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헨리 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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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및 근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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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존 헨리 뉴먼
John Henry Newman


파일:뉴먼.png

출생
1801년 2월 21일
영국 잉글랜드 시티 오브 런던
사망
1890년 8월 11일 (향년 89세)
영국 잉글랜드 버밍엄 에지배스턴
종교
성공회 (1824년1845년)

가톨릭 (1845년1890년)
직업
성직자, 교수, 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교육학자, 작가, 소설가, 시인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고전학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컬리지 (펠로우, 강사)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신학 / 박사)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명예 펠로우)
소속
오라토리오회
재임 기간
초대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총장
1848년 2월 1일1890년 8월 11일
초대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1] 부총장
1854년 6월 4일1858년 11월 12일
제59대 산 조르조 인 벨라브로 추기경
1879년 5월 15일1890년 8월 11일
서명
파일:뉴먼서명.png
수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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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부제 수품

1824년 6월 13일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
에드워드 레지 주교 주례
성공회
사제 수품

1825년 5월 29일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
에드워드 레지 주교 주례
가톨릭
사제 수품

1847년 5월 30일
산타 마리아 인 아라 코엘리 대성당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 추기경 주례
추기경
임명일

1879년 5월 12일
교황 레오 13세

역임 직책
{{{#373a3c,#dddd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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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총장


초대

2대

존 헨리 뉴먼 (1848년1890년)
이그네이셔스 라이더 (1890년1905년)
역대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 부총장


초대

2대

존 헨리 뉴먼 (1854년1858년)
바솔로뮤 우드록 (1861년1879년)
역대 산 조르조 인 벨라브로 추기경
58대

59대

60대
톰마소 마르티넬리 (1874년1875년)
존 헨리 뉴먼 (1879년1890년)
프랜시스 에이던 개스케 (1914년1915년)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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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요한 헨리 뉴먼[한국가톨릭]
존 헨리 뉴먼[대한성공회]
[언어별 명칭]
라틴어: 요안네스 헨리쿠스 뉴먼
(Ioannes Henricus Newman)
영어: 존 헨리 뉴먼
(John Henry Newman)
폴란드어: 얀 헨리크 뉴먼
(Jan Henryk Newman)

시복
2010년 9월 19일
버밍엄 코프턴 공원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례
시성
2019년 10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
교황 프란치스코 주례
축일
10월 9일[가톨릭]
8월 11일[잉글랜드국교회]
2월 21일[미국성공회]
묘지
영국 잉글랜드 버밍엄 레드널 공동묘지[1]

문장
파일:뉴먼문장.png
COR AD COR LOQUITUR
(마음은 마음에게 말한다)


1. 개요
2. 생애
2.1. 유소년 시절과 교육
2.2. 성공회의 길을 걷다
2.3. 고교회 전향과 지중해 여행
2.4. 옥스퍼드 운동
2.4.1. 시국 소책자
2.4.2. 신념의 변화
2.4.3. 리틀모어의 공동체
2.5. 가톨릭으로 개종하다
2.6. 반가톨릭에 맞선 대중 강연
2.7. 교육인으로서의 활동
2.8. 그의 삶을 위한 변론
2.9. 추기경으로 임명되다
2.10. 죽음과 사라진 유골
3. 작가이자 신학자로서
4. 사후 공경과 영향
4.1. 시성 과정
4.2. 그의 이름을 딴 시설 및 단체
5. 어록
6. 대표작
6.1. 성공회 시절
6.2. 가톨릭 시절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영국성직자, 교수, 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교육학자, 작가, 소설가, 시인.

뉴먼은 성공회에 몸담고 있을 때 성공회 가톨릭주의[2]의회의 종교 불간섭을 주창한 옥스퍼드 운동을 이끌어 종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성공회와 가톨릭을 잇는 가교를 맡아 두 교회 간의 소모적인 논쟁을 완화해 양측 신자들이 신학적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이바지했다. 그의 활동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지속되어 교회가 다양한 과학적 발전으로 빠르게 바뀌어 가는 사회에 알맞도록 신앙과 이성의 조화와 교리 쇄신을 위한 개혁적인 사상을 제공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뉴먼은 또한 신학, 철학, 예술, 교육 등 다방면에서 두루 활동한 다재다능한 천재로 신학 간행물 《시국 소책자(Tracts for the Times)》와 《소책자 90(Tract 90)》, 철학서 《동의의 문법(Grammar of Assent)》, 자서전 《그의 삶을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 성가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Lead, Kindly Light)》, 시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 소설 《칼리스타(Callista)》, 그리고 잡지 《더 램블러(The Rambler)》 등을 남겼으며, 반(反)가톨릭 성향이 만연했던 당시 사회상 속에서 더블린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버밍엄에 오라토리 스쿨을 설립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교육에 제한을 받던 학생들이 학업을 안정적으로 계속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주었다.

가톨릭과 성공회에서는 현재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3]. 다만 교회별로 축일이 다른데, 가톨릭은 10월 9일, 잉글랜드 국교회는 8월 11일, 그리고 미국 성공회는 2월 21일이다.


2. 생애[편집]



2.1. 유소년 시절과 교육[편집]


존 헨리 뉴먼은 1801년 2월 21일 금융인 존 뉴먼과 그의 아내 제미마 푸르드리니에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런던의 금융 기업 램즈바텀 뉴먼 앤드 컴퍼니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위그노 난민 출신 조상을 둔 유명 인쇄업 및 제지업 가문의 딸이었다. 그의 가족은 캠던 지역의 블룸즈버리에서 살았고 리치몬드어폰템스에 조그마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뉴먼은 7살이 되던 해에 당시 명문 사립 학교였던 그레이트 일링 스쿨에 입학해 그곳에서 그는 수학[4], 고전학 등을 공부했다. 천성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성격으로 인해 친구들과의 놀이보다는 독서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휴식 시간마다 월터 스콧, 데이비드 흄, 볼테르, 토마스 페인이 집필한 서적들을 섭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16년 15살이 된 뉴먼은 성공회 신자였던 고전학 교사 월터 메이어스가 빌려 준 칼뱅주의 서적에 큰 감명을 받아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복음주의 성향의 저교회 성공회임을 확신했다. 그는 남은 학년 동안 성공회 및 개신교 신학자들이 남긴 저서들을 탐독함으로써 신학적 지식과 반가톨릭 성향을 키워 나갔다. 이후 학교를 졸업한 그는 호기롭게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로 진학했지만, 중요한 시험을 볼 때마다 유독 불안감을 많이 느낀 탓에 좋은 성적은 받지를 못했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다행히 겨우 성적을 맞춰 제때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학업을 계속 이어 가고자 당시 대학 내의 지성의 중심지로 손꼽혔던 오리엘 컬리지의 펠로우십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1822년 4월 12일 그는 해당 컬리지의 펠로우로 발탁되어 학생들에게 복음주의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듬해 그는 훗날 자신과 함께 성공회의 옥스퍼드 운동을 이끌어 나갈 에드워드 퓨지를 펠로우 동료로 맞이했다.


2.2. 성공회의 길을 걷다[편집]


1824년 6월 13일 존 헨리 뉴먼은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성공회 부제로 서품되었고, 10일 뒤 그는 옥스퍼드셔에 있는 오버워튼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다. 그는 그곳에서 학창 시절 은사이자 자신을 종교의 길로 이끈 월터 메이어스와 해후했는데, 메이어스는 과거에 교사를 그만두고 해당 교구의 성공회 보좌신부로 전향한 상태였다. 그리고 1825년 5월 29일 뉴먼은 옥스퍼드 주교 에드워드 레지로부터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동료 에드워드 퓨지의 제안에 따라 옥스퍼드 중심지의 동부 지역에 위치한 세인트 클레멘트 교회의 보좌신부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2년 동안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의 경쟁 대상이었던 《대도시 대백과사전(Encyclopædia Metropolitana)》에 수록될 글들을 집필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일생, 키케로의 일생, 그리고 기적에 관해서 저술했다.

1825년 뉴먼은 오리엘 컬리지의 학장이자 논리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신학자였던 리처드 와틀리의 요청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내의 전통 깊은 교육 기관인 세인트 알반 홀의 부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년 뒤에 해당 직책을 그만두었고, 1826년 다시 자신이 속한 컬리지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그의 동료였던 리처드 허렐 프루드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뉴먼이 가장 명민하고 명석하며 심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뉴먼은 또한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와틀리를 종종 도와주었는데, 일례로 와틀리가 교회는 국가와 독립되어 자기만의 권리와 힘이 있어야 한다고 주창했을 때 그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하지만 뉴먼은 1827년에 와틀리와 갈라섰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정치적인 것이었는데, 바로 와틀리가 뉴먼이 반대했던 로버트 필이 대학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는 것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뉴먼은 화이트홀 지역의 설교자로 지냈다.


2.3. 고교회 전향과 지중해 여행[편집]


이때까지만 해도 존 헨리 뉴먼은 저교회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1828년 오리엘 컬리지의 새로운 학장 선출에 관해서 같은 종교적 성향의 에드워드 호킨스를 지지했고 동류의 여러 신학자들과 꾸준히 교류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교회 성공회 성직자들이 기존의 전례 방식을 축소하고 극단적인 내용의 신학을 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 그는 자신의 신조였던 개신교적 성향에 회의감을 느꼈으며 점점 가톨릭 성향의 고교회주의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이후 세인트 메리 대학 교회의 유급 주임신부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교부들의 저서들을 깊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고교회 쪽으로 마음을 서서히 굳히게 된 뉴먼은 영국 성공회 선교협회의 지역 총무를 도맡고 있을 때 결국 개신교 성향의 중심이었던 비국교회[5] 신자들을 모두 축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익명의 편지들을 유포했다. 이같은 사실이 발각되자 그는 1830년 3월 8일 해당 직책에서 해임되었고, 세 달 뒤 성서공회로부터 퇴출당함으로써 완전히 저교회와의 관계를 끊었다. 그렇게 자신의 종교적 믿음은 이제 고교회 성공회임을 확신한 뉴먼은 1832년 지난날 그가 지지했던 개신교 성향의 에드워드 호킨스와 대학 교편 생활에 대한 종교적 입장을 두고 큰 차이를 보이자 그에게 사임을 촉구했다.

1832년 12월 뉴먼은 자신의 동료 리처드 허렐 프루드의 건강 회복을 위해 그의 아버지 로버트 프루드 보좌주교와 함께 잠시 여행의 시간을 가졌다. 이 셋은 증기선 헤르메스호를 타고 남유럽지중해 일대를 돌았는데, 지브롤터, 몰타, 이오니아 제도를 거쳐 시칠리아, 나폴리, 그리고 로마에 이르렀다. 뉴먼은 자신의 기록에서 로마에 대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칭송한 반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던 가톨릭 자체에 대한 반감심과 그 폐단을 현장에서 엿보게 된 것으로 인해 다신교적이고 모멸적이며 우상숭배를 일삼는다고 비난했다.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 뉴먼은 짧은 시들을 남겼고, 1833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프루드 부자를 뒤로 한 채 자신은 혼자 시칠리아로 떠났다. 어느 날, 그가 시칠리아에 있는 레온포르테라는 지역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장티푸스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이내 금방 회복되자, 그는 이 경험이 잉글랜드로 돌아가 남은 소임을 다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라고 여겨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같은 해 6월 팔레르모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배를 타고 코르시카를 거쳐 마르세유에 다다랐으며, 몇 날 며칠 동안 프랑스를 가로지른 후 7월 9일 드디어 옥스퍼드에 당도했다. 한편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 뉴먼은 시 한 편을 썼는데, 그 시는 이후 성가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Lead, Kindly Light)》의 가사가 되었다.


2.4. 옥스퍼드 운동[편집]



2.4.1. 시국 소책자[편집]


존 헨리 뉴먼이 시칠리아 여행을 마치고 옥스퍼드에 막 도착했을 때, 성공회에서는 큰 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19세기의 영국 의회는 교구를 재편성하고 교회의 재산을 환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종교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6], 1832년 집권 여당이 된 휘그당이 해당 권리를 기반으로 성공회와의 상의도 없이 아일랜드[7]의 교구를 통폐합해 주교직을 축소했으며, 이로 인한 잉여 교회 토지 및 재산을 모두 회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세속 권력의 교회에 대한 간섭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고교회 성향의 성공회 사제 존 키블은 1833년 7월 14일 뉴먼이 주임신부로 지내는 세인트 메리 대학 교회에서 《국가적 배교(National Apostasy)》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를 세속적 전유물로 간주하고 있는 의회의 입김이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영역에 작용한다고 지적함으로써 정치권의 종교 불간섭을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옥스퍼드 운동의 결정적인 발단이 되었다.

키블의 설교에 공감을 한 뉴먼은 그 뜻을 이어 받은 종교적 운동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는 리처드 허렐 프루드를 포함한 옥스퍼드 대학교 동료 사제들과 신학자들을 불러모았고, 이들은 7월 25일과 26일에 운동의 최초 근거지인 성공회 사제 휴 제임스 로즈의 집에서 뭇 고교회 사제들과 교류를 했다. 모임의 참가자들은 사도전승성공회 기도서의 진실성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의했으며, 종교에 대한 세속의 간섭을 경계하고 저교회 측이 주도한 개혁으로 파괴된 교회의 전통과 전례를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주 뒤 뉴먼은 성공회가 과거에 교황 없는 가톨릭이라는 강령하에 지니고 있었던 절대적인 교리와 규율을 수호하자는 내용이 담긴 《시국 소책자(Tracts for the Times)》를 배포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교회에서 진행되는 일요일 오후 설교 시간을 통해 소책자에 담긴 내용을 신자들에게 가르쳤다. 소책자는 그의 교육을 받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학생 신자들을 중심으로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나갔고,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까지 그 영향이 미치자 런던에 있는 리빙턴 출판사가 이를 정식으로 발행했다. 그리고 1835년 뉴먼의 동료이자 당시 대학의 석좌교수로 지내고 있던 에드워드 퓨지가 옥스퍼드 운동에 동참했고, 그는 고교회적 시각으로 쓰인 세례감사성찬례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소책자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퍼뜨린 옥스퍼드 운동의 주동자들과 협조자들은 외부인들로부터 소책자 운동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운동가들은 또한 소책자 배포 활동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논쟁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836년 이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정기 강연 프로그램인 뱀턴 강연에서 렌 딕슨 햄던 신학 교수가 발언한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에 소시니안주의[8]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비판했고, 뉴먼은 자신이 작성한 소논문 《햄던 박사의 신학적 발언에 관한 설명들(Elucidations of Dr Hampden's Theological Statements)》을 통해서 비판에 정당성을 실어 주었다. 한편 뉴먼은 별도로 자신의 교회 내부에 있는 예배당에서 강의를 열었는데, 그는 청중들에게 성공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지점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2.4.2. 신념의 변화[편집]


옥스퍼드 운동이 진행됨으로써 존 헨리 뉴먼의 영향력은 운동권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교 내에서도 막대해졌다. 그의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컬어 뉴먼주의자라는 명칭이 생겼을 정도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나 그가 단성론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면서 성공회 신학의 현 상황이 과연 옥스퍼드 운동이 추구하는 보편교회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지 의혹을 품었다. 뉴먼은 어느 날 스페인 출신의 아일랜드 가톨릭 신부 니콜라스 와이즈먼이 기고한 《성공회의 주장(The Anglican Claim)》이라는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그는 해당 기사에서 작가가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금언 “이 세상의 평가는 확실하다(Securus judicat orbis terrarum)”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 문구가 세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가톨릭의 유구하면서도 다양한 역사를 의미하고 함축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선 성공회의 정체성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835년 뉴먼은 자신의 지리적 활동 반경을 옥스퍼드 밖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리틀모어라는 곳에서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계획했으며, 그 출발점으로 해당 지역에서 세인트 메리 앤드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다. 1836년 그는 애초에 오리엘 컬리지의 동료인 찰스 골리틀리를 리틀모어의 보좌신부로 임명하기를 원했으나, 정작 골리틀리는 뉴먼의 가톨릭 성향에 반대의 뜻을 밝혀 임명이 무산되었다. 대신 존 키블의 제자이자 옥스퍼드 운동의 일원 중 하나였던 아이작 윌리엄스가 리틀모어의 사제직을 맡았고, 이듬해인 1837년 뉴먼의 대학 동료인 존 블록섬이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에 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했다.

1841년 뉴먼은 자신의 입장을 담은 《39개 신조의 특정 구절들에 대한 발언(Remarks on Certain Passages in the Thirty-Nine Articles)》, 흔히 《소책자 90(Tract 90)》으로 불리는 글을 출판했다. 그가 이 작문을 통해 성공회 39개 신조야말로 가톨릭을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전통과 양립할 수 있다고 피력한 신학적 해석은 성공회 내 많은 고위 성직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보다 못한 당시 옥스퍼드 교구장 리처드 배곳 주교의 요청에 따라 출판은 끝내 중단되었다.


2.4.3. 리틀모어의 공동체[편집]


《소책자 90》의 파급력으로 인해 존 헨리 뉴먼은 성공회 내에서 아리우스파에 못지 않은 이단 취급을 받게 되었고, 성직자와 교수로서의 직무에 대해 부분적으로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1841년 잉글랜드 국교회프로이센 루터교회가 공동으로 개신교 성향의 예루살렘 주교좌를 설치해 뉴먼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성공회는 더더욱 사도전승의 정신과 멀어졌다. 더 이상 옥스퍼드에서는 자신이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이에 1842년 자신을 따르는 일부 사람들과 함께 리틀모어로 피신했다.

뉴먼은 리틀모어에서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수도회와 유사한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구성원으로는 윌리엄 록하트, 헨리 매닝, 앰브로즈 세인트 존, 프레더릭 오클리, 앨버니 제임스 크리스티 등 과거 뉴먼을 따라 옥스퍼드 운동을 전개했던 사제들과 학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집단이 형성되자 뉴먼은 이들과 생활하고 있는 건물을 ‘리틀모어의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고 불렀다. 공동체의 일원들은 뉴먼의 신념을 바탕으로 한 글들을 집필하거나 잉글랜드 출신 성인들에 관한 기록 등을 저술해 활발한 학문적 활동을 지속했고, 뉴먼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대한 논고(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의 완성에 몰두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동체는 리틀모어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알려졌고, 심지어 옥스퍼드 교구 관계자들까지 관심을 가졌으나 정작 뉴먼은 이에 괘념치 않았다.

1843년 2월 뉴먼은 자신이 과거에 가톨릭에 대하여 했던 부정적인 발언들을 모두 철회한다는 글을 익명으로 발표한 후 가톨릭으로의 회심을 결정했다. 그는 공동체에게 개종의 뜻을 함께 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윌리엄 록하트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5일 그는 리틀모어에서 마지막 성공회 전례와 설교를 진행했으며, 세인트 메리 대학 교회의 주임신부 직책을 내려놓았다.


2.5. 가톨릭으로 개종하다[편집]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45년 10월 9일 존 헨리 뉴먼은 리틀모어에서 공동 생활을 하던 동료들과 함께 예수고난회 소속의 이탈리아 가톨릭 신부 도메니코 바르베리에 의해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의 개종에 대한 여파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했는데, 그중에서 옥스퍼드 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뉴먼이라는 중추적인 인물의 이탈로 운동권은 잠시 휘청거렸으나, 뉴먼과 비슷한 가톨릭 성향의 신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성공회에 남아 있던 존 키블과 에드워드 퓨지 등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소책자 발간을 추진했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성공회는 다시 잉글랜드 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 전례와 양식을 회복했고 영국 의회의 간섭마저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건설적인 영향은 오랜 기간 동안 운동을 주도했던 고교회파가 종교 내에서 온전히 자리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1846년 2월 뉴먼은 교황의 감목 대리구[9]가 있던 버밍엄으로 떠나 그곳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컬리지에서 자신의 가톨릭 성향의 행보에 결정적인 도화선을 제공했던 니콜라스 와이즈먼 신부와 만남을 가졌다. 와이즈먼은 그에게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권유했고, 이에 뉴먼은 그해 10월 로마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847년 그는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 추기경에 의해 사제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이윽고 필리포 네리가 설립한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했다.

1847년 말 고국으로 돌아온 뉴먼이 당면한 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인 문제였다. 당시 가톨릭은 영국에서 축출당했는지라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고, 성공회는 이미 그를 반역자로 몰아세움으로써 이미 등을 돌렸기 때문에 그 어느 종교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사실상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그는 버밍엄의 메리베일, 스태퍼드셔의 세인트 윌프리드 컬리지 등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다행히 그는 버밍엄 남부의 교외 지역인 에지배스턴에 정착하게 되었다. 1848년 초 뉴먼은 자신이 자리잡게 된 마을에서 버밍엄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해 영국 최초의 오라토리오회를 탄생시켰고, 1849년에는 런던 오라토리오회와 세인트 앤 성당을 설립하는 등 활발한 종교 활동을 이어 갔다.


2.6. 반가톨릭에 맞선 대중 강연[편집]


16세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의 주도로 이루어진 잉글랜드 종교 개혁 이후로 영국에서는 반가톨릭을 기반으로 하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러한 성향이 극에 달했을 때였고,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1850년 교황 비오 9세는 과거에 축출되었던 잉글랜드 가톨릭 교구 재설립을 공표했고, 같은 해 9월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대교구를 설치함과 동시에 니콜라스 와이즈먼을 초대 웨스트민스터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리고 다음 달 10월 7일 와이즈먼은 잉글랜드에서의 가톨릭 복귀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어마무시한 반발을 일으켰는데, 영국의 다수 언론은 교황이 잉글랜드의 사법권에 도전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당시 영국 총리 존 러셀더럼 주교에게 전달하는 공식 서한을 통해 “우리의 정신과 양심에 이질적인 멍에를 씌우는 행위”라고 이를 거세게 비난했다. 삽시간에 퍼진 적대적인 분위기는 곧이어 가톨릭 신부를 향한 폭력과 성당의 가차없는 파괴로 이어졌고, 거리 곳곳에는 “교황쟁이[10]들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고 있었던 존 헨리 뉴먼은 가톨릭 신도들이 공개적인 변론의 최전선에 서기를 촉구하면서 널리 만행되고 있는 박해 행위를 빌미로 체계적인 조직을 세우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는 1851년 2월 가톨릭 옹호를 위한 강연을 제공하는 위원회를 통해서 강연자 존 케입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케입스는 건강상의 이유로 도중에 강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뉴먼은 자신이 강연자로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는 다수의 사람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일부러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버밍엄 곡물 거래소를 강연 장소로 결정했다. 그는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강연의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유지하려고 애썼으며, 참석자들에게는 이와 관련된 홍보물을 나눠 주었다. 그의 강연은 《잉글랜드 가톨릭의 현 위치에 대한 강의(Lectures on the Present Position of Catholics in England)》라는 제목으로 매주마다 이루어졌고, 1851년 6월에 시작해 총 9번 진행되어 같은 해 9월 1일에 끝마쳤다. 뉴먼은 개신교의 시각으로 바라본 가톨릭 교회의 모습과 그로 인한 오해, 그리고 그에 대한 변증을 하는 방식으로 강연했으며, 이후 해당 내용들을 집대성해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으로 편찬했다.


2.7. 교육인으로서의 활동[편집]


존 헨리 뉴먼은 신앙의 권리와 지식의 권리가 함께 존중받는 종교적 영역과 자유로운 사고의 중간 지점이 있음을 굳게 믿었다. 이에 그는 유럽의 주요 가톨릭 대학이 세속화가 되어 가고 있고 대부분의 영미권 대학이 개신교 성향을 띠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는 대학이 이 드넓은 세상에 제 역할을 확실히 수행하려면 교회의 검열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온전히 장려되는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1854년 3월부터 교황 비오 9세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아일랜드의 새로운 가톨릭 대학 설립에 관심을 기울였다.

얼마 뒤 뉴먼은 아일랜드 가톨릭 주교들의 요청에 의해 신설될 예정인 가톨릭 대학의 초대 부총장직을 수행하고자 더블린으로 떠났다. 그는 꼼꼼한 행정가로서 법학, 의학, 철학, 신학과 같은 전공들이 확립되도록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고 구체적인 학제를 편성하는 등 교육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8일에 아일랜드 가톹릭 대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했으며 11월 3일에 강의가 개시되었다. 그는 4년 동안 부총장으로 지내면서 대학 운영의 안정화와 학생 유치에 힘썼고 토론 및 연설 동아리인 리터러리 앤드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11]를 창설하기도 했다. 1858년 부총장직에서 사임한 뉴먼은 자신의 교육 철학을 담은 《대학교의 견해(The Idea of a University)》라는 책을 출간했다.

1859년 뉴먼은 상류층 가문의 자제들이 모여서 함께 수업을 받는 퍼블릭 스쿨처럼 깊고 풍부한 교양을 제공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계획했다. 그는 버밍엄 오라토리오회와 함께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가 제한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오라토리 스쿨을 신설했다. 오라토리 스쿨은 가톨릭을 믿는 귀족 및 신사 가문들의 입소문을 타 단숨에 명문 기숙 학교로 발돋움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가톨릭 이튼’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2.8. 그의 삶을 위한 변론[편집]


1862년 존 헨리 뉴먼은 자신이 영위해 왔던 그간의 종교 생활을 소명하기 위한 자서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가 자서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1864년 1월 성공회광교회파 사제 찰스 킹슬리가 그를 두고 한 발언 때문이었다. 킹슬리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제임스 앤서니 프루드가 쓴 《잉글랜드의 역사(History of England)》에 관한 평을 하면서 “뉴먼 신부는 로마 가톨릭 성직자의 미덕이 진리 자체가 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전반적으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라고 뉴먼의 가톨릭 개종에 대해 넌지시 비꼬아 말했다. 이에 당시 뉴먼의 가까운 법적 조언자였던 변호사 에드워드 배덜리는 킹슬리에게 확실한 반박을 전하라고 그를 격려했다. 이 일을 기점으로 뉴먼과 킹슬리 간의 갑론을박이 몇 차례 오고 갔고, 킹슬리가 여전히 자신이 했던 발언을 철회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뉴먼은 《킹슬리 씨와 뉴먼 박사: 뉴먼 박사가 진리는 미덕이 아님을 가르치는지에 대한 질문의 화답(Mr Kingsley and Dr Newman: a Correspondence on the Question whether Dr Newman teaches that Truth is no Virtue)》이라는 제목을 팸플릿을 출판했다. 이 소책자는 곧이어 대중들의 고무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훗날 신랄한 풍자를 통해 영어라는 언어적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호평을 받았다. 킹슬리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뉴먼이 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뉴먼 박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then does Dr Newman mean?)》라는 제목의 장문의 팸플릿을 발표했다. 하지만 킹슬리의 소책자는 뉴먼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으며, 훗날 빅토리아 시대에 일어난 수사학적으로 논쟁적으로 실패한 사례 중 하나라고 비판을 받았다.

같은 해 뉴먼은 배덜리의 지지에 힘입어 킹슬리의 팸플릿에 대한 답변으로 드디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 《그의 삶을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을 소책자 형식으로 두 달마다 출간했다. 해당 시리즈에는 자신을 가톨릭 교회로 이끈 신념의 이유와 킹슬리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가했던 전체적인 비판에 관해 솔직하게 다루는 내용이 담겨 있어 그동안 영국인들이 뉴먼에게 가졌던 성공회를 배반한 이단자라는 이미지를 상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865년 뉴먼은 격월로 출판된 소책자들을 한 권의 자서전으로 묶어 발표했다.


2.9. 추기경으로 임명되다[편집]


1869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무류성에 관해 논의가 이루어지자 존 헨리 뉴먼은 이를 화두로 삼기엔 아직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이에 그는 가톨릭 버밍엄 주교 윌리엄 버나드 울라톤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를 통해 해당 논의를 추진한 자들을 무례하고 저돌적인 무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뉴먼은 교황무류성에 반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정식으로 결의된 후에는 오히려 그 원칙을 옹호했다. 이렇듯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신학적 소신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870년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집필해 왔던 《동의의 문법(Grammar of Assent)》을 출간했다. 그는 해당 저서를 통해 신앙과 실생활의 관계성을 논함으로써 당시 가톨릭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논증과는 다소 다른 방향을 지닌 내용을 피력했다. 그리고 1877년 그는 과거 성공회에 몸담고 있었을 때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다시 출판하면서 성공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지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두 권의 책에 기존의 원작의 반가톨릭적 주장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덧붙였다.

같은 해 1877년 뉴먼은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측에서 그를 명예 펠로우로 선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해당 컬리지 설립 이후로 최초의 명예 펠로우가 된 사례였으며, 덕분에 그는 무려 32년 만에 자신의 모교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한편 교황 비오 9세의 뒤를 이은 새로운 교황 레오 13세는 당시 뉴먼의 지지자였던 노퍽 공작과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의 성원에 따라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할 준비를 착수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로선 굉장히 이례적인 결정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주교도 아니었고, 로마에 거주하지도 않았으며, 이탈리아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79년 2월 교황청은 뉴먼에게 공식적으로 추기경직을 제안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는 자신을 가장 높은 직급인 주교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지 않을 것, 그리고 둘째는 버밍엄에 계속 머무를 수 있게 할 것이었다. 다행히 교황은 그의 조건을 흔쾌히 수락했으며, 이에 같은 해 5월 12일 뉴먼은 로마의 중심 구역에 위치한 산 조르조 인 벨라브로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2.10. 죽음과 사라진 유골[편집]


추기경으로 서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존 헨리 뉴먼은 노화로 인한 잦은 병치레를 겪기 시작했다. 그는 쇠약해진 신체를 고려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건물에서만 머물렀지만, 옥스퍼드 운동 때부터 함께했던 자신의 오랜 막역지우인 성공회 사제 리처드 윌리엄 처치를 만나러 런던에 위치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간간이 방문하곤 했다. 1880년 4월, 당시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권력에서 물러나자 그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뉴먼은 큰 기쁨을 표했다. 그리고 1886년 그는 자신의 건강이 본격적으로 악화되었음을 직감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889년 성탄절에 마지막 미사를 집전했다. 이후 1890년 8월 11일 뉴먼은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건물에서 눈을 감았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뉴먼의 시신은 세상을 떠난 지 8일 후에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생전에 리틀모어 공동체 시절부터 여정을 함께했던 앰브로즈 세인트 존의 곁에 묻혔다. 유골을 안치해 둔 관의 덮개에는 프랑스의 오라토리오회 소속 주교 프랑수아 드 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추기경 시절의 사목 표어 “마음은 마음에게 말한다(Cor ad cor loquitur)”가 쓰여 있었고, 묘비에는 뉴먼이 죽기 전에 채택한 문구 “그림자와 환영을 넘어 진실 속으로(Ex umbris et imaginibus in veritatem)”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8년 10월 2일 교황청이 뉴먼의 묘를 이장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측은 그의 유골 일부라도 성유물로 삼을 겸 무덤을 드러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관은 해체되어 있었고 그 내부는 나무판자 일부와 자그마한 옷 조각을 제외하고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에 대해 오라토리오회에서는 관이 나무로 만들어졌고 매장된 곳의 토질에 습기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버밍엄 대학교법의학 전문가 존 헌터가 묘지에서 채취한 토양 샘플을 검사해 본 결과, 관이 매장된 시점부터 무덤을 드러낸 시점까지인 약 120여 년의 기간 동안 단순히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유골이 완전히 사라질 과학적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3. 작가이자 신학자로서[편집]


존 헨리 뉴먼은 어렸을 때부터 문학적 소양이 깊어 작가로서의 역량이 매우 뛰어났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활기차고 매력적인 어감을 적극 사용해 자칫하면 과하게 무게감이 느껴질 수 있는 요소를 줄였다. 그의 대표작인 시 《제론티우스의 꿈》은 단테 알리기에리신곡과 유사한 서사적 장치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려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고, 그의 자서전 《그의 삶을 위한 변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함께 종교적·문학적 가치가 높은 참회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영국기자 리처드 홀트 허튼은 뉴먼의 작품들에 관해서 웅장한 개요, 순수한 표현, 그리고 다채로운 문학적 효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호평했고, 아일랜드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는 평소 그의 집필 방식에 자주 존경을 표했으며 영어로 쓰인 산문 중에서는 이를 능가할 작품이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뉴먼은 또한 성공회가톨릭 양측 교회에 영향을 준 신학자로 유명하다. 성공회 사제로 있었던 시절 그는 과도한 개신교적 성향으로 교회의 전통을 상실하고 있는 성공회에 경종을 울린 옥스퍼드 운동을 이끌었고,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초기 교회로부터 계승되고 있는 유구한 교리와 의식 등을 성공회 전례와 신학에 포함해야 한다는 성공회 가톨릭주의를 주창했다. 훗날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그는 신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는데, 주로 과학의 영향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그 시류에 도태되지 않도록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대해 탐구했다[12]. 이러한 그의 개혁적인 기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지대한 영향을 줌으로써 가톨릭 교회가 현대 사회와의 대화 지향적 태도를 가지는 것에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뉴먼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로 구분하는 개념을 개발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 종교는 그리스도교적 계시의 영역 밖에서 얻은 진리를 내포하는 반면에 계시 종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얻은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신성한 지식은 단순히 어느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부분을 관할하는 존재의 은총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발현된 이성의 결과이므로 자연 종교의 진리도 불완전하지만 역시 계시 종교와 동일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4. 사후 공경과 영향[편집]


“오늘날 그는 현대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가르침의 방향과 확실한 지침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더욱 밝은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

“위대한 신앙의 스승이자 영적 지도자로서 그의 고무적인 영향력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인지되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의 관계, 문명 사회 속 계시 종교의 중대한 위치, 교육에 대한 폭넓고 광범위한 접근 방식의 필요성을 파악한 그의 통찰력은 빅토리아 시대영국에서 매우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계몽하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인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 정신과 마음에 중요한 이유를 보여 주는 사람이라면, 뉴먼은 그 칭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그가 남긴 유산은 하나의 교회나 두 교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유산이자 희망과 진리의 유산이며 하느님을 찾는 유산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저스틴 웰비

“그는 용감한 진리의 수호자로 세상에 끼친 그의 영향은 오래 지속될 만큼 막대합니다.”

찰스 3세

1854년 뉴먼이 설립한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는 그가 부총장직을 사임한 이후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려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되어 현재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최상위권 명문 대학교 중 하나로 성장했다.

1878년 옥스퍼드 대학교 학생들은 뉴먼을 존경한다는 뜻으로 뉴먼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의 가톨릭 동아리를 창설했다. 이는 현재 대학 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가톨릭 동아리로 자리잡고 있다.

1883년 미국에서 가톨릭을 믿는 대학생들 사이에 이들의 원활한 종교 활동을 보장하자는 취지로 뉴먼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1893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학생들이 가톨릭 동아리인 펜 가톨릭 뉴먼 커뮤니티를 설립한 것을 기점으로 미국 내 여러 대학에서 각종 가톨릭 단체 및 시설들이 세워졌고 현재 그 수는 2,000개 이상 달한다.

성공회와 가톨릭 양측에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 중 한 명으로서 그의 이름을 딴 신학 중심 학술 강의가 존재한다. 영국에서는 런던에 소재한 세인트 메리 대학교와 이스트 앵글리아 교구 간의 협력으로 진행되는 뉴먼 강연이 있고, 미국에서는 로욜라 대학교 시카고 산하 행크 가톨릭 지적 유산 센터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는 세인트 존 헨리 뉴먼 강연이 있다.


4.1. 시성 과정[편집]


1958년 교황청 시성성[13]잉글랜드가톨릭 교구로부터 제기된 존 헨리 뉴먼의 시성 청원을 받아들인 뒤 심사를 착수했다. 그로부터 약 33년이 지난 1991년에 뉴먼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전구를 통한 기적 사례가 입증되어야 복자가 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2001년 미국 매사추세츠에 거주하는 가톨릭 부제인 잭 설리번이 보스턴의 성당에서 뉴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한 덕분에 그의 만성적인 척추 질환이 말끔히 치료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스턴교구는 곧바로 자체적인 조사를 시작해 2006년 8월 해당 사례에 대한 자료들을 교황청에게 전달했고, 이듬해 2009년 4월 시성성은 교구청의 조사 결과와 추가적인 심사를 바탕으로 설리번의 치유를 기적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복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된 뉴먼은 2010년 9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전구를 통한 추가적인 기적 사례가 증명되어야 성인이 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랐다.

2013년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는 여성 멜리사 비야로보스는 임신 중 하혈이 도무지 멈추지 않자 절박한 심정으로 뉴먼에게 증세를 멈춰 달라는 기도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가 멎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자 시카고교구에서는 해당 사례에 관해 오랜 기간 동안 면밀히 조사한 후 교황청에게 알렸으며, 2019년 2월 시성성은 비야로보스의 치유를 기적으로 인정한다는 교령을 공표했다. 그렇게 뉴먼은 2019년 10월 13일 당시 웨일스 공이었던 찰스 3세와 수백 명의 영국 가톨릭 순례자들이 참석한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성인의 기일을 축일로 삼는 관례에 따라 본래 뉴먼의 축일은 8월 11일이어야 했지만, 이는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를 기념하는 축일과 겹쳐 교황청에서는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날인 10월 9일을 축일로 지정했다.

한편 뉴먼의 시성 소식이 알려지자 성공회에서도 이를 환영하면서 그를 성인 목록에 올렸다. 단, 잉글랜드 국교회에서는 그의 기일인 8월 11일을 축일로 삼고 있는 반면에 미국 성공회에서는 그의 생일인 2월 21일을 축일로 삼고 있다.


4.2. 그의 이름을 딴 시설 및 단체[편집]






5. 어록[편집]


“사는 건 변화하는 것이니, 완벽해지려면 자주 변화해야 합니다.”

“To live is to change, and to be perfect is to change often.”


“아무도 잘못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A man would do nothing if he waited until he could do it so well that no one could find fault.”


“그대의 인생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시작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라.”

“Fear not that thy life shall come to an end, but rather that it shall never have a beginning.”


“계산적인 행동이 영웅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Calculation never made a hero.”


“우리가 어떤 것을 알고 싶다면 많은 것에 대해 무지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We must make up our minds to be ignorant of much, if we would know anything.”


“사전을 논문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뛰어난 기억은 결코 지혜와 동의어가 되지 않습니다.”

“A great memory is never made synonymous with wisdom, any more than a dictionary would be called a treatise.”


“성장은 삶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Growth is the only evidence of life.”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We can believe what we choose. We are answerable for what we choose to believe.”


“우리가 사적인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유일한 준비 운동입니다.”

“The love of our private friends is the only preparatory exercise for the love of all men.”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행동합시다.”

“Let us act on what we have, since we have not what we wish.”


“만 가지의 어려움은 단 하나의 의심조차 만들지 않습니다.”

“Ten thousand difficulties do not make one doubt.”



6. 대표작[편집]



6.1. 성공회 시절[편집]


  • 기적에 대한 논고(Essays on Miracles, 1826, 1843)
  • 4세기의 아리우스주의자들(The Arians of the Fourth Century, 1833)
  • 시국 소책자(Tracts for the Times, 1833~1841)
  • 교구 설교와 일반 설교(Parochial and Plain Sermons, 1834~1843)
  • 리라 아포스톨리카(Lyra Apostolica, 1836)
  • 교회의 예언적 직분에 대하여(On the Prophetical Office of the Church, 1837)
  • 의인에 대한 강의(Lectures on Justification, 1838)
  • 성 아타나시오의 논문들(Select Treatises of St. Athanasius, 1842, 1844)
  • 잉글랜드 성인들의 일생(Lives of the English Saints, 1843~1844)
  • 옥스퍼드 대학교 설교(Oxford University Sermons, 1843)
  • 오늘의 주제에 관한 설교(Sermons on Subjects of the Day, 1843)


6.2. 가톨릭 시절[편집]


  •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대한 논고(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 1845)
  • 반가톨릭 발언들의 철회(Retractation of Anti-Catholic Statements, 1845)
  • 손실과 이익(Loss and Gain, 1848)
  • 신앙과 편견 그리고 미공개 설교(Faith and Prejudice and Other Unpublished Sermons, 1848~1873)
  • 혼합된 집회에 대한 담화(Discourses to Mixed Congregations, 1849)
  • 성공회의 어려움(Difficulties of Anglicans, 1850)
  • 잉글랜드 가톨릭의 현 위치(The Present Position of Catholics in England, 1851)
  • 대학교의 견해(The Idea of a University, 1852, 1858)
  • 카테드라 셈피테르나(Cathedra Sempiterna, 1852)
  • 칼리스타(Callista, 1855)
  • 그리스도교 교리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들과 상담하는 것에 대하여(On Consulting the Faithful in Matters of Christian Doctrine, 1859)
  • 그의 삶을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 1864)
  • 퓨지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Dr. Pusey, 1865)
  • 제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 1865)
  • 동의의 문법(Grammar of Assent, 1870)
  • 다양한 행사에서 이루어진 설교(Sermons Preached on Various Occasions, 1874)
  • 노퍽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the Duke of Norfolk, 1875)
  • 다섯 통의 편지(Five Letters, 1875)
  • 성 아타나시오의 논문들(Select Treatises of St. Athanasius, 1881)
  •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1884)
  • 종교적 오류의 발전(Development of Religious Error, 1885)


7. 여담[편집]


  • 영국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는 뉴먼의 시 《제론티우스의 꿈》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해당 작품을 바탕으로 동명의 음악을 창작했다.

  • J. R. R. 톨킨은 소싯적에 뉴먼의 제자이자 버밍엄 오라토리오회 소속 신부 프랜시스 제이비어 모건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모건은 어머니를 잃은 톨킨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사비를 들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고, 훗날 톨킨은 자신의 아들 마이클에게 쓴 편지에서 신부에 대해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묘사했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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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의 전신 대학이다.[2] 초기 교회의 명맥을 계승하고 있는 가톨릭처럼 사도 때부터 존재했던 유구한 그리스도교 전통 신앙 및 의식 등을 복원함으로써 이를 성공회 전례와 신학에 포함해 보편교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종교 사상.[3] 특히 가톨릭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 영국에서 배출된, 순교자가 아닌 첫 번째 성인이다.[4] 어린 뉴먼을 가르쳤던 수학 교사는 유명 생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의 아버지이자 유명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증조할아버지인 조지 헉슬리였다.[5] 성공회, 특히 잉글랜드 국교회의 규율에 따르지 않는 칼뱅주의 신도들을 통칭하며, 청교도라는 이명으로도 불렸다.[6] 현재에도 영국 의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임명 인가와 같은 성공회에 대한 권한을 일부 가지고 있지만, 예전과는 달리 이는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7] 당시 영국의 영토였다.[8] 이탈리아의 신학자 렐리오 소치니와 파우스토 소치니로부터 촉발된 극단적인 교리 체계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창조 전 존재, 원죄, 그리고 속죄를 부인했다.[9] 사목 활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인근의 여러 본당 사목구들을 결합시켜 지구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 감독을 맡긴 구역을 일컫는다.[10] 영어로는 ‘Popery’로 당시에 가톨릭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표현이었다.[11] 원문으로는 ‘Literary and Historical Society’로 현재 아일랜드 가톨릭 대학교의 후계 대학인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동아리로 자리잡고 있다.[12] 일례로 뉴먼은 당시 세간에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찰스 다윈진화론을 긍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생물의 진화를 하느님의 설계에 속한다고 보았다.[13] Congregatio de Causis Sanctorum. 교황청 산하의 행정 기구로 성인 후보자의 덕목에 대한 진술들과 기적 사례 조사를 통해 시복부터 시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감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