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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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 추존 황제
시조 무열황제 | 始祖 武烈皇帝


파일:vqGt6sW.jpg

출생
155년[* 손견은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오서》에서는 손견이 192년 사망한 것으로 (즉, 156년생으로) 나오나,《한기》및《오력》에서 손견은 191년 사망하였다는 기록과《오록》에서 손책이 1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는 기록을 종합하여 배송지는 주석으로 손견이 191년 사망한 것이(즉, 155년생이) 맞을 것이라 하였다. ]
후한 양주 오군 부춘현
(現 저장성 항저우시 푸양구)
사망
191년 (향년 36세)
후한 형주 양양
(現 후베이성 샹양시)
능묘
고릉(高陵)[1]
재위기간
후한의 오정후(烏程侯)
187년 ~ 1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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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부춘 손씨

견(堅)
부왕
효의왕
형제자매
3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무열황후
자녀
5남 3녀

문대(文臺)
작호
오정후(烏程侯)
묘호
시조(始祖)
시호
무열황제(武烈皇帝)


1. 개요
2. 정사
2.1. 탄생 설화
2.2. 수적 퇴치
2.3. 허창의 난
2.5. 변장·한수의 난
2.6. 구성의 난
2.7. 왕예를 죽이다
2.8. 장자를 죽이다
2.10. 낙양 입성
2.12. 주씨 형제가 예주를 치다
2.13. 죽음
3. 연의
4. 평가
4.1. 통솔력
4.2. 성격
4.3. 무력
4.4. 지력
4.5. 정치력
4.6. 충의
5. 기타
6. 가족 관계
7. 대중매체에서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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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修陵懷舊蹟(수릉회구적): 수릉에서 옛 자취 회고해보니,

匿璽啓雄心(닉새계웅심): 옥새 숨겨 영웅되려는 마음 먹었구나.

遂達江東業(수달강동업): 강동의 패업(霸業)을 달성했던 일,

臨風感不禁(임풍감불금): 바람 맞으며 생각하니 감회를 금할 길 없네.

후한 말의 군벌이자 손책, 손권, 손부인의 아버지로 는 문대(文臺).

손종의 차남 혹은 손자이며 아래에 동생 손정이 있다. 형 손강은 일찍이 죽었고, 형의 아들들인 손분손보는 손견이 거병하자 그를 따랐다.

보통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자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진수가 《삼국지》에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추측성 언급을 했는데, 웬만큼 선조가 불확실하지 않으면 이런 표현은 안 쓰기 때문. 조조조참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비슷한 뉘앙스의 추측성 언급으로 되어 있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손자의 후손은 자칭이고, 본디 손견의 가문은 후한 말 오군 부춘현에 근거를 둔 중소관리로 한미한 신흥 호족 가문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2. 정사[편집]


삼국지 연의의 영향으로 인해 그가 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옥새를 얻어 야심을 품어 천하를 제패하려는 위풍당당한 군벌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손견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고평가는 어폐가 있다. 우선 그의 행적은 위풍당당한 독립 군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손견은 커리어 초기인 황건적의 난에선 주준 휘하로 종군했고 서량에서의 반란을 진압할 땐 장온 휘하로 참전했다. 그리고 본인의 커리어 최정점인 반동탁 연합군에서도 철저히 원술 휘하에 있었으며, 이는 손견이 남양을 원술에게 양도하고 원술이 손견의 벼슬을 올려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그 시점 최강의 군세를 갖춘 동탁군을 물리치고 낙양을 탈환한 것은 분명 손견이 맞는데 어느새 그 공적이 원술에게로 고스란히 귀속되는 것도 그렇고... 결론적으로 최후[2]까지도 원술의 충실한 셔틀이라는 혐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게 손견의 행적이다. 즉 진짜 군벌로서 강동에 손오의 기반을 잡은 것은 손견이 아니라 그의 아들 손책이다.

다만 명문가 출신으로 오랫동안 축적한 부와 권력, 명성을 계승해 단숨에 군벌화 할 수 있었던 조조, 원소, 원술에 비해 손견이 가진 건 상대적으로 협소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원소 같은 경우는 명문가의 천출이기에 집안 덕 본 것은 별로 없다고 볼 수 있고, 커리어 초기 순식간에 상당한 군세의 사병을 모을 수 있었던 손견의 행보를 보면 집안 자체는 꽤 잘 살았던 듯 싶지만 잘해봐야 지방의 신흥 귀족 가문 정도일 것이기에[3] 명성과 권력이란 측면에선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개인적인 능력만으론 원술에게 전혀 꿀릴 게 없고, 실제로 그 시점 최고 권력자인 동탁조차 개무시했을 만큼 거칠게 없던 손견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최고 명문가의 적자인 원술에게 저자세로 일관했던 걸 보면 이 부분에서 상당한 자격지심이 있던 걸로 보인다.[4]

조조의 경우도 황건적 진압 당시에는 황보숭 휘하의 장수였으며 그 이후엔 하진 밑에 있있고 동탁의 집권 이후에는 원소의 영향력하에 있던 군소 군벌이었다. 유비 같은 케이스도 공손찬이나 도겸 등 여러 제후와 연합하거나 사실상 명령 받는 입장에 놓여있던 순간에도 독립 군벌로 취급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손견도 나름대로 독립적인 세력을 가진 객장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손견이 전사한 후 그의 부하들이 원술에게 그대로 흡수되지 않고 손견의 아들인 손책과 손권 밑에서 싸워 나갔던 걸 보면 손견은 원술의 직계 부하라기보단 어디까지나 원술을 맹주로 모시는 연합 세력의 일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5]


2.1. 탄생 설화[편집]


유명한 《삼국지》 인물 가운데 '출생 설화가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오서》(吳書)엔 손견의 출생 설화가 적혀 있다. 《오서》의 출생 설화는 손견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적혀있고[6] 《유명록》에 적힌 설화는 손종 문서로.


2.2. 수적 퇴치[편집]


본래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대담하고 화통한 기질로 인해 이름이 높았다.

17세 때 부친과 배를 타고 전당현에 이르렀는데, 강기슭에 호옥 등의 수적떼들이 약탈품을 나누고 있었다. 이에 놀란 손견의 부친은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배를 돌리려 했는데, 손견은 부친의 만류에도 기어이 칼을 잡고 언덕으로 올라가 장수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마냥 연기했다. 이를 본 수적들은 관군이 체포하러 오는 것으로 알고는 황급히 달아났는데, 손견은 이를 뒤쫓아가 기어이 수적 한 명의 머리를 베고 돌아와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이름이 알려져 관리가 되었다.


2.3. 허창의 난[편집]


이후 회계군에서 허창과 그 아들 허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1천 명의 군사를 모아[7] 양주의 관군과 합류해 공을 세웠다. 이때가 172년이었는데 손견이 156년생이이라면 17세, 155년생이라면 18세의 나이가 된다. 당시에는 16세만 넘어도 결혼도 하고 성인 취급 했으니 이상한 건 아니다. 혼란기에 열전이 상세한 상당수의 무인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커리어를 쌓는다.

당시 양주자사였던 장민이 손견의 공적을 장계에 적어 조정에 알리자 손견은 염독현의 승(丞)[8]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몇 해 뒤에 우이 승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다시 하비 승으로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평판이 좋았기에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2.4. 황건적의 난[편집]


손견이 하비 승으로 있을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주준을 우중랑장으로 삼아 반란 진압의 일익을 담당하게 했다. 주준은 손견을 군사마로 천거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주준은 양주 회계군 출신이며 이전부터 반란 진압으로 잔뼈가 굵은 양주의 실력파 관리로 손견의 선배격이 된다. 더구나 허창의 난 당시에는 회계군의 주부를 지내 손견의 활약상을 더욱 눈여겨 봤던 듯 하다. 주준이 고향이 손견과 가까운 것도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역사 삼국지의 저자인 최진열 교수는 소속된 군이 다르지만 주준이 고향인 상우현과 손견의 부춘현은 거리가 가까워서 주준이 손견을 동향으로 판단하고 천거했다고 추측했다.

이에 손견은 하비 일대에서 1천 명의 군사를 모아 주준과 합류했는데, 주준과 손견이 함께 힘을 합쳐 분투하니,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였다고 한다. 연이은 패배에 황건적은 완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했는데, 이때 손견은 황건적의 거센 저항에도 스스로 앞장서서 성벽을 기어오르며 병사들을 독려해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주준이 손견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는 손견을 별부사마로 임명했다.


2.5. 변장·한수의 난[편집]


184년 겨울, 변장, 한수가 서량 지역에서 난을 일으키고 185년에는 삼보까지 쳐들어왔다. 원래 황보숭이 그 진압을 맡았는데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잘렸다. 대신 조정은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반란 진압을 지휘하게 했고, 황보숭의 부관 중 하나였던 동탁은 파로장군으로 올렸다. 장온은 표를 올려 손견을 참군으로 삼아 종군하도록 했다.

이때 동탁은 장온의 소집령에 느릿하게 움직이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는데, 오히려 장온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이 무능한 지휘로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반란을 전혀 진압하지 못했으며, 명령에도 제대로 따르지 않은 데다, 윗사람에게도 무례하기 짝이 없어 그 죄가 매우 크다며 동탁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장온은 동탁과 강족과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동탁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장온은 하진 사후 조정을 장악한 동탁에게 죽는다.

장온과 손견은 변장과 한수를 상대로 고전만 거듭하였다. 11월 오히려 동탁이 반군을 격퇴하였다. 장온은 탕구장군 주신에게 추격을 지시했다. 동탁은 장온에게 주신의 보급로를 지켜야 한다고 진언했고, 손견은 주신에게 한수 등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장온과 주신은 그 진언들을 모두 무시했고, 결국 한수 등이 주신의 병참선을 끊는 바람에 주신과 손견이 크게 패퇴하였다.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것은 동탁뿐이었다.


2.6. 구성의 난[편집]


구성이란 자가 1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장사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태수에 임명되어 진압을 맡았는데 불과 보름만에 구성을 깨뜨렸고, 자신의 관할 구역을 넘어 인근의 군인 영릉과 계양에서 구성에게 호응해 일어난 주조곽석 등의 무리까지 모조리 토벌해버렸다. 이는 엄연한 월권 행위였지만 조정은 손견의 공을 인정해 이를 사관에 기록하게 하고 오정후에 봉했다.


2.7. 왕예를 죽이다[편집]


영제가 붕어하고 동탁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휘두르자 각지에서 군사가 일어나 동탁을 치려 했다. 손견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임지인 장사를 버리고 북진했다. 형주를 지나는 동안 조인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여달라는 격문을 뿌렸다. 손견은 왕예가 평소 자신을 무식한 무관이라고 무시해서 왕예를 미워했었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왕예를 추궁하러 갔다.

왕예는 손견의 상관이었다. 주석에 따르면 왕예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거병했었는데 당시 왕예와 앙숙이었던 무릉태수 조인이 왕예에게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 해 왕예의 죄를 부풀린 글을 쓰고 손견에게 가서 광록대부 온의의 격문이라고 속였다. 이를 믿은 손견은 왕예를 습격했고, 왕예가 성루에 올라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냐." 고 묻자 손견은 "모르는 것이 죄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9] 궁벽해진 왕예는 결국엔 자살했는데, 문제는 왕예는 평소 손견이 무식하고 행동이 가볍다는 이유로 경시했다곤 하나 어찌됐든 손견의 상관이었다는 점이다.[10] 이는 하극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손견이 왕예 살해의 명분이라 믿고 있던 중앙 고관의 격문 또한 조인이 날조한 가짜였다.

더구나 왕예는 같은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이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왕예가 손견과 같은 반동탁 연합에 참가하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손견이 반동탁 연합의 협조를 받지 못하고 군세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임지인 장사에서 낙양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인 관계로 보급이 원할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거기다가 사실상 임지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손견은 자력으로 군세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2.8. 장자를 죽이다[편집]


결국 이것 때문인지 원술과 손을 잡게 되는데 원술은 손견을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계속 북상해 남양에 이르렀을 때 남양태수 장자가 길도 닦아놓지 않고 군량도 내놓지 않는 등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홀랑 남양을 원술에게 바쳤다. 원술은 이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손견을 예주자사와 파로장군으로 추천하였다.[11]

이때 원술은 후장군으로서 손견의 상관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상사와 동료 태수를 멋대로 죽이고, 원술의 휘하로 들어간 덕분에 손견은 남양군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떠니 못 얻을 게 없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남양에 대한 착취가 극심해졌다.


2.9. 양인 전투[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당당히 하나의 세력으로서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원술의 부장에 더 가까웠다. 손견은 신흥 가문 출신이었던 반면 원술은 후한 최고의 명문 원씨 가문의 적자였던 데다 원술 또한 개인적으로 군웅할거 이전부터 호걸로 이름이 높아 명성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 동탁으로 인하여, 낙양의 원씨 일족이 모조리 몰살당한 일로 엄청난 동정표를 받아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원술군의 뼈대 구축에 손견의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원술은 이미 사방 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이었다.[12] 손견은 이제서야 중랑장을 거쳐 잡호 장군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 승진을 하게 해준 게 바로 원술이다.

손견은 원술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북상하여 드디어 동탁군과 교전하게 된다. 손견은 초반에는 서영을 상대로 고전하여 불과 수십 기와 함께 도주하는 수모를 겪는데 손견은 항상 쓰던 붉은 두건을 조무에게 씌워서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손견은 다시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동탁이 보낸 호진여포를 양인에서 대파하고 도위 화웅을 효수했다. 이 전투가 바로 양인 전투다.

주: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혹자가 원술에게 이르길 "손견이 만약 낙읍(洛邑)을 얻게 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이리를 제거하려다 호랑이를 키운 격입니다"라 했다. 그래서 원술이 그를 의심했다.」고 한다.

양인성에서 노양까지는 100여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출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 했다.

주: <강표전>에 실린 손견의 말에 의하면

"큰 공훈이 승리에 달려 있는데 군량이 이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오기(吳起)가 서하(西河)에서 탄식하며 운 까닭이요, 악의(樂毅)가 수성(垂成)에서 한을 남긴 까닭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에 원술이 조심스러워하며 곧 군량을 조달해주었다. 손견이 둔영으로 돌아왔다.

정사 《오서》 <손파로토역전>


손견이 너무 잘 나가서 낙양까지 수복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리라 의심한 원술은 손견을 견제하기로 결정하고 군량의 보급을 중단했다. 사실상 이때 원술은 손견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까 강하게 의심하여 관계를 끊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에피소드는 흔히 원술의 옹졸함과 졸렬함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되지만 손견은 직속 상관 형주자사 왕예를 평소 자신을 무시했다는 개인적인 원한에, 남양태수 장자를 기분 나쁘게 굴었다는 이유만으로 골로 보낸 전적이 있기에 원술 입장에선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과 견제였다. 이에 손견은 밤새 말을 달려 원술을 대면하고 다른 마음이 없음을 확인시키고 겨우 재보급을 받았다.

손견의 군이 주둔하고 있던 양인에서 원술이 주둔하던 노양까지는 대략 100리 거리였는데 손견은 밤새도록 말을 달려 원술의 앞에 출두해 군의 전황과 자신의 전략에 대해 땅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고 위로는 국가의 역적을 제거하고 아래로는 공의 원수[13]를 갚기 위해 힘쓸 뿐이라며 한치의 사심 따위는 없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손견의 열변에 부끄러워진 원술은 즉시 군량을 보내며 손견을 주둔지로 돌아가게 했다.[14]


2.10. 낙양 입성[편집]


동탁은 북상해오는 손견의 용맹과 굳셈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그의 자식들을 태수와 자사로 천거해주겠다며 회유했지만, 손견은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온갖 모욕과 함께 거절한 뒤 계속 진군해 낙양에서 90리 떨어진 곳에서 동탁군과 대치한다. 동탁은 친히 나와 여러 능을 사이에 두고 손견과 싸웠는데, 패하여 달아났고 낙양 서쪽의 민지현에 주둔했다. 크게 이긴 손견은 여세를 이용해 계속 진군했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를 패주시키고 낙양을 수복한다.

동탁은 손견을 자신만큼 뛰어난 장수라고 평하였다.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 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 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0,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0,000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 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정사 《오서》 <손견전>


한마디로 동탁이나 손견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변장과 한수를 토벌할 수 있었음에도 장온은 동탁의 진언을, 주신은 손견의 진언을 무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을 초토화시켜놓았기 때문에 낙양성 안팎엔 연기나 불빛이 전혀 없었다. 이를 본 손견은 애통해하며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낸 후 곧 노양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손견이 옥새를 발견하고 원술에게 바친다.[15]


2.11. 군웅할거 도래[편집]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장안의 조정을 동탁의 괴뢰 정권으로 규정했고, 동탁이 보낸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칙사를 살해하는 등 조정의 권위를 강하게 부정하고, 명망 높은 황족인 유우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원소의 주장은 상당히 극단적인 논리였지만, 당시 동탁 정권과 헌제의 정통성이 워낙에 약했던 데다, 원소의 기세가 엄청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계획은 유우 본인의 완강한 거절로 인해 무산되었는데, 이는 곧 기존의 권위를 부정했고, 이를 따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에도 실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각지의 관리들은 제각기 다투며 토지를 겸병하고 사병을 늘리는 등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며 군벌화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관리들이 군벌화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일단 관리들이 중심으로 받들던 황제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렇게 반동탁 연합군은 흐지부지되고 군벌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무렵 원소의 독주를 견제하고 있었던 원술은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한편 서쪽으로 진군하여 낙양을 회복하고 또한 동탁을 처벌하여 황실을 구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소는 유우의 추대에 실패하고, 원술은 정말로 낙양을 수복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데 이른 것이니, 원술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2.12. 주씨 형제가 예주를 치다[편집]


원소 또한 원술의 상승세를 견제하여 회계 사람 주앙 혹은 주우를 예주자사로 삼으며, 예주를 공격해 탈취하도록 했고 주앙은 예주를 내습하여 양성 등의 주요 거점을 빼앗았다. 양성은 사예와 예주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가 주앙에게 넘어가면 예주와 형주 북부에 근거지를 둔 원술은 낙양과의 연결이 끊기게 된다.

주앙은 오와 회 지역의 유력자였는데, 그의 형인 단양 태수 주흔과 동생인 주우 또한 원소와 연계하며 원술과 대립했다. 이 주씨 형제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으나, 원술이 남양을 통치할 때 극도로 가혹하게 다스리며 마음대로 세금을 걷었다는 기록과 주흔이 원술의 잔학함을 싫어해 그와 대립했다는 기록으로 유추했을 때 원술의 군비 조달을 위한 지나친 수탈로 양주와 예주 일대의 경제가 붕괴된 것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중앙 정부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상태로 흘러가는 당시 분위기에 따라 대부분의 주와 군에서는 제각기 겸병하며 강해지는 데 힘쓰고 있었다. 손견은 주앙의 내습 소식을 듣고는 원소 등을 필두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제 역적들이 격파되려 하는데 제각기 행동을 이 같이 하니 내가 누구를 믿고 힘을 합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에 분발한 손견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어 주씨 형제와 여러 차례에 걸쳐 싸운 끝에 이들을 몰아냈다.
<공손찬전>만 보면 손견이 진 것 같은데 다른 기록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손견이 이겼다.

실제로도 주흔은 단양태수, 주앙은 구강태수로 있다가 원술이 수춘으로 튈 때 쫓겨났는데 단양이나 구강이나 예주가 아니라 양주이다. 어쨌든 원술은 남양에서 포악하게 굴어 백성들을 수탈하면서 마음대로 세금을 가둬서 주흔 등은 그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이 남양을 원술이 제멋대로 꿀꺽하게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가?


2.13. 죽음[편집]


이후로는 원술의 명령을 착실히 수행하였다. 손견은 이후 유표를 공략하라는 원술의 명령을 받았다. 손견은 유표를 공격했고 요격 나온 황조를 이기는 등 승승장구하며 유표의 거점 양양까지 포위했다.

그러나 현산으로 달아난 황조를 직접 쫓다가 황조가 사전에 준비해둔 매복에 걸려들어 복병들의 화살과 돌을 맞고 머리가 깨져 죽었다.《영웅기》에 따르면 산으로 유인한 여공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사후에는 손견의 조카인 손분이 손견의 잔당을 이끌고 다시 원술에게로 귀의했다.

그리고 손견이 이 전투로 전사한 후 손씨 가문은 형주의 유표와 철저한 원수지간이 됐고 자신의 아들인 손권이 형인 손책을 뒤를 이어 오나라 군주가 된 이후 형주를 얻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형주 공방전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사후에 오나라가 건국된 이후 손권은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로 추숭하였다. 묘호는 시조(始祖),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이다.


3. 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강동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정사에서는 없는 별명이다. 하지만 손견을 묘사할 때, 강동의 호랑이를 꼭 인용할 정도로 연의에서 유명해진 설정이다. 하지만 실제는 태수와 자사를 멋대로 죽이는 등 호랑이가 아니라 역적이자 살인귀이다.[16]

유비, 주준이 황건적의 완성을 공격하는 걸 협동하는 데서 첫 등장. 여기서 손견이 수적을 퇴치하고 허창의 난을 토벌했던 과거가 소개된다.

십상시는 손견을 장사태수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구성을 토벌하도록 시킨다. 손견은 50일도 지나지 않아 구성을 토벌해 강하 땅을 평정했고 그 공으로 오정후가 되었다. 또한 남양태수 장자를 쳐부숴 원술이 남양을 얻게 돕는다.

반동탁 연합에 참가하여 화웅과 싸우나 원술이 질투 때문에 군량을 보내지 않아 패배한다. 손견은 이를 원술에게 항의하고 원술은 부하 탓을 하며 넘어간다. 동탁군의 장수 이각이 손견과 혼약을 청하러 오나 손견은 이각을 쫓아낸다.

유비 삼형제가 호로관의 여포를 이기자 원소는 다시 손견에게 사수관을 공격하라고 한다. 화웅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사수관을 지키고 있었던 조잠은 버틸 수가 없어서 그 길로 손견의 진중으로 가 항복하고 손견을 사수관으로 안내했다. 연의에선 화웅은 일군을 이끌고 18로 제후군 전체를 도발하면서 무장들을 무찌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손견에게 죽은 호진의 많은 부하 중 하나인 도독 A일 뿐이다.

조잠의 항복으로 제후 중 가장 먼저 낙양에 들어서게 되는데 손견은 폐허가 된 궁궐을 손보고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능침,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냈다. 도중에 옥새를 손에 넣어 서둘러 장사성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손견군의 병사 하나가 이탈하여 밀고한 덕에 원소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원소는 유표에게 손견이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라고 지시한다.

이후 원술의 밀서를 받고 손견은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해서 유표의 양양성을 공격한다.[17] 손견군은 처음엔 승승장구하며 계속 이겼지만 혈기 넘치는 성미 때문에 적의 유인책에 걸려 바위와 화살에 깔려 사망한다. 이때 손견의 시신은 유표군이 접수했고 때마침 황조는 황개에게 생포당했는데 유표가 손책과 협상을 해서 손견의 시신과 황조를 교환한다. 본래 정사에서는 황조가 생포되지 않았고, 손견의 시신을 찾아온 것은 환계다.

삼국지평화를 비롯한 원대 삼국극에서는 화웅이나 여포가 나타났을 때, 배가 아프다면서 도망가는 비참한 개그 캐릭터 역할로 등장하는 등 이미지가 형편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것이다.

물론, 손견이 화웅, 호진, 여포, 동탁을 격퇴하는 전공 중에서 화웅, 여포를 이기는 공은 유비 삼형제에게 넘어가는 각색이 있다. 하지만, 손견이 동탁군의 진정한 명장 서영한테 패배한 부분은 삭제하고, 원술의 비열한 계략 때문에 화웅한테 한번 지는 것으로만 각색하여, 실질적인 전공 자체는 손견의 패배를 변명해줌으로써, 더욱 빈틈이 없고 순수한 무인처럼 묘사하려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손견이 저지른 형주 침공, 태수 살해, 일부 동맹에 대한 뒤통수 행위 등은 연의에서 모두 각색되었다. 손견은 죄가 없으며, 전부 이를 명령하는 원술이 나쁜 놈인 것으로만 묘사하며, 손견은 그러한 원술과 은근히 대립하며 따르고 싶지 않았던 본심을 숨기고 있었던 비극적인 인물로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즉, 삼국지 연의의 손견은 '유교적인 충렬지사' 라는 캐릭터로서의 각색의 수혜가 상당수 주어져 있다.[18]

특히, 연의에선 손견의 간사하고 잔인한 모습을 대부분 삭제했으며, 손견의 각종 실패는 오히려 손견의 영웅적인 성품에 의한 손해를 감수하는 장면으로 포장해버릴 정도로 수혜를 받았는데, 손견의 승리를 줄인 대신에 패배까지 줄여버렸다는 점까지 보면, 여러모로 연의의 피해자인지 애매하다. 무엇보다, 연의에서 강조하는 '강동의 호랑이'라는 별명은 손견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어, 연의를 까는 사람들도 이 별명은 꼭 갖다 쓸 정도로 대단히 좋은 묘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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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우물가에서 옥새를 찾아낸 손견.

하지만 각색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손견의 충렬지사 같은 모습이 아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손견의 본심이야 어쨌건 반동탁연합군 중에서 가장 한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펄펄 뛰는 인물이었고 또 낙양을 수복하며 압도적인 전공으로 보여줬다. 각색이란 것이 손견의 비열한 계책을 아예 삭제한 것이거나 조금 더 멋있게 만든 것이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옥새를 손에 넣은 다음 원소유표가 그를 추궁하자 "내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칼과 화살을 맞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맹세한다. 일종의 복선인 셈. 연의에선 손견이 사용하는 고정도라는 검과 화종마라는 명마가 등장한다. 고정도는 삼국지 시리즈 등의 매체에서 꼭 나올 만큼 유명한 편이지만 화종마는 많이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4. 평가[편집]



4.1. 통솔력[편집]


황건적의 난 때부터 후한 말의 여러 반란에서 활약했다. 특히, 반동탁 연합에서 다른 제후들 공을 다 합쳐도 손견의 활약을 못 따라 간다. 여러 제후들은 동탁군에게 패배했으며 원소는 한복의 군량 보급 중단으로 무력화되었고 조조도 서영에게 패배했다. 손견 역시 초전에 서영에게 패배했지만, 병력을 수습해 호진, 여포를 격파하고 동탁도 물리쳤으며 낙양을 일시 수복했다. 사실상 손견 혼자서 동탁과 싸웠다고 봐도 될 정도. 동탁의 서량군은 서량에서 백전 이상을 치렀다고 회자될 만큼 강군이었고 실제로 대부분의 제후들이 동탁군에게 패배했다. 더구나 하진의 중앙군까지 흡수했으니 규모 면에서도 적지 않았을텐데, 손견이 그 군세를 연달아 격파하자 동탁이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할 정도였다.

일단 종합하면 산양공재기에서 손견을 이각•곽사만도 못하다고 평가하는 부하의 말에 동탁이 병사들은 오합지졸이지만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전을 겪은 양주 병주군에 중앙군을 합친 동탁군을 상대로 내륙에서 보기합동전장을 겪지 않은 병사들을 가지고 본인의 지휘력과 경험으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조도 서영한테 패배하는등 경험도 없고 병력도 훈련이 안되어있어서 고생을 하는데 손견은 초반에 패배를 하나 결국 양인전투에서 도독 화웅의 목을 거두며 승리하고 그 뒤 이어지는 동탁과의 야전에서도 동탁을 털어서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가게 하고 여포가 지키는 낙양도 공격하여 여포가 도망가게 만들었다. 기병전력을 확보하지도 못하고 최전방에서 전투경험을 가진 유주, 병주, 양주가 아닌 지역에서 긁어모은 병력을 가진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걸 극복하고 야전에서 싸움에서 이기며 낙양을 탈환했다는 점에서 다른 삼국지 무장들과는 다르게 질에서 밀리고 양적으로도 우월하지 않은데 공격으로 이겼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남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손견은 군사활동도 정치의 연장이라는 점에서는 약점이 두드러지는데, 손견의 대에서는 결국 원술의 명분을 이용하여 잘 사는 다른 지방을 약탈하고 도살하여 군사력을 유지하는 깡패 집단에서 탈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19] 연의에서는 원술만이 나쁜 놈처럼 각색되었지만, 실제로는 손견과 원술은 죽을 때까지 한통속이었고 다른 제후들을 뒤통수 치고 약탈하면서 이득을 나누는 철저한 공생관계였다. 또, 보통 손견을 원술보다 더 유능한 인물로 보면서 왜 손견이 원술 밑에 있었는지 의문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손견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 원술만도 못했다. 그밖에도 순수한 개인의 능력만 따지면, 비슷한 변방의 깡패에서 제왕에 도달하는데 성공한 동탁, 공손찬의 재능과는 엎치락 뒤치락 하는 부분이 많은 편이다.[20]


4.2. 성격[편집]


정사에서는 교활하거나 잔인한 모습도 있다. 동탁의 살해를 그의 앞자리에서 진언하고, 당대의 태수치곤 평범한 정도의 관리였던 왕예를 사지로 몰아넣은데다가,[21] 마음에 안 드는 장자를 베어죽이고 목을 군문에 효수하는 등, 즉석에서 상급 관리들과 척을 지고 해치는 일이 두 차례 있었다. 아내이자 손권의 모친인 무열황후의 친척 일가들조차 손견의 성격을 싫어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연의에서는 손견의 성격을 용맹하고 솔직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능력이 매우 부족했던 것과 더불어, 이런 경솔함으로 양양 전투에서 황조를 직접 추격하다가 죽음을 자초하는 등, 단점이 큰 성격이었다.

특히, 연의에선 공생관계였던 원술과 손견을 경쟁관계로 설정하여, 손견을 순수하고 비극적인 영웅으로서 각색했다. 하지만, 정사에서 볼 수 있는 실제 손견은 연의의 모티브가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득이 되는 세력 앞에서 굽힐 줄도 알았고, 때로는 교활하고 잔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교활하고 잔인하지 않은 무장은 사실상 없기도 하다. 삼국지 시대에도 유비 정도가 잔인하지 않았을 뿐 교활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문신들도 무슨 예형처럼 현실에 저항하다가 죽은 사람 아니면 거의 다 교활한 부분이 있다.

유교적인 학자들은 손견을 충렬지사의 본보기로 설정하는 와중에, 손견의 성품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그대로 적어놓았으면서도 개인 성품에 대한 역사적인 해설평은 피했다. 대표적으로 손견이 종종 쓰던 잔꾀는 순수한 용맹꾼이라 전투에선 안 쓰고 죽음,[22] 충렬지사인데 같은 반동탁 동맹제후의 뒤통수를 때린 건 평가 안 함[23] 같은 정사의 흐름과 인물평을 보면 손견의 인물평에 대해서는 순화한 흔적이 있다. 반대로 삼국지연의에선, 처음부터 손견의 단점으로 보일 만한 나쁜 성품을 삭제하여, 적어도 성품에 따른 사건진행의 앞뒤는 맞게 연출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평들이 아예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손견은 원래 어린 시절부터 결기가 있었고 상술했다시피 고대의 무장이 잔인하고 교활하지 않기도 어렵다. 어쨌거나 홀로 나서서 수적을 물리친 일은 의행이다. 또한 중딩이 간이 부어서 나댄 거지 수적들이 침착하게 관찰하고 대처했다면 혼자 있는 손견의 목은 그냥 달아났을 것이며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서 목 하나 베고 돌아온 것은 지혜라기보다는 순수한 용맹꾼, 깡패, 협객에 걸맞은 모습이다. 그리고 황건적이나 서량의 난리 등에 있어서도 공명심으로 용맹을 믿고 겁없이 나대는 모습이 뚜렷하다. 그리고 비단 황실에 대한 제사를 올린 것뿐만이 아니라 손견의 언행도 어쨌건 애국심이 엿보이는 부분이 나름대로 있다. 그리고 제사를 올린 것도 사실 상당히 비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술과 얽힌 것으로 손견을 뭐라고 하기에는 어쨌든 손견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원술이 딱히 반역도배도 아니었고 오히려 상당한 충신의 면모를 겉으로는 보여주고 있었다. 원소의 유우 추대도 물리친 것이 원술이니 이 시점에서도 깡패짓거리는 실컷했지만 소위 말하는 참람된 짓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 기존의 손견 묘사 역시 나름대로 깎아내고 보수한 부분은 많지만, 그렇다고 손견의 인물상이 막 나가는 시골 애국보수 깡패의 모습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은 없다. 왕예나 장자를 죽이고 날뛴 것은 문제가 크지만, 나라가 넘어가는 난세에 불타는 애국보수 깡패의 날뛰는 모습이라고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왕예나 장자를 죽이고 유표처럼 살살 눈치를 보다가 털푸덕 눌러앉았으면 손견 역시 다른 군벌들처럼 그저 교활한 군벌이겠지만 펄펄 뛰면서 낙양까지 진격한 것은 손견이 좀 다른 인물이긴 한 것이다. 물론 왕예나 장자는 애꿎게 죽었지만 대의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쨌건 손견이 동탁을 크게 물리쳤으니 원술과 손견이 최종성공해서 한실이 다시 정상가동됐으면 잘못한 일이긴 해도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24][25]


4.3. 무력[편집]


개인적인 무예에 관한 기록은 직접적인 것은 수적에게 덤벼들어 1명의 목을 벤 것 정도 이외에는 없다. 다만 용맹하다는 묘사는 여럿 있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 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정사 오서(吳書)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 - 손견전)

이와 같은 묘사인데 김경한 등은 이를 두고 손견이 무예도 천하 제일! 식으로 묘사했으나 이건 과장이 심한 확대 해석이다. 손견의 지휘 능력과 군사적 식견을 두려워했을뿐 개인적인 무예[26]를 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저 시점에서 손견은 동탁의 군대를 격파한 거의 유일한 군사집단이며 초전의 패배에도 오히려 반격해 동탁군의 장수를 죽인 상황이므로 그 군대의 기세를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다.

여포가 동탁 휘하였고 동탁도 힘이 대단했는데도 손견의 용맹을 두려워했으니 무예가 최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애초에 동탁이 전선에서 손견과 직접 칼을 휘둘러 맞섰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탁이 직접 손견과 칼싸움해서 이길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적도 없다 오히려 동탁이 손견을 칭찬한 것은 과거 보았던 군사적 식견이다. 그리고 여포를 이기고 동탁이 두려워했으니 무조건 삼국지 무예(지휘력도 아니고) 최강은 손견이라고 주장하기도 애매하다.[27] 병사를 지휘해 전투에서 이기는 지휘력은 확실히 당대 최상급이었지만 그게 손견이 직접 칼을 휘둘렀다는 증거는 아니다. 물론 용맹함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장서서 싸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다. 용맹하다는 것은 장수 개인이 호전적이었고 겁이 없었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방어적인 전술보다는 공세적인 전술을 선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전투에서 이겼으니 무예도 더 낫다는 식의 의견은 삼국지연의에서 장수들이 앞장서서 칼싸움하는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연의와 달리 실제 이 당시 중국의 전쟁은 관우안량 참살이나 방덕의 곽원 참살 등 기록에도 남을만한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병사들의 훈련도와 경험, 지휘관의 전략, 전술로 판가름났다. 손견이 몇몇 예외적인 경우였다는 증거는 없다.[28] 게다가 삼국지에는 만인지적이라고 불린 관우, 장비, 조아라고 평가 받은 황충, 조운, 비장이라고 불리우는 여포, 백마장수라 불리웠던 방덕 등 개인 무력에 대한 별명이 부여된 무장들이 제법 있지만 손견에게는 그런 칭호는 없다.[29]

하지만 완성의 황건 토벌 당시 앞장서 성벽을 올랐다는 묘사가 있는 걸 보아 최강은 아니더라도 장군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무예를 익히기는 했던 모양이다. 초월적인 무예나 용력의 근거로는 빈약하나 선두에서 먼저 성벽을 오르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무예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30]

그리고 10대 시절부터 수적을 퇴치할 때 혼자서 돌격하는 모습을 볼 때 최소한 깡다구, 담력은 일반인 수준을 상당히 넘어서 있다. 또한 10대를 비롯한 초창기 시절 1000여명의 무리를 모아서 싸우러 다녔다고 하는데 이 숫자는 개인의 용력을 배제하고 지휘력으로만 위력을 발휘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숫자다. 이런 점이나 성벽을 먼저 올라간 모습, 직접 용맹함이 언급된 것으로 볼 때 상당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반동탁연합군 선봉으로 나서 화웅을 벤 묘사가 있는데, 무예가 뛰어나지 않다면 애초에 선봉으로 내세웠을리도 없다. 그런 화웅을 벴다면 무예 자체도 상당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어찌 보면 삼국지연의에서 무력이 너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사에서도 연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무시무시한 여포조차도 손견과 싸우기를 꺼렸다고 했을 정도면 너도 나도 관우, 장비급으로 나오는 삼국지연의에서는 오히려 무력이 못하게 연출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4.4. 지력[편집]


삼국지 연의와 후대의 매체에서는, 손견이 춘추전국 시대 초일류 병법가 손자의 후예이므로 손견이 학식을 겸비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손견은 일단 손자의 후예가 맞는지 조차 불확실한 인물이다. 실제로는 당시의 손견 가문은 성씨만 유사한 신흥세력으로 보는 해석이 많은 편이다. 또한, 학식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로 두각을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왕예는 평소에 손견을 무식한 무부라고 무시한 기록이 있다.[31]

손견이 지략을 쓴 기록이 두개 있긴 하다. 17세 때 수적을 퇴치할 때 관병처럼 보이게 했던 것과, 손견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장자를 죽일 때 손견이 병든 척을 하고 친한 사람을 장자에게 보내 병 때문에 군사를 장자에게 맡기겠다고 속여 장자를 군영으로 오게 해서는 장자를 죽였다. 다만, 후자는 지략이긴 한데 당대 수준에선 멀쩡할 뿐더러 자신보다 약한 군사력을 지닌 태수를 굳이 거짓말로 불러내서 죽인 것으로 평가는 미묘하다.


4.5. 정치력[편집]


손견은 공손찬처럼 문관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이런 류의 인물이 그렇듯이 부하들의 평판은 좋았다. 후한 시기 현령을 보좌하는 공식적인 직위는 승(丞)과 위(尉) 두 직책이 있었다. 이 중 '승'은 문관직으로 문서와 행정 담당을 하는 직책이었고 '위'는 현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군권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승을 역임하면서 칭송을 받고 따르는 자가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행정가로서 실무 능력도 있었던 듯하다. 왕예에게 무관이라 언행이 가볍다고 까였던 손견이지만, 실무적인 차원에선 장애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손견의 정치적인 실속은 최악이며 정사에선 무식하다는 평가도 있었기 때문에, 손견의 행정력이 다른 변방 군웅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부족하다. 정사에선 동탁공손찬도 군사행정 만큼은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모습과 비교된다. 오히려 조조보다 앞서 협천자를 하며 국가를 장악하는 동탁, 축성과 세력 유지의 재능을 지녔던 공손찬이랑 비하면, 손견은 씀씀이가 컸던 원술의 지원을 받고 다른 지방을 통째로 약탈했는데도 정사 기준으로 종사분야가 유사한 변경깡패 군웅들에 비교하면 정치와 행정면에서는 그다지 재능이 부각되는 기록은 부족한 편이다.


4.6. 충의[편집]


삼국 시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동진 - 유송 시대의 사람인 배송지는 손견을 "의흥군 중에 가장 충렬이 어울리는 자"라고 그의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사며 그를 평가했다. 성격은 좀 거칠어도 한 황실에 대해서 일관된 우국충정을 보였기에 배송지가 당대의 여러 인물 중에서도 손견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칭호를 준 것이라고 한다. 우선 손견 자신은 한실에 반대한 것은 없었다. 그가 후에 오의 무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어디까지나 아들 손권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추숭받은 것이지 그와는 무관한 일이다. 무엇보다 반동탁 연합이라는 기치하에 모인 군웅들이 동탁군에게 패하거나 서로 간만 보다 각자의 이해 관계의 충돌에 따른 내분 등으로 지리멸렬할 때 혼자서 동탁군과 싸워 낙양을 수복했으며, 초토화된 역대 제왕들의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내며 한실의 몰락을 비통해 했다. 또 원소를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에 강렬한 분노를 표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배송지는 손견의 충의를 높게 평가했고 후손들의 평가는 그렇게 좋게만 써주지 않았다.

하지만, 손견의 충의는 배송지처럼 낭만적인 것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손견은 반동탁연합군 비판의 핵심인 학살과 약탈에 있어 같은 동맹제후를 뒤통수 치고 도살하는데 앞장섰으며, 죽을 때까지도 원술과 철저한 공생관계였고,[32] 처음부터 연합군 사이의 학살이나 태수 살해의 시작도 손견이 열어제끼기도 했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남송 시대의 학자인 홍매는 <<용재속필(容斋随笔)>>에서 "왕예와 장자를 죽이는 것이 왕에게 충성하는 것인가? 역심을 품는 원술 밑에서 왕실을 생각하는 유표를 공격했는데 이는 어떤가?"라는 골자로 손견의 충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신의 직속 상관인 형주자사 왕예를 평소에 자신을 업신여겼다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살해하고, 남양 태수 장자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처참히 살해했으며, 왕예의 후임으로 부임한 정식 형주자사 유표도 임의로 쳐들어갔는데, 이는 말 그대로 후한 체제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애초에 손견도 반동탁연합에서 가장 막장스러운 사건들의 첫 포문을 열어제낀 군웅으로 손꼽히며, 왕예, 장자, 유표는 아예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이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 손견은 반동탁연합에서도 따로 놀기 시작하는 원술과는 철저한 공생관계였다.

다만 당시의 원술은 다른 막장스러운 군벌들과 특별히 다를 바는 없었으며, 한실을 정상화 하겠다는 명분은 있었던 시기다. 손견의 충의에 관한 문제는 과연 당시의 손견이 원술의 딴마음까지 알고 동조했냐는 것이다. 이것은 손견이 죽은 시기가 미묘하기 때문에 진짜로 알 수 없는 문제다. 원술과 연합한 후 유표에게 처들어간 것도 사실 동탁이 한실을 장악하기 시작한 이후이기 때문에 이것이 손견에게 충의의 마음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라기도 미묘하다. 어차피 손견과 싸웠던 동탁군도 다 정식 한실 관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거기다 원술이 황족인 유총을 암살한 일이나 칭제를 하기 시작한 것 등도 전부다 손견 사후에나 일어난 일이고 그전까지는 원술이 그정도로 선을 넘지는 않았고 칭제 또한 본인이 더이상 충신 코스프레도 못하게되고 점점 궁지에 몰리자 본인의 상황을 뒤집기 위한 최후의 도박쯤 되는지라 손견과 어울려 다닐 당시에는 칭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손견도 원술이 딴마음을 먹던것 까지는 몰랐을 가능성도 크다.

반동탁연합군 비판의 핵심인 학살과 약탈, 동맹제후 뒤통수와 살인 등에 있어서 손견이 할 말 없는 입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차피 한실수복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커다란 명분 앞에서 작은 것들아 사라져라 식의 고대인 애국보수 깡패짓이냐, 원술과 한통속으로 그당시부터 딴맘 품은 교활한 놈이었느냐 하는 것은 알기 어려운 문제다. 원술과 한통속으로 보자면 원술과 함께 벌인 약탈과 뒤통수가 있지만, ㅉㅉ 유학자 놈들 제사 한 번 치러줬다고 띄워주네 하기에는 앞장서서 날뛰면서 낙양까지 수복한 것도 손견이기도 하다. 물론 낙양수복 역시 정치적으로 앞서나가기 위해서라고 하면 그것 역시 그럴 듯한 얘기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손견이 추하게 조무한테 빨간 두건 뒤집어 씌우면서 도망쳤다가도 바로 돌아와서 동탁군을 대파한 것처럼 선봉으로 몸바쳐 목숨바쳐 싸운 것도 확실하다. 비판자들의 비판도 일리가 있지만 기존 학자들의 평가 역시 근거가 뚜렷하다.


5. 기타[편집]


  • 동탁은 두 원씨(원소, 원술)와 손견 그리고 유표만 죽이면 천하가 평정되어 두려울 게 없다고 했다. 손견은 군웅할거 이전부터 활약하다가 군웅할거 극초반에 사망하지만 글자 그대로 '폭풍' 같은 행보를 보였다. 보통 원술과 별달리 연관없는 독립적인 군벌로 묘사되거나 혹은 원술을 이용한 뒤 자립하여 패업을 꿈꿨던 것으로 묘사되는 창작물이 많지만 정사상의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묘사는 그 아들 손책에게 어울린다. 손견은 원술과의 철저한 정치-군사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 다만, 군웅할거 시대의 손견이 원술 손아귀에서 놀아나다 죽은 피해자이고 실제로는 충렬지사라는 대중적인 이미지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두 사람은 원술의 정치력, 손견의 군사력이 합쳐진 공생관계로서, 정사에서는 둘이 다른 동맹 군벌을 약탈하고 뒤통수를 치면서 이득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손견이 좀 더 오래 살아 있었다면 원술이 조조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계속 패퇴해서 알짜배기인 남양, 구강(수춘), 진국 같은 요지를 연이어 빼앗기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원술이 초반에 헌제의 정통성을 옹위한 이유는, 그냥 원소가 잘 나가는 것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적인 동탁에 의해 강제로 추대된 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로 인해 중앙 정부가 극도로 약해진 틈을 타 자기가 스스로써 황제의 자리에 오를 욕심을 가졌는데, 유우 같이 무게감 있는 인물이 황제로 즉위하면 곧 중앙 정부와 사회의 질서가 회복될까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원소가 주앙에게 명을 내려 손견을 치게 하면서 역적 동탁의 주살을 방해했다는 건 유우 추대 시도와 더불어 군웅할거의 원술과 공손찬 등 초반 적대 세력들이 원소를 비난하는 주된 명분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원술이 칭제하면서 흑역사화가 됐는지 이후에 조조가 원소를 비난할 때는, 유우 추대 쪽으로 기틀을 잡고, 원술과 엮어서 원씨 전체를 깐다.

  • 본인과 무열황후의 능묘라고 사서에 명기된 고릉(高陵)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장쑤성 단양시에 위치한다고 한다.

  • 고금주의 여복편에 따르면 '손문대는 푸른 옥으로 만든 말 안장을 얻었는데, 그 광채가 큰 길을 비추었다.'라고 한다.

  • 현대 인물로 쑨젠(孙坚)[33]이라는 중국의 영화배우가 있는데, 이름의 한자가 완전히 같다.

  • 손견의 첫 무용담인 수적퇴치 이야기에서 손견의 아버지가 표국의 수장일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손견이 17살의 나이에 칼을 차고 자신의 연기에 호응 할 만한 상당수의 인원과 배를 탄 점을 보면 단순히 여행중이 아니라 정기적인 운송업무를 수행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돈도 받지 않았는데 굳이 수적과 싸울 필요는 없었으나 손견은 의협심에 수적퇴치에 뛰어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원술 집안과도 손가 표국의 오랜 계약관계로 안면을 트게 되었고 때문에 쉽게 대를 이어 원술휘하의 군사집단 지휘관이 된것이나 그러면서도 특이하게 독립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점도 쉽게 이해가 된다.

  • 이 견해대로라면 손견의 가문은 조상 대대로 원가라는 대기업의 하청거래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증거나 뒷받침은 전혀 없다.

  • 조조유비와는 다르게 후한의 황실 쪽 인물들과 연이 없는 편이다. 조조는 채옹과 친하게 지냈고 사도였던 왕윤의 의뢰를 받고 동탁 암살에 앞장서기 했었고, 유비는 애초에 한나라 황족과 혈연인데다가 노식을 스승으로 두면서 황실 쪽 인물들과 인연이 깊지만 손견은 그런 것이 없다.


6. 가족 관계[편집]


  • 손종 - 아버지
  • 손강 - 형
  • 손정 - 남동생
  • 손씨 - 여동생. 서곤의 어머니. 장영을 격파하는데 지혜로써 공헌했다.
  • 손책 - 장남
  • 손권 - 차남
  • 손익 - 삼남
  • 손광 - 사남
  • 손랑 - 서자
  • 손부인 - 딸
  • 손씨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제갈근전에서 손권의 매형인 홍자(弘咨)가 제갈근을 천거했다.
  • 손씨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반준전에 손권의 누나가 언급된다. 손권의 누나는 진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가서 딸 진씨(陳氏)를 낳았다. 딸 진씨는 반저의 동생 반비에게 시집갔다.
  • 무열황후 오씨 - 본처
  • 정씨(丁氏) - 첩실. 손랑의 친모. 성씨조차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손권이 손랑의 가족을 정씨(丁氏)로 바꿔버렸기 때문에 손랑의 친모의 성씨가 정씨로 추정. 삼국지연의에서는 오국태로 가공된다.
  • 오경 - 처남. 무열황후의 동생.


7.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손견/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문서[편집]




9. 둘러보기[편집]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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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군 곡야현.[2] 연의에선 손견 본인이 주체적으로 형주의 유표를 공격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상에선 원술의 명령을 받고 출전했다 전사한다.[3] 출신지로 따지면 사실 한나라 시절에서는 손권이 어엿한 중원인이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다.[4] 동탁이야 손견 본인과 마찬가지로 시골 깡촌에서 온 촌놈이니 충분히 대등하게 소리칠 만하지만 원술은 사세삼공으로 대표되는 한나라 최고 명문가의 적통 후계자니 천둥벌거숭이인 손견이 감히 넘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손견이 그 손책과 손권의 아버지란 점, 그리고 연의에서 저들과 대등한 입장처럼 묘사되어 그렇지 원술 밑에서 일하는게 저자세라거나 자격지심 때문이라고 볼 순 없다. 손견은 딱히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정치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 그냥 용맹한 무장이었을 뿐이다. 당대 능력있는 인물들이 전부 군벌이 된 것도 아니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세력이 없어 신하로 평생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만약에 유비가 웅대한 야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서주를 빼았겼을 때 좌장군이란 높은 벼슬을 받게해준 조조 밑에서 종군하는 훌륭한 무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즉 출신도 딱히 뛰어나진 못한 뛰어난 무장이 당대 최고의 명문가 적통 출신인 군벌 밑으로 들어가는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다.[5]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상 몇몇 부하들을 제외하면 손견 사후 그의 군세는 거의 원술에게 흡수되었고 그래서 손책은 원술에게 아버지의 군세를 돌려달라고 징징댔다. 연합세력이라고 실질적으로 칭할 정도가 된 것도 사실상 손책 때부터다.[6] 《오서》(吳書)에 이르길 「손견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에서 벼슬살이를 했는데, 그 집은 부춘에 있었고, 조상들은 성 동쪽에 장사지냈다. 무덤 위에 여러 번 괴이한 빛이 있었는데, 운기(雲氣)가 오색 빛을 띠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이어져 수(數) 리에 만연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길가다 이를 보았다.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얘기하길 “이것은 비범치 않은 기운이니, 손씨가 흥하게 될 것이다!” 라 했다. 그 어미가 손견을 배었을 때, 꿈에서 창자가 나와서 오의 창문을 둘러싸는 것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는 두려워서 이를 이웃 어멈에게 알렸다. 이웃 어멈이 말하길 “어찌 길조가 아니겠습니까?” 라 했다. 손견이 태어나니, 용모는 범상치 않았고 성품은 활달하며, 빼어난 절개(奇節)를 좋아했다」고 한다.- 정사 《오서》 <손견전> 주석.[7] 손견의 가문이 경제력을 갖춘 신흥 가문이었다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는 데는 상당한 자본금이 필요한 데다가 인맥 역시 중요하다. 비록 손견이 공직에 있었다곤 하나, 말단이었고 수완이 좋았다고 한들 고작 17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1천의 병력을 모은 주체가 손견으로 된 것은 최소한 그의 가문이 군대 편성의 자금 문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해왔고 다른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만한 가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냐는 것.[8] 현령의 보좌관[9]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 논변으로 불학무식자, 양아치가 자주 쓰곤 한다. 간혹 배운 사람도 쓰지만 그 경우 너랑 나는 급이 안 맞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다물고나 있으라는 상당히 거만한 스타일의 논변이다. 손견이 후자의 경우, 크게 배웠을 경우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10] 왕예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형주자사 자리에 들어선 이가 바로 유표였고, 손견은 결국 유표 휘하의 황조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결과적으론 자업자득(?)이 된 셈이다.[11] 때문에 손견을 손파로라고도 한다.[12] 후한의 대장군에 해당되는 일곱 장군이 바로 대장군, 표기장군, 거기장군, 전, 좌, 우, 후장군인데 원술이 바로 이 후장군이었다.[13]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동탁은 아직 낙양에 거주하고 있던 원씨들을 역적죄로 참수하였다.[14] 손견은 보급을 제대로 안 해줬던 장자는 평소 성격대로 바로 죽여버린 것에 반해 원술에게는 그저 열변을 토하며 자신의 진정성을 강변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손견이 제아무리 군재가 뛰어났다고 해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의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은 결국 원술이었고, 손견은 그 영향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다.[15]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손견의 아내 무열황후를 볼모로 잡고 협박해서 얻었다고 한다. 훗날 원술은 그 옥새를 이용하여 자신이 황제임을 온 천하에 알려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16] 그리고 삼국지 시리즈와 진삼국무쌍 시리즈를 제작하는 코에이 테크모가 이 별명을 가져다 쓰면서 이 설정의 유명세가 더 해졌고, 덕분에 대중문화에서 오나라의 상징은 호랑이로 완전히 고정된다.[17] 이 때 손견이 먼저 번성을 친 후에 한수를 건너 양양을 공략하는걸로 묘사되는데 이 때문에 손견이 반동탁 연합 전쟁 이후 장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완전 모순된다. 장사는 양양 남부에 있기에 양양 북부에 있는 번성부터 먼저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의에서 손견의 유표 공격 동기를 각색한 나머지 생긴 설정 오류이다. 정사에는 손견이 장사로 가지도 않았고 줄곧 원술과 함께 활동하며, 원술과는 대립하지 않는 충실한 동맹 관계였다.[18] 다만, 옥새에 관해서는 약간의 야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손견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사의 손견이 보여준 교활하고 치사한 부분은 모조리 삭제한 탓에, 이런 성격의 묘사를 연의의 폄하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다.[19] 그나마 원술의 정치력이라도 없었다면, 손견은 빼도 박도 못할 무단 점령이나 약탈을 반복하여 세력을 유지한 도적 집단이었다. 중앙 진출에서 이런 정치 정복적인 명분의 한계는 원술한테 종속된 이유이기도 하다.[20]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지만 그래도 중앙을 차지하고 천하를 진동했던 동탁, 최강의 제후 중 하나였던 공손찬에 비하면 손견은 원술 휘하의 일개 장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결국 이들만도 못했다.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해도 나름 전국구였던 이들 제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입지인 셈. 유비만 해도 모병할 때는 항상 자기 이름으로 했고 반드시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다보니 설령 어느 군벌 휘하에 들어가더라도 자기 군대만큼은 유지할 수 있었고 설령 흩어지더라도 금세 다시 모였다는 점과도 비교가 된다. 반면 손견은 살아 있을 때의 장수로서 통솔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죽고 나서 그의 군대가 곧바로 원술의 휘하에 흡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애시당초 손견 본인의 힘으로는 군대를 유지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방증이며 이는 통솔력 이전에 정치적인 면에서의 문제이다. 즉, 손견의 통솔력은 일개 장수로서는 충분히 유능하긴 했지만 그 이상, 즉 세력을 이룰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 자신의 아들인 손책에게 물려주지도 못했을 정도다.[21] 왕예가 손견을 싫어하고 무례했던 이유가 손견 언행의 무식함이니 언행에 교양이 없었던 점은 맞는 듯하다. 욕했다고 죽일 이유는 아니라지만 사실 이런 건 시대와 문화권마다 다르기도 하다. 이 시대만 해도 하후돈이 스승을 욕하고 다닌 사람을 죽이자 사람들이 강직하다고 여겼던 적도 있다. 뭐 그랬다고 잘했다는 건 아니고 어쨌건 당대 기준으로도 배움과 교양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22] 평소부터 손견은 성급한 성격으로 정치, 군사 양쪽으로 간혹 실수를 저질렀는데 유학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죽음까지 자초한 손견의 이러한 단점을 충렬지사 캐릭터로 미화하여 '순수한 용사라서 손해를 감수하며 싸운 것' 처럼 손견의 영웅성을 중심으로 해설하는 사례가 널리 알려졌다.[23] 손견은 눈앞의 이득에는 몹시 약삭빠른 사람이었고, 어쨌든 한 왕실의 멀쩡한 태수들을 뒤통수 쳐서 원술과 함께 이득을 나눠 먹었음에도, 손견의 간사한 행보들은 충렬지사 평판으로 전혀 평가하지 않고 묻어버리는 감이 있다.[24] 물론 이건 정말로 원술과 손견에게 한을 재건할 생각이 있었을 경우에나 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럴 사람들이었다면 애시당초 저들을 죽인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어쨌거나 저들은 한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된 관리들이었으니까. 거기다 이들은 한 황실을 재건하겠다고 주장한 적도 없었다.[25]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하여 동탁에게 반발한 것부터가 속마음은 몰라도 일단 겉으로는 한나라 정상화의 기치를 내건 것이다. 원술은 몰라도 손견의 경우 단순히 제사를 올렸다는 것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여러 번 격한 어조로 한나라 재건의 명분을 내세웠다. 연의의 묘사는 상당히 윤색된 것이 맞고 옛날 중국 역사가들의 평가도 손견의 성격적 결점이나 악행을 무시하는 부분이 있긴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왕예나 장자를 죽였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손견이 범죄를 저질렀으니 한실 재건 의지가 전혀 없다고 단정짓는 것도 이상하다. 삼국지 내부에서만 해도 잠깐 흉악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많다. 살인죄로 떠돌던 관우(다만 정사에서는 그냥 불분명한 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탁군으로 왔다고만 나오며, 그가 고향의 부패한 관리를 죽였다거나 같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야사나 이를 채택한 창작물에서 나온다.), 마찬가지로 살인죄로 잡히기까지 했던 서서(효자라서 어머니가 조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에 어머니를 구하려고 유비와 작별하여 조조에게 투항했다.), 스승을 욕했던 자를 죽인 하후돈(심지어 하후돈은 정사에서 충성스러운 2인자이자 덕장으로 평가받았다.) 등 이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인생을 살다 갔는데 살인을 했으니 인생행적에 대의와 정의가 평생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26] 싸움 실력[27] 애초에 이 두 사람이 힘세고 무예가 뛰어나다는 묘사는 있어도 천하 제일이라는 식으로 묘사된 정사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28] 장수들끼리 붙는 경우도 최전선에서 지휘하다가 마주쳐서 죽이려할경우 별 수 없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전투 중인 병력과 함께하면서 사기를 북돋는 것 또한 당대 지휘관들이 가져야 할 미덕이었다.[29] 하다못해 손견의 아들도 소패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말이다.[30] 동서를 막론하고 공성전에서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르는 것은 최정예 병력이며, 그들을 마주하는 수성 측도 최정예를 먼저 앞세운다.[31] 사실 유명한 혈통을 자기 가문에 갖다 붙이는 행위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자주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유비는 혈통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헌제가 직접 인증한 진짜인데도 현대인에게는 종종 가짜로 의심받았는데 정작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손견의 혈통은 진짜로 믿어졌다.[32] 연의와 일부 사서에선, 변명을 써서 손견은 순수한 사람처럼 포장해놓고 있다. 하지만, 정사의 손견은 원술의 명령을 거절하긴 커녕 좋다고 따르며, 평소에 관계가 나빴던 태수들을 뒤통수를 치는 도살자의 모습을 보인다.[33] 병음인 Sūn Jiān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쑨젠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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