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주(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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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석주.jpg

창씨명
쿠레야마 샤쿠쥬(吳山錫柱)

남계(南溪)
본관
동복 오씨[1]
출생
1888년 12월 11일
전라도 강진현 절이도 신평리
(현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 명천마을)
사망
1952년 6월 1일
전라남도 고흥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09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황성수 전 국회의원은 그의 외조카이다.[2][3]

2. 생애[편집]


오석주는 1888년 12월 11일 전라도 강진현 절이도 신평리(현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 명천마을)에서 아버지 오구상(吳九相, 1863년생)[4]과 어머니 경주 김씨(1867년생) 김배열(金背烈)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평양신학교에 다니다가 목치숙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그해 4월 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손재곤(孫在坤)·최세진(崔世珍)[5]·조병학(曺秉學)·이석완(李錫琬) 등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한편 만세시위에 사용할 선언서를 작성하고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이형숙의 자택에서 독립선언서 100장을 준비했고, 목치숙은 태극기 80개를 제작했다. 거사일은 4월 14일, 장소는 고흥장터로 정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새벽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시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과 순천 헌병분대 감독 보조원에게 익명으로 보냈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관리집행방해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0월 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었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순천성경학원(順天聖經學院)과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고 목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 뒤 고흥군 도양읍 관리로 이주하였으며, 1930년대 말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는 1938년 2월 금산면 금천교회와 도양면 중앙교회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신을 우상(偶像)으로 여기는 것이므로 절대로 신사에 참배하지 말라"고 신도들에게 설교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이와 별도로 같은 날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3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총 2년 4개월간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에는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박팔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뒤 1952년 6월 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오석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 10월 10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 1948년 6월 2일 헌법급정부조직법기초위원 30인 으로 뽑혔다.[6]
  • 1948년 6월 15일 '울릉도어선피습 건'을 발의하였다.[7]
  • 1948년 8월 4일 국회 부의장 투표때 4표를 받으며 떨어졌다.
  • 1948년 8월 31일 의장 명의로 해외 동포들에게 감사장을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 1948년 9월 21일 발언권을 고루고루 나누어 달라고 앙청하였다.
  • 1948년 10월 12일 조성환 선생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 1948년 10월 14일 조성환 선생 장례식 참석 보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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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암공파 26세 연(然) 항렬. 족보명은 오연석(吳然錫).[2] 막내 여동생이 황성수의 아버지 황보익과 결혼했다.[3] 같은 제헌 국회의원인 황두연은 그와 매제 관계이다.[4] 초명 오중구(吳中九).[5]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최세진과 동명이인이다.[6] 류성갑,김옥주,김준연, 오석주,윤석구,신현돈,백관수,오용국,최규옥,김명인,이종린,이훈구,류홍렬,연병호,서상일,조헌영,김익기,정도영,김상덕,이강우,허정,구중회,박해극,김효석,김병회,홍익표,서성달,조봉암,이윤영,이청천. [7] 김장열,강기문,김상순,조영규,이성우,류성갑,오석주,조옥현,김옥주,황두연,황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