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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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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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魯昌
생몰연도 미상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유주(幽州) 대군(代郡) 출신.
2. 생애[편집]
서진 조정이 영가의 난으로 인해 무너지고 많은 유민 무리가 당시 유주에서 할거하던 왕준에게 의지하였으나, 왕준이 폭정을 행하는 것을 보고 이내 실망하여 모두 그를 떠나서 동쪽으로 이동해 모용부로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이들을 모두 위무하고, 쓸만한 인재는 등용하면서 배억, 양탐, 황홍, 노창을 모주(謨主)로 삼았다. 이후 노창은 정로장군에 임명되었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양주(揚州)에서 승제하여 진왕(晉王)에 즉위하고, 사신을 보내 모용외를 가절, 산기상시, 도독요좌잡이유민제군사(都督遼左雜夷流民諸軍事), 용양장군, 대선우로 삼으면서 창려공(昌黎公)에 봉하였다. 그러나 모용외는 사마예를 무시하며 조서를 받들지 않으려 하니, 정로장군 노창이 모용외에게 나아가 유세하였다.
모용외는 이를 옳게 여기고, 장사 왕제(王濟)를 동진에 사자로 보내 진왕 사마예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게 하였다."지금 낙양과 장안 두 수도가 무너지고, 천자께서 몽진하시어 낭야왕이 강동(江東)에서 승제하였으니, 실로 뭇 사람들의 목숨이 그에게 달려있는 셈입니다. 명공(明公)께서는 해삭(海朔)에 웅거하면서 한 방면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여러 부락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숫자만을 믿고 거병하여 도화(道化)를 따르지 않음은 명공의 관직이 왕명(王命)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 또한 강성하다가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의당 낭야왕에게 사자를 파견해 대통(大統)을 잇도록 권하십시오. 그런 후에 황제의 명령에 의거하여 죄인들을 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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