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우
덤프버전 :
분류
}}} ||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씨개명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령(高靈). 자는 윤시(胤詩), 호는 금하(錦霞), 종교는 개신교(감리교)이다.
2. 생애[편집]
2.1. 구한말[편집]
1883년 3월 26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관정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묵정마을)에서 아버지 신면휴(申冕休, 1845. 11. 21 ~ 1933. 2. 10)와 어머니 안동 김씨(1844 ~ ?)[4]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때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가담했다. 그 후 미국에 유학,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고등과 및 의과·문과를 졸업하였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및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더럼 스티븐스 저격 사건 당시에 전명운과 장인환의 재판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2.2. 일제강점기[편집]
1912년 YMCA 청년회 이사와 배재학당 교장을 지냈다. 1919년의 3.1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다. 1920년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제7대 회장을 지냈다. 1927년 이상재, 허헌, 김병로 등과 함께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여 개신교 대표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본의 전쟁에 협력해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2002년의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9년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일제 말기의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에 지정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본 행적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2.3. 광복 이후[편집]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이 시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의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윤기섭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현직인 자유당 이승만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9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번지 자택에서 지병인 협심증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편집]
4. 관련 문서[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6 06:57:20에 나무위키 신흥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영성군파 24세 우(雨) 항렬.[2] 음력 2월 18일.[3] 인근의 귀래리·추정리·호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신백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4] 김노승(金魯承)의 딸이다.[5] 서대문구 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