이드 대상자가 당시 모두 백업 아니면 2군 선수들이어서 화제가 되지도 않았고, 트레이드 이후로도 별 활약이 없어 회자되지 않는다.
4. 포스트시즌[편집]
4.1. 준플레이오프[편집]
자세한 내용은 KBO 준플레이오프/199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총평[편집]
김성근 감독은 부임 후 자신이 영입한 베테랑들을 중용해, 기존의 대구·경북 출신 선수들과 마찰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김성근 감독은 팀의 주장이자 주전 3루수이기도 한 김용국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적하면서 그를 엔트리에서 아예 빼버렸고, 김용국이 이에 반발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결국 롯데를 상대로 2경기 모두 영봉패를 당했다.
5. 선수별 개인 성적[편집]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 투수는 이닝이 많은 순서대로, 타자들은 타수가 많은 순서대로.
- 시즌 중 이적한 선수들은 당해 삼성 소속 성적만 기록.
5.1. 투수[편집]
- 우완
- 좌완
5.2. 타자[편집]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투수
6. 수상 및 기록[편집]
- 오봉옥 : 승률 1위(1.000(13승 무패))
7. 기타[편집]
삼성 라이온즈 팬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 장진은 1992년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팀의 성적 부진에 항의하기 위해 야구단 버스 위에 올라갔다고 고백했다.[1]
1991, 1992년은 김성근에 대한 반감으로 평균 입장객이 대폭 감소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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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근은 대구구장에서 꼴보기 싫은 놈으로 선동열과 투 탑을 달리며 김성근과 선동열을 모두 겪어본 세대는 심지어 지금도 김성근을 다시 삼성 감독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선동열을 감독으로 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도 선동열 때는 우승이라도 했으니까[2] 대구구장 평균 입장객은 1989년 6,582명. 1990년 7,277명. 1993년 8,557명이었고 심지어 556을 찍던 1994년~1996년에도 8,230명 9,904명 7,534명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재임기인 1991, 1992년 대구구장 평균 입장객은 각각 5,680명과 5,011명으로 KBO 리그가 전체적으로 관람객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삼성만이 특별한 외부 이유 없이 단지 김성근 하는 짓(..)을 보기 싫어서 평관 2000명 가량이 야구장 가는 것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