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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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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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양천부원군(陽川府院君) 충정공(忠貞公)
허종
許琮


출생
1434년(세종 16)
사망
1494년 3월 29일[1] (향년 59 ~ 60세)
(음력 성종 25년 2월 14일)
봉호
양천부원군(陽川府院君)
시호
충정(忠貞)
본관
양천 허씨

종경(宗卿), 종지(宗之)

상우당(尙友堂)
신장
11척 2촌(약 233cm)
학력
생원시 급제(1456년)
별시 문과 을과 급제(1457년)
부모
부친 - 허손(許蓀, 1412 ~ 1466)
모친 - 화순 최씨 최안선(崔安善)의 딸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
남동생 - 허침(許琛, 1444 ~ 1505)
남매 - 반남 박씨 박임종(朴林宗)의 처
부인
청주 한씨 - 한서봉(韓瑞鳳)의 딸
자녀
4남 1녀#
장남 - 허확(許確, 1466 ~ 1537)
차남 - 허렴(許石+廉)
3남 - 허추(許硾)
장녀 - 강이행에게 출가
서장남 - 허소(許石+喿)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가, 시인.


2. 생애[편집]


1434년 부친 허손과 모친 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후 1456년에 생원시를 거쳐서 1457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58년 군기시직장 및 세자우정자가 된 뒤 1459년에 언로 개방. 이단 배척, 경연 실시등의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세조의 신임을 얻어서 선전관을 겸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고 이어 통례문봉례랑 지제교 세자좌정자가 된 뒤 1460년 여진족의 침입 때 평안도병마절제사도사로 출정하였고(경진북정) 조정으로 돌아와 성균관주부·예문관봉교 등을 거친 뒤 이듬해 형조도관좌랑이 되었다.

그 뒤 함길도도사·사간원정언·함길도경차관·훈련원판관을 거친 뒤 1465년에 성균관사예에 올랐고 그리고 평안·황해·강원·함길도체찰사 한명회의 종사관이 되어서 북변경영에 공헌하는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1466년에 함길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직후 이만주 토벌에 참가하여 이만주를 주살하는 성과를 낸다(정해서정)

1469년에 평안도관찰사·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대사헌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77년 10월에 건주 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순찰사로 파견되어 격파했다. 1483년에는 세자이사를 겸한 뒤 세조비 윤씨의 국상 때 산릉도감제조가 되었고 1485년에 모친상으로 사직했으나 1487년에 기복되어 이조판서가 된 뒤 그 후 병조판서에 임용된다.

1491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북정도원수가 되어 여진족들을 격파하고(신해북정) 이듬해 우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이 신해북정은 어이없는 이유로 대실패했는데, 이 당시 여진족의 기동력이 월등했기에 허종의 전략은 여진족이 감히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 대군을 이끌고 여러 여진족 부락을 동시에 타격하되 여진족이 농토와 가택을 버리고 도망가면 모두 파괴하고 이를 3개월 이상 유지함으로서 여진족의 1년 농사를 망쳐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허종은 정군 2만에 보인 2만명을 동원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조정에서 여유분까지 포함한 4만 대군의 4달치 군량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양에는 5만석이 넘는 군량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이를 함경도까지 운송하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에 허종은 15일치의 식량만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니마차 올적합(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조선을 도발한 여진족은 니마차 올적합이 아니라 도골 올적합이었다. 애초에 잘못된 상대와 싸운 셈)과 한 차례 교전한 뒤 여진족 수급 9개를 얻자 그대로 퇴각해버린다. 원균칠천량 해전을 보면 옳은 선택이었으나, 진짜 문제는 조선이 대외원정을 할 동력이 소실되었음을 보여준다.

1494년 성종 25년 음력 2월 14일에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 야사 중에는 성종폐비 윤씨를 폐출할 때, 누이의 충고를 듣고 동생인 허침(許琛)과 함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폐출을 논하는 어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연산군갑자사화의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형제가 갑자사화 때 화를 면한 것은 사실이나 말에서 일부러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폐출을 결정할 때 두 형제는 할머니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회의에 불참했다. 또한 그전에도 두 형제는 폐비 자체에 반대했었다. 그리고 생몰년을 보면 허종은 갑자사화 이전에 이미 사망했다. 아무튼 이 야사를 따라 형제가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다리를 종침교라고 불렀는데, 현재의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옆에 있는 종교교회[2] 자리다. 동생인 허침은 갑자사화 이후에도 생존했다가 1505년 병사했다.
  • 조선 역사상 최장신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는데, 가장 가까운 시대인 16세기 초반 저작인 《속동문선》에 실린 허종의 행장에는 11척 2촌으로 나와 당시 공식 단위 중 가장 짧은 주척(20.8cm) 값을 그대로 대입하여 계산해도 허종의 키는 233cm 가량이 된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행장 문학의 특성상 부풀려진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점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체적인 수치가 오락가락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큰 키였던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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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3월 20일.[2] 종침교가 있던 자리라고 해서 종교라는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