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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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1. 2006 ~ 2008 시즌
2.2. 2009 시즌
2.3. 2010 시즌
2.4. 2011 시즌
2.4.1. 포스트시즌
2.5. 2012 시즌
2.6. 2013~2014 시즌
2.7. 2015 시즌
2.8. 2016 시즌
2.8.1. 4월
2.8.2. 5월
2.8.3. 6월
2.8.4. 7월
2.8.5. 8월
2.9. 2017 시즌
3.2. 2019 시즌 - 은퇴
4. 국가대표 경력
4.1. 2007 대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 개요[편집]



2.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2.1. 2006 ~ 2008 시즌[편집]


파일:attachment/한기주/hgj.jpg
[1]

프로 선수 시절엔 부상과 부진으로 '먹기주'라는 별명까지 얻고 재활병동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광주동성고 시절에는 '야구의 한기주, 축구의 박주영'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의 역대급 투수 유망주였는데, 150km/h를 거뜬히 넘는 강속구에 다양한 변화구까지 갖췄었고, 이때까지의 한기주는 메이저리그급 포텐셜이라는 말이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2] 언론에서 처음으로 100년만에 나온 선수라는 칭호를 붙여줄 정도였다.[3] 고교 시절 공식 최고구속은 153km/h이었지만 [4] 비공식 지역예선에서 155km/h를 기록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교 3년동안 실점은 고작 4점으로, 당연히 방어율은 0점대. 한국 야구계는 물론 뉴욕 양키스에서도 계약금으로 25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시하는 등[5] 미국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연봉 2000만원과 계약금 10억을 받고 KIA에 입단했다.[6][7][8]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이때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고 기아에 입단한 건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수가 되었다.[9]

전해 꼴찌를 한 KIA에서 선발 자원으로 데리고 왔고 언론에서도 한기주가 KIA의 당당한 3선발로서 KIA의 4강을 위해 그가 분전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기대가 컸으며 실제로 한기주의 활약으로 2006년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데뷔 첫 해 3점대 방어율에 10승을 찍었지만[10] 본인의 한계투구수 문제와[11] 불펜진이 약했던 팀 특성상 마무리 전향을 하게 되었다. 팀에서 1998년 임창용 이후에 최초로 20세이브 이상의 기록을 세운 투수로 앞으로의 모습을 기대받았다. 특히, 2007년, 2008년 2년간 연속 25세이브 이상을 올렸으며 2008년엔 1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다. 어떻게 보면 참 비운의 투수다. 많은 기대를 받고 프로에 입문하고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선발에는 류현진, 마무리에서는 오승환이라는 거대한 산에 밀린 판이니..[12]

2006 시즌 기록
구분

출장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선발
KIA
17
82⅓
3
10
-
-
.231
4.92
95
7
47
43
50
45
1.60
구원
27
58⅓
7
1
1
8
.875
0.93
22
1
17
35
7
6
0.63

2006년 8월 9일 한화전에서 마지막 선발 등판을 하기까지 간간이 구원 등판으로 2경기에 출전한 것을 제외하면 선발투수로서 17경기 3승 10패 평균자책 4.92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후 8월 12일 SK전에서 완전히 구원투수로 전업하였다. 구원투수로 27경기 7승 1패 1세이브 8홀드 평균자책 0.93으로 불펜으론 비교적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2006 시즌 합산 성적으로 44경기 10승 11패 1세이브 8홀드 평균자책 3.26을 거두면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인인 것을 감안하고 괜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하필 같은 해에 괴물 같이 등장한 동기생대졸 신인에 밀려 신인왕 수상엔 실패했다. 사실 한기주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존재하지만, 애시당초 2006년 신인들 중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한기주와 유원상[13]이었으며, 2006년 동기였던 류현진이 너무 미쳤을 뿐 2006년 고졸신인 동기들로만 따져보면 류현진 다음의 성적이다. 장원삼도 있기는 하지만 장원삼은 대졸이니 제외.[14] 2006년 신인들 중 롯데의 류현진 대신 뽑은 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6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한화와의 경기 9회말 무사 1루 상태에서 보크를 범해서 무사 2루로 만들었고, 그 후 만루채우기 작전을 했지만 희생플라이로 팀이 패배했던 전적이 있었다.[15] 이로 인해 생긴 별명은 10억 보크. 참고로, 2007 시즌 이 경기에서도 한 건 했던 선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2006 시즌 후반기에 애니콜로 불펜에서 상당한 이닝을 던지면서 KIA의 준PO행을 지켜냈으며[16][17], 2008 시즌에는 삼성의 오승환, 한화의 브래드 토마스, SK의 정대현과 더불어 믿을 수 있는 마무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사실 시즌 중 성적으로만 보면 한기주가 부진하던 정대현이나 오승환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기점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2.2. 2009 시즌[편집]


올림픽 이후 그의 마무리는 팬에게는 긴장을, 타인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의 성적이 어떻게 나오든 불기주의 오명을 벗기에는 올림픽에서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다. 심지어 마그마 기주, 용(암)기주, 등의 별명이 붙여졌다. [18]

성적은 신통치 않아 무려 59일만에 시즌 3세이브를 올렸고 들쭉날쭉한 활약을 펼치며 블론세이브를 쌓아나갔다. 7월 4일 이도형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면서 한화 이글스의 12연패를 마무리지었던 그의 활약에 KIA의 한 팬은 그에게 시를 헌정했다.

화 팬 여러분

뻐해

세요 !!


계속된 방화에 셋업맨으로 보직이 바뀌기도 했다가, 어깨와 팔꿈치에 문제를 보여 2군으로 내려가 재활을 거쳐 09년 9월 15일부터 1군에 복귀해 얼마 뒤 승리투수가 되기도 했다. 2009년 10월 19일 KS 기간 중 3차전에선 서재응이 만들어놓은 무사 만루상황에 등판하여 1이닝을 던지고 내려왔다. 하지만 24일 7차전에선 위기상황에 등판해서 당 이닝은 잘 막았지만 다음 이닝에 다시 불을 지르고 내려왔다.

맥심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10억 계약금은 루머이며, 올림픽 이후에 악플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2010 시즌에는 선발로 뛰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본인도 여러 소문들로 마음 고생이 심했던걸로 보인다.

나중에야 알려진 거지만, 한기주는 이미 고교 시절부터 혹사를 당했고, 입단해서는 하필 서정환이 감독이라 관리는커녕 141이닝 가까이 던지는 등[19] 상당히 혹사당했다. 마무리로 전향한 2007~2008년은 합해서 101경기 128.1이닝을 던졌다.[20] 게다가 국가대표로까지 차출되었었으니 결국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기주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2009년 들어와 불꽃남자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합류했고 팀이 7차전 승부 끝에 우승을 달성하며 한기주도 선수 시절 유일한 우승 반지를 얻은 것이 위안점.[21]

2.3. 2010 시즌[편집]


박동희 기자가 모 프로그램에서 KIA를 비판하면서 "팔꿈치가 아픈데도 던지게 하는 투수가 있다"라고 했었는데, 2009년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박동희 기자와 조범현 감독의 질의응답시간에 박동희 기자가 취재내용을 밝히고, 이 사실을 조범현 감독이 인정함으로써 기존의 떡밥이 사실로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한기주의 팔꿈치는 고교시절부터 정상이 아니었던 상황으로, 당시 상태로는 수술 없이 재활만으로 40구 정도를 던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선발 전환은 수술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것. 당시에도 이미 팔 자체는 너덜너덜했던 상황이었으며[22] 수술의 필요성은 있지만 그게 시급하지도 않아 애매했던 것이 문제였다.

이로 보았을 때, 올림픽 이후 부진해진 것도 팔꿈치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해서 페이스가 떨어졌던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2009년 7월 16일 목동 히어로즈전 이후에 2군으로 내려갔고 조브 클리닉에 팔꿈치 사진을 의뢰한 결과, 수술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고 토미 존 서저리에 들어감에 따라서 2010 시즌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23] 이 수술이 성공하기만 하면 160km/h의 공을 뿌려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한기주가 아직 젊고 병역 문제도 해결하였다는 점 덕분에 수술로 가닥을 잡았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래도 수술 전에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는 땄으니 다행인 듯.

본인이 엄청나게 노력을 했는지 복귀 시점이 매우 빨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조범현 감독은 애초에 2011년 중반부터 투입 가능하다고 말했다가, 2010년 8월에는 2010년 9월 투입도 고려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7월에 불펜 투구로 100개의 공을 던졌는데 무리없이 공을 뿌렸다고 한다. 당시 본인 말에 의하면 팔꿈치 통증은 없고 단지 어깨가 조금 뻐근한 정도라고..

3군에서 선발 등판을 했는데 안정적인 투구를 보여주었다. 구속은 147km/h까지 나왔다. 조범현 감독은 겨우내 훈련을 시켜서 2011년 시즌에는 선발 기회를 줄까 생각중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2010년 11월에 팔꿈치에 염증이 생겨서 투구를 쉬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며 원래 페이스로 몸을 만들어가면 2011 시즌 개막에 맞출 수 있다고 한다.


2.4. 2011 시즌[편집]


하지만 끝내 개막 엔트리에는 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2011년 4월 21일 기사에서 8-90개의 투구수로 불펜 피칭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이 나왔다. 조범현 감독은 몸이 완전해진 뒤에 올리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김진우보다는 빨리 1군에 올라올 가능성이 있다.

4월 28일 불펜에서 불펜피칭을 했다. 총 80개의 공을 던졌고 팔꿈치 통증이 전혀 없다고 한다. 구단에서는 점진적으로 투구수를 늘리면서 일단 6월 중순 2군 실전에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군 진입은 7월쯤에 가능할것이라고. 80구 이상의 불펜 피칭을 한 것으로 볼 때 1군에 올라오면 선발로 뛸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7월 14일, 1,799일만에 선발등판을 했다. 상대팀 투수는 두산김선우. 선발 등판하여 3이닝을 소화했고 투구수는 60개, 2피안타, 3탈삼진, 3사사구, 2실점, 평균자책점은 6.00을 기록했다. 이날 최고 구속은 2회 초 양의지에게 던진 151.3km/h(직구)로 무난한 피칭을 선보였으나 안치홍의 에러가 실점으로 이어지면서 역전을 허용하였고, 이어 등판한 차정민박경태의 잇단 방화실점으로 결국 스코어 11:2 경기가 끝나면서 패전투수가 되었다.

7월 17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이상화에 이어 구원 등판하여 3이닝동안 안타, 4사구 없이 무실점으로 깔끔히 막았다. 무려 756일만에 거둔 세이브.

7월 20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손영민에 이어 구원 등판하여 2⅔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고 2세이브째를 거두었다.

7월 26일 광주 삼성전에서는 아웃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한 채 3실점하며 트레비스 블랙클리의 승을 날려버렸고 본인은 패전투수가 되었다. 베이징의 추억

8월 11일 광주 LG전에서는 8회초 1사 만루상황에 등판해 잉금님을 병살처리하며 위기를 넘겼고, 9회를 땅볼, 삼진, 삼진으로 깔끔하게 틀어막으며 세이브를 챙겼다.

8월 19일 목동 넥센전에서는 9회말에 폭투에 이어 장기영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퐈이야 패전투수가 되었다. 동시에 팀도 5연패하면서 3위로 밀려났다.

8월 26일 광주 SK전에서 서재응의 뒤를 이어 8회부터 등판했다. 8회는 삼진 2개와 뜬공으로 처리하고, 9회는 병살타를 이끌어내며 팀의 1점 차 우위를 지켜냈다. 이것으로 시즌 6번째 세이브.

9월 11일 잠실 두산전 마지막 투수로 올라와서 1이닝 1실점으로 게임을 마무리지었다. 4점차 리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이브는 기록하지 못했다.

9월 14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6:3으로 앞서고 있던 9회말에 등장하여 최진행에게 볼넷을, 대타 고동진에게 2루타를 내주어 순식간에 무사 2, 3루의 위기를 만들었다. 이대수를 우익수 플라이, 이여상을 투수 땅볼 아웃으로 처리하며 2사 2, 3루를 만들어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으나 한상훈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고 점수를 6:5까지 만들면서 작가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가르시아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등단에 실패 1점차로 경기를 마무리지으며 1이닝 23개 투구수 2피안타 1볼넷 2실점 2자책점을 기록하고 세이브를 챙겼다.

9월 24일 광주 두산전에서 스코어 2:9로 크게 이기고 있던 9회초에 등판하여 난타당하며 2실점을 내주면서 7점차에서도 KIA팬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며 작가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9월 29일 잠실 두산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포스트시즌 3선발을 대비한 등판에서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1,936일만에 선발승을 따냈다. 상대가 내년 시즌 대비에 들어간 두산이란 점을 감안해도 괜찮은 편이라는 평가가 많다. 역시 원하던 선발에서 더 잘던지나! 다만 포스트시즌에서도 이런 호투가 가능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

10월 4일 광주 SK전에서도 선발투수로 나와서 호투를 했지만 도중에 물집이 잡히면서 2이닝만에 강판되었다.


2.4.1. 포스트시즌[편집]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2011년 10월 9일 인천 문학 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스코어 2:2인 7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0회말까지 무실점으로 꾸역구역 버텼지만, 11회말 2사 만루에서 결국 이호준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 날 한기주는 4이닝 72투구수 2피안타 5볼넷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패전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2:3으로 졌다.

야갤에서는 '한작가님 필력은 변함이 없네요' 같은 드립을 쳤지만 투구 내용을 보면 필력 운운하기에는 너무하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불안불안 하긴 했어도 잘 막아내긴 했으며 11회에 들어서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도 불구하고 조범현 감독이 투수 교체를 안한 것이 패인이었다. 그만큼 믿을 불펜이 없어

한기주는 201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5⅔이닝 5피안타 6볼넷 1탈삼진 3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4.76, 1패를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2.5. 2012 시즌[편집]


개막 후 3경기에 등판해 자책점 없이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어깨 염증 증세를 보이며 4월 19일자로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최소 3주의 재활기간이 예상된다는데, 가뜩이나 부상병동인 KIA 입장에서 주전 마무리의 이탈은 굉장히 뼈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다가 5월 21일에 1군에 복귀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상 KIA 성적이 막장인 상황이라 마운드에라도 세우자는 선 감독의 생각이었던 듯.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은 한기주의 몸상태. 150km/h를 찍던 구속이 141km/h정도로 떨어진 상태다. 한기주는 선발을 위해서 완급조절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일각에서는 한기주의 팔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탓에 구위가 떨어진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였다.

복귀 후 불펜 투수로 뛰면서 향상된 제구력으로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이전의 불같은 광속구 대신 맞춰잡는 피칭 위주로 경기를 이끌었다. 한기주 특유의 구속이 실종된 상태라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선동열 감독도 구속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며 질책하였다. 전문가들은 어깨 부상등의 여파로 본인이 이전같은 속구를 뿌리는데 부담을 느끼는게 아닌가라고 보았다.

5월 22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6차전, 팀이 2:0으로 뒤지던 6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등판, 하주석을 1루수 땅볼로 잡고 정범모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했지만 강동우를 중견수 플라이 아웃으로 잡아내면서 한화의 추가 득점을 막았다. 이후 한화의 막장수비가 터지면서 KIA는 3:4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5월 24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8차전에서는 팀이 3:7로 경기를 리드하는 상황에서 선발로 쾌투한 앤서니 르루에 이어서 7회초에 등판하였다. 2이닝동안 땅볼로만 다섯 타자를 잡아내고, 유일하게 장성호는 중견수 뜬공으로 잡아내면서 승리를 지켰다.

6월 7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8차전에서 팀이 3:5로 도망가던 9회초에 마무리로 등판하였다. 진갑용은 2루수 땅볼로 잡았지만 조동찬에게 안타를 허용하였다. 이후 조영훈을 삼진으로 잡은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배영섭박한이에게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1점을 내주고 말았다. 다행히 정형식을 3루 땅볼로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하였다. 숨길 수 없는 작가본능 이날 한기주는 20개의 공을 던지며 6타수 3피안타 1탈삼진 1실점 1자책을 기록하며 세이브를 챙겼다.

6월 9일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5차전, 팀이 4:2로 이기고 있던 10회말에 마무리로 등판하였다. 그리고 또 집필을 했다. 박준서에게 2루타를 맞은 후 황진수에게 희생진루타를 허용했으며, 이승화의 직선타는 박기남이 잘 처리해줬으나 전준우가 안타를 때려내며 1점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갑자기 영점을 잡지 못하며 김주찬에게 볼넷을 내줬고, 손아섭에게도 볼 2개를 내줬지만 이후 손아섭의 타구를 1루수 최희섭이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날 한기주는 17개의 공을 던지며 5타수 2피안타 1볼넷 1실점 1자책을 기록하며 세이브를 챙겼다.

6월 22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7차전에선 7회 1사에서 박지훈이 남겨둔 1루주자 한명을 이어받고선 4타자에게 3안타를 얻어맞으면서 0.1이닝 2자책으로 재역전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 사고를 치고 다음날엔 엄지손가락 아프다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이후 2군에서 머물다가 8월경 다시 1군에 콜업되었다.

8월 16일 잠실야구장 LG 트윈스와의 팀간 1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2:4로 뒤쫓던 6회말 등판하였으나, 제대로 불을 지르고 말았다. 6회말 큰 이병규에게 1타점 희생 플라이, 이진영에게 2타점을 허용한 후 7회말 김용의에게 솔로 홈런을 맞기까지.. 이후 타석에 들어선 오지환에게 빈볼성 공을 계속 날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알고보면 빈볼도 한번에 못던지는 신세다. 결국 오지환을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시키며 분위기가 이상해지나 싶었으나 다행히 오지환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큰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8회말에 투수는 임준혁으로 교체되었다. 제구 잡는다면서 빈볼도 제대로 못 맞췄다는 게 함정 이 날은 2이닝 12타자 38투구수 9타수 4피안타 1피홈런 2사사구 2탈삼진 4실점 3자책점 기록하였고 팀은 3:10으로 크게 패하였다.

결국 이 날 이후로 1군에서는 물론 2군에서조차 실종되었다.

팀은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지만, 선동열 감독은 아예 한기주를 2013년 시즌 전력에서 제외된다고 가정하고 내년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10월 16일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아쇠 수지증후군이 의심된다고. 한기주, 손가락 검진 위해 미국으로 출국 본인에게다 팬들에게나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2.6. 2013~2014 시즌[편집]


선동열 감독은 2013 시즌을 준비하면서 처음부터 한기주를 전력외로 분류, 한기주의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재활에 몰두하게끔 배려하는 상황이었으나 이번에는 어깨 회전근 파열이라는 야구 선수에게는, 특히 투수에게는 선수생명 자체가 불가능한 치명적인 부상소식이 전해지면서 더더욱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결국 또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 수술후 재활에만 1-2년이 걸린다고 하여 사실상 2013 시즌은 아웃되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2015 시즌에야 복귀할수 있을 전망이다.

2013-2014년 비 시즌기간동안 호프집에서 김현수, 안치홍, 이원석, 황재균과 함께 자선활동을 했는데 살이 엄청나게 불어서 팬들이 상당히 걱정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자.사진으로 보자2.[24]

SBS 스포츠 중계석을 방문해서 근황을 전했는데, 현재 캐치볼하는 단계까지 재활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2.7. 2015 시즌[편집]


SK 와이번스 2군과의 연습경기에서 첫 실전투구를 가졌다. 최고구속은 142km/h, 15구 1 1/3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했다.

퓨처스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였고, 4월 23일 화성 히어로즈에게 5이닝 1실점, 4월 30일 상무 피닉스에게 2이닝 5실점, 5월 6일 고양 다이노스에게 5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들쑥날쑥 하는 중. 상무에 1군급 전력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현재 컨디션으로 1군에 오르기에는 무리인 듯 보여진다. 현재까지 최고구속은 고양전(5월 6일)에서 기록한 144km/h.

그리고 2015년 7월 12일 드디어 1군에 복귀했다.

2015년 7월 16일 LG전 8회초에 1,064일만에 등판하여 최고구속 144km/h를 기록하고 1이닝 1피안타 1K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미 이 시점에 KIA가 1-15로 LG를 매우 크게 이기던 중이라 이동근 캐스터와 이순철 해설이 대놓고 만담을 했었다. 이 와중에 2014년에 이순철을 찾아온 장면이 방영된 건 덤이다.

141을 바깥쪽에 찔러넣습니다. 삼진! 주자를 내보내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한기주선수 1064일만의 1군 등판, 야구 두번째 인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 이동근 캐스터


7월 21일 삼성전에서는 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투수로 나와서 1 2/3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그 후로 주로 패전처리로 크게 이기거나 지는 상황에 1이닝 정도씩 등판하며 3점대 초중반 정도의 ERA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는 무리시키지 않고 실전감각을 찾게 할 요량인듯. 긴 재활을 마치고 첫 실전투구를 한 해에 1군 진입이라는 성과를 내어,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고 투구할 다음 시즌이 기대된다.


2.8. 2016 시즌[편집]


4년만에 전지훈련에 참가한다고 한다. 오래간 만에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시범경기에서 연이은 호투로 곽정철과 함께 팬들이 기대하고 있다.


2.8.1. 4월[편집]


4월 12일, 3이닝을 3BB 3K 무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한기주에게는 부상으로 기나긴 터널을 지나 무려 1462일만의 승리를 거뒀으니 더욱 의미가 깊은 승리라 할 수 있겠다.

4월 15일 2이닝 1K 1볼넷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는데 1,401일만의 세이브라서 그런지 승리에 이어 뜻깊은 세이브이다.

4월 23일 토요일,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다.무려 1,663일만의 선발 등판이다![25] 그동안의 좋은 불펜 피칭으로 기대하는 팬들과 갑작스러운 선발 전환으로 우려가 많은 팬들로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KIA 타선이 대폭발하며 롯데 투수를 압박했고, 한기주는 5이닝 4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4월 29일 금요일 두산과의 홈경기에 선발로 등판하여 5⅔이닝을 1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선발승을 챙겼다. 특히 이날은 한기주의 생일이었기에 더욱 뜻깊은 승리였다.

2.8.2. 5월[편집]


2016년 5월 6일 넥센전에서 만루포를 두 번 맞으며 마이너 버전 한만두를 달성하였다. 이날 구장은 모처럼 매진이 되었는데 한기주가 만루포 2개와 셀 수 없는 볼넷을 던지며 교수님에게 2점홈런까지 허용, 총 3.2이닝에 13실점을 하며 무너졌다. 아직 부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었고 야구란게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법이니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오늘 경기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잘 분석해서 다음 등판때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사실 1회에 이미 박동원에게 만루포를 얻어맞으면서 강판당할 만한 상황은 벌어졌으나, 점수차가 많이 벌어지기도 했고 한기주의 투구수에도 여유가 있어 다소 무리하게 끌고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회 대니 돈에게까지 만루홈런을 맞고도 교체하지 않고 서건창에게 투런까지 맞도록 내버려 둔 것은 재활을 이제 막 끝내고 돌아온 투수에게는 다소 가혹해 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경기 해설에 따르면 한기주의 개인 한 경기 최다 실점은 2006년에 기록한 6점이었는데, 오늘 경기로 13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김주형 등 야수들이 눈이 썩는 수비를 펼치고도 실책으로 기록이 되지 않아 죄다 한기주의 자책점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KBO 역사상 세 번째 한만두를 기록했다. 참고로 중계투수가 더 잘 던졌다. 타선이 못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 대패를 했다. 사실 이 경기에선 부진한 수비와 머뭇거리는 주루, 선발 가릴 것 없이 모두 못했다.

5월 12일 kt전에서도 이진영, 마르테에게 2점 홈런을 맞는 등 3이닝 6피안타 5실점 5자책으로 또다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팀이 3회말에 동점을 만들어 패전투수가 되진 않았다.

5월 27일 NC전에서도 4.1이닝 8피안타 5실점으로 시원하게 털렸다. 이쯤 되면 4월에 호투를 했던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2.8.3. 6월[편집]


결국 선발 전환은 실패라고 생각했는지 이후론 계투로 나왔으나 여전히 좋지 못한 투구 내용을 보이던 중 6월 14일 두산전에서 제대로 불을 지르며 역전패의 시발점이 되었다. 9회 1사 12루 상황에서 최근 컨디션을 봤을때 정말 뜬끔 없이 한기주가 나왔다.민병헌을 어찌어찌 잡아냈지만,곧바로 김재환에게 역전 쓰리런을 맞고 에반스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된다. 이 때 김재환에게 홈런을 맞은 게 스탯티즈 선정 2016년 시즌 결정적인 장면 1위로 꼽히고 말았다.


2.8.4. 7월[편집]


7월들어서는 패전처리나 크게 리드하는 상황에서 가비지 이닝을 먹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투구 내용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26일 kt전에서 147km 속구를 던지는걸 보고 새삼 야잘잘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주었다.

28일 선발이었던 홍건희가 3이닝을 던진 뒤 가슴 근육통을 느껴 강판되어 갑작스럽게 투입되었는데 3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냈고, 팀은 3:9로 승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7월들어 2.31의 괜찮은 방어율을 보여주고 있지만 운빨로 꾸역꾸역 막아낸 경우가 많은데다 패전조로 등판하는 경우가 많아 스탯을 숫자 그대로 믿기에는 거품이 좀 끼어 있는 감이 있다. 하지만 패전조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투구를 보여주는 중. 특히나 뻥튀기된 방어율의 대부분은 선발등판때 생긴 점수이고, 불펜으로 나왔을 때의 방어율만 계산하면 무려 2.12이다.

2.8.5. 8월[편집]


8월 12일 넥센전에서 8:2로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9회에 올라 만루를 만들며 마무리인 임창용을 소환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그나마 임창용이 병살로 마무리해서 실점은 없었다.


2.9. 2017 시즌[편집]


2월 16일,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허벅지 햄스트링 부상으로 조기귀국했다. 이후 부상을 회복하고 6월달부터 퓨처스리그에서 뛰었다. 1군에 올라오지는 못하고 퓨처스리그에서만 13게임에 출장하여 1승 1홀드 평균자책점 5.00의 성적을 거두고 시즌을 마감하였다.


3.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11월 29일, 갑작스럽게 외야수 이영욱과의 1:1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본인의 요청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 KIA 타이거즈에서 뛰던 신용운도 삼성 이적 후에 STC에서 재활 끝에 팀의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하면서 우승반지까지 획득했었던 사례가 있었기에, 과연 STC가 한기주를 살려낼지 관심거리라고 할 수 있다.[26][27]

동성고 시절부터 이어져온 혹사, 그리고 긴 재활과 다시 마운드 위에 서는 모습까지 모든 것을 지켜봐왔던 KIA 팬들에게는 이 트레이드가 가슴 아프기만 하다.[28] 삼성엔 그 유명한 STC가 있고[29], 선수 본인이 직접 요청한 트레이드이기도 하니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대해보자. KIA 팬들 역시 신용운처럼 살아나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꼭 부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애초 예상과 달리 STC에 입소하지 않았다.[30]

3.1. 2018 시즌[편집]


꺼지지 않는 불꽃,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꾼다

-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의 한기주 소개글.

스프링캠프때부터 4월 정도까지는 심창민-장필준과 함께 삼성 필승조를(?!) 맡을 투수로 평가받기까지 했다. 이때 필승조 셋을 묶어 한심장 트리오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4월 17일 롯데전이 끝나고 나서 시즌 방어율은 무려 1.04였다[31]. 그러나 18일 롯데전에서 천적 이대호에게 3점짜리 끝내기 홈런을 맞고 시즌 방어율이 4.00으로 치솟음과 동시에 한기주의 패전조 생활이 시작됐다.

그렇게 점점 마당쇠처럼 구르는 날이 많아지더니 5월 19일 고척 넥센전에서는 무려 749일만에 선발로 등판하기도 했다 [32] 마지막 1군 등판은 7월 12일 롯데전[33]이 마지막.

시즌 성적은 33경기(1선발) 1승 4패 3홀드 방어율 6.69. WAR은 -0.04지만 KIA로 트레이드된 이영욱(-0.34)보다는 그래도 나은 성적을 내고 있다.[34][35]

트레이드로 기아에 이적했지만 1할대의 초라한 성적을 내고 방출당한 이영욱에 반해 3~4월의 모습 때문인지 팀에서 아직은 쓸 생각이 있는듯 하다.

한기주/2018년 문서 참조.


3.2. 2019 시즌 - 은퇴[편집]


이학주가 2차 1라운드로 삼성에 입단하면서 어색한 만남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 제외되었으며 5월 초순 기준 퓨처스리그 등판도 아직 없다. 그 이후에도 퓨처스 등판이 없었으며, 시즌 후 방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선언했다. # 은퇴 후 인터뷰에 의하면 만세를 못할 정도로 어깨 상태가 좋지 못한 듯. 재활을 하면서 팔을 내려도 통증이 지속되어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꼈다고 한다. 혹사 논란에 대해서는 자신이 관리를 잘못한 탓이라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

4. 국가대표 경력[편집]



4.1. 2007 대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자책점
4구
삼진
상세
1
0
1
0.00
0
0
0
0
0
0
0
2
1
-
한기주는 2006년 규정이닝 + 3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KBO 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프로 2년차 시즌에 광속구를 살리기 위해 전업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자마자 리그 탑 클로저로 거듭난 한기주는 활약을 인정받아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된다. 자신의 커리어 첫 A대표팀 출전이었다.

당시 대회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겸한 대회였다. 대한민국대만, 일본을 꺾어 우승을 차지해 올림픽 본선행을 확정짓는 것이 목표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4년전 본 대회에서 겪은 샷포로 참사를 만회하고자 했다.

신예 한기주는 많은 등판 기회를 얻진 못했다. 하지만 딱 한번의 등판기회를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편 대한민국필리핀, 대만을 잡아내며 4년전의 설욕에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에 패하며 대회 준우승에 그첬다.


4.2.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자책점
4구
삼진
상세
3
0
2⅓
19.31
1
0
0
0
7
5
5
2
3

파일:한기주99.9.jpg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보이는 실적으로 한작가라고 불리며 선수단 중 제일 많이 까였다. 흡사 보는 사람이 애간장이 타들어가다 못해 몸의 피가 싹 말라들어가는 소설을 쓰듯이 미국전, 일본전, 대만전에서 참담한 방화로 8월 17일까지의 방어율은 무려 99.9. 이는 표기할 수 없어서 이랬던 것인데, 사실 실점을 했지만 아웃은 한 번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 방어율은 무한대가 된다.[36] 올림픽 본선 중 일본전 및 대만전에서의 모습이 왜 한기주가 한작가 소리를 들었는지 잘 알 수 있는 경기.

이렇게 얻어맞은 이유는 포심 패스트볼이 구속만 빠를 뿐 구위가 떨어지고 변화 없이 너무 한 방향으로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작대기 직구. 참고로, 국가대표로 뽑힐 프로선수 정도면 공만 빨라선 잡을 수 없을 뿐더러 작대기 직구는 일단 제구 안 되면 그걸로 끝이다. 게다가 포심 외의 패턴은 단 1개. 한마디로 말해서 작대기 직구 아니면 변화구 한 종류 이렇게 2가지 패턴만 구사한다는 말인데, 스트라이크를 잡을 작대기 직구의 구위가 상당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던지는 족족 배트에 맞기 딱 좋았다.

다만 훗날 스톡킹에서 밝히길 베이징에 가기 전엔 같은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 [37], 정대현 중에서도 제일 볼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베이징에 가서 급작스런 컨디션 난조로 인해 아무리 세게 던져도 시속이 145km/h를 넘지 않았고, 공도 다 가운데로 몰렸다고 한다. 오죽하면 조계현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가 어떻게든 컨디션을 끌어올리려고 했다고 한다.

대만전에서 봉중근에 이은 두번째 투수로 8:6 상황에서 등판,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면서 99.9의 속이 꽉찬 남자에서 108.00의 108번뇌 투수로 진화, 모두 박수를 쳤지만 곧이어 6회에 대만에 2점을 내주면서 8:8 동점을 만든 한작가의 집필 철학에 모두들 똥줄을 잡으면서 쓰러졌다. 그나마 한국이 한 점 더 내서 이겼으니 망정이었다.

파일:attachment/rvwiki_gksrlwn.jpg

역시 명실상부한 작가였다. 더더욱 놀라운 점은 이 경기 승리 투수가 되었다는 점. 다만 한기주 입장에서도 이 경기는 다소 억울한 것이, 대회 내내 한기주가 불안했기에 욕을 제일 많이 먹긴 했지만 사실 이 경기에서 최악의 투구는 선발로 6자책이나 기록한 봉중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기 선발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게 문제.[38]

일본에선 안경군이라 불리고 있으며, 다수의 팬까지 만든 듯.[39] 아마 모티브는 파워프로군 포켓 시리즈의 안경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하여간 덕분에 야구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까지 유명세를 떨치면서 불기주 혹은 불꽃남자 한기주라 불리면서 대차게 까였다. 게다가 이 대회로 인해 야구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고, 올림픽 하이라이트를 주구장창 틀어주는 바람에 인지도가 계속 쌓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40] 엎친데 덮친격으로 MBC 방송사고로 허구연의 드라마 주연 드립[41]까지 튀어 나오는 등 본의 아니게 올림픽 기간의 이슈 메이커 중 하나였다.

훗날 밝히길 "목메달이었으면 베이징에 그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군대를 갔으면..."라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맘 고생이 심했던 듯.

이 때의 한기주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 그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었다.

번만

회를

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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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성적을 반영을 해서인지 프로야구매니저에서 국가대표 카드가 업데이트되면서 항상 매년 6~7성 이상의 코스트를 자랑하던 한기주가 국가대표 카드는 3성 카드에 70이 넘는 구속을 제외하면 매우 슬픈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올림픽 이후 남은 시즌 동안 계속해서 삽질을 하는 바람에 작가의 이미지는 더욱 강해졌고, 결국 우리가 아는 그 한기주의 이미지가 굳혀지게 된다.

[1] 속구가 상당히 좋았기에 다른 투수였으면 얻어맞기 십상인 속구 일변도의 피칭으로도 마운드를 지켜냈다. 참고로 22구째에 꽂아 넣은 슬라이더를 상대 타자였던 고영민이 받아쳐 담장 바로 앞에서 잡히는 큰 타구를 만들어 냈다. 9회 말 2사 1점차 리드였기에 동점을 허용할 수도 있던 상황. 이선호 기자는 그의 직구가 오승환과 맞먹는다고 평가했고, 저 때만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2] 2023년 현재 KBO 리그의 강속구 투수들인 안우진, 문동주, 심준석, 김서현 등이 보인 퍼포먼스를 약 15년 전에 보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3] 당시 한국야구 99주년을 맞은 해였다.[4] 당시 한국 고교야구대회에서 최고구속 기록이다.[5] mlb 드래프트 상위라운드 신인 계약금 수준이다. 당시 참고로 가장 많은 신인 계약금을 받은 김병현이 애리조나에 입단했을 때 계약금으로 225만 달러를 받았다.[6] 한기주는 당시에는 양키스 스카우터가 온 것을 아예 몰랐고, 나중에 기사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7] 보통 계약금은 전/후반기 반씩 나눠서 지급하는데, 당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몸이었던데다 미국행에 대한 우려로 KIA는 10억 원을 한번에 지급했다. 해태 시절엔 상상도 못했던 일. 물론 2001년 6월에 해태가 김진우에게 계약금 7억 원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당시는 해태가 기아자동차로 인수되는 것이 확정된 직후였고 이 해 8월 1일에 KIA 타이거즈가 출범하기 바로 전이었다.[8] 당시 해외진출을 원할 경우 7년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서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물론 후술할 혹사로 인해 없던 일이 됐다.[9] 기아에서는 상식을 초월하는 혹사를 당하며 구속만 잃어버리고 메이저리그 진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10] 이것도 선발로는 부진했고 불펜으로 많이 나와서 방어율을 내린거다. 시즌 평균자책점 3.26, 8월 12일 계투전환 이후부터의 평균자책점 0.95[11] 등판시 적정 투구수가 40구 정도였다. 자세한 사항은 한기주 문서의 5번 문단 참고.[12] 공교롭게도 한기주와 같은 해에 졸업했으며 청소년 야구 대회에서 한기주와 라이벌 기믹을 보였던 쓰지우치 다카노부도 고교 때의 명성과는 달리 프로에 와서 부진했다. 당시 한기주를 바르기도 했던 쓰지우치였으나 프로에 와서 제구력 난조, 부상 등으로 여전히 2군 신세. 한기주와 스지우치 모두 고교 시절 혹사의 여파로 팔꿈치 부상을 안게 됐으며 결국 쓰지우치는 150km를 넘나들던 구속이 120 km 대로 추락하며 선수로써의 생명을 완전히 상실, 단 한번의 1군 등판 없이 2013년 26세의 이른 나이로 은퇴한다. 현재는 일본 여자야구팀 '이스트 아스트라이아'의 코치 겸 한 식품회사의 사원이다.[13] 유원상은 1986년생이지만 미국 유학 경력이 있어 귀국 과정에서 1년 유급하여 1987년생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년 유급 경력으로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3년생과 92학번으로 분류되는 1972년생인 정민철과 비슷한 케이스이다.[14] 류현진이 의외로 신인시즌 초기 많이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가 수술 전력이 있어서였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한기주가 최우수 신인상을 타리라고 예상했었다.[15] 김태균/별명/2006년 문서에서 김비켜 항목을 참조.[16] 소위 신용운-한기주 라인은 신한카드라고 불리며 삼성의 권오준-오승환 KO펀치에 버금가는 성적을 냈다. 신용운 또한 부상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선수라 관리가 필요했는데 막 끌어다 쓴다고 신한카드 카드깡이라는 뼈있는 농담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말 카드깡처럼 두 투수의 미래를 갈아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성과를 올리기는 했다.[17] 2006년의 한기주의 등판 로그를 살펴보면 계투 전환 이전의 등판은 문제가 없으나(8월 9일까지 84이닝 소화), 8월 계투 전환 이후 서정환 감독에 의해 21세기 유례가 없는 혹사를 당한다.(상세기록 확인) 4일 연속 투구는 물론 투구수 관리 역시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닝도 원없이 먹었다(8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51일 동안 56⅔이닝, 769구를 던졌다). 이 패턴을 그대로 따랐던 게 2009년 133이닝을 먹고 규정이닝을 채운 SK의 전병두. 그리고 16시즌 한화의 심수창이 5연투, kt의 심재민이 9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며 여전히 연투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18] 2000년 이후 출생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드립이다. 소방수가 firefighter가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원래는 fireman이었다가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man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하다 하여 firefighter가 되었다. 200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영어 교육에서 두 표현이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비슷한 예로는 경찰관이 policeman에서 police officer가 된 것이 있다.[19] 입단 당시 메디컬 테스트나 고교시절 기록조회 등으로 선수 상태를 파악했겠고, 충분히 혹사를 인지할 수 있었겠지만 서정환 감독이 혹사에 둔감한 편이라 그냥 무시하고 계속 굴린 듯. 이 경우 2008년에도 계속해서 굴렸던 조범현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다.[20] 2006년부터의 기록을 합치면 145경기 269이닝을 등판한 셈이다. 고교시절에 혹사까지 당했으니 저 정도면 드러눕지 않는 게 이상하다.[21] 2017년에도 팀이 우승했으나 그때 한기주는 재활로 1군 출전조차 없었다.[22] 인대가 30% 정도밖에 붙어있지 않았다고 한다.[23] 2010년 후반에 복귀하고 싶다는 말을 했지만(재활이 잘 되면 2011 시즌 초반부터 투입이 가능하다고는 한다.) 배영수가 재활에 실패해서 고생하는 것 때문인지 조범현 감독은 '여유있게 2011 시즌 중후반에 투입을 할 생각이다'라고 하니 이쯤 복귀할 가능성이 어느정도 있다.[24]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대개 반응은 "저게 한기주야 아님 호프집 사장이야?"였다.[25] 원래 이날은 윤석민이 선발로 나설 예정이었는데, 한기주의 상태가 좋아서 그를 대신 내보낸 거라고 한다.[26]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건 사실이다. 신용운도 재활 후 13시즌 40이닝 동안 2승 2홀드 2.03 ERA이라는 성적을 보여주며 불펜요원으로서 부활하는가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또다시 팔꿈치 뼛조각이 발견되어 수술과 재활을 반복한 끝에 은퇴한 걸 감안하면 만약 부활 하더라도 혹사 여파가 재기 이후에도 계속 되는 위험이 있다.[27] 그리고 사실 한기주는 이미 재활이 끝난 상태로 원래 가지고 있던 부상에 대해서는 STC에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28] 한기주는 신용운과 함께 서정환 감독 시절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 그래서 그 둘의 성을 따 신한카드라고 불렀다.[29] 물론 함평 기아 챌린저스 필드에도 최신식 재활센터가 있지만, 완공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탓에 역사가 오래된 STC에 비하면 데이터 면에서는 밀릴 수 밖에 없다.[30] 삼성은 2017년 시즌 종료후 경산 볼파크에 STC와 비슷한 수준의 재활시설을 마련했다. 큰 재활이 불필요한 한기주에게는 STC까지 보낼 필요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31] 시즌 성적은 10경기 8.2이닝 1자책 1패 3홀드[32] 다만 1이닝 4피안타 3볼넷 5실점으로 부진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33] 0.2이닝 2피안타 1볼넷 1실점[34] 정확히 말하면 유용하게 기용하고 있다가 맞을듯 싶다.[35] 어쩌면 한기주가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트레이드하려고 나왔다면 강승호 같은 좋은 유망주와 트레이드되었을 수도 있다.[36] 실제로 미국의 박스스코어 기입방식에 INF라고 적는다. 잘 아는 Infinity의 약자. 2023 WBC 에서의 김윤식, 양현종이 아운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해서 방어율이 무한대다.[37] 실제로 오승환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거의 등판하지 못해서 존재감이 없었다.[38] 사실 봉중근도 한기주에게 묻혀서 그렇지, 그 못지 않게 대회 내내 극도로 부진했다. 첫 경기 미국전에서도 부진해서 대회 기록 8.2 이닝 ERA 8.31로 매우 부진했다. 다만 이듬해 2009 WBC에서 멋지게 만회하며 봉중근 의사가 된다.[39] 일본과의 4강전에서 이승엽의 홈런과 'GG사또 고마워요'가 터지자 일웹에서는 한 목소리로 "안경군을 올려줘!"를 외쳤다는 후문이 있다. '괜찮아 우리에겐 안경군이 있어.'라는 말까지 나온 걸 보면 인지도는 확실히 올린렸다.[40] 심지어는 웹툰계 공식 축빠 조석한테도 까였다. 마음의 소리에서 '내가 군대 가겠다는데 왜 그러냐능'이라는 대사를 날리는 모습을 보인다.[41] 예선전 일본전이 끝난 후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마이크가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으로 허구연이 "이야, 진짜 드라마다 드라마 감독 김경문, 주연 한기주" 이런 발언이 나갔다. 허구연은 나중에 '그 때 만약 욕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섬찟하다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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