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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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3. 현실의 용례


1. 개요[편집]


서기 2024년은 단기 4357년이다.}}}
단군기원(檀君紀元)은 대한민국에서 한때 쓰던 기년법으로, 약칭은 단기(檀紀). 단군원호(檀君元號)라고도 한다.

단군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1]을 단기 1년으로 헤아리는 방법이다. 서기 연도에 2333년을 더하면 단기가 된다. 반대로 단기 연도(2334 이상)를 서기 연도로 바꿀 때는 단기 연도에 2333을 빼면 된다.[2][3]

전설 속 첫 임금이 기준이란 점에서 중국황제기원일본황기와 유사하다. 전자는 황제 헌원씨의 즉위, 후자는 진무 덴노의 즉위가 기준이다. 단기도 그렇듯 이들도 현대에는 실생활에서는 잘 안 쓰인다.

2. 기원[편집]


단군기원을 사용하려면 당연히 원년으로 삼을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라 관련된 기록마다 단군이 있었다는 시기가 서로 다르다.

일연이 충렬왕 7년(1281)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일연은 삼국유사 권1 기이편 첫머리에서 고기(古記)[4]를 인용하여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以唐髙校勘即位五十年庚寅, (唐堯即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 疑其未校勘實) 都平壤城 (今西亰)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 一作方忽山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校勘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 壇校勘君乃移於藏唐亰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고기에서 말하기를)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당의 요堯 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 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으로,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혹은 방方이라고 한다.) 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다."라고 하였다.

일연은 고려 임금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요(堯) 임금을 고(高)라, 주나라 무왕(武王)을 호왕(虎王)이라 적었다.

일연이 인용한 글에 따르면 요 임금이 즉위하고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에 단군이 즉위하였다. 이에 따르면 요 임금이 즉위한 해는 신축(辛丑)이다. 하지만 중국의 고서 중 요 임금이 신축년에 즉위했다고 말하는 것은 없다. 일연은 여기에 주석을 달아서 요 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이라고 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의 단군기원 항목#은 중국의 고서 중 요가 무진년에 즉위했다고 말하는 것은 "중국 사마광(司馬光)의 『계고록(稽古錄)』과 유서(劉恕)의 『자치통감외기(資治通鑑外紀)』"라고 설명했다.

또한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자를 봉한 해를 전근대 역사학에서는 기원전 1122년(기묘)이라고 보았다. 단군이 임금이 되고 1500년이 지나 주무왕이 기자를 봉했다 하였으므로 단군이 임금이 된 해는 기원전 2622년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가 이 즈음에 즉위했다고 말하는 고서가 없어서 여전히 일연, 또는 일연이 인용한 '고기'가 단군이 즉위한 때라고 생각한 연도가 서기로 언제인지 말하기가 힘들다.

아무튼 단군이 언제 사람인지 요 임금을 기준으로 설명하였는데, 세부사항이 서로 아귀가 맞지 않고 또 설들이 달라서 서로 충돌하여 연도를 특정하여 말할 수가 없다.

고려 공민왕 재위 10년(1361) 11월, 홍건적의 난 때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을 점령하자 공민왕은 남쪽 안동까지 파천했다가, 이듬해(1362)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탈환하자 환도하였다. 고려사 백문보(白文寶) 열전과 담암일집(淡庵逸集: 백문보 문집)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11년(1362) 8월, 백문보는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백문보는 임금이 난리를 만나 먼 남쪽으로 파천해야 했음을 한탄하고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수단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다독이고 유교의 가르침대로 나라를 다스리며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상소를 척불소(斥佛疏), 즉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라고 부른다. 그런데 백문보는 척불소에서 단군을 언급하였다.

且天數循環周而復始. 七百年爲一小元, 積三千六百年爲一大周元. 此皇帝王覇理亂興衰之期. 吾東方自檀君至今已三千六百年, 乃爲周元之會. 宜遵堯舜六經之道, 不行功利禍福之說. 如是則, 上天純祐, 陰陽順時, 國祚延長.

또한 하늘의 운수는 순환하여 돌고 다시 시작합니다. 700년이 하나의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여 하나의 대주원(大周元)이 됩니다. 이는 황제(皇帝)⋅왕패(王覇)와 이난흥쇠(理亂興衰)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었으니, 곧 주원(周元)의 기회입니다. 마땅히 요순(堯舜)과 육경(六經)의 도(道)를 쫓되 공리화복(功利禍福)을 논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하늘(上天)이 진실로 돕고 음양(陰陽)이 때를 맞추어 국운이 길어질 것입니다

담암일집인용출처, 고려사 백문보 열전[5]

백문보는 척불소에서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리며 당시(1362)가 단군으로부터 3600년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백문보가 생각한 단군원년은 기원전 2239년(임인), 또는 기원전 2238년(계묘)이다. 1362년 간지가 임인이였으니 백문보의 단군원년은 기원전 2239년(임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백문보가 무엇을 근거로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단기의 원년인 '기원전 2333년'은 조선 성종 16년(1485) 편찬된 《동국통감》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신 등은 살펴보건대) 고기(古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무진년(戊辰年)에 함께 즉위하여, 우(虞)나라와 하(夏)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1천 48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 갑자(上元甲子)인 갑진년(甲辰年)에 있었는데, 단군의 즉위가 그 후 25년 무진년에 있었다면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하였다.'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인용문 2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가 제공하는 《국역 동국통감》(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링크

임금 시절 무진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세워 임금이 되었다고 했는데, 요 임금 역시 사실 신화 속 인물이므로 정확한 생몰연대가 전할 리 없다. 그래서 중국의 고서에서도 요 임금이 언제 사람인지를 두고 서로 말이 달랐다. 예를 들어 죽서기년은 요 임금이 병자년(기원전 2145년)에 즉위했다는 설을 주장했다. 11세기 북송 사람 소강절(邵康節)이 쓴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요 임금이 갑진년(기원전 2357년)에 즉위했다는 설을 주장하여 동아시아에 널리 퍼졌다.

고서들이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시기를 요 임금 즉위년과 비교하여 설명하였으므로, 요 임금 즉위년을 언제라고 보느냐에 따라 당연히 단군의 연대도 함께 엇갈릴 수밖에 없다. 동국통감이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 갑자인 갑진년"이라고 설명했는데 바로 황극경세서의 설을 인용한 것이다. 동국통감은 황극경세서의 해석을 따라 요 임금이 기원전 2357년(갑진)에 즉위했다고 보고, 단군이 즉위한 해가 60갑자로 무진년이었다는 설을 절충해서 해석하였다. 갑진년으로부터 24년 뒤가 무진년이므로, 요가 기원전 2357년(갑진)에 즉위했고 단군이 무진년에 즉위했다면, 기원전 2357년에서 24년을 더하여 기원전 2333년이 된다. 만일 죽서기년의 기원전 2145년설을 인용했다면 이후의 무진년은 기원전 2093년이다.

동국통감의 해석을 받아들여 18세기에 씐 《동사강목》 또한 단군 즉위년을 '당요 25년 무진'이라고 설명했다.[6]

세간에는 기원전 2333년이 단군 즉위년도인 듯 착각하기 쉽게 알려졌지만,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이라는 단서를 붙이며 사실이라고는 절대 명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기를 쓰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확한 연도를 몰라서 단군이 즉위했을 법한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수많은 연도 중 하나를 설정했을 뿐이다. 실제로는 기원전 2333년 이전일 수도 있고 이후일 수도 있다는 것. 고고학적으로 보면 단군이 등장할 법한 청동기 시대는 훨씬 이후이다.

단기와 비슷하게 일본에서 진무 덴노의 즉위기원을 근거로 한 황기(皇紀) 역시, 진무 덴노가 실존인물이 아닌 신화 속 인물이라는 점에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7][8] 애당초 고대의 기년법이란 이렇게 국가의 정통성을 위해 끼워맞춘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후대에 표준화된 것. 심지어 우리가 평상시에 주로 사용하는 서기의 원년도 역사적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예수가 태어난 해를 나름대로 추정한 것이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 추정이 몇 년 정도 오차가 있다고 본다.[9]

3. 현실의 용례[편집]


  • 1909년, 홍암 나철이 창교한 대종교에서 동국통감의 기록에 근거한 단기 사용을 적극 주장하였다. 이후 꼭 대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민족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종종 단기를 몰래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일본 연호를 따라 썼기 때문이다. 이후 대종교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만주에서의 무오독립선언서에 '檀君紀元(단군기원)'이라는 명칭으로 단기가 사용되었으며, 역시 이 영향을 받아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에도 '朝鮮建國(조선건국)'이라는 명칭으로 단기를 사용하여 연도를 표기하였다. 다만,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단기 대신 3.1 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1919년을 원년으로 하여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 1948년(단기 4281년) 제헌 국회에서 새 정부의 연호로 단기를 채택하여 처음으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단기를 사용하였다. 이때 이승만을 포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 정치인들은 대한민국 연호[10]를 쓰자고 주장한 반면[11] 국회의원들은 단기 연호를 쓰자고 하였다. 대한민국 연호는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연호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단기를 새 나라의 연호로 채택했다. 이 시기 법률문서나 반민특위 관련 문서 등에서 단기로 연도를 적었음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호적 기록도 죄다 단기로 적었다. 당시에는 단기 사용이 당연했으므로 굳이 단기라고 명시하지 않고 숫자만 적은 경우도 많다. 지금 서기에 따라 연도를 적을 때에 굳이 서기라고 명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기와 단기는 무려 2333년이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1961년 12월,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는 동안 연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1962년(단기 4295년) 1월 1일부터 단기를 폐지하고 서기를 채택하기로 하여 현재에 이른다. 공문서 등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서기만 사용하지만, 민간에서는 단기를 함께 쓰는 경우도 나름대로 있다. 예를 들어 불교 달력에 서기와 함께 불기와 단기를 병용하거나, 신문 날짜란에 서기와 같이 쓰는 식.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졸업 앨범 등에 서기와 병기하여 쓰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 3009년[12] 삼국통일, 3925년[13] 임진왜란, 3956년[14] 인조반정, 4278년[15] 8.15 광복 등과 같이 주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연도가 명시된 국사, 세계사 교과서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단군기원이다. 또한 이런 학교에서 이런 교과서들로 학습한 사람들의 졸업장에도 연도를 단군기원으로 표기했다. 대략 1948년생까지는[16] 이런 단기 졸업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 산수 과목에서는 서기 연도를 단기로 바꾸거나 단기 연도를 서기로 바꾸는 문제가 나오기도 했다. 이유는 물론 서기가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기년법이기 때문.

  • 옛날식(?) 분위기를 내려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옛날 건물을 복원할 때 대들보에 이것을 써 넣는 경우도 있다. 태조 왕건을 비롯한 일부 사극의 내레이션에서도 단기로 일시를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상술했듯이 정작 건물이 처음 세워졌을 때나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단군기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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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는 연도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기원전 2333년은 조선서거정이 쓴 동국통감에서 처음 주장하였다.[2] 법률 제775호 연호의 관한 법률 부칙 제3조에 따라 법률 제4호 시행 당시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단기연대에서 2333년을 감하여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3] 단, 서기에는 0년이 없기 때문에 기원전을 단기로 헤아릴 때는 2334를 더해야 한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천문학계에서는 기원전까지 헤아릴 때 기원전 1년을 0년으로, 기원전 2년을 -1년으로 간주하고 계산한다.[4] 제목이 <고기(古記)>인 책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옛날(古) 기록(記)'이란 뜻으로 고기(古記)라고 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5] 척불소 내용은 고려사 백문보 열전과 담암일집에 모두 있지만, 고려사에는 백문보가 척불소를 언제 썼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공민왕 11년(1362) 8월에 썼다는 내용은 담암일집의 부록에 있는 편년(編年)에 나온다.[6] 즉위년을 재위 원년(1년)으로 보므로 24년 뒤는 25년째가 된다.[7] 진무 덴노의 모델이 된 천황가의 시조는 존재했겠지만 황기 연대와 일치하게 장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8] 단군왕검은 그나마 고고학적으로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로 여겨지긴 한다. 문제는 단군왕검이 존재하긴 했는데 정확히 언제 고조선을 세웠다는 내용이 신화적이라는 것이다.[9] 주류 의견은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 정도로 본다.[10] 김구백범일지와 같은 임정 요인들의 기록물에서 '대한민국 XX년'이라는 식으로 자주 쓰였다.[11] 이에 따라 1948년은 대한민국 30년이 된다.[12] 서기 676년.[13] 서기 1592년.[14] 서기 1623년.[15] 서기 1945년.[16] 대학은 1939년생까지, 고등학교는 1942년생까지, 사범학교 (현재의 교육대학)는 1943년생까지, 중학교는 1945년생까지, 초등학교는 1948년생까지. 유치원은 1949~1954년생도 포함하나, 당시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은 매우 드물었다. 또한 출생신고가 늦게 되는 바람에 또래보다 1~3살은 더 먹고 입학한 학생들도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