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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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엔트리
3. 경기
3.1. 조별리그 대한민국 2 - 1 바레인
3.2. 조별리그 호주 1 - 1 대한민국
3.3. 조별리그 대한민국 4 - 1 인도
3.4. 8강 이란 0 - 1 대한민국
3.5. 4강 일본 2 PK 2 대한민국
3.6. 3·4위전 우즈베키스탄 2 - 3 대한민국
4. 평가



1. 개요[편집]


조광래호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활약상을 정리한 문서.


2. 엔트리[편집]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끝으로 허정무 감독의 후임으로 조광래 감독이 선임되었다. 당연히 목표는 우승으로 잡았고 슬로건은 왕의 귀환. 특히 박지성, 이영표의 국가대표 은퇴 무대로 정해졌으며, 박지성은 은퇴 전에 국가대표로서 첫 우승을 하고 싶다며 전의를 다졌다.

2010년 12월 24일 최종 결정된 23명의 엔트리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각 포지션의 인원 수. 가나다순 정렬. 굵은 글씨2010 남아공 월드컵 참가 선수.



3. 경기[편집]



3.1. 조별리그 대한민국 2 - 1 바레인[편집]




득점: 구자철(2)

2011년 1월 10일, 카타르 도하.

명목상으로는 공격형 미드필더이지만, 사실상 세컨톱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인 구자철. 새로운 옷이 맞지 않을 것 같았지만 첫 공식전에서 멀티골을 넣으며 우려를 불식시킨다. 하지만 후반 막판 곽태휘가 불필요한 파울로 페널티 킥을 내주며 실점한 것은 옥의 티.

그러나 이 퇴장은 과잉징계로 논란이 되었는데, AFC도 이를 인지한 건지 본래 다이렉트라 인도전까지 정지지만 호주전만 정지 징계를 내렸다.


3.2. 조별리그 호주 1 - 1 대한민국[편집]




득점: 구자철

2011년 1월 14일, 카타르 도하. 정성룡의 장거리 골킥을 이어받아 지동원과 구자철이 선제골을 합작하며 경기를 순조롭게 가져가는 듯 했으나 후반전 코너킥 위기상황에서 호주의 마일 제디낙에게 동점골 허용. 동점골을 실점할 때 혼전 상황에서 호주 공격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였던 것으로 드러나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이 경기에서 유병수가 후반전에 교체 출전되었다가 20분 만에 다시 교체아웃되었는데, 이에 대해 미니홈피에 불만섞인 글을 남겼고, 바레인전 윤빛가람의 케이스에 이어 이런 식으로 넣었던 선수를 바로 빼는 것을 조광래교체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조광래의 선수단 관리 실패가 드러나면서 재조명.


3.3. 조별리그 대한민국 4 - 1 인도[편집]




득점: 지동원(2), 구자철, 손흥민[1]

2011년 1월 18일, 카타르 도하. 인도의 전력이 우리보다 한참 떨어지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8강전 이후의 빡센 일정에 대비해 후보들을 섞어 출전시켜 체력안배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이에 대해 갑론을박도 많았지만, 주전 선수들 그대로 출전. 결국 4-1로 승리하기는 했으나, 호주에 승점 - 골득실 동률 다득점으로 밀려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여 8강전 이란 - 4강전 일본(예상)이라는 지옥의 일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는 후보선수들이 뛰었어도 전력이 저조한 인도 상대로 네 골밖에 넣지 못했을까? 설령 어쩔 수 없이 조 2위로 8강에 가야 하더라도 이후 3일에 한 번 꼴로 경기를 치르는 토너먼트 일정을 감안하면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어야 했다는 것이 중론. 게다가 인도전은 가 계속 오는 와중에 경기가 펼쳐져서 출전한 주전 선수 중 몇몇이 컨디션 난조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뒤이어질 8강전 이란, 4강전 일본과의 120분 연장 혈투에서 조광래의 이 선택은 나비효과로 돌아온다.


3.4. 8강 이란 0 - 1 대한민국[편집]




득점: 윤빛가람

2011년 1월 22일, 카타르 도하. 아시안컵 5대회 연속 8강전에서 붙게 된 한국과 이란. 패(96) - 승(00) - 패(04) - 승(07) 순환법칙에 따르면 이번에 질 차례라서 불길했다는 거고, 그나마 지리한 경기 끝에 연장전에서 교체 투입된 윤빛가람이 인생골을 터뜨리면서 1-0 승리, 준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조별예선 3연전 주전 풀가동에 이어 언제 만나도 힘겨운 경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대인 이란과의 120분 연장 혈투는 주전 선수들 체력관리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대한민국은 이 경기이후 무려 11년동안 이란을 이겨보지 못하다가 2022년에서야 홈에서 2:0 승리를 거두었다.


3.5. 4강 일본 2 PK 2 대한민국[편집]




득점: 기성용(PK), 황재원

2011년 1월 25일, 카타르 도하. 숙명의 한일전. 한국[2]이나 일본[3]이나 8강에서 힘든 경기를 하며 올라왔고, 단기 토너먼트인 만큼 체력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애초에 이란과 연장을 치렀고 휴식도 짧았던 한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싸움이었다.

그래서 한국은 초반에 승부를 보겠다는 듯 공세로 나왔고 박지성이 페널티 킥을 유도해 냈고 이를 기성용이 성공시켜 1-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이 때 기성용은 골을 넣고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골 세레머니를 했는데, 경기 후 많은 논란을 낳았다.[4][5]

그러나 잠시 후 차두리가 나가토모에게 뒷공간을 털리면서 동점골을 내주었고, 일본이 경기 주도권을 잡아 가기 시작한다. 이에 조광래 감독은 원톱 지동원을 빼고 홍정호를 투입하였다. 교체투입된 홍정호는 일본 공격의 핵 혼다를 묶으면서 서서히 경기흐름을 한국 쪽으로 가져왔으나, 역시나 문제는 공격진 선수들의 체력이었다. 결국 추가득점 없이 90분 종료되면서 연장전으로 돌입.

연장 전반에 이번엔 일본이 페널티킥을 획득. 혼다가 찬 페널티킥을 정성룡이 한 번 막았으나 곧바로 쇄도하던 호소가이가 가볍게 골로 연결했다.[6] 체력이 고갈된 한국 선수들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패색이 짙었고 조광래 감독은 결국 패스축구를 버리고 최후의 카드, 김신욱을 이용한 롱볼축구를 시작하는데... 연장 전후반까지 120분도 다 지나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쯤에 결국 하나가 터졌다. 길게 넘어온 프리킥을 김신욱이 헤딩으로 떨궈 준 볼을 손흥민이 여차여차 수비진과 비벼 가며 소유권을 유지했고, 이를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수비수 황재원이 바로 일본 골문으로 차 넣었다. 극적인 동점골에 당시 생중계를 하던 SBS 박문성 해설위원은 멘트를 하다 울먹이기도...

이렇게 극적으로 승부는 외나무다리 승부차기까지 이어졌으나 그 이후는 생략... 자세한 내용은 삼연뻥 참고.


3.6. 3·4위전 우즈베키스탄 2 - 3 대한민국[편집]




득점: 구자철, 지동원(2)

2011년 1월 28일, 카타르 도하. 전반전에 세 골을 넣으며 경기를 쉽게 가져가는가 했지만 전반 막판과 후반에 연속골을 허용하면서 기어코 축빠들의 똥줄을 태워가며 승리.

그래도 이 승리로 인해 4년 후 2015 AFC 아시안컵 호주 대회의 아시안컵 예선 면제권을 획득했다는 점에서는 의미 깊은 승리였다.


4. 평가[편집]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단 6개월만에 단 9명만을 제외하고 전원 교체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젊어졌다. 거기에 대표팀의 거의 유일한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김정우는 부상 회복이 느려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박주영은 소속팀에서 결승골 넣고 세레머니하다가 동료들한테 깔리는 바람에(...) 부상 당하여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염기훈K리그 맹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국가대표팀에 승선하였다.

박주영이 부상으로 불참하여서 결국 공격수는 전부 새로운 얼굴들로 꾸려졌다. 김신욱(22), 유병수(22), 지동원(19)로 모두 상당히 어린 선수들이며 모두 K리그 소속. K리그 득점왕 유병수와 U19 월드컵과 소속팀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지동원의 활약이 관심을 끌고 있다.

중원에서는 K리그에서 맹활약한 젊은 미드필더들인 구자철윤빛가람이 합류하였다. 기성용과 함께 세 명의 조합에 대해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중. 최근 기성용의 폼이 부쩍 오르면서 기성용은 고정으로 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화제의 신성 손흥민이 합류되어 많은 이들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 조광래 감독은 조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조광래 감독이 경남에서부터 3백을 중시해왔고 이를 국대에서도 적용하고 있기에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부임 후 몇차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기에 이번 아시안컵은 조광래 감독의 국가대표 감독 생활에 중요한 고비가 될 듯 하다.

결국 4강전 한일전에서 2:2 무승부를 기록, 어린 선수들이 통한의 승부차기 패배를 기록하며 아쉽게 3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여러모로 어린 선수들의 가능성을 확인한 대회였으며, 성공적인 세대교체로 평가할 만한 경기력을 보였다. 특히 일정이 꼬이고 결과가 안좋아서 그렇지 경기력 자체는 굉장히 훌륭한 편이었다. 눈에 띄는 선수로는 무명에 가깝던 이용래가 활발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조광래호의 새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 대회를 끝으로 박지성과 이영표가 대표팀에서 은퇴하면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세대는 사실상 차두리 혼자 남게 되었다.

2011년 조광래 감독은 국가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의 선수 중복차출을 거부해, 축구협회와 심각한 불화를 빚었다. 8월 10일, 한일전에서 3대 빵으로 발리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11월 15일,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 레바논전에서 제대로 추태를 작렬시키며 결국 12월 7일 자로 감독에서 짤렸다. 조광래호 시절에 있던 일들.

4강전에서 삼연뻥 사건이 터지며 비난 여론이 크게 일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등 굵직한 경기 경험도 없는[7] A매치 경험조차 일천한 젊은 선수들에게 4강전의 승부차기 같은 중압감이 높은 임무를 맡긴 것에 많은 이들이 불만을 표하는 상황[8]

이 부분에선 사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네티즌들이나 축빠들이나 하나같이 간과들을 하고 있는데, 이 때는 조광래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자리를 맡은지 겨우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허정무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3년 동안 감독직을 수행한 끝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데 성공했는데, 6개월밖에 시간이 없고 또 실질적인 시간도 부족한 감독에게 4강에서 그깟 승부차기에서 패배했다고 다짜고짜 짜른다고? 사우디아라비아가 2000년 이후 수십명의 감독을 교체했다가 이번 2011년 아시안컵에서 3전 전패로 광탈하는 망신을 당하며 8강도 들지 못한 사례[9]를 상기시켜 보자. 조광래보다 1달 더 늦게 부임한 알베르토 자케로니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본인의 색깔을 어느 정도 입혔다는 것에서 이것마저 비겁한 변명이라며 까는 사람도 있다. 허나 정작 4강 한일전 당시 조광래 감독이 홍정호, 손흥민 등을 후반에 투입하여 4-6-0의 제로톱을 중심으로 한 선 굵고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하며 경기 분위기를 다시 되찾은 반면, 자케로니 감독은 카가와 신지혼다 케이스케의 동선이 겹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과 체력이 방전되어 전반만큼의 압박과 공격을 보여주지 못하는 일본 대표팀의 전술 변화를 꾀하지 못하고 있다가 연장 전반 PK로 한 점을 따내자 우주방어에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색깔을 입혔다느니 뭐니 하는 것은 승부차기로 패한 결과에 지나치게 집작하여 정작 경기 내용을 고려하지 않은 의견일 뿐이다.

예선전에선 이런저런 선수들을 뽑았지만, 현 2011 국대의 주축이 되는 신예들은 2009 당시에는 모두 실력이 좋지 않거나 검증이 덜 된 상태였다. 이승렬도 잠깐 반짝했다 다시 삽질 중이였으며, 이승렬보다 더 심각한 선수들이 정성훈과 이근호이다. 본선 진출의 최고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던 이 두 공격수가 월드컵을 앞에 두고 부상과 부진에 빠져 결국 월드컵 본선에 공격진이 얇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근호는 다행히 다시 폼이 좋아졌지만, 정성훈은 영 좋지 않았고, 결국 이후로는 잊혀졌다. 실제로 세대교체가 제대로 안 된 자리는 박지성, 이영표, 이운재 이 세 자리 정도인데, 2002 월드컵 이후에도 오만 쇼크, 몰디브 쇼크를 겪으며 황선홍, 홍명보를 그리워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비난받지는 않았다. 결국 성적을 내야 하는 월드컵 본선인지라 세대교체보다 성적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후임 감독들이 그 설거지를 어느 정도 하는 입장이라는 것도 이해해 줘야 한다.

조광래호에서도 구자철 등의 활약이 있었지만 박지성, 기성용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고, 지동원은 박주영의 공백을 완전히 메우지는 못해 양박쌍용의 의존도는 너무 컸으며, 정작 지동원을 백업할 원톱 자원도 전멸에 가까웠다. 결국 어린 나이부터 혹사에 가까운 경기수를 소화하면서 선발되어 대회 끝에는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특히 허정무가 구축해 놓은 중앙을 이용한 공격루트가 거의 단절되면서[10] 공격루트가 측면에 한정되었으며, 수비에서의 빌드업도 황재원의 롱패스를 통해 단조롭게 풀려나갔다는 단점도 지적될 필요가 있다. 또한 허정무가 벨라루스에게 패한 것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가전일 뿐이었고, 허정무의 마지막 경기에서 4강 팀인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등, 혹은 관점에 따라 우위라고 할 만한 경기 능력을 보여주고도 거센 비판을 받았던 점을 고려해보면[11] 이는 조광래도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물론 조광래의 측면 위주의 플레이는 지동원이 박주영만큼 중앙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서 측면으로 이동해서 경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광래호는 측면에서의 움직임에 비해 중앙을 비워놓고 측면에서 경기를 풀어가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에 무한 스위칭과 패싱 플레이를 강조하는 조광래호는 필연적으로 심한 체력적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이러한 체력 부담에 대해 딱히 대응 방안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특히 안 그래도 얇은 공격진에 체력 부담은 더해지는데 한창 뜨는 손흥민이라는 교체 카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물론 조광래호가 출범한지 고작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런 문제 해결의 필요성은 조광래도 앞으로 해결해 나갈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감독의 경질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아시안컵 4강에서 탈락해서 3위한 감독들이 백이면 백 모두 사임했다는 사실이 있고 들 수 있는 예는 2006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사임한 후 대표팀을 이어받은 핌 베어벡 감독을 들 수 있는데, 베어백 감독은 비록 수면축구라 불릴 만큼 거지같은 경기력(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때의 선수 명단은 거진 2군이라서 베어벡만의 잘못은 전혀 아니다.)을 보여줬지만, 대회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각종 언론의 집중 포화 및 박지성&이영표의 공백을 제대로 메꾸지 못했다는 비판에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임했다. 그러나 3득점, 3실점 하고 토너먼트 3경기를 모두 승부차기로 때운 그 때와 지금의 차이는 너무나도 확연하므로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일이다. 경기력 제끼고 결과만 봐도 전경기를 4강까지 이기면서 온 조광래랑 토너먼트 전 경기를 무재배한 감독과의 비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만큼 조광래는 사임도 사퇴도 하지 않고 감독직을 유지했었다.
[1] 손흥민의 A매치 첫 골이다.[2] 연장 혈투 끝에 승.[3] 개최국 카타르 상대로 힘겹게 3-2 역전승.[4] 사실 이는 변명의 여지 없이 인종차별적 행동으로, 기성용에게 FIFA가 징계를 내렸어도 할 말이 없다. 마케다 골 세레머니 때 한국 축구팬들이 얼마나 분노했었는지 상기해 보자.[5] 특히 일본의 반응이 웃겼다. 그 쓰레기 같은 극우 잉여 집합소인 2ch에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 여담이지만, 이 장면은 사실 혼다가 킥을 하기 전에 호소가이가 이미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노골이 선언되어야 맞다. 심판들의 오심.[7] 사실 이는 결과론일 뿐이다. PK는 경험보다 배짱 싸움이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이영표가 PK 실축을 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 결국 이동국은 꼼짝없이 상무로 가야만 했고, 박항서 감독은 목이 날아갔다.[8] 그러나 당시 경기장에 남아있는 선수 중 그나마 최선의 키커 구성을 한 것이다. 고참들인 박지성과 이영표, 차두리 모두 끔찍한 실패 경험이나 배짱 부족을 이유로 PK를 안 차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박지성, 이영표, 차두리는 억지로 떠밀지 않는 한 나오지 않을 키커였고, 좋은 키커라 볼 수 없는 상황인지라 키커의 경험 부족을 까는 것은 에러. 그런 이유에서 키커로 뽑혀 나온 3연뻥의 주인공 중 두 명인 이용래구자철은 나이는 어리지만 킥력은 고참에 밀리지 않기에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원래 보직이 수비수인 홍정호는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다.[9] 특히 전패도 전패였지만, 최종전인 일본전에서 5대0으로 참패한 게 최고 압권이었다.[10] 이 부분은 중원을 책임지던 김정우의 공백과 박주영의 공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전술적 미스가 아닌 선수선발 옵션의 한계이다.[11] 허정무의 대 우루과이전은 경기 직후에는 비난이 넘쳐났으나, 오히려 해외 언론은 우루과이전에서 보여준 한국의 패스 플레이와 경기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사커라인 등 국내 커뮤니티 분위기는 허정무가 우루과이전에서 보여준 플레이를 높은 수준으로 평하고 있다. 사실 허정무의 월드컵에서의 비판의 9할은 우루과이전이 아닌 아르헨티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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