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일생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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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입문 전
1.1. 출생
1.2. 학창 시절
1.3. 청년기
1.4. 법조인 시절
2. 정치 입문 후
2.1. 국회의원 시절
2.2.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다
2.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2.4.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시절
2.5. 퇴임 후
3. 이명박 정부에서의 비리 수사
4. 사망
4.1. 사망 이후 및 여파


1. 정치 입문 전



1.1. 출생


노무현1946년 9월 1일 일요일 (음력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외에 이복누나(노명자)와 이부누나(김선밀)이 각각 한명씩 있다. 이때 아버지의 연세가 무려 45세였다고 하니 늦둥이다. 유년시절은 평전에 따르면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노판석은 일제강점기 때 사업가였으나, 사기로 재산을 잃었고, 노무현이 태어난 때는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안 되어 어머니 이순례가 일을 하여 집안을 간수했다고 말한다. 그의 형 중 큰 형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일찍이 떴고, 노건평은 둘째 형이다.

1.2. 학창 시절


1953년에 진영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대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진영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돈이 없어 외상 입학을 했다. 1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백지 동맹'을 일으켜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2학년 때 부산에서 시험을 통해서 당시 부산일보의 사장 김지태가 만든 장학회인 부일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시험[1]을 준비했는데,[2] 첫째 형의 권유로 당시 부산에서 꽤 좋은 학교였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도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공부만 하지 못하고 방황도 하고, 숙소도 제대로 없었고, 졸업도 21살 즈음에야 했다. 이 때문에 대학교 진학은 하지 못한 채 학력이 고졸로 마무리되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둘뿐인 고졸 출신. 단, 김대중은 건국대학 합격 사실을 대선 프로필 등에 적을 때가 있었으므로 확실한 고졸 출신 대통령은 현 시점에서는 노무현 한 사람뿐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역대 대통령과 비교되어서, 혹은 법조인 치고 학력이 낮아서 낮은 학력이라고 하는것이지 당시에는 고졸자 수가 별로 많지 않았기때문에 고졸도 고학력자 취급으로 사회에서 귀한인재로 나름대로 대접받았다. 좀 더 정학히 얘기하자면 1960년대의 중학교 진학률은 위에 언급되었고 고등학교 진학률은 상승하는 추이이기는 했지만 전체 청소년들 가운데서 1/3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대학 진학률은 이 보다 훨씬 낮아서 1965년 시점에는 대학생 수가 10만명인데 중퇴자 수까지 감안해도 대학진학률은 높아봐야 3% 이내에 불과했다.이 정도로 학력이 처참했던 시절이었기에 고졸이라도 은행이나 사무직같은 꽤 괜찮은 직장에 취직이 가능했던것이었다.

1.3. 청년기


고등학교 졸업 즈음 농협 입사시험을 쳤고, 떨어졌다. 한 달 반쯤 개인 회사를 다녔으나, 너무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도 되지 않아 퇴사하고 고시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집 근처의 산자락에 토담집을 만들어 공부했지만, 공부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이 없어 울산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이때 잠시 사고로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예비시험에 합격한 소식을 병상에서 듣게 된다. 당시 고졸 출신이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그런데 또 반전이 생겼는데, 합격 후 사법고시 학력 제한이 없어진 것이다. 예비시험 합격의 보람이 없어진 것. 그 후에는 계속 고시에 매달렸다.
중간에 34개월(2년 10개월) 쯤 현역병(상병계급으로 제대)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복무 기간은 1968년 3월 ~ 1971년 1월. 2019년 현재 현역 일반병 출신 대통령은 노무현과 문재인 둘 뿐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은 장군 출신이고(육군 대장 예편), 다른 대통령들을 보면 이승만, 윤보선은 구한말~일제시대 사람인지라 군대를 안 갔고, 최규하는 일제말에 공무원으로 일해서 군대를 안 갔다. 김영삼은 학도의용군 출신이며, 김대중은 병역사항에 대해 확인이 필요, 이명박은 면제, 박근혜는 병역 대상이 아닌 여자라서 군대를 갈 필요가 없었다 . 여튼 상병 전역으로 나오는데,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병장이 많았기 때문인 데다가 노무현은 분대장을 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주는 계급이었는데, 파병 문제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특별 케이스로 병장 계급을 달아줬다. 전역 이후에는 사법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73년 즈음, 약혼자가 결혼 적령기를 넘어 고시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고, 아이(건호)도 낳았다. 이때는 위의 두 형이 세무 공무원으로 취직해 경제적 사정이 나아졌다고 한다.
1973년부터 사법 시험을 보기 시작해 3번째인 1975년, 30세의 나이사법시험(17회)에 합격하였다.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중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 7기 연수생으로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 60명 중 47등으로 수료하였다. 당시 7기 연수생 출신 중 유명인으로는 안대희 전 대법관, 진영 국회의원 등이 있다. 이중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인 인사들을 모은게 참여정부 이후 알려진 일명 '8인회'이다. 공식적으로 '8인회'라는 조직을 만든 것은 물론 아니고 그만큼 8명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 그는 을 벌 수 있는 변호사를 희망했지만, 형과 어머니의 권유로 판사 임용을 신청한다. 이때는 성적순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임용되던 시기였다. 1977년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 그의 판사 시절을 회상한 기록에 따르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그가 작성한 합격 수기는 널리 알려진 바 있다.

1.4. 법조인 시절


대전지방법원에서 7개월간의 판사 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사임했다. 이는 1992년명예훼손과 관련되어 서울민사지방법원 판결을 통해 사실임이 인정되었다. "원고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으나, 7개월만에 판사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 전문 변호사로,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한마디로 승률이 높아 돈 잘 벌었다는 이야기다.[3]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리 상고(현 개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 세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회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에, 일반 변호사들이 파고들기에는 수월하지 않은 분야이다.[4]
파일:변호사노무현.jpg
변호사 시절의 모습
개업 초기에는 형사사건을 조금 맡다가 이후 민사사건을 주로 맡으며, 등기업무를 취급하여 부산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부산에 개업한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심지어 노무현까지 불과 3명이었다는 설까지 있던 시절에 법무사들의 밥줄인 등기업무를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미웠을 것이다.[5] 다만 등기업무 자체는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1981년, 우연히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에도 김광일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는데, 이 사건을 위해 그는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한다. 검사였던 최병국은 변호에 참가하면 공범으로 함께 기소하겠다는 협박으로 변호인단에 참여하지 못했고, 사람이 모자랐기 때문에 노무현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한다. 당시 변호인단으로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총 5명이었다. 이는 노무현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동지인 문재인은 사법 연수원을 1982년 8월 수료했으므로 부림사건 변호에는 참여한 적이 없다.
이때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의 권유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두었는데, 재판에 들어가기 전까진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사고를 친 것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이 사건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재판에서도 변호인단 중 가장 서열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본인도 피고인인마냥 열성으로 나서서 변호를 했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도 재판 초반에는 변호사가 저렇게 흥분해서 변론을 해도 되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상.
이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혹은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유명했던 표현 중 아스팔트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노무현이 당시 만든 말이라 한다. 그는 연설을 하다가 전경의 최루탄을 맞고 기절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마이크를 놓지 않고 시종일관 꾸짖는 연설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와 관련된 이미지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검찰은 그를 구속하였고, 안기부(안기부는 국정원의 전신)는 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강제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불법으로 수시로 감시를 했지만, 직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변호사 시절 부산 서구에 노동법률사무소를 열어 운영할 때 만나서 의기투합한 사람이 문재인이다. 노무현의 고시공부 동지이자 연수원 동기 박정규가 문재인을 노무현에게 소개시켜준 것이 인연이다. 이 둘이 훗날 대통령이 됐다는 걸 알면 말 그대로 기연.

2. 정치 입문 후



2.1. 국회의원 시절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당시 실세였던 민주정의당 허삼수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 일설에는 이 때 노무현이 김영삼에게 쎈놈과 붙게 해 달라 해서 허삼수와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설이 사실이면 진짜로 노무현은 간이 큰 셈.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5공청문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5공 청문회 때 발의자로 등장해 증인으로 참석한 정주영을 상대로 질의에 앞서 한 말이 매우 유명해졌다.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현대 그룹의 수장이면서, (지금도 그렇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였다. 게다가 특유의 뚝심있는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정치권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기도 힘든 인물이었는데, 그런 정 회장이 일개 초선 의원, 그것도 겨우 40대 초반의 정치 신인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뚝심 어디 안 가서 여타 증인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맞받아치긴 했지만.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천만 원을 주느냐, 8천만 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 시절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 中에서.

전두환과의 청문회 이후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노무현 명패사건을 참조하면 된다.
이 청문회에서 5공 시절 억눌려 지내던 국민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통쾌한 추궁으로 유명해지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유명세로 인해 시간이 흘러서 대통령 선거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를 받게 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활약상으로 이 무렵에 김영삼은 노무현을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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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 3당 합당에 반대하던 당시 노무현 초선의원.[7]


3당 합당에 분개한 노무현 당시 의원의 발언. 6분 50초부터
그리고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은 5공 비리 청문회를 비롯해,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비판하며 거부하고 정치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던 김영삼의 곁을 떠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제13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재출마했으나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 역시 낙선했다. 또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이종찬 등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1997년 대선을 앞두고서는 한나라당행을 선택한 이부영, 김부겸 등과 달리 쿠데타와 3당 합당의 원죄가 있는 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며,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다. 1997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TV 찬조연설
이후 이명박 의원이 1998년 초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국회의원 직을 자진사임했고[8] 노무현은 그해 7월의 보궐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장직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였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고건 전 총리[9] 영입에 따라 출마를 포기하고 대신 종로구에 공천된 것이다. 이 때 역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던 동교동계 한광옥과 달리 노무현이 시장 후보 자리를 쿨하게 포기하자, DJ는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해야 한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2년 뒤인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 출마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총선 이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노무현을 취재했는데, 권양숙 여사와 딸 노정연씨가 "종로에서 한 번만 더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부산에 내려가자고 얘기했다."는 언급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고집은 확고했다. 참고로 출마한 선거구는 북구·강서구 을이었는데 선거운동 초반에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막판 한나라당 표심이 결집하며 허태열[10]에게 밀려 35.2%의 득표율로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낙선 후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낙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2. 해양수산부 장관이 되다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현재보다 미래가 있는 부처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한국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노력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 있게 일하십시오.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십시오. 반대의견이 있으면 직을 걸고 반대하십시오. 현장에 가서 보고 판단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2000년 8월 7일, 노무현의 해양수산부장관 취임사.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장관을 8개월 동안 역임했다.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직원들과 같이 이메일로 대화를 하고 수평적 토론 문화를 새로이 정립했고, 다면평가를 비롯한 인사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공무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탈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특유의 성격답게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 같은 의전도 모두 없앴다고 한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서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던 관행도 중단시켰다고 한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서 마중을 나오던 관행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 #1, #2
노무현 스스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를 저술해서 장관으로서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2.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파일:노무현대선.jpg
대선 후보 시절 유세하는 모습
2001년 12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노무현은 행정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고 당내의 다른 대권주자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지지율은 미미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경선과정에 대해서는 제16대 대통령 선거 문서에서 다룬다.
이때 처음으로 유시민을 비롯해 훗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비서관, 실장으로 근무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당시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새 시대가 찾아올 것 같기는 한데, 그 때가 되면 자신은 없을 것 같다 말했다고 한다. 그걸 들은 유시민은 새 시대의 첫 파도에 올라탄 거라서 자신이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분명 온다 말했고, 노무현은 "새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 내가 없어도 어때"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노무현 본인도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할 줄은 전혀 몰랐겠지만,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보면 굉장히 섬뜩하게 들릴 지경.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이회창 후보와 맞붙게 되었다. 노무현 측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회창 측은 부패 정권 심판, 정권교체 등의 공약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제기되었던 아들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재차 인터넷에 퍼져나가자, 그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후에 이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은 의혹에 불과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은 정치공세에 불과했던 셈.[11]
초반 기선은 노무현이 압서는 듯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나서 선거악재가 터진 데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에 관심이 쏠리면서 투표율이 낮게 나왔고 결국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이 큰 타격을 입고 이회창이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당시 제3 후보로 떠오르던 정몽준노무현을 완전히 압도할 기세는 아니었고, 이미 1987년 대선의 선례도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인기가 올라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기로 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단일화 진행 후에는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앞섰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래서, 노무현 후보가 직접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분노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불러모으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있다.
결국,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를 얻으면서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민주당계 정당에서 최초의 영남 출신, 즉 지역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2.4.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시절


파일:노대통령취임식.jpg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출범되며 기대를 모았으며, 또한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북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재임 기간 내에 있던 업적과 실책 그리고 사건사고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문단 및 이하문단참여정부 참조하길 바란다.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이다. 정부 출범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로는 아래와 같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4대 악법이라고 칭했다.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사고는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매우 큰 사건들만 서술한다.
  • 대구 지하철 참사: 사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작 정확히 1주일 전2003년 2월 18일 일어난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하기 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절묘하게 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여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뿐만 아닌 노무현 대통령까지 싸늘한 시선으로 대했으며, 공식 석상으로 사과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 시절의 숭례문 방화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
  • 한미 FTA 사태: 임기 내내 농민 및 노동자들과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극렬 대립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 노동자들은 분신자살, 음독자살까지 택하면서 "한미 FTA 절대 반대!"를 외쳤으며 농민들은 해외 원정 시위에 나섰다. 시위로 인해 부산 APEC에선 명박산성의 원조인 무현산성이 등장하였으며 여의도 농민 집회에선 강제 해산 과정 중에 두 명의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협상 장소 중 하나였던 제주도에선 4.3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의 공권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 전염병 사스 유입: 2003년 4월 23일, 관계차관 대책회의를 열어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시키겠다고 보고 하였다. 보건원의 사스 전담 인력은 4~5명에 불과하였지만 현장 간호사에게 그 당시 국무총리인 고건 총리가 사무실 팩스로 직보하면 바로 처리하는 빠른 대응책과 이 뿐만이 아니라 상위 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하고 사스방역도 국가방어하는일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로 군의관과 군 간호 인력이 공항 사스 방력에 투입되었으며 민간에도 협력을 구하여 대한병원협회장, 대한의사협회장,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장 등 민간 의료단체 대표를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그렇게 사스방역은 전쟁처럼 치뤄졌으며 의심 환자는 있었지만 확진 환자는 1명도 내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WHO는 우리나라가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내놨으며 2003년 7월 31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주례 오찬에서 '한국판 CDC(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가 필요하다는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의 건의를 전달했는데 받아들여져 다음 해인 2004년 1월 19일 질병관리본부가 정부 직속산하로 정식 출범하였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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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퇴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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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노서은과 자전거를 타고 봉하들판을 산책하는 노무현. 이는 귀향 후 노무현의 서민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으며 이 후 노무현재단 로고에도 이 모습이 들어갔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발췌-

2008년 2월 25일, 후임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KTX를 타고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이 아닌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했는데 퇴임 대통령이 고향으로 귀향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김경수, 양정철, 김정호 등은 노무현과 함께 귀농해서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다.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과 따뜻함 때문에 비서 및 측근들의 충성심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비서들과 측근들을 막 대하고 조금의 흠이라도 생기면 토사구팽을 하여서 구속 당시에 곁에 아무도 없었던 이명박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명예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장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 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거나 불법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 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고 수 년 뒤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가 일본 도요요카 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참조.

화포천 습지
친환경 농법인 '오리 농법'을 도입하고자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초기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리 농법이 성공을 거두자 현재는 거의 모든 봉하 마을의 가구들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차를 재배하여 마을의 특산물로 만들었고, 늘어나는 마을 방문객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 및 동물원의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방문객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마을 앞에 생태 공원을 조성하여 연꽃 등 각종 수생 식물을 심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의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보면 30대 초반의 남성이 60대 나이의 전직 대통령에게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니 형님 합시다”고 제안하자 “형님 하려면 내 말 잘 들어야 하는데…”라며 유머로 응수하거나 “여기 좀 봐주세요”라며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에게 “(그 카메라는) 줌이 안 되네요. 그럼 그쪽으로 가서 서비스 할게요.”라고 응답하는 등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이런저런 근황을 전하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열창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영상, 영상2, 영상3, 노래영상.
노무현 쪽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문할 거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시절에는 욕하던 사람들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통령 시절에는 참여정부를 욕했지만 노무현이 만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환경운동을 하며 주민, 관광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타임즈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 및 주요 매체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하천에 나가 직접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진을 게재하며 "버젓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네티즌들도 "중국에서는 퇴직 후 몇 채의 호화 주택과 몇 백만 위안의 주식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한국의 대통령과 우리(중국)의 관리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하였다. #
귀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러온 관광객들 덕분에 김해시는 300억원 가량의 이익을 보았다. 봉하마을 인근의 주유소, 식당 등의 매출이 급증했고, 김수로 왕릉, 김해미술관, 김해박물관 등의 관광지들을 찾은 관광객들의 숫자도 덩달아 22% 이상 증가하였다. # 이 같은 관광객 증가 현상은 전국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저와 생가를 보러 온 관광객이 봉하마을을 둘러본 뒤 다른 관광지도 둘러보는 이른바 ‘전 대통령 특수’ 때문인 것으로 김해시는 분석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찾으러 김해를 찾는 관광객은 평일에는 하루 3천명, 주말에는 1만명에 이르렀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은 평일엔 6번 정도, 주말엔 10번 정도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왔는데, 무턱대고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찾아온 여성부터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법도 불사하겠다며 협박하는 남성들까지 찾아오는 등, 봉하마을이 '국민 하소연' 장소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간적이고 신선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찾아온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엔 2008년 4월 15일까지 3만 6천건이나 되는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으며 대부분이 응원과 격려의 글이었다.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서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아카이브에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과 당시 네티즌들이 단 댓글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씩 보다 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철호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된 후의 방송 출연 중의 언급에 의하면 노무현은 아직 지역주의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면서,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본인이 다시 총선에 나갈 생각이 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퇴임 대통령들은 정치인으로서 최종 목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므로 정치에서 은퇴하는 게 보통이지만, 대통령만 다시 못할 뿐 그 외의 선거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
정말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술할 수사와 일련의 사건으로 그의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3. 이명박 정부에서의 비리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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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이렇게 임기 말기에 레임덕을 맞는 대통령으로서 모범적인 말년을 보내고 고향에서 농사 짓고 방문객을 맞이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수사의 화살이 측근의 중심인 자신에게까지 뻗쳐 검찰 수사를 받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는 무려 몇 개월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 먼저 박연차에게 받은 15억은 이자율 7%, 차용기간 2008년 3월 ~ 2009년 3월로 명시되어 있는 차용증을 써주고 받은 것이라 사안간의 거래로 판단돼 죄를 묻기 어렵다며 무혐의 처리되었고, 강금원이 노무현에게 전달한 70억은 창신섬유 이사회에서 회의 후 후원격으로 건넨 것이고, 건넨 시점도 퇴임 이후이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에게는 불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강금원의 횡령탈세 사건을 수사하던 대전지검은 이 돈을 회사에서 횡령한 것으로 판단해 사법처리 하였다. 당시 강금원은 뇌졸중을 앓고 있었으나 구속되었고, 병보석마저 불허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글로 남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스스로 칩거에 들어갔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강금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제서야 병보석이 허락된다. 그러나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만다.
노무현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작성하였고, 부인 권양숙 여사가 자신 모르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권양숙도 박 회장한테서 받은 10억과 현금 3억원을 모두 자신이 전달받았다고 인정했으며, *, * 이후에도 박연차가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전달한 1억원어치의 백화점 상품권이 권씨에게 돌아간 정황이 드러나 다시 수사를 진행했었다. 문재인은 당시 노무현이 이 사실을 듣고 엄청나게 화를 낸 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냐며 심한 허탈감에 빠졌다고 말했다. 참고로 이 일은 사과문을 작성하기 이전이라고...
이 상황에서 박연차는 4월 검찰의 수사에서 “500만 달러를 연철호에게 송금하기 이전에 이미 노 전 대통령과 사전에 협의를 했었다.”라고 진술하여 당초 퇴임 이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는 노무현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노 전 대통령은 곧바로 해명과 방어가 필요하다는 제목의 글에서 검찰 수사를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박연차는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 하고 있고 아내가 돈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참 구차하고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몰랐던 일은 몰랐다고 말하기로 했다”며 “나는 아내가 받은 줄 몰랐다는 사실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 진술이 터지고 난 후 검찰은 다음주 내로 노무현 내외를 불러 수사하기로 하였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두환 다음으로 세번째로 검찰에 소환된 대통령이 됐다. 2008년 12월, 연철호를 통해 박연차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500만 달러, 2007년 6월 정상문을 통해 권양숙이 받은 100만 달러, 그리고 정상문이 횡령한 12억 5000만원의 업무 추진비에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검찰은 노무현에게 이런 돈의 흐름을 재임기간에 알고 있었느냐고 집요하게 캐물었으나, 노 전 대통령은 대체로 '모른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2007년 6월 말 박연차가 권양숙에 전달한 100만 달러 중 일부로 의심되는 30만 달러가 금융정보분석원의 외화송금 거래내역에 의하면 노 전 대통령의 아들노건호 노정연에게 송금되었는데, 이 사실을 노 전 대통령에게 알고 있었느냐고 추궁했으나 이 사실도 '전혀 몰랐다'며 부인했다. 검찰이 박연차의 대질을 추진했지만, 노 대통령은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검찰은 30만달러의 출처가 박연차의 돈 100만 달러의 일부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권양숙을 비공개로 다시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각 언론들은 참여 정부가 내건 최대 무기였던 도덕적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주변 참모들의 연이은 비리 소식과 구속, 노건평의 이권 개입, 정치자금 주선과 노무현도 시인한 아내의 뇌물수수로 인해 청렴과 깨끗한 정치를 내걸던 참여정권의 이미지가 추락했다고 연일 보도했다.
여담으로, 박연차는 당시 검찰에서 박검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금품을 받은 사실 자체를 부인하던 정치권 인사와 관료에게 '다 끝났으니 사실대로 털어 놓으라'면서 당사자를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 검찰 관계자는 "상대방이 박 회장과의 금품 수수를 시인하든지, 부인하든지 관계없이 박연차가 대질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그대로 유지한 점은 법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검찰의 공소 유지에 청신호가 된다"라고 전했으며, "이 진술이 법정에서도 일관되면 노무현에게 유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월,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당시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당시 이인규, 홍만표, 우병우 등이 합류하였다. 이인규는 이명박과 오래전부터 인맥 관계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원래는 중수부에 들어갈 라인이 아니었다는 것.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들이 부임하고 난 이후 고가의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선정적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논두렁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언론에서 '아내가 받은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라는 보도가 이어지자 몇몇 사람들은 해당 피아제 시계를 찾기 위해 논두렁을 뒤지는 일도 일어났다.[12].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은 2009년 5월 13일, SBS가 단독 리포트로 내보낸 기사가 출처다. 이 기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준 명품 시계를 받아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시민은 이후에 "노무현이 시계의 존재를 알게 되어 권양숙에게 화를 내며 망치로 깼다고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라고 한 방송에서 발언했다. 결론적으로는 논두렁에 버린 것이 아니라 망치로 깨버렸다는 것. 26일 검찰에 따르면 2009년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이끌던 ‘노무현 수사팀’은 노 전 대통령 소환 전부터 국정원 측과 정면충돌했고 한다.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및 명품시계 여론전 등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이명박 정권 때 국정원 직원 4명이 ‘논두렁 보도’ 직전인 2009년 4월, 하금열 당시 SBS 사장과 접촉해 노 전 대통령 수사 보도를 적극 요청하고 주장했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물이 5월 13일, 단독으로 내보낸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 해당 과정에서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알려졌다. * 검찰은 당시 노 전 대통령의 구속 등 신병 처리에 치중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수사팀이 노 전 대통령 소환 후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구속 기소를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 내 분위기도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구속된 형사범들과 다르게 불구속으로 처리할 이유가 없다"였다. 한 관계자는 "600만 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한다면 앞으로 남은 수사에서 1억∼2억 원 씩 받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어떻게 구속하자고 할 것이냐"고 주장했다. *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밝혀 `말 바꾸기'가 아니냐는 의혹이 주장되었다. 2007년 12월, 연철호가 박연차에게 500만 달러 투자를 부탁했고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버진아일랜드에 다음 해 1월, 타나도인베스트먼트라는 창투사를 설립해 다음 달 노 전 대통령 퇴임 직전 홍콩계좌로 돈을 송금받았고, 노 대통령은 퇴임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 사실을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가면서 알게 됐다."며 "투자이고 하니까 그냥 정상적 거래로 봐서 별 문제가 안되는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
2017년, 정두언새누리당 의원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 당시 담당 검사였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노 전 대통령의 구속수사를 강하게 주장했다고 밝혔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차피 재판으로 가면 노 전 대통령은 실형을 받을 텐데 구속되면 본인이 한 걸로 여론몰이가 될까 부담을 느꼈다."라며 "구속시키지 말라고 검찰 수뇌부에 전달했는데 우병우가 버텼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 전 수석이 버티는 바람에 안타까운 죽음이 일어났다.", "이 죽음이 엄청난 촛불집회로 이어졌으니 MB 입장에서는 우병우가 얼마나 밉겠냐?"라며 우 전 수석이 검사장으로 승진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을 반대했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0.6%의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하였고, 찬성한 국민들은 27%에 그쳤다고 한다.(기사) 예전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0%,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2%#,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5%에 달한 것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여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여론은 그대로 선거에 반영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검찰수사와 발맞추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으나 노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을 하루 앞 둔 2009년 4월 29일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5곳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곳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한다. 그제서야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인식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늦추며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인다.#, # 당시 한나라당 핵심 당직자의 전언에 의하면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도 재보선 참패 뒤에 악화된 국민여론을 인식하여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심지어 청와대조차도 국민여론을 의식하여 불구속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임채진 검찰총장도 불구속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수사를 전담하던 이인규, 우병우, 홍만표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를 강력히 주장하고 버티면서 사태는 더욱 난항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한 지 3주쯤 지난 뒤...

4. 사망


2009년 5월 23일 자택의 컴퓨터에 아래아 한글 파일로 유서를 미리 작성해 두고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영읍내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시골 병원 특성상 수술이 불가능하여 인근의 양산시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다시 후송하는 도중에 결국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원래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화장하여 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수원연화장에서 화장하여[당시] 봉하마을 내 묘역에 안장되었다. 향년 62세.


사망 직후 법무부장관 김경한은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을 것으로 안다(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의 수사 종결)고 언론을 통해 발표하여, 검찰 수사가 통제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이 자진 사표를 냈고, 법무부장관 사표는 반려되었지만 검찰총장은 받아들여졌다. 사건은 추가적인 심문 및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피의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 발표하고 내사 종결로 마무리되었다. 기사.
죽음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각계각층에서 검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는 국정원 개입 부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여당한나라당에서조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장관까지 지냈던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라며 검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특히 이 부분은 노무현이 사망하기 한 달 전인 4월의 상황이다. 물론 박희태 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편들었다기보다는 검찰이 하루가 멀다 하고 노무현 수사 과정을 속속들이 언론에 뿌리고 이에 노무현 측에서 반박하는 것까지 공개되면서 정치권이 혼돈에 빠진데 대한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여권 인사들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마냥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던 것.
홍준표"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고 검찰을 강하게 질타했다.''' 홍준표가 노무현의 정적으로 분류되는 정당 소속이긴 하지만 검사 시절 정의와 소신의 검사로서 이름 날렸고 검찰의 고질적인 병폐 때문에 잘리다시피 했던 자라 검찰의 저런 행동이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13].
검찰 원조 특수통이자 레전드 검사로 불리는 심계륜 전 부산고검장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켜본 뒤 검찰동우회 소식지에 '수사십결'[14]이라는 글을 기고하며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팀의 과도한 수사행태를 비판하였다. '검사님의 속사정'이란 책에 나온 내용에 의하면 어느 검찰간부는 당시 수사팀이 검사로서 지켜야할 선을 넘으며 무리한 수사를 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전직 대통령은 다 허물이 있는데도 손도 못대면서 봉하마을에 내려간 힘없는 노무현만 잡아 족치는 건 비겁한 짓이라는 말도 덧붙혔다고 한다.# 과거 모 사이트에서 역시 그 말년이 거의 절정에 이르렀던 노무현이 투신하기 5월 몇 주 전부터도(당시 시점으로 아직 살아생전의 생존 중이면서.) MB는 꽤나 디스된 듯 하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하고 6월 12일, 검찰은 6개월에 걸친 '박연차 리스트' 수사 결과를 최종적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장장 6개월에 걸쳐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결과를 단 5분 만에 발표하고 종결지었다. 처음에는 중수부장실에서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하려고 하다가 언론의 반발을 받고 공개로 진행한 것이었다. 발표 현장에서 수사팀은 최대한 답변을 피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고, 홍만표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만 있었다. 이인규는 발표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 검찰, 결과 발표 '게눈 감추듯' 게다가 타살 의혹들도 있다.
5분간의 발표에서 이 수사는 '뇌물수수 의혹' 때문이라 하였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언급하지 못했다. 훗날 문재인 대표 측에서 이인규를 비판하며 몇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 검찰 측에서는 그러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 다만,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며, 정당한 수사였다고 주장하면서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변호인단은 어이없다는 입장과 함께 검찰의 자기변명과 책임회피를 비판하였다. 문재인 변호사는 자신을 방어하고자 고인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곧이어 검찰은 전직 대통령 구속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이미 불구속으로 내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당시 박연차에게서 금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고인으로서 다 불구속이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유독 금품을 받지 않은 노무현에게만 피의자로서 구속 여부를 심의하였으며, 또한 시간을 질질 끌며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러한 검찰의 혼란스러운 행태에 대해 검찰은 또 다시 비난을 들었다. 검찰은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2015년 2월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당시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그 진실의 일부분을 밝혔다. 국정원에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으며, 검찰의 권한을 무시하고 국정원이 주도하려고 하여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심지어 국정원이 여론플레이의 주역이었으며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 국정원 검찰에도 노무현 시계 언론플레이 요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수사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는 이인규의 발언에 긍정하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를 밀어붙이던 검사 3인방의 운명도 주목받고 있다. 홍만표 당시 수사기획관은 법조사상 최대비리에 연루되어 구속수감 중이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불구속 국민여론도 무시하며 구속을 밀어붙이던 우병우 당시 중수1과장 역시 사상최대의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어 현재 구속수감 중이다. 이인규 당시 수사팀장은 모기업의 인사청탁 의혹 등에 연루된 상태이고, #,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가 발족하자 재직 중이던 법무법인을 퇴사하고 미국으로 날아가 체류 중이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노무현의 저주'란 말이 떠돌기도 하였다. #, #2
노무현 본인이 뇌물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2017년에 비리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대북공작금까지 사용하며 뒷조사를 벌였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러고도 뇌물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세간에 내놓지 않았던 것을 볼 때 노무현 본인은 완전무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형사처벌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 행동 덕분에 이명박은 노무현의 곁을 따르던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진들과 노무현의 옛 동지, 추종자들에게 단단히 원한을 사게 된다.

4.1. 사망 이후 및 여파


파일:노무현 국민장 인파.jpg

노무현 :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

유시민 : 아, 오지요. 100% 오지요.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노무현 : 아,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중략)

유시민 : 가시고 싶은 데[15]

까지 못 가실 수도 있죠. 그런데 언젠가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갈 거예요. 그렇게 되기만 하면 후보님이 거기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 있나요.

노무현 : 하긴 그래요.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2002년 7월, 마포에 있는 유시민의 작업실에서 나눈 대화. [16]

[17]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대한민국 정치사를 뒤바꾸어 놓았고 그 여파는 현재진행중이다.
현직 권력자도 아닌 퇴임 후 시골로 낙향한 전직 권력자 한 명의 죽음이 일국의 현대사를 뒤흔들어 놓은 사례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 동안 500만 명이나 되는 역대 최대의 조문객이 몰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은 내무부 자체보고에 의하면 1769만 명이라 하지만# 언론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문객 수를 200만 명으로 잡고 있으며#, #2, #3 노무현 전 대통령의 500만 명 조문객을 역대 최대로 보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서울역사박물관에 공식분향소를 설치했지만, 추모객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공식분향소를 외면하고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덕수궁 앞 시민 분향소를 찾았다. 당시 조문객들의 숫자를 보면 5월 27일까지 덕수궁 시민분향소엔 60만명의 조문객들이 몰렸지만, 공식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겨우 5만명 정도였다.#
10%대의 낮은 지지율로 허덕이던 민주당은 순식간에 지지율이 28%로 급등하여 정당 지지율 1위를 기록하였고, 한나라당은 24%를 기록하여 1위에서 2위로 내려앉았다. # 시사in의 분석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일부 한나라당 지지층과 부동층, 진보진영이 민주당 지지로 결집하였다고 한다. 여론조사 결과 60%의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이명박 정부의 정치보복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도 56%에 달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대선후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구광역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 후 대선후보 대열에도 끼지 못하던 유시민이 정동영을 꺾고 야권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의 대권주자로 올라서기도 하였다. # 또한 2010년 지방선거의 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 적합도에서 친노인사 3명(유시민, 한명숙, 강금실)이 1위 ~ 3위까지를 독차지했고, 이들 모두 오세훈 前 서울시장을 가상대결에서 꺾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이전까진 언급조차 되지도 않던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등장하게 된 것은 '노무현 사망 후폭풍'의 영향력이 그만큼 엄청났다는 반증이다. 민주당 당내의 역학구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까웠거나 친노 진영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사들의 위상이 급상승하고, 비노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특히 비노 인사들로부터 맹공격을 받던 참여정부장관 출신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위상이 강화된다. # 또한, 추모기간 동안 네이버다음 등에선 노무현 추모웹툰이 올라왔으며, 현재에도 만화 전문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사망 직후 각 지역에서 시국선언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얼마 후에 2009년 6.10 범국민대회등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2010년 치러진 6.2 지방선거는 우연찮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1주기 추모식이 겹치는 바람에 친노 인사들을 전면에 내세운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 이 때 지방선거 직전에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명칭만 들어가면 여론조사 지지율이 5~15%가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해, 노무현 재단에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노무현 재단 관련 타이틀을 달고 싶다는 후보자들의 민원이 쏟아졌다고 한다. # 특히,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이광재, 김두관 등이 각각 충청남도지사강원도지사, 경남도지사 등에 각각 당선되어 화제를 모았고 참여정부 행정관, 비서관 출신들이 대거 기초자치단체장에 당선되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여론조사 경선에선 후보의 경력에 '노무현' 문구만 들어가도 지지율이 20% 상승하여 비노계 후보들이 여론조사 문항에서 '노무현' 이름을 빼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낭독한 한명숙 전 총리는 큰 인기를 얻어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 자리까지 차지한 뒤 2012년 총선을 진두지휘하기도 하였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비록 김용민 막말 파문의 직격탄을 맞아 패하긴 하였으나 127석의 의석수를 확보하였는데, 이 중 참여정부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훗날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서 참패를 거듭하던 민주당을 되살아나게 한 원동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라 분석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에도 영향을 미쳐 2013년 10월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노무현이 박정희를 호감도에서 앞섰던 적이 있고, 2016년에는 역대 호감도에서 박정희를 완전히 꺾었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발 직후에는 박정희의 호감도가 빠지며 노무현의 호감도가 처음으로 50%로 상승했다. 2017년 5월 여론조사에서는 54.2%의 호감도를 기록하여 20.6%의 호감도를 기록한 박정희를 누르고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10월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가 기고한 논문에 의하면 기존의 '김대중 vs 박정희' 구도로 돌아가던 한국의 현대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노무현 vs 박정희'의 구도로 변환되었다고 한다. # 김호기 연세대 교수 역시 현대 한국사회를 이끌어온 시대정신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꼽았고, 그 상징이 박정희와 노무현이라고 정의하였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고, 정치에 나설 생각조차 없는 인물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이후 대권주자로 발돋움하여 2012년 민주당 대선후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를 거쳐 2017년,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으로 노무현의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졌다고 표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키고, '친노'란 멍에 때문에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인재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이 노무현의 이름을 팔아 정계에 데뷔하거나, 대중영합주의에만 혈안이 된 일부 정치인들이 자신의 인기를 높이기 위해 수시로 노무현 및 친노의 이름을 팔아대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일례로 별다른 경력없이 노무현재단 관련 타이틀만 가지고 선거에 나선다든지,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자 시절 잠깐 맡았던 명예직이나 한직 등을 크게 부풀려 말하거나, 고인과 과거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며 관직, 국회의원직 등을 얻으려 하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지지자들의 애정을 악용하여 자기들 자리보전 하는데 써먹는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등 고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8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무현의 적통이라 불리는 문재인 대통령이 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친노를 잇는 친문은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서 주류 중의 주류 계파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귀향 연설에서 극찬했었던 친노 핵심인사로 분류되는 유시민 또한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작가, 평론가, 방송인으로 두루 활약하고 있으며, '2017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시사저널 조사) 3위에 선정되었다. 역시 친노계인 정세균은 현재 국회의장을 직무수행 중이고, 노무현 정부 때의 국무총리였던 이해찬 의원은 무려 7선에 성공하는 둥 많은 나비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현재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70% 박스권이라 할 정도로 높은 상태를 유지 중이고, 더불어민주당 역시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으로는 이례적으로 과반 지지율을 유지중인 상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은 정권이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는 존재할 것이다. 사실상 현재 차기 대선후보로 분류되는 실질적으로 유력한 후보들은 대체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많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변호인, 노무현입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등의 작품이 화제가 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오마쥬가 영화 곳곳에 담긴[18] 광해도 문재인이 관람 후 모습(문재인은 당시 엄청 울었다고 한다.)으로 인해 노무현과 함께 오르내렸고, 더 킹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및 죽음이 영화의 터닝포인트로 작용하였다. 더 킹의 감독은 이 영화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
심지어 '노무현의 남자들이 여의도를 접수했다.' 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실장 등을 역임했던 김병준이 임명되고, 여당대표로는 노무현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해찬이 당선되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희상은 국회의장으로, 정무수석을 지냈던 유인태는 국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동아일보는 '여의도를 넘어 한국정치 전반을 친노가 점령하는 모양새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게다가 그가 정치 인생 전부를 걸고 싸워왔던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 역시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해, 7회 지선에서는 부산의 오거돈, 경남의 김경수, 울산의 송철호가 당선되었다. 이 3인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은 편이다. 김경수의 경우는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으로, 오거돈은 참여정부 시절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송철호는 인권변호사를 노무현 - 문재인과 같이 함께 한 데다가 참여정부 시절 국민고충해결위원장을 맡았던 전력이 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의 영향력이 크다. TK에서도 각각 임대윤 후보와 오중기 후보가 3~40%를 득표했다. 광역단체장에서는 비록 아쉬운 결과를 보였지만, 구미시에서는 장세용이 당선되는 등 TK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선명히 드러났다. 물론 박근혜 게이트부터 시작된 보수의 몰락과, 남북 평화 국면 등이 시민의 선택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는 견고했던 보수의 아성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도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도전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이 많아졌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그로 인한 여러 법조비리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련성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나는 과반의 여론이 적폐청산의 동력원이 되는 이유가 이명박 정부 시절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또한 이명박에게 거의 불리하게 해석되는데, 국민들의 여론이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이명박이 지른 범죄를 수사하는 것이다' 와 동시에 '당신도 노무현을 무리하게 수사해서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인과응보다'라는 주장이 병존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서 적어도 같은 대통령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노무현의 죽음이 적어도 대통령 후임인 이명박을 수사하는데 이 정도까지의 원동력이 되고, 그 여론이 과반을 훨씬 넘는 지지를 받는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방문객 수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딴지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정국기간 관련 취재 및 특집보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몰려들며[19]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김어준은 이 당시 딴지일보에 쇄도하는 네티즌들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으로 돌려말하며 자신에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였으나 결국엔 딴지일보가 부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를 런칭하여 진보진영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게 된다.[20] '나는 꼼수다'의 대성공으로 정치 관련 팟캐스트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보수우위의 종편방송과 맞서는 민주진보측 여론시장이 팟캐스트계에 형성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생을 마감한 장소인 봉하마을은 김해시 최고의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 잔디공원과 생태문화공원이 들어서면서 정치색이 없는 일반관광객들도 종종 찾는 명소가 되었고, 민주진보 성향의 정치인들이나 중도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이 필수코스로 들리는 곳이 되었다.
[1] 참고로 당시 행정고등고시는 3급 채용.[2] 1960년대 당대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에서 일하거나 부모님 일을 돕는 청소년들이 많았고, 중학교 진학률도 40~50%대에 머물렀었기때문에 중졸이 특별히 낮은 학력은 아니었다. 중학교 진학이 대중화 된것은 1970년대 들어와서부터이며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진학이 대중화 된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3] 다만 당시엔 승률과 관계없이 변호사들은 다들 부자였다. 1년에 사시로 고작 100명을 선발했기 때문. 그나마 그 100명들 마저도 대부분 커리어를 국가 공무원(판,검사)으로 시작했기에 민간에 변호사가 희귀할 수 밖에 없었다. 베리타스 법학원의 헌법 강사 금동흠에 따르면 당시 부산에서 영업했던 변호사 숫자는 한 자리였다고.[4] 그런면에서 영화 변호인(영화)의 고증은 잘된편이다. 변호사는 그당시 한가지만 잘해도 돈을 잘벌던 시기였다.[5] 노무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변호인(영화)에서도 법무사들이 노무현을 모델로 한 주인공 송우석의 사무실로 찾아와 자신들의 밥줄을 빼앗는다고 시위를 하면서 항의를 하자 부당하면 고소를 하라면서 대응하는 모습이 나온다.[6] 사진에서 주먹을 움켜쥔 가운데 인물이 노무현 前 대통령 (당시에는 초선의원) 이고, 그의 오른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사람이 김상현 前 의원이다. 참고로 그 앞쪽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김우석 前 의원으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건설부(현 국토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한보그룹 장태수 회장한테 뇌물을 받은 것이 폭로되면서 구속되었다.[7] 그의 격렬한 항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직후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 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사람들은 자화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8] 1998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선 무효형이 선고되기 전에 자진사퇴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당선 무효형확정되면서 1998년 서울특별시장 출마에도 실패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이 된 것은 사면 복권된 2002년의 일이다.[9] 문민정부에서 총리를 지냈고,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두 번째 총리에 오른다.[10] 훗날 박근혜의 대통령비서실장[11]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2002년 8월부터 10월까지 수사에 착수하였지만, 혐의 없음으로 기소하지 않은 채 종결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나라당의 청구로 재판이 성사되어, 2005년 5월, 대법원은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이 사실무근이라 판결하였다. 2002가합40574 참조.[12]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홍만표와 우병우는 비리 및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갔고, 이인규는 모 기업의 채용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국정원 관련 수사가 시작되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를 노무현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이인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며 모든게 끝나면 제대로 된 당시의 사실을 밝히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인규는 세월이 흘러 2019년 8월, 미국에서 돌아온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다.[당시] 8번 화장로 에 화장 되었다.[13] 개인의 일설로는 홍준표가 당 원내대표 시절에 노무현 정당으로 옮기려다가 같이 술을 마시며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근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는 정적이지만 속으로는 꽤 친근했다고.[14] ‘칼은, 찌르되 비틀지 마라’, ‘수사의 목적은 달성하되, 공연히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안 된다’, ‘언론과는 불가근 불가원하라' 는 등 수사를 할때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10개의 원칙을 설명.[15] 노무현의 시대[16] 당시 노무현과 유시민은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노무현이 사라진 후, 노무현의 시대가 왔다.[17] 유시민은 이 대화를 회고하며 '그 때 내가 너무 냉정하게 말을 했다' 며 후회한다고 말했다.[18] 영화 내에 더 많은 오마쥬가 있었으나 정치적 후폭풍을 고려하여 편집되었다고 한다.[19] 딴지일보의 말에 의하면 독자들이 '텍사스 소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20] 다만, 노무현이 죽기 전까지 딴지일보나 나꼼수 멤버들이 보였던 행적은 참여정부 내지는 노무현을 물어뜯던 당시의 진보층과 다를 게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주진우는 당시 시민사회수석인 문재인을 민경찬 사설펀드 건으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전과를 만들어내고 사퇴시키지만 결국 문재인은 무관한 일이 되어 직접 사과를 해야 했고, 김어준, 김용민은 각자 사설로 노무현을 비난했던 전력이 있다. 딴지일보도 창간 때부터 B급의 명랑한 정치 풍자를 명목으로 조롱을 일삼기도 했다. 의문의 서버 해킹 및 폭파로 인해 딴지의 과거로 접근할 길이 사라진 점은 이들의 이미지 세탁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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