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선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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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정조의 황녀
숙선옹주 | 淑善翁主


조선 정조의 왕녀
숙선옹주 | 淑善翁主


숙선옹주묘 전경
출생
1793년 4월 11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사망
1836년 7월 20일 (향년 44세)
조선 한성부 이동궁(履洞宮)[1]
(現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일대)
능묘
숙선옹주묘(淑善翁主墓)[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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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정조 선황제
모친 수빈 박씨
부군
영명위 홍현주
(永明尉 洪顯周)
자녀
슬하 1남
장남 - 홍우철(洪祐喆)
봉호
숙선옹주(淑善翁主)

1. 개요
2. 생애
3. 일화
4. 가족관계
5. 유물
6.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간택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순조의 동복 여동생이다.


2. 생애[편집]


1793년(정조 17) 3월 1일에 태어났다. 사실 숙선옹주는 어머니 수빈 박씨의 출산예정일이 한 달이 지나서야 태어났다.[3] 다만, 당시 《일성록》에서 정조는 다행히 순산하였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수빈 박씨의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듯 하다.

1796년 숙선옹주가 천연두에 걸렸는데 이때 아버지 정조와 오빠인 순조가 이문원으로 피신했다. 후에 숙선옹주가 완쾌하자 정조가 크게 기뻐하며[4] 마마신 전송 의식으로 숙선옹주의 완쾌를 기뻐하는 시를 지었다.

숙선옹주는 정조의 생전에 작호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빠인 순조가 '숙선'이라는 작호를 주었다.[5][6] 정순왕후는 숙선옹주의 생모 수빈 박씨가 보통의 빈과는 다르다고 하여 공주 아래, 옹주 위인 궁주 칭호를 새로 만들어 숙선옹주에게 주고자하였으나 수빈 박씨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것이 수락되었으면 숙선옹주가 아닌 숙선궁주로 불렸을 뻔했다.

1804년(순조 3) 1월 1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부마 초간택을 하고, 3월 17일 중희당에서 재간택, 4월 9일 중희당에서 삼간택을 거쳐 전 정랑 홍익모의 아들 홍현주를 낙점했다. 같은 해 5월 17일 가례청이 세워지고 혼인을 치른다.

숙선옹주는 아버지인 정조와 오빠인 순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숙선옹주가 시집갈 당시 순조가 혼수로 많은 재물을 챙겨주면서 "선왕(정조)이 몹시 사랑하는 바이고 (나의) 유일한 동생이니 선례로 삼지말라" 라고 신하들에게 훈계를 내린 기록이 있을 정도다.[7]

그리고 숙선옹주가 출합(왕자녀가 혼인하여 궐 밖에 사가를 짓고 사는 것)하기 전 날, 숙선옹주의 집에 가보겠다고 신하들의 반대도 물리치고 가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순조대왕묘지문》, 《명경왕비가 내린 행록》등에는 숙선옹주를 자신과 같이 대하였으며 숙선옹주가 결혼한지 고작 3일만에 순조는 옹주를 그리워하여 매우 서글픈 빛을 띠었으며, 옹주가 궁으로 돌아올 때에는 마치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온 것처럼 맞이하여 위로하였고 출가한 후 계속 서로 만나볼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문안과 선물을 빠뜨리는 날이 없었으며 숙선옹주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따라 주었고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들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숙선옹주가 순조를 방문하러 입궁한다고 하면 순조가 기뻐하며 동생의 방문을 몹시 기다렸는데 기쁜 표정이 주변 사람들이 보일 정도로 눈에 띄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순조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숙선옹주의 집으로 행차하기도 할 만큼 우애가 깊었다.

《조선요리학》에서 숙선옹주가 무를 썰어 만든 요리를 임금에게 올려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이것이 깍두기의 시작이라고 소개하였다. 아버지인 정조가 승하했을 때 숙선옹주의 나이가 겨우 8세였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순조인 것으로 보인다.

숙선옹주는 아버지인 정조를 닮아 여러가지 시를 남겼는데 남편인 홍현주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왕실의 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시라고 한다.

淸風入羅袖(청풍입나수) 맑은 바람은 소매자락에 들어오고

身隨白雲去(신수백운거) 몸은 흰구름 따라가네

啼鳥無定樹(제조무정수) 우는 새는 정한 나무가 없고

流水向何處(유수향하처) 흐르는 물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봉은자(逢隱者)


숙선옹주가 조카인 명온공주를 생각하여 지은 《月夜懷明溫(월야회명온)》이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明月到階前(명월도계전) 밝은 달이 계단 앞에 이르니
淸光如見人(청광여견인) 맑은 빛이 사람을 보는 듯하네
遙知鳳樓夜(요지봉루야) 멀리 봉루를 생각하는 밤
焚香吟詩新(분향음시신) 분향하고 시를 읊조리니 새로워지네

3. 일화[편집]


홍선표는 저서 《조선요리학》에서 숙선옹주가 무를 썰어 만든 요리를 임금에게 올려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이것이 깍두기의 시작이라고 소개하였다. 아버지인 정조가 승하했을 때 숙선옹주의 나이가 겨우 8세였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오라버니인 순조인 것으로 보인다.

4. 가족관계[편집]



  • 시조부 : 홍낙성(洪樂性, 1718 ~ 1798) - 혜경궁 홍씨의 6촌 오빠[8][9][10]
  • 시조모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규(沈?)의 딸, 청성위 심능건[11](靑城尉 沈能建)의 고모
    • 시부 : 홍인모(洪仁謨, 1755 ~ 1812)
    • 시모 : 영수합 달성 서씨(令壽閤 達城 徐氏, 1753 ~ 1823)

  • 남편 : 영면위 홍현주(永明尉 洪顯周, 1793 ~ 1865)
    • 장남 : 홍우철(洪祐喆, 1813 ~ 1853)
    • 며느리 : 전주 이씨(貞夫人 全州李氏, 1815 ~ 1868) - 이혁로[12](李赫魯)의 장녀
      • 손자 : 홍승간(洪承幹, 1834 ~ 1845)
      • 손자 : 홍승억(洪承億, 1842 ~ 1882)


5. 유물[편집]


숙선옹주인장
  • 2017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한국고미술품 53점 중에 가장 높은 가격인 34만 3500달러[13]에 낙찰되었지만 국내에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해 언론에서도 언급이 거의 없었다. 경매 후 인장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6. 기타[편집]


서울특별시 중랑구에는 숙선옹주로라는 도로가 있다. 하지만 이 숙선옹주로는 정조의 차녀 숙선옹주가 아닌, 태종의 후궁 숙선옹주(선빈 안씨)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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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숙선옹주의 제택(第宅)이라고 나온다.[2]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861-1[3] 현대의학으로도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한 출산이다. [4] 정조는 예전에 홍역으로 첫아들인 문효세자를 잃었다.[5] 참고로 정조는 생애 총 2남 2녀로 딸은 둘이 있었는데 의빈 성씨 소생의 큰 딸은 생후 2개월만에 병으로 요절했다. 원래 유아사망률이 높던 시절이라 태어난 아이가 최소한 첫 돌은 넘겨야 비로소 호적 등에 올릴 정식 이름을 짓는 게 일반적이었고, 이러한 유아사망률이 왕자녀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기에 왕실의 작호는 더욱 그러했으며, 특히 그 중 왕위를 이을 원자 및 세자에겐 따로 작호를 만들지 않았다. 첫 아이인 문효도 세자로 책봉하였기 때문에 살아 생전엔 작호를 내리지 못했고( 문효는 사후에 붙인 시호.) 둘째아들인 순조가 태어날 당시에도 역시 다른 아들이 없었으니 자동으로 원자-세자 루트가 예상되므로 작호를 내릴 수가 없었다. 첫 딸은 돌도 안 되어 죽고, 막내인 숙선은 웬만치 크기 전에 정조 본인이 사망했다. 물론 아명 정도는 있었겠지만 공주, 옹주의 작호에 좋은 뜻을 담아 정성스레 지어주던 다른 왕들의 관습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부분이다.[6] 정조 생전에 작호를 받지 못한 이유는 정조가 사망한 해에 숙선옹주는 7살이었는데 이 때 오빠 순조도 아직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오빠인 순조가 세자가 되지 못했는데 그 동생에게 먼저 작호를 줄 수는 없었고 순조가 세자가 된 후에는 세자빈 간택을 진행하던 중이라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얼마안있어 정조가 죽고 삼년상을 다 마친 10살이 되어서야 작호를 받았다.[7] 숙선옹주는 순조에게는 유일한 동복 남매인데, 순조의 고조부가 되는 숙종도 하나뿐인 여동생 명안공주를 무척 아꼈다. [8] 홍준기 → 홍석보 → 홍상한 → 홍낙성[9] 어머니가 함종 어씨인데, 선의왕후의 사촌동생.[10] 홍낙성의 첩이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친언니였다고 함.[11] 화령옹주의 남편[12] 양녕대군의 후손[13] 당시 환율 3억 85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