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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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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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游邃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사주(司州) 광평군(廣平郡) 임현(任縣) 출신.
2. 생애[편집]
서진 시기에 창려(昌黎)태수를 지냈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 중원이 혼란스워지자, 유수는 위군(魏郡) 출신의 황홍(黃泓), 전 창려태수 봉선(逢羨), 송석(宋奭)과 함께 계(薊)로 피신하였다.
당시 유주(幽州)에서 할거하던 사공 왕준은 유수의 형 유창(游暢)을 초빙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다. 유창은 왕준의 초빙에 응하여 그 휘하로 들어가려 했으나, 유수가 말리며 말했다.
유창이 말했다."팽조(彭祖: 왕준의 字)의 형벌과 정무는 제대로 손보지 않아, 한족과 이민족 할 거 없이 이반하고 있습니다. 이 유수의 생각으로는 그는 분명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형님은 어째서 머뭇거리면서 결정을 못 내리시는 겁니까?"
이에 유수가 납득하였다. 그리하여 유창은 왕준을 섬기다가 훗날 석륵이 왕준을 멸할 때 목숨을 잃었다."팽조는 잔인하여 북쪽으로 가는 유민들을 모두 학살한 일이 있었다. 지금 그가 손수 서신을 써서 나를 몇 번이고 부르는데, 만약 내가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경과 우리 종족에게도 그 화가 마치리라. 의당 여기서 갈라져야 종족을 보존하기 쉬울 것이다."
영가 7년(313년) 3월, 요동에서 모용부의 모용외가 진나라 유민들을 받아들일 때, 유수는 황홍과 더불어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용양장군 장사에 임명되어 조정의 의례와 법도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모용외가 동진으로부터 인수를 하사받고 요동공(遼東公)에 봉해지자, 유수는 배억과 나란히 그의 장사에 임명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