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비난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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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2.1. 책임회피
2.2. 심리적 원인
2.3. 피해자다움
2.5. 모순점
3. 사례
4. 같이 보기
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Victim blaming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조롱하며 탓하는 행위.

범죄, 폭력, 학대 등에 있어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떠넘기거나, 피해자의 잘못을 묻는 경우를 의미한다. 국내에서는 '당한 놈 잘못'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복수의 피해자가 존재할 경우, 피해자들 사이에서 일방적 혹은 상호적인 비난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로 보통 대상이 약자, 소수자인 경우가 많다.


2. 설명[편집]


여기서 먼저, 피해자를 비판하는 행위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여행을 갈 때 집 문을 열어두고 현관에 금품을 놔두고 갔다 하더라도 그 금품은 주인의 것이고 이를 가져가는 이는 절도죄로써 죄를 지은 것이다. 하지만 집주인의 과실도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집 문을 열어놓고 금품을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하는 행위와 절도의 타겟이 될 가능성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며 집주인은 문을 닫고 잠그고 가는 간단한 행위로 절도의 타겟이 될 확률을 극적으로 낮출 능력이 있었음에도 이를 하지 않았고 이는 분명히 불필요하게 악인들을 끌어들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왜 피해자 비난이 계속 욕을 먹는가? 비판받아야 마땅한 피해자 비난 유형은 아래 중 하나 이상이다.

  1. 그냥 사실이 아닌 경우. 사실 가장 많은 경우이다. 비난받는 행위와 그 행위의 "위험성"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예를 들면 옳지 않은 피해자 비난중 가장 유명한 "강간 피해자의 옷차림 비난"이 있겠다. 강간범들은 누가 약해 보이는가를 중점으로 피해자를 고르지 옷차림이나 외모를 기준으로 고르지 않는다. 따라서 강간 피해자의 옷차림을 걸고 넘어지는것은 도덕이 어쩌고 하기 전에 그냥 과학적으로 틀린 것이다.


  1. 범죄자를 옹호하는 경우. 위의 예에서 분명 집 문을 열고 여행간 집주인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둑이 잘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집 문이 열려 있었더라도 내 것이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며 이를 훔친 사람은 훔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산 도둑과 똑같이 악한 것이다. 여기서 집주인의 부주의함이 부적절했을 순 있어도 도둑을 옹호하기 시작하면 틀린 것이다. 참고로 여기 "옹호"에는 "원래는 착한 사람이었는데 뻔히 보이는 금품의 유혹에 넘어갔다" 등도 포함된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바로 착한 사람이다.


  1. 비난이 도를 넘은 경우. 집주인이 "부주의했"을 수는 있어도 그 금품이 자기 것이었다는 전제 하에[1] 도덕적으로 그른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집주인을 더 욕하는 것은 비난도 뭣도 아닌 그냥 생판 남을 욕하는 것이다.


  1. 피해자가 자신이 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달리 회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때. 범죄자와 알콜중독자들이 넘쳐나는 위험 골목을 지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지만 그 골목을 지나지 않으면 30분쯤 돌아가야 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그냥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이러다가 강도를 당했을 때도 피해자의 부주의함을 탓할 게 못 된다.


  1. 피해자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나를 문제 삼을 때. 보통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로부터 회피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가해자에게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를 비난한다. 이는 피해자가 재빨리 도주하거나 저항을 했다면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보인다. 심지어 오히려 가해자를 제압하지 못하고 당한 피해자를 비웃는다.[2]

먼저 언급할 만한 사례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사실은 저쪽이 진짜로 가해자이고 자신이야말로 억울하게 몰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를 경쟁적 피해의식(competitive victimhood)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자들은 피해자로서의 지위가 사회적 및 공적인 심리적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당사자의 내면에서 도덕적 정체성에 우월감을 주는 반면, 가해자로서의 지위는 당사자의 내면에서 도덕적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피해자 지위는 양측 모두에게 선망받는 지위라고 분석하고 있다. 호주 백인들의 이주자 혐오를 주제로 하는 어떤 연구에 따르면[3] 다수 집단은 소수 집단의 피해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 또한 소수 집단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항의할 수 있다. 즉, 이들은 100% 순수한 피해자란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라고 믿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가해와 피해는 제로섬 관계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객관적 우열이나 억울함과는 별개로, 경쟁적 피해의식은 갈등 상황을 완화하거나 건설적으로 개선하기는 커녕 도리어 악화시킨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대중적 의미에서의 피해자 행세(victim playing)라는 단어와도 연결된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에 리뷰 논문도 나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4]

다음으로, 사건과 무관한 제3자가 가해자 편을 들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주제의 연구는 사회학, 사회심리학, 범죄학, 법학, 경찰행정학, 여성학, 문화비평 등의 분야들에서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거의 사실상 강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경향을 핵심 토픽으로 하여 진행되어 왔다.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조차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러한 비난을 받고 사회에서 고립되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심해질 경우,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이전에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의 시나리오를 우려하여 아예 말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결과적으로 성범죄 신고율은 범죄율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의 한 단락에서 피해자 비난을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5]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사회적으로 피해자를 무력화시키고 탈권력화(disempowerment)한다는 점은,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피해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국가와 정부, 법에 호소해보려고 해도 사법기관이 피해자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정의의 구현은 어려워지게 되고, 주변 지인들이 또한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재활을 하는 것 역시 힘들어진다. 아무도 피해자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로부터 벗어나서 사회에 재복귀하는 데 실패하게 되어, 끝없이 자신의 피해자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지원은 피해자로부터 피해자성을 분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예컨대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그 피해자의 섹슈얼리티에서 피해자라는 라벨링을 떼어 줄 필요가 있다.[6]

범죄 피해를 공론화하는 것이 피해자 비난으로 인해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로 피해자 보호가 너무 극심해져서 거꾸로 무고죄가 발생하게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 가능성은 페미니스트인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가 자신의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에서 인종차별성차별을 엮어 이야기하면서 제기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야 할 것 같다.[7]

브라운밀러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흑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강간 위협을 받으면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공론화한다는 것이다. 백인 여성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흑인 남성과 성적으로 접촉한 뒤 강간이라고 주장하면 "우리 귀한 백인이 저 짐승 같은 흑인에게!"라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피해자 보호가 이루어지지만, 성적 접촉 후에 강간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이렇게나 문란해서야, 쯧쯧!" 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거꾸로 백인 여성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인종차별이 갖는 사회적 영향과 관련하여 미국 사회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통찰을 준다. 세상 일이 이분법적으로 볼 정도로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틀에 의해 규정됨을 보여주는 예이다.

인종차별, 지역 비하 등 특정 집단 전체를 비하하는 언행도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자 비난이 될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많은 누리꾼들은 이걸 간과하고, 일단 사건사고가 생기면 해당 집단을 비하하기에 급급하다. 이 경우는 진짜로 가해자의 소행에 분노한다기보다는, 평소 안 좋게 생각했던 집단에 대한 깔 거리가 생겼다고 소스로 사용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여 그 집단에 소속된 피해자도 덩달아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성폭력이나 다른 폭력 이상으로 피해자 비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이 있는데, 바로 학교폭력이다.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 따돌림 등을 막론하고, 학교폭력의 경우 많은 가해자는 그 일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제3자들도 딱히 경멸하지 않는다. 적어도 피해자에 대한 경멸의 감정에 비하면 없는 수준에 가깝고, 오히려 뒤틀린 숭배의 감정이 깔려 있기도 하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비하는 일상적이며, 다른 분야의 폭력에 민감하다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비하는 별로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격한 언쟁 시에 사용한다. 이러한 비하의 어휘는 학교폭력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논쟁(이를테면 젠더, 지역 논쟁 등)에서도 주된 비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찐따, 담당일진, 아싸(가볍게 사용될 때도 있다), 왕따, '친구가 없다' 등등의 표현이 그러한 표현의 예이다. 위의 첫번째 문단에서는 선망받는 피해자 지위에 대해 논했다면, 여기서는 선망받는 가해자 지위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가해자들은 지금은 "아~ 나 이제 옛날처럼 거칠게 안 살 거야. 이제 착하게 살고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어." 같은 말을 하면서 여전히 가오를 부릴 수 있으며, 그들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은 유튜브 등에만 해도 넘쳐난다. 그들에 대한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너 저 사람 앞에서 무서워서 말도 못할 거지?" 같은 약자멸시의 어휘를 통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공격들이 가해진다. 그 공격자들은 가해자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이는 강약약강에 해당된다고 볼 수있다. 만만한 사람들에게는 막말을 쉽게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상에서 (특히 젊은 세대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비하어 중 하나가 '찐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약자 멸시 및 비굴함이 학교폭력 문제를 피해자 비난으로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느냐를 관찰할 수 있다.[8]

한편 이 피해자 비난이란 개념이 악용되기도 한다. 2차 가해 문서에 나오는 것처럼, 피해자라고 자칭하는 자, 특히 무고자가 자신에 대한 반박과 비판을 피해자 비난이란 2차 가해라고 치부하고 반박을 봉쇄하는 것. 자세한 내용은 2차 가해 문서 참고.

2.1. 책임회피[편집]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고도화되고 합리화된 도시생활과 규범의 적용으로 범죄를 통해 발생한 피해가 사회 전체의 경각심 확산과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으로 인해, 더이상 가해자와 피해자 당사자만의 문제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쿨존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 아이가 사망했다고 하자. 그러면 실제 피해자는 사망한 아이지만 사건 이후에는 해당 스쿨존에 사망사고가 있었음을 인지한 교통경찰과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되고 교통법규단속 가능성도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그 지역을 주로 이용하면서 평소에 스쿨존에 보행자가 없을 땐 자기 편의를 위해 조금 더 속도를 내던 운전자들이 스쿨존 안전 위반으로 단속에 걸려 딱지를 맞을 가능성이 올라가고, 이 운전자들은 "너만 안죽었으면 안걸렸는데 너때문에(단속이 생겨) 내가 딱지를 맞았다."라는 사망 피해자에 대한 억하심정이 생긴다. 이들은 운전자 입장으로 가해자와 똑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피해자의 상황따윈 관심이 없고, 실제 사고는 내가 치지 않았고 왜 난 평소대로 운행했을 뿐인데 딱지를 떼냐는 억울함이 먼저일 뿐이다. 사회가 점점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관리를 강화하고 단속한 것이 되려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한다며 최초의 피해자를 비난하는 역설이 일어나는 것. 사회 역시 이렇게 발생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어디다 하소연할 방법도 없고, 그저 사건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원망뿐이다.

그정도는 그래도 현상 유지는 비슷하게 될 수 있는 것이고, 이때문에 평소에 잘 하던 것이 아예 금지가 될 수도 있고 완전히 성질이 변해 범죄 당사자들과는 무관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되는데, 그때 발생하는 책임을 아무도 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가장 먼저 원인을 제공한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릴 뿐이다.[9]


2.2. 심리적 원인[편집]


피해자 비난이 대체 왜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해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심리학계에서 줄곧 있어 왔다.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 된 과학적 연구 문헌은 1966년의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10], 둘씩 쌍으로 묶여서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참가자들은, 자기 실수 때문에 대신 괜히 전기충격을 받는 피해자를 보거나, 혹은 그 전기충격이 장기간 지속되는 피해자를 접했을 때 뜻밖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 피해자 파트너에게 미안해하고 그들을 안쓰러워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들을 거부했으며 배척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사회문제와 결합시킨 다른 논문에서는[11], 처녀아내 등 소위 '존중할 만한 여성'(respectable woman)이라면 강간을 당했을 때 가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이 있으므로 무거운 선고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만, 만일 이혼녀일 경우에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덜 묻고 형량도 가볍게 선고한다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심리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 연구자들은 이를 후견편향(hindsight bias)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논문에 따르면[12] 참가자들의 절반에게는 어떤 여성이 밤에 술에 만취한 꽐라가 되어 헐벗은 옷차림으로 할렘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당해버린다거나 등 특정 행동을 한 후 무난한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그 여성의 행동까지는 똑같은데 갑자기 강간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러자 강간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게 그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후견편향이 나타났지만, 무난한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똑같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후견편향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의 경향을 직접적으로 예측했으며, 심지어 이들에게 "...사실 저쪽 집단에서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봤다던데요?"라고 보여주더라도 이들은 "그래도 나는 강간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고 초지일관으로 답변했다고.

이후 어떤 연구자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성범죄자들 37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실시하기도 했다.[13] 이 문헌에 따르면, 37명의 성범죄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암묵적인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전제들은 각각 ① '여성들은 불가사의하다'(Women are unknowable), ② '여성들은 성적 대상이다'(Women are sex objects), ③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능이다'(Male sex drives are uncontrollable), ④ '나는 내 욕구를 마땅히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Entitlement), 그리고 ⑤ '원래 세상이란 위험한 곳이다'(Dangerous world)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미리 깔아놓고 사건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잘못한 게 있다면 저쪽이다"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에 입각해서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인간관계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수행한 2011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14] 가상의 성희롱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남성 참가자들 중 유독 성차별 성향이 높게 나타난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 가해자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더 많이 느꼈으며, 자신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자기방어적(self-defensive)인 태도로 성희롱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 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가해자에게 공감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도 찔리기 때문에 가해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매사 성차별을 거의 하지 않는 평등한 의식을 지닌 남성들은 이런 비난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 역시 성립한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비난에 관련된 현대의 대개의 심리학적 연구들은 멜빈 러너(M.Lerner)가 주창한 공정한 세상 신념(Just-world hypothesis)이라는 이론적 조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관련기사 공정한 세상 신념은 한국어의 '사필귀정' 이라는 표현과도 뜻이 상당 부분 통하는데, 이것은 "결국에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다"라고 굳게 믿는 신념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강간이나 폭력 등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사건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워지게 된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었다면, 이 세상은 더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공정한' 곳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심리적으로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특정 커뮤니티에서 싫어하는 정치인이 테러를 당하면 '자업자득'이라느니 '업보'라며 오히려 테러를 지지하는 댓글이 달리거나, 심지어 외국에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무고한 서민들이 많이 죽어도 자신들이 싫어하는 국가면 '천벌을 받았다'며 조롱하는 반인륜적인 악플이 달리곤 한다.

이 점에서 좀 더 나아가면, 결국 피해자 비난은 인식론적 위협에 대한 회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론 케이(A.C.Kay)와 같은 이론가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혼돈, 무선성(randomness), 무질서, 구조의 부재, 우연성,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하며 혐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갑작스럽게 강간이나 린치 등을 겪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저 "재수없게 당했다" 라고 설명된다면, 이를 지켜본 제3자들은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자신 역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똑같은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에 그 곳에 가면 안 돼, 그 행동을 하면 안 돼, 그 옷차림을 하면 안 돼"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그 '우연해 보이는' 현상을 예측 가능하고 예방 가능한 현상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 비난의 한편으로는 "...따라서 적어도 나라면 안전할 수 있겠지?"라는 불확실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15]


2.3. 피해자다움[편집]


Victimness

피해자다움은 법학, 경찰행정학, 범죄학, 여성학 등의 분야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아 왔으며, 범죄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속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구성된다. 대중적인 표현으로는 "당신 같은 피해자는 처음 봤다"는 표현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국내의 한 논문에 따르면[16]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때때로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예컨대 자신이 범죄를 당했다는 의식이 확고하면서,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피해자는 고발 과정에서 당당하고 명석한 태도를 견지할 텐데, 이는 수사관들에게 무고의 죄질이 불량하다는 엉뚱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관들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다니는 피해자다운 태도는 '울먹이고, 혼란스럽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특히 성범죄는 범죄 특성상 칼로 무자르듯 하기가 애매한 면이 있어, 가해자 측에선 '피해자다움'을 내세워 방어하기도 한다. 일례로 박원순 성폭력 사건 당시 정철승의 박원순 텔레그램 메시지 일부 공개 사건처럼, "잘봐라, 피해자가 먼저 꼬리쳤다"라는 식이다. 故박원순 부인 "내 남편은 억울한 피해자" 그러다보니 박원순 전 서울시장 지지자들은 되레 '피해자호소인'이라면서 '피해자다움'이 없다고 피해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박원순 성희롱' 인정한 법원…'피해자다움 주장' 비판했다 2022년 CBS노컷뉴스 기사에 따르면, 대법원을 중심으로 '피해자다움'을 배척하는 것이 최근 법원 분위기라고 한다. 재판부의 판결에 따르면, 박원순 시장 측 주장은 '성희롱 피해자는 피해를 보는 즉시 어두워지고 무기력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성희롱 피해자라면 '이러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라는 자의적인 생각에 기초한 것으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성희롱 피해자들의 양상을 간과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기자는 법원의 판결과 달리 '피해자다움'을 보는 양측의 첨예한 시각차가 좁혀지지는 않은 듯 하다면서, 피해자는 법원 결정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지만 텔레그램 메시지 논란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서로 상처뿐인 씁쓸한 결과만 남았다고 평했다. 이러니 피해자들도 더욱 '피해자다움'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피해자답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이미 범죄정책 분야의 연구자인 닐스 크리스티(N.Christie)가 중요한 문헌을 남긴 바 있다.[17] 크리스티는 "피해자로서의 완전성과 적격성의 지위"(the complete and legitimate status of being a victim)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이상적 피해자(the ideal victim)라고 불렀다. 그리고 피해자가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질수록, 가해자 역시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그의 문헌에서는 이상적 피해자의 다섯 가지 기준이 제시되는데, 이를 나무위키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 피해자는 약하다(The victim is weak)
즉, 피해자가 환자, 노인, 어린이 등일 때 좀 더 '피해자답다' 고 여겨진다. 전근대 서구에는 노인 여성일수록 오히려 '마녀' 같은 이미지로 인해 가해자다움에 가까웠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노인 여성들이 거꾸로 '연약함' 같은 이미지가 부각됨에 따라 피해자의 이미지에 잘 부합하게 되었다고 한다.[18]
  • 2. 피해자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The victim was carrying out a respectable project)
피해자가 피해를 겪던 당시에 여동생을 돌보고 있었거나, 노모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거나, 어머니께 드릴 꽃을 들고 있었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거나, 하여간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면, 그 피해자는 더 '피해자답다' 고 여겨진다.
  • 3. 피해자는 비난받지 않을 만한 곳에 있었다(The victim was where they could not possibly be blamed for being)
예컨대 피해자가 백주대낮에 갑자기 습격을 받았다거나 한다면, 그 피해자는 '피해자답다'는 인정을 받기가 쉽다. 이는 표현을 바꾸면 "피해자는 자기 스스로 범죄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로도 말할 수 있다.
  • 4. 가해자는 크고 악하다(The offender was big and bad)
가해자가 근육질이라거나 동종의 강력범죄 전과 이력이 있다면, 그 가해자에게 당한 피해자 역시 덩달아서 더 무고한 피해자로 존중 받을 수 있다.
  • 5. 가해자는 낯선 사람이며 피해자와 아무런 사적 관계가 없다(The offender was unknown and in no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victim)
즉,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일수록 가해자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지만, 피해자에게 원한을 사거나 개인 간의 시시콜콜한 역사가 아예 없었다면 그 피해자는 비로소 '피해자답다'고 여겨진다.

위의 다섯 가지 기준이 무서운 것은, 위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실제로 피해자인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피해자 지위를 일방적으로 부정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피해자가 이상적 피해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입증하는 책임은, 크리스티에 따르면 피해자 본인에게 오롯이 지워지게 된다. 즉, 피해자 본인이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고, 얼마나 위험을 회피하려 애를 썼고, 가해자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웠으며, 자신과 가해자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것을 전부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은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만일 피해자가 자신이 이상적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입을 열고 자신을 변호하고 사건을 공론화한다면, 이번에는 "드센 성격"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거꾸로 1번 기준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라고. 결국 피해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피해자다움'이란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요구인 셈이다.

그런데 크리스티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상적인 가해자나 이상적인 피해자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강간 사건들이 늘 '풀숲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덮쳐드는 늑대'에게서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숲길을 홀로 걸어가던 빨간 모자'가 변을 당하는 시나리오를 의하지는 않는다. 강간뿐만 아니라 왕따학교폭력, 가정폭력, 기타 수많은 강력범죄들은 대개 그런다. 가해자 역시 악한이라고 보기에는 의외로 평범할 뿐이다. 많은 경우는 타인을 해치려는 의도가 불명확하거나, 피해자와 안면이 이미 있거나, 의외로 왜소한 체격이기도 하다. 여기에 쌍방폭행의 가능성까지 거론되기 시작하면 실로 설상가상이다.

크리스티는 우리 사회가 파편화되고 개인들이 고립되어서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자꾸 '이상적 이미지'에 따라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본다고 한다. 범죄 피해자들이 뭐가 어쩌건 관심이 없는 무심한 사회일수록 그 피해자들이 마치 '순진무구하고 힘 없는 불쌍한 모습'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는 먼저 사람들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가까워져야 이상적 이미지를 털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래야만 현실이 복잡하다 하는 것을 느끼고 정형화된 머릿속 피해자상에 현실의 피해자들을 끼워맞추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양극화' 문서의 '위화감과 적대감 심화' 문단, '우월의식' 문서에도 관련 내용이 있다.

다만, 크리스티의 말대로 이상적인 가해자나 이상적인 피해자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오히려 범죄에 '무감각'해질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드러낸 사례가 바로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이다. 외부에서는 사악한 주인과 불쌍한 노예 프레임으로 상당히 이슈화되었으나, 가해자도 평범한 사람들인 것을 아는 판사는 가해자를 옹호했다. 실제 이 지역에선 염주들이 다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되레 가해자를 옹호하고, 염전 노예들의 행실이 불량하다느니, 거두어주지 않았으면 노숙자나 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비난하는 적반하장격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광주고등법원 판사는 "나라에서 가족이 지원 못 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그래도 이 염주들이 데리고 있으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살펴줬던 거 아니냐"며 염주들을 대놓고 옹호했다. 시골에서 가출소녀에게 잠자리 제공해주며 착취하는 것도 비슷한 논리로 이어진다. 지적장애 여성을 평범한 시골주민들이 집단으로 성폭행하고 은폐할때도 비슷한 논리인데, 이웃집 숟가락 개수마저 알 정도로 집단주의가 강한 폐쇄된 시골마을이 훨씬 무서울 수도 있다.

이상적인 가해자와 이상적인 피해자가 없다는 것을 알면 설사 문제가 있어보이는 피해자라도 적극 옹호해주지 않겠냐는 크리스티의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순직경찰 기사 검색해보면 다 '경찰다움'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는 경찰관들 뿐인데, 만약 부패경찰이 칼 맞았다고 하면 악플이 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여신도의 집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남편이 들어오자 아파트 실외기에 매달려 있다 추락사한 사건 당시, 언론에서는 목사의 부고를 전하며 '과로사'(...)란 식으로 미화해서 보도했었는데, 왜냐하면 똑같은 사고 피해자라도 행실에 따라 욕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 보도 기사에서는 대개 '피해자다움(선량한 이웃)'스럽게 보도하며, 이로 인해 선입견과 프레임이 생기곤 한다. 도시인들은 대개 언론을 통해 세상돌아가는 것을 파악하니 '피해자다움'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탓이 크다. 그런데 또 언론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당한 기사에 그 사람의 안좋은 행실 쓰면, 오히려 기자에게 굳이 그런 내용을 왜 쓰냐며, 일부러 욕먹게 하려는 의도냐며 안티냐고 예의가 없다는 식으로 악플이 달릴 정도다. 감정을 지닌 사람은 AI가 아니라서 기계적으로 가해자, 피해자를 구분하지는 않고 가해자라도 행실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는데, 친분이 있는 사람이 범죄에 연루되면 적극 실드치거나 물타기하는 모습은 흔하다. 박원순 성폭력 사건 당시엔 '피해호소인'이란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시골 마을에서는 가해자들이 다 평범한 이웃들이니 아예 범죄에 둔감해져 판사마저 가해자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옹호하고 집행유예로 처벌을 대폭 경감했다.

사실, 사이코패스의 예처럼 '가해자다움' 프레임도 결국 언론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로 인해 사이코패스 이미지가 왜곡됐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어차피 이웃의 사생활에 관심이 무척 많은 시골에 살아도, 대부분 자신의 생활반경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반경에 특별히 노예나 범죄가 없다면, 결국 시골인들도 언론을 통해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은 도시인과 똑같다. 사이코패스도 언론에서 보도할때 막 째려보는 사진 등, 하여간 최대한 '악당'처럼 보이는 사진을 골라서 올린다. 그래서 사이코패스가 무슨 타고난 살인마나 악마 수준으로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상은 정치인이나 판사, 의사 등도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고 한다. 또 연쇄살인마 강호순도 막상 주변 이웃에 따르면 자기가 아플때 강호순이 차에 태워줘서 근처 병원에 데려줬다는 등 '미담'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어야 돈이 되는 언론은 '극단적인 가해자'와 '선량한 피해자' 프레임이 돈이 되니까 더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그게 고정관념으로 형성될 수 있다. 이런 '선과 악' 프레임은 역사학자들도 선호한다.[19] 그리고 사실 대중들도 가해자 미담 기사와 피해자 악담 기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 일본에서 극단적인 살인마로 꼽히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가해자가 출소 후 자신을 변호하는 책을 출판했을 때 심지어 그 출판사의 책조차 불매하자는 여론마저 생겼을 정도였다. 피해자에게 불리한 기사 역시 가해자에게 유리하므로 싫어한다. 결국 '가해자다움'과 대조적으로 '피해자다움'스러운 프레임으로 언론의 편집방향은 정해지고, 그렇게 고정관념은 생겨난다.

그렇다고 '가해자다움'과 '피해자다움'을 단순 고정관념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실제 '범죄심리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이를 어느 정도는 패턴화시켜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이를 범죄심리학자에게 보여주며 자문을 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쓴 '피해자'인지, 아니면 진짜 '가해자'인지를 인터뷰만으로 유추해볼 때는 결국 '가해자다움'과 '피해자다움' 중 어느쪽에 가까운지 대조해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러다보면,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에서 삽질한 범죄심리학자처럼 생사람 잡을 수도 있는데, 이 심리학자가 피해자의 아버지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것은, 아버지의 반응이 '피해자다움'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며 확증편향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알에서도 용의자에게 찾아갔을 때 용의자가 거친 반응을 보이면, 범죄심리학자나 댓글 반응이나 '도둑이 제 발 저린 듯한 반응'이라며 '피해자다움'에 어긋난다고 가해자로 의심하는데, 피해자라도 경찰과 기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트라우마가 생겨 거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어차피 다른 범죄들은 '증거 중심주의'가 워낙 강하게 정착되어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라는 말이 나오는 '성범죄'처럼 증거가 뚜렷하지 않으면 '피해자다움'이 더욱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원래 사람들은 사주나 별자리, 궁합 등 미신은 물론, 혈액형 성격이나 MBTI처럼 다소 논란이 있는 것들도 '맹신'하는 등 어떤 틀에 끼워맞춰서 판단하려는 본능이 있고 편견에 빠질 수 있어 법원에서 증거 중심주의를 채택한 것인데, 정황증거나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할 때는 편견이 일정부분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피해자다움'의 편견에 빠질 수 있다며 배제하고 피해자의 진술에 손을 들어줬으나, 이로 인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 박원순 시장의 부인은 법원의 판결을 부정하며 계속 '우리 남편은 피해자'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2.4. 내면화된 차별[편집]


범죄를 당하거나 차별을 경험하거나 갑질을 당한 피해자들이 스스로 당해도 싸다고 여기거나 자신들이 틀렸다고 자학하며 자신과 같은 부류의 피해자들을 비난하거나 매도하기도 한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속담처럼 '피해자가 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실제 윤일병 사건의 가해자인 이병장도 이병 시절엔 고참들의 괴롭힘에 시달려 소원수리를 긁던 피해자였다고 한다. 물론 꼭 피해했기 때문에 가해를 했다는 것은 변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반대로 쫄병 시절은 피해해 악습을 없애려 노력하는 고참도 있고, 고참들에게서 괴롭혀지지 않았어도 자신이 고참이 되면 후임을 괴롭히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 그럴 사람이 미리 당해서 더욱 '보상심리'로 악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2.5. 모순점[편집]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또 다른 사건의 피해자가 되면 마치 피해자 비난을 단 1번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태세전환을 한다.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 남에게서 비난되기 싫어하는 이중잣대 그 자체인 셈이다. 이런 태세전환은 가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남이 가해자라면 엄청 비난하지만, 막상 자신이나 주변인이 가해자가 될 땐 실드를 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며 물타기한다. 일례로 박원순 성폭력 사건 당시 서울시에서 지원받던 여성단체들은 침묵을 하거나 박원순 시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평소는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다'라거나 '성인지 감수성'이라며 가해자를 옹호하면 '2차 가해'라는 프레임까지 퍼뜨리던 것이 무색해졌다. 또 박원순의 변호인부터 지지자들까지 '피해자 비난'에 앞장서다 피해자에게 고소까지 당하는 등, 평소는 '여성 인권'에 앞장섰다는 박원순 시장의 업적이 무색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박원순 성폭력 피해자, ‘2차 가해’ 정철승 변호사 고소


3. 사례[편집]



강간과 같은 성범죄는 사실상 피해자 비난에 대한 담론과 학술적 논의의 중심부에 있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기한 거의 모든 설명들은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비난 사례를 가정하고 있는 문헌들을 참고한 것이다. 법조계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묘한 용어를 도입한 것 역시 성범죄 사건에서의 피해자 비난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관련 기사 수십 년 전, 즉 1970년대 유신정권만 하더라도 법원에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책임을 부각하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해당 사례에서 보듯이 재판장이 성폭행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며 강조해 말하는 등 많이 변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20] 더욱 강조한다면 성범죄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일어나며 가해자는 피해자가 백주대낯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전신을 철갑옷을 입고 저항해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곧 장소나 옷차림, 저항여부는 상관없다. 심지어 남성이 여성한테서 성범죄 피해를 했을 경우엔 여자한테서 당하고 있냐는 등 2차 가해가 더욱 심해지곤 한다.

"맞을 짓"이라는 표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위의 성폭력을 제외한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 혹은 군 가혹행위 등을 포괄하기 위해 동원한 단어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군대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집에서 배우자나 부모에게 몽둥이질을 당하거나 하는 사례들에서 "너도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 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특히 가정폭력의 경우, "왜 참고 살고 있어? 얼른 도망쳐야지!"라고 말하는 것 역시, 비록 선의에서 조언한 것일지언정 도망치지 않으면 무슨 일을 겪든 본인 책임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기에 비난조로 들릴 수 있다. 또한 "왜 맞고 있었냐? 같이 때려주지 않고."라고 비난하는 경우도 많다.
  • 학교폭력 피해자: 위의 '피해자다움'이란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피해자가 평소 성적이 좋지 않거나 아예 학교 전체의 학력이 낮거나 피해자가 게임 등 폭력적인 오락매체에 자주 노출되거나 등의 요인들이 있을 경우 피해자 비난이 발생하게 된다. 학교폭력/오해 등의 문서를 참고할 것. 특히 피해자를 제외한 제3자인 학생, 교사, 학생의 부모 등의 경우 위에 언급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제3자의 입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가해자가 피해자 비난을 행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 사회생활 갑질의 피해자
    • 학교폭력이나 집단 따돌림과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못나서, 무능해서 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이를 정당화한다. 가스라이팅이 대표적 수단. 꼰대들에서 자주 보이는 성향인데 참고로 이는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꼰대 갑질을 통하는 가해가 이루어지고 있다.[21]
  • 전염병 환자
의외로 피해자 비난은 공중보건, 건강, 의료,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어떤 전염병 등에 감염된 환자를 비난하는 경향에 치중하여 논의하고 있는데[22], "그러길래 애초에 감염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식으로 환자를 비난하게 되는 식이다. 특히 이런 비난이 가장 극심해지는 질병이 바로 에이즈이며, 에이즈 보균자에는 대해서 아직도 "문란하게 놀아서 그래", "동성애를 해서 그래"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특히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도들에게서 에이즈 환자에 대한 혐오가 조장되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한센병은 역사성을 따져보면 에이즈보다 더 유서깊은(?) 피해자 비난의 사례이다. 특유의 끔찍한 증상과 전염성으로 인해 한센병 환자들은 심각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속는 놈이 잘못이다"로 대표되는 케이스.[23] 만일 주위에 누군가가 보이스 피싱에 속아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멍청하다면서 비웃었다면, 이 역시 그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다. 보이스 피싱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현직 경찰관들이나 법조계에 출입하는 기자들마저 속여넘기는 게 바로 사기단의 현실이다. 심할 경우 오래동안 금융권에 종사한 피해자도 있다. 비단 통신전자금융사기가 아니더라도, "사기는 멍청한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다"와 같은 편견 및 고정관념은 그 사기의 종류를 막론하고 폭넓게 퍼져 있다. 당장 네이버 뉴스 댓글만 보아도 성범죄에서는 피해자 비난은 비난을 받는 반면, 사기에서 피해자 비난 댓글이 압도적인 공감을 얻는 것을 볼 정도로 심각하다.

  • 재난사고 피해자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천안함 피격 사건, 이태원 압사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비난 여론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인명피해가 발생한 재난사고의 피해자를 배상금을 탐하여 시체팔이하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해당 사고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된 배상을 했느냐의 경우를 떠나서, 사고 당시 희생자들이 사고현장에 있어야 했던 목적을 빌미로 국가의 배상 책임이나 시민들의 추모의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하거나[24], 이들이 배상의 의미로 받은 각종 혜택때문에 사고와 관련없는 이들이 피해를 봤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는 재난사고에 대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지는 이유를 모르거나, 알아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느라고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난 사고를 구태여 국가가 책임을 지고 배상이나 뒷수습을 하거나, 해당 사고의 발생에 대해 대국민 사죄를 하는 것은, 이런 사고의 발생을 예방하거나 사고 발생 후에 일어나는 피해를 최소화할 의무를 국가가 지는데, 어떤 이유로든 이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국가에게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추모공간을 서울특별시가 철거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극심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이러한 정부의 책무의 존재의 이유를 정치인들 중에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압사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범죄자의 가족이니까, 연관자니까 피해해도 무관하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케이스. 연좌제 자체는 현대엔 제도상으로는 소멸되었으나 연좌라는 인식은 어딜가든 남아있는지라 신상이 알려지고 주목받은 범죄자의 가족은 설령 범죄자와 무관하게 살고 과거나 현재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었다도 연좌에 의해 사회적으로 차별, 혐오, 낙인의 피해자가 되며, 심하면 직장생활을 비롯한 여러 사회활동에도 대놓고 피해를 보거나 피해자나 피해자의 연관자에게서 보복성 범죄행위를 당하거나[25], 연좌에 따라 사회적으로 말살, 거세당하는 걸 견디지 못한 가해자의 가족/연관자이면서 동시에 연좌 피해자가 끝내 자살하는 등의 문제가 나오기도 한다. 특히 일본메이와쿠 문화가 강해 그것과 관련한 연좌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편이다.

특정 국가의 국민 혹은 특정 인종이 단순히 국적/인종을 이유로 차별발언, 혐오발언을 들어도 '평소 해당 국가/인종이 문제를 일으켜서 이미지를 깎아먹으니까 당해서 싸다'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또 비슷한 경우로, 서구권의 동양인 혐오 범죄에 대하여도 비난의 대상을 인종차별 및 혐오범죄의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국가의 동양인에게 돌리면서 '너희들이 우리 이미지를 깎아먹어서 애꿎은 우리까지 피해를 입는다'는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특정 국가의 동양인을 대상으로는 혐오범죄를 저질러도 좋다는 의미로 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바이다.

  • 국가 권력에 의한 탄압과 폭력, 차별 행위
위의 인종차별이나 폭력 피해자처럼, '뭔가 맞을 짓을 해서 국가와 국민들에게 해를 끼쳤을 테니 당한 것', 혹은 '억울해도 나라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이런 인식이 국가 권력을 절대화하는 사상과 결합하게 되면 더더욱 합리화가 가능해지며 사실상 답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부분은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공권력의 표적수사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부분인데, 전후 사정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로 그저 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이라는 점 하나만 가지고 비난부터 하는 사례도 많다. 국내 사건이라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성접대 의혹 등에서의 반응을 예로 들 수 있고, 해외에서는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에 대한 표적수사 논란에 대한 반응이 있다.

  • 악성 프로그램 피해자
불법 다운로드나 불법 사이트 등을 이용했다가 거기에 있던 바이러스나 렌섬웨어 등의 악성 프로그램에 당하는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한 일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입장 때문에 (혹여나 같이 털릴까 봐) 신고를 못 하는 경우도 생긴다.

과거는 가해를 저지른 전적이 있는데 다른 사건에선 자기가 피해자가 된 경우. 보복성 범죄를 당하건 무관한 범죄를 당하건 간에 과거 가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퍼지면 '당할 만 했네' 하는 등의 비난이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닫힌 사회 특유의 내부 결속력과 자기 합리화 등으로 인해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례가 많다.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명백한 피해자인데도 책임을 전가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4. 같이 보기[편집]


  • 2차 가해
  • 강간 문화
  • 강간 신화
  • 강약약강, 성선설: 고대, 중세에는 노예, 하층민 등에 대한 지나친 학대를 예방하기 위하는 좋은 취지로 시작된 개념이었지만, 나중에 변질되어 “강간범은 원래 착한 사람인데, 사악한 여자가 유혹해서 어쩔 수 없이 강간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로 악용되곤 한다. 참고로 초등학교 교사 중에서도 왕따 가해자 문제를 처리하기 귀찮았을 때 왕따 가해자 편을 드는 수단으로 잘 이용하곤 했다.[26]
  • 능력주의
  • 다윈상
  • 맞을 짓
  • 메이와쿠: 싸움 자체를 금기시하는 일본의 관습.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정당하게 이야기해도 오히려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그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일본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나,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들에서도 종종 나타나곤 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일본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수성에 대해 연구할 때 자주 언급된다. 다만 이에 대해 사회적 규칙 및 조화를 지키기 위해 피해자를 비난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는 건 비단 일본 혹은 동아시아만의 일은 아니라는 반박들도 존재한다.
  • 병먹금: 피해자 비난은 병먹금을 악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 샤덴프로이데
  • 수평 폭력
  • 악은 악으로: 피해자가 된 가해자 비난의 예로 볼 수 있다.
  •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적반하장
  • 정신력: 이런 비난을 저지를 때는 사람의 정신력이 언제나 일정하다는 전제를 은연 중에 깔기도 한다.
  • 존경성 정치
  • 책임전가
  • 피해자 코스프레: 이쪽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피해자다움을 충족하지 못한 피해자가 말 그대로 피해자인 척 한다고 비난되는 일도 있다. 피해자인 척 하는 진짜 피해자 코스프레자들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 한국인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
  • 헬리콥터 부모
  • Mamihlapinatapai

5. 외부 링크[편집]




[1] 남에게 맡아준 금품을 이런식으로 도둑맞았을 경우는 이야기가 다른게, 남이 금품을 맡긴 순간 집주인에게는 이 금품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어이없는 이유로 잃었을 경우 그 의무를 소홀히 한, 도덕적으로 그른 일을 한 것이다.[2] 그러나 현실에서는 총기로 무장한 경찰조차 비무장 상태인 범죄자를 체포하려고 할 때 신중하게 접근하며 경찰에서도 범인이 살인이나 강간이 아닌 단순 금품을 노리는 상황이면 도둑이나 강도를 자극시키지 말고 우선 범인 요구를 들어준 후 경찰에 신고하라고 한다. 본인이 힘이 세거나 무술을 배운 것만 믿고 범인을 공격하면 제압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당황한 가해자가 사람을 해칠 가능성이 높기때문이다.[3] Leviston, Z., Dandy, J., & Jetten, J. (2020). 'They're discriminated against, but so are we': White Australian-born perceptions of ingroup and immigrant discrimination over time are not zero sum. British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doi:10.1111/bjso.12384.[4] Young, I. F., & Sullivan, D. (2016). Competitive victimhood: A review of the theoretical and empirical literature. Current opinion in psychology, 11, 30-34.[5] Maybrey, C. (2004). "Blaming the victim" syndrome. In M. D. Smith (Ed.), Encyclopedia of Rape (pp.26-28). Greenwood Publishing Group.[6] 배상미 (2017). 성폭력 피해자의 섹슈얼리티--제도화된 성폭력 각본을 넘어서. 여/성이론, 36, 12-37.[7] 브라운밀러는 무고죄의 사례로서 미국의 유명한 스캔들인 "스코츠보로 소년들"(Scottsborough boys) 사건을 들고 있다. 물론 이는 흑인 사회와 리버럴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 대목이었다고 한다.[8] 반대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추종자도 거느리고 사회적으로도 입지가 있는 유명인사들이 학교폭력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밝히며 가해자를 지목할 때는 여론이 오히려 가해자에게 공격적으로 되기도 한다.[9] 극단적인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7년동안 운행 중단된 인천-제주간 여객선 운항같은 것이 있다. 사고는 청해진 해운이 내고, 피해자는 승객과 단원고 학생들이었지만, 사건 이후에는 이 인천-제주간 여객선 서비스의 존재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던 사람들은 전부 운항 중단으로 피해를 봤다. 이들은 사건과 관련이 없음에도 피해를 봤고 이들의 피해를 책임졌다는 소식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10] Lerner, M. J., & Simmons, C. H. (1966). Observer's reaction to the" innocent victim": Compassion or rejec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4(2), 203-210.[11] Jones, C., & Aronson, E. (1973). Attribution of fault to a rape victim as a function of respectability of the victim.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26(3), 415-419.[12] Janoff-Bulman, R., Timko, C., & Carli, L. L. (1985). Cognitive biases in blaming the victim.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21(2), 161-177.[13] Polaschek, D. L., & Gannon, T. A. (2004). The implicit theories of rapists: What convicted offenders tell us. Sexual Abuse, 16(4), 299-314.[14] Key, C. W., & Ridge, R. D. (2011). Guys like us: The link between sexual harassment proclivity and blame.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 Relationships, 28(8), 1093-1103.[15] 조금 더 간단히 말하자면 우연(논리적으로 납득 불가능한 상황)에 의해 일어나는 불행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는 현상을 갖다가 '예방하면 그런 것은 피해갈 수 있다'라고 스스로 논리적으로 납득하며 살아가기 위해 2차 가해 등 피해자 비난을 저지르며 안심한다는 것. 예시를 들어보자면 밤길을 걷던 한 사람이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에게 당해 이유없이 칼에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람은 말 그대로 우연히 이런 일을 당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제 3자들 입장에서 이건 납득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를 납득해서 스스로 안심하기 위해 피해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든 스스로 지정한다. 그러고서는 피해 원인을 봉쇄할 예방책이 버젓이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당해버린 "무지한" 피해자와 나는 달라, 나는 예방책을 숙지했으니까, 하면서 피해에 대한 예방책을 본인 나름대로 수립하고, 본인은 피해자처럼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조심성 없이 밤길을 걸으니까 그런 일을 당하는거야!' 하고 도리어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한편으론 '난 밤길은 걷지 않겠어. 그러면 그런 일은 안 당하겠지?' 하고 안심하기를 추구한다는 것.[16] 허민숙 (2018). 성폭력 피해자를 처벌하다--피해자 전형성 위반 범죄로서의 성폭력 무고. 한국여성학, 34(4), 69-97.[17] Christie, N. (1986). The ideal victim. in E. Fattah (Ed.), From crime policy to victim policy (pp. 17-30). London: The Macmillian Press Ltd.[18] 예를 들어 한 건장한 성인남성이 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했는데 되려 공권력인 경찰은 남성을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례를 보면 여성의 폭행으로 건장한 성인남성이 반신불구되거나 사망한 사건들도 많다. 그러나 " 건장한 성인남성이 폭행당할리가 없다"는 선입관으로 사건을 잘못 처리했다가 뒤늦게 논란이 되어 재수사하는 낭패를 본 사례도 있다.[19]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민비'라고 부르고 별로 명성황후를 좋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는데, 각종 매체를 통해서 미화된 것은 일제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라는 지분이 크다. 일제는 나빠야 하는데, 만약 민비가 사악하다고 생각되면 일제에게 명분을 줄 수 있으니 "내가 이 나라의 국모다"라고 울부짖으며 민중을 위해 희생하는 테레사 수녀 마냥 미화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동학농민군에게 처형당했으면 어떨까? 2000년대 들어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시민혁명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는데, 만약 동학농민군이 민비를 '혁명의 이름으로' 단두대에서 처형했으면 프랑스 혁명처럼 미화됐을 수 있다. 당연히 '혁명'의 명분을 드높이기 위해, 그때는 매체에서 "내가 이 나라의 국모다"라고 울부짖는 성녀 이미지보단,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며 음흉하게 헤헤 웃는 악녀 이미지로 묘사됐을 수도 있다. 사실 이 이미지가 좀 더 팩트에 가까운데 '일제 피해자다움'으로 인해 미화됐다. 결국 모든 분야에서 '선과 악' 프레임을 선호하며 '살인마' 보도에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성범죄에서 더욱 피해자다움이 부각되고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성범죄 특성상 다소 다툼의 여지가 있어 '피해자다움'에 어긋나면 혹시 너도 빌미를 준거 아니냐고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20] 다만 성범죄의 감형이 살인죄에 비해 매우 쉽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존재한다.[21] 괜히 '젊은 꼰대'라는 용어가 생긴 게 아니다. 중장년 세대만 갑질을 하는 게 아니다. 젊은 세대들, 이른바 사회 초년생들조차도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후배인 사람에 대해 갑질을 일삼고 위계질서를 강요한다. 애초에 꼰대는 나이, 세대를 불문하고 자신의 성격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22] Crawford, R. (2008). The politics of victim blaming. In S. Earle, & G. Letherby (Eds.), The sociology of healthcare: A reader for health professionals (pp. 123-135). New York, NY: Palgrave MacMillan, Ltd.[23] 더 정확히는 첫번째 당하는 건 사기친 사람 잘못이지만 두번째 당하는 건 사기당한 사람 잘못이라는 속담 유래.[24] 가령, 상술한 세월호 사고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이나 추모에 대한 논의가 그렇다. '자기들끼리 놀러가다가(놀다가) 사고가 난 것뿐인데, 왜 그걸 국가가 배상해야되냐 or 뭐하러 추모해주냐'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꽤 있는 편이다.[25] 드물긴 하지만 수면위로 떠오를 정도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국민법감정상 너무 가벼운 처벌로 끝난 경우에는 실제로도 눈돌아간 피해자 가족에게 가해자 본인 또는 가해자의 가족이 살해당하는 일도 있으며, 세간에선 해당 사건만 따지고 볼 경우 엄연히 피해자인 가해자 가족을 신경을 쓰기보단 당시 사건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가해자가 된 피해자 가족이 그럴 만도 하다고 넘어가는 경향이 더 크며 이러한 보복성 범죄행위는 2차 가해같은 악랄한 경우가 아니라면 뉴스 등 각종매체에 수면 위로 뜨지 않는 경우가 많다.[26] 냉혹한 현실이지만 교사 입장에서도 여러 학생들을 상대로 해서 한꺼번에 훈계하다가 학부모 여러명과 싸움 붙는 거보다는 순하고 만만해 보이는 애한테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게 더 편하다. 심지어 자기 자식이 피해자래도 자식을 지키고자 이러는 경우마저 존재하니 말 다했다. '운지', '인민' 같은 단어들도 비슷하게 원래 뜻으로 쓰려면 화자 대부분의 갱생이 필요하나 매우 어려워서 금지어로 찍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