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역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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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colbgcolor=#00428e><colcolor=#ffffff> 모기업 관련 정보 ||모기업 파일:DeNA 로고.svg ||
|| 일본시리즈 우승
★★ ||1960 · 1998 ||
|| 리그 우승
(2회)
||1960 · 1998 ||
|| 클라이맥스 시리즈 ||2016 · 2017 · 2019 · 2022 · 2023 ||
|| 시즌별 요약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2> 경기장 ||1군 요코하마 스타디움 · 2군 요코스카 스타디움 · 지방 홈구장 HARD OFF ECO 스타디움 니가타 ||
||과거 오사카 구장 · 카와사키 구장 ||
|| 홈 중계 채널 ||파일:tbs채널2 로고.png TBS 테레비2 ||
|| 주요 인물 ||감독 미우라 다이스케 · 선수회장 이마나가 쇼타 · 주장 사노 케이타 · 투수 주장 야마사키 야스아키 ||
||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 틀 문서 ||<bgcolor=#00428e>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 선수역대 감독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1. 개요
3. 출신 선수들
3.1. 투수
3.2. 포수
3.3. 내야수
3.4. 외야수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1. 개요[편집]


역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재적했던 선수들을 이 항목에서 정리한다. 현역 선수단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선수단 항목 참고.

상위 문서에서 언급했듯이 현존 12개 구단 중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함께 한국인 선수(재일교포 제외)와 별 인연이 없는 두 팀 중 하나다. 물론 재일교포 선수는 송재박이 1980년대 뛰었던 적이 있으며 그 유명한 모리모토 히초리가 입단하기도 했다만 먹튀.


2. 영구결번[편집]


강팀이던 시절도 있었고 다이요 시절도 포함하면 명구회 회원인 히라마츠 마사지(27번)와 마츠바라 마코토(25번)를 비롯하여 이시이 타쿠로(5번), 사사키 카즈히로(22번) 등 나름 레전드 선수들이 있지만 구단 정식 영구결번은 없다.[1] 레전드들과 제대로 헤어지지 못한 것도 있고, 결번대신 번호를 물려주는 경향이 있는 일본야구 문화의 특성 덕분에... 그나마 미우라 다이스케가 은퇴하며 18번을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투수코치로 부임한 미우라가 사용하다가, 2021시즌에 감독에 부임하며 번호를 81번으로 교체했다. 어디까지나 '준'영구결번이라, 나중에 미우라의 뒤를 이을만한 투수가 등장하면 본인 합의하에 물려줄 가능성도 있다고 공언하였으며 2021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을 받은 고졸 투수 코조노 켄타에게 18번이 부여되어 준영구결번이 해제되었다.


3. 출신 선수들[편집]



3.1. 투수[편집]


  • 곤도 마사토시 (1953 - 1973)
  • 아키야마 노보루 (1956 - 1967) - 첫 우승당시의 에이스였던 언더핸드 스로 투수. 선수생활 동안 거둔 193승은 히라마츠에 이은 구단 통산 최다승 2위 기록.[2] 슈트가 주 특기였고 선발과 롱 릴리프를 오락가락했음에도 선수생활 마지막 3년을 제외하면 9년간 200이닝 이상(300이닝 2번, 400이닝 1번 포함)을 소화하는 강철어깨를 자랑했다. 은퇴 후에 감독도 맡았지만 최하위권만 찍고 해임당했다. 2000년 8월 12일에 호흡부전으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이나가와 마코토 (1962 - 1968) - 선수 생활은 7년밖에 안 될 정도로 짧았지만 이 후 투수 코치, 스카우트, 숙소장까지 맡다가 2012년 은퇴할 때까지 훼일즈/베이스타즈 한 구단에서만 뛰었고, 은퇴 당시 오랫동안 팀에 공헌한 것에 대한 표창으로 구단으로부터 기념패를 받았다. 오 사다하루가 외다리 타법으로 타격 스타일을 바꾼 뒤 처음으로 홈런을 쳐낸 선수이기도 했다.
  • 사사키 요시로 (1962 - 1969) - 선수 생활은 8년, 통산 성적은 23승 34패인 평범한 투수였으나 1966년에 히로시마 카프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나름 족적을 남겼던 투수. 오 사다하루에게 리그 신기록이자 2013년 이전까지 깨지지 않은 시즌 55홈런(1964년)을 허용한 투수이기도 하다.
  • 타카하시 시게유키 (1964 - 1980)
강속구와 커브가 주 무기였던 선발 투수. 중간에 미국 교육리그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2010년에 심부전으로 64세의 나이로 별세.
  • 히라마츠 마사지 (1967 - 1984) - 구단 사상 최다승인 201승을 찍은 투수이자 구단 사상 유일한 200승, 12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 최다승 2회를 기록한 명투수. 명구회 역사상 유일한 유일한 타이요-요코하마 원클럽맨 투수 출신 가입자다.[3] 2017년에 이토 쓰토무, 호시노 센이치와 함께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니이하리 신지 (1965 - 1968) - 선수생활은 4년, 통산성적은 9승 6패밖에 되지 않지만 역사상 최초의 도쿄대학 출신 프로야구 선수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대학 졸업 후 훼일즈의 모기업 타이요에 입사했다가 당시 타이요 사장 겸 구단 오너였던 나카베 켄키치에게 훼일즈에서 뛸 것을 권유받아 자회사 출향 형식으로 훼일즈에 입단하면서 데뷔했다. 은퇴 후엔 모기업 타이요로 복귀해 기업인으로 활동.
  • 사이토 아키오 (1977 - 1993) - 1977년 신인왕. 타이요에서 선발, 마무리로 번갈아 뛰면서 최다 세이브 3회, 구원왕(최다 세이브 포인트) 2회, 방어율 1위 1회, 우완투수 최초 100승 - 100세이브 기록을 차지했다. 가와사키시 시절의 타이요 훼일즈,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세 시대를 전부 경험한 유일한 선수.
  • 엔도 카즈히코 (1978 - 1992)
  • 카게하타 미츠노리 (1984 - 1994)
  • 다이몬 카즈히코 (1984 - 1993) - 80년대 후반-90년대 초 타이요의 주축 선발투수로 뛰었던 선수였지만 당시 타이요의 전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탓에 미미한 성적에 그쳤고, 1994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여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한 후 현재는 보험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여담으로 현역 시절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로드 알렌에게 몸에 맞는 공을 날린 뒤 격분한 알렌이 쫒아오자 줄행랑을 쳐버린 해프닝이 현재까지도 종종 회자된다. http://blog.naver.com/littleladykr/120045644261
  • 나카야마 히로아키 (1986 - 1991) - 구단의 흑역사 1. 타이요에서 선발, 셋업맨, 마무리로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며 구단의 기대가 컸던 선수였지만 1991년 오프시즌에 요코하마 시내에서 여자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후 구단에서 방출됨과 동시에 일본야구기구로부터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흑역사가 되었다. 이후 나카야마 본인이 잘못을 인정했고 피해자 측에서 합의를 받아들이면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뒤 운송업에 종사하다 복귀를 바라던 팬들의 서명 운동을 통해 자격 정지 처분이 해제되면서 다시 프로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1993년에 주니치 드래곤즈에 구단 직원 입단을 거쳐 다음 해 정식 선수로 등록되면서 프로에 복귀한 뒤 중간계투 셋업맨으로 준수하게 활약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1999년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 패전처리를 전전하다가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주니치에서 방출되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대만프로야구팀 중신 웨일스에서 뛰다가 은퇴하여 현재는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 마츠모토 유타카 (1986 - 1993)
  • 아이카와 히데아키 (1986 - 1993)
  • 니우라 히사오(김일융) (1987 - 1991)
  • 토모리 유이(데니 토모리) (1987 - 1996, 2003 - 2004) - 미국계 혼혈 선수. 요코하마 시절엔 무명이었지만 세이부 이적 후엔 미국식 이름인 '데니'라는 등록명으로 활동하면서 계투진으로 활약했다.
  • 노무라 히로키 (1988 - 2002)
  • 모리타 코키 (1988 - 1997) - 타이요/요코하마에서 선발 및 중간계투로 활약한 선수로 1992년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수상한 바 있다. 슈트를 통한 인코스 공략이 주특기였으며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특히 고전했었던 선수로 알려져 있다. 1998년에 하술할 나카네 히토시, 아라이 유키오와의 트레이드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했으나 이적 직후 뇌종양이 발견되며 선수생명에 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재활 끝에 힘겹게 복귀에 성공하여 이후 중간계투진의 일원으로써 2001년 킨테츠의 구단 역사상 최후의 퍼시픽리그 우승에 공헌했고 그 덕에 '기적의 릴리버'란 별명이 생겨났다. 은퇴 이후 요코하마로 복귀하여 구단 직원 및 해설 위원을 지내며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듯 보였지만 2005년부터 뇌종양이 재발하면서 긴 시간 동안 투병을 이어갔고, 결국 2015년에 종양이 온 몸에 전이되면서 향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오카모토 토루 (1988 - 1995)
  • 타나베 마나부 (1989 - 1997)
  • 사사키 카즈히로 (1990 - 1999, 2004 - 2005)
  • 미즈오 요시타카 (1991 - 1994)
  • 와타베 타카시 (1991 - 1994)
  • 사이토 다카시 (1992 - 2005)
  • 시마다 나오야 (1992 - 2000)
  • 우도 카츠야 (1992 - 1996)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초창기의 선발 투수로써 베이스타즈 개칭 이후 최초의 시합인 1993년 4월 10일 개막전(vs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쿄돔 원정경기) 선발투수를 맡았다.
  • 미우라 다이스케 (1992 - 2016) - 다이요 시대부터 요코하마, DeNA 시절까지 1군 기록이 있는 유일한 프랜차이즈 선수, 최후의 다이요 전사
  • 이가라시 히데키 (1993 - 2001)
  • 코히야마 마사히토 (1993 - 2001)
  • 토카노 히사시 (1993 - 2000)
  • 모리야마 료지 (1993 - 1995)
  • 나가노 요시나리 (1993 - 1996)
  • 오카 토모카즈 (1994 - 1998, 2010 - 2011)
  • 카와하라 류이치 (1994 - 2004)
  • 후쿠모리 카즈오 (1995 - 2003)
  • 요네 마사히데 (1995 - 2002)
  • 이토 아츠노리 (1995 - 1996)
  • 아라키 다이스케 (1996)
  • 요코야마 유키야 (1996 - 2003, 2007 - 2009)
  • 팻 마홈스 (1997 - 1998)[4]
  • 카와무라 타케오 (1997 - 2008)
  • 모리나카 마사오 (1997 - 2003)
  • 코미야마 사토루 (2000 - 2001)
  • 키즈카 아츠시 (2000 - 2010)
  • 나카노와타리 스스무 (2000 - 2003)
  • 라파엘 베탄코트 (2000)
  • 셰인 바워스 (2001 - 2002)
  • 에디 게일라드 (2003 - 2004)
  • 세드릭 바워스 (2004 - 2005)
  • 카도쿠라 켄 (2004 - 2006)
  • 우시다 시게키 (2004 - 2013)
  • 마크 크룬 (2005 - 2007)
  • 야마구치 슌 (2006 - 2016) - 2016년 선발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고 호기롭게 FA를 선언해 요미우리로 이적했으나, 병원에서 음주 폭행 사건을 터뜨리며 불구속 입건과 잔여시즌 출장정지와 해당분 연봉 미지급 크리, 약 1억엔에 달하는 손해를 보며 자신과 팀에 상당한 흑역사를 남겼다. 그래도 이후에는 스가노의 뒤를 잇는 팀의 2선발로 좋은 활약을 하며 요미우리 사상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에 진출했으나 실력 부족만 보여주며 요미우리로 리턴했다.
  • 쿠도 키미야스 (2007 - 2009) : 선수시절에만 우승반지를 11개를 낀 우승청부사. 그러나 다녀간 팀 중 요코하마만 우승시키지 못했고, (세이부, 다이에, 교진은 모두 우승에 성공.)팀에 대해 장렬히 비판했다.
  • 테라하라 하야토 (2007 - 2010)
  • 라이언 글린 (2009)
  • 레스 왈론드 (2009)
  • 첸웨이 (2009 - 2010) -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고, 정식 선수로 등록된 적도 없는 이 선수의 의의는 바로 중국 본토 최초의 요코하마 선수[5]라는 것. 톈진 라이온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요코하마에 육성선수로 입단하였으나, 2군에서 4경기 던지고 방출당해 톈진 라이온스로 돌아가서 아직까지 뛰고 있다. 정확히는 톈진과 요코하마 두 구단간의 교류로 인해서 NPB 경험차 요코하마로 임대된 것이라고 한다.
  • 스티븐 랜돌프 (2009 - 2011)
  • 크리스 부첵 (2010)
  • 왕이정 (2010 - 2013)
  • 카가 시게루 (2010 - 2018)
  • 브랜든 만 (2011 - 2012) - 요코하마에서는 보험용으로 데려와서 별 활약 없이 사라졌는데 방출 6년 후에 뜬금없이 메이저리그에 34세의 나이로 데뷔를 해서 주목받았다. 그리고 그 유명세 덕분에 7년 만에 일본에 복귀하는 데 성공.
  • 천관위 (2011~2014)
  • 하야시 마사노리(2012 - 2017)
  • 호르헤 소사 (2013 - 2014)
  • 엔옐베르트 소토 (2013 - 2014)
  • 오사다 슈이치로 (2013 - 2016)
  • 타카하시 히사노리 (2014 - 2015)
  • 카키타 유타 (2014 - 2017) - 현 시점 DeNA 시대 출범 이후 최악의 1라운드 망픽. 13년 드래프트에서 3구단 경합 끝에 하즈레픽으로 입단했으나 입단 첫 시즌부터 팔꿈치에 이상이 생기고 뺑소니 사고를 일으킨것도 모자라 해가 갈수록 기량이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1군 마운드를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2017년을 끝으로 방출당했다.
  • 오카지마 히데키 (2015)
  • 듀웨인 빌로우 (2015)
  • 재크 페트릭 (2016)
  • 타무라 죠 (2016 - 2019)
  • 필 클라인 (2017)
  • 조 윌랜드 (2017 - 2018)
  • 미즈노 코야 (2017 - 2019)
  • 아야베 카케루 (2015 - 2019) - 구단의 흑역사 3. 1군 통산 1승이 전부인 듣보잡 투수로 2019년 7월달에 18명의 여성과 불륜 혐의로 근신 처분을 받았었고 이후 청소년 보호 위반 및 아동 매춘, 포르노 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2019년 10월 11일에 불구속 기소됨과 동시에 방출. 저 불륜 상대 18명은 아야베 본인이 1군에서 상대한 타자 수보다 많았다. 1군에서 총 21타자를 상대했으나 중복되는 선수들을 제하고 나면 실제 1군에선 9명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만들어진 표현이 밤의 사와무라상. 夜の沢村賞 2021년 3월 올 프론티어라는 회사에 입사하였고 동시에 회사의 야구부에 들어가며 사회인야구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 테라다 코키 (2018 - 2019)
  • 나카우시로 유헤이 (2018 - 2019)
  • 에디손 바리오스 (2018 - 2019)
  • 새미 솔리스 (2019)
  • 이노 쇼이치 (2013 - 2020)
  • 마이클 피플스 (2020 - 2022)
  • 미카미 토모야 (2014 - 2022)
  • 스나다 요시키 (2014 - 2022)

3.2. 포수[편집]


  • 도이 기요시 (1956 - 1968)
  • 이치카와 카즈마사 (1981 - 1993)
  • 와카나 요시하루 (1983 - 1988)
  • 타니시게 모토노부 (1989 - 2001)
  • 아키모토 코사쿠 (1990 - 2000)
  • 야마네 요시노부 (1992 - 1998) - 구단의 흑역사 2. 현역 시절엔 타니시게 모토노부, 아키모토 코사쿠 등에게 밀려 백업 이하만 전전하던 이름없는 포수였지만, 은퇴 이후 이나가와카이 소속 야쿠자가 되었다가 사기사건으로 체포되면서 나쁜 쪽으로 현역 시절보다 훨씬 더 유명해져버렸다(....)
  • 오츠카 요시키 (1992 - 1996)
  • 카와사키 요시후미 (1994 - 2000)
  • 아이카와 료지 (1995 - 2008)
  • 츠루오카 카즈나리 (1996 - 2008, 2012 - 2013)
  • 니누마 신지 (1998 - 2012)
  • 나카무라 타케시 (2002 - 2004)
  • 타케야마 신고 (2003 - 2011)
  • 나카지마 사토시 (2003)
  • 쿠로바네 토시키 (2006 - 2017)
  • 호소야마다 타케시 (2009 - 2013)
  • 니시모리 마사시 (2012 - 2019)
  • 타카조 슈토 (2012 - 2018, 2020 - 2022)
  • 미네이 히로키 (2014 - 2022)


3.3. 내야수[편집]


  • 쿠와타 타케시 (1959 - 1968)
입단 첫 해부터 4번타자를 맡을 정도로 준수한 활약을 했던 중장거리 유틸리티 플레이어 오른손 타자. 타이요 마지막 해인 1968년에 부임한 벳토 카오루 감독과 마찰이 생겨 그 해 코치와 다툰 끝에 전력 외로 분류되어 트레이드 대상에 올라 요미우리로 이적했다.[6] 하지만 요미우리에선 단 한번도 안타를 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0년에 야쿠르트로 이적했지만 이 해에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혐의로 출장정지 3개월 처분을 받은 끝에 그대로 은퇴했다. 이후 1991년에 지주막하출혈로 사망.
  • 곤도 아키히토 (1960 - 1973)
신인으로서 최초로 일본시리즈 MVP에 오른 선수이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초대감독으로 1993~1995년까지 역임했다. 1997~1998년에는 롯데 감독을 역임했다. 두 번 모두 시즌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요코하마 94 1번, 롯데는 2년 전부) 감독으로서 경력은 좋지 못했다. 특히 98년엔 일본프로야구 최다 연패인 18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 같은해에 에이스인 쿠로키 토모히로를 마무리 투수감들의 줄부상을 이유로 마무리로 무리하게 돌렸다가 2001년에 부상을 입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 클리트 보이어 (1972 - 1975)
  • 존 시핀 (1972 - 1977)
카와사키 시절 말기 타이요의 중심타선으로 활약한 외국인 선수.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잠시 뛴 후 은퇴했다.
  • 야마시타 다이스케 (1974 -1988)
70~80년대 팀을 대표하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 1976년부터 83년까지 8년연속 유격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03 - 04년에는 팀의 감독도 역임했지만 팀의 하락세를 막지는 못했아스키 아트만 잔뜩 만들어냈다. 젊었을 적에는 날렵한 인상의 미남으로 여성 팬들에 인기가 많았지만 나이가 먹어 감독을 역임할 즈음엔 후덕한 인상의 대머리 아저씨가 되어 자학개그 소재로 써먹기도.
  • 마츠바라 마코토 (1962 - 1980)
60~70년대 팀을 대표하던 강타자이자 일본프로야구계의 진정한 무관의 제왕. 무관의 제왕에 소개된 다른 선수들은 타격과 관련된 주요 타이틀만 못 땄을 뿐 신인왕, 골든글러브, 베스트나인 등등 기타 수상경력이 있는 '불순물'임에 반해 이 선수는 선수생활 20년동안 통산 2095안타, 331홈런, 1180타점을 기록한 강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도 수상하지 못한 순도 100% 무관의 제왕이다. 이 정도 성적을 남긴 선수가 주요 타격 타이틀은 고사하고[7] 포지션별로 주어지는 골든글러브나 베스트나인 조차도 수상하지 못한 이유는 포지션 때문인데 이 선수의 주 포지션이 1루수와 3루수였다. 문제는 이 사람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나가시마 시게오오 사다하루의 전성기와 정확히 겹친다는 것(...). 저 두 사람이 3루와 1루에서 포지션 관련 상을 쓸어가니 상을 받을래야 받을 수 가 없었다. 그나마 이 사람이 현역으로 있는 동안 시즌 최다안타는 2번 기록했지만 그 당시에는 최다안타는 수상항목이 아니었다(...)[8] 원래 포수로 입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타격을 살리기 위해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제안으로 최초에는 3루수, 그리곤 곧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음에도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다리 찢기 캐치가 전매특허였을 정도로 우수한 수비수이기까지 했으니 골든글러브[9] 한 번조차 없는 것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 다이요 역사상 최초의 2000안타 선수이며 다이요 시절 기록한 330홈런은 2017년 현재까지도 아직 구단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야말로 미스터 웨일스였다만 저 기록은 정말 눈물만 나올 뿐(...) 그나마 다행히도 1975년 올스타전 2차전에서 맹활약해서 MVP를 얻은 적은 있고, 현역 마지막 해인 198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보고[10] 은퇴해서 현역 커리어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기는 했다.[11]. 2009~2010년에 KIA타이거즈에서 인스트럭터로 타자들을 지도한 적이 있어서 이름 정도는 들어본 국내팬들도 있을 것이다.
  • 타시로 토미오 (1973 - 1991)
요코하마 타이요 시절 팀의 강타자로써 활약하며 타이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 은퇴시합에서 만루홈런(!)을 쏘아올린 것과 2011년 SK 와이번스에서 코치직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 모토이 미츠오 (1979 -1984)
  • 타카기 유타카 (1981 - 1993)
  • 타카하시 마사히로 (1983 - 1996)
2011년에 기아 타이거즈에서 수비코치로 뛰었던 인물로 선수시절엔 준족의 유격수였다. 플루크 시즌인 1988년엔 159안타와 연속경기 무실책을 기록했지만 이후 이시이 타쿠로에게 밀리면서 내외야 유틸리티로 전략했고 치바 롯데 마린스로 이적당한다.
  • 쵸시 토시오 (1984 - 1991)
  • 시미즈 요시유키 (1988 - 1992)
  • 신도 타츠야 (1988 - 2000)
1998년 우승 당시의 주전 8번타자 내야수. 타율은 다소 낮으나 두자릿 수 홈런을 친 시즌이 꽤 있을 정도로 의외의 장타력을 보유한 선수였다. 후에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 후 은퇴.
투수로 입단했지만 타자전향 후 3루수, 유격수로 뛰며 명구회 가입까지 했던 선수. 빠른 발을 이용한 베이스러닝과 넓은 수비범위가 장점이었으며 골든글러브, 도루왕도 해본 적 있는 나름 간판스타였으나 노쇠화로 인해 팽당한 후 히로시마 카프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독특한 게다리타법으로 유명하다.
  • 무라타 슈이치 (2003 - 2011)
  • 타이론 우즈 (2003 - 2004)
  • 후지타 카즈야 (2005 - 2012)
  • 나이토 유타 (2006 - 2013)
  • 니시 토시히사 (2007 - 2009)
  • 야마자키 노리하루 (2009 - 2017)
  • 나카무라 노리히로 (2011 - 2014)
  • 우치무라 켄스케 (2012 - 2016)
  • 토니 블랑코 (2013 - 2014)
  • 시라사키 히로유키 (2013 - 2018)
  • 아롬 발디리스 (2014 - 2015)
  • 야나기다 시게오 (2014 - 2016)
  • 율리에스키 구리엘 (2014)
  • 야마모토 무사시 (2016-2018) - 등록명 무사시(武白志). 전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인 야마모토 고지[12]의 아들로 고등학교 때 고시엔에서 장타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프로입단은 시기상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는데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요코하마만이 육성 3순위로 지명하는 결과가 나와서 드래프트 당일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인이나 대학을 가서 좀더 기량을 갈고 닦으라는 주변의 충고를 무시하고 프로를 지망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그 때문에 드래프트 때는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선수라는 인상을 주었다. 다만 이 선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도 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하게 됐는데 이미 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 일이 알려지고 나서 이 선수가 무리하게 프로를 지망한 것도 자신을 꿈을 위해서 거주지까지 옮긴(이 선수는 고시엔 진출의 가능성을 위해서 후쿠오카 국제대학 부속고에 진학을 했는데 이 때문에 살던 집을 팔고 온 가족이 아무 연고도 없는 후쿠오카로 이사를 하면서까지 아들을 지원했다.) 아버지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프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참고로 본인의 아버지가 44세때 얻은 자식으로 상당한 늦둥이이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2군에서도 털리면서[13] 3년 만에 방출. 이후 프로 크리켓 선수에 도전하게 되면서 야구는 완전히 은퇴했다.
  • 아우디 시리아코 (2017)
  • 마츠오 타이가 (2017 - 2019) - 제적시절 등록명 타이가(大河).
  • 카리노 유키카즈 (2017 - 2019)
  • 나카가와 타이시 (2018 - 2019)
  • 쿠라모토 토시히코 (2015 - 2022)

3.4. 외야수[편집]


  • 코즈루 마코토 (1950 - 1952)
초창기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했던 강타자. 일본 프로야구 시즌 최다타점(161), 최다득점(143), 최다루타(376) 기록 보유자이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시즌 50홈런을 기록했다. 모두 일본에서 양대리그가 시작된 1950년의 기록인데 이 해의 기록이 타율 .355, 51 홈런, 161 타점, 출루율 .450, 장타율. 729로 OPS만 무려 1.179를 기록했다(...) 다만 이 선수의 소속팀은 1952년 타이요와 합병한 쇼치쿠 로빈스 소속이었고 쇼치쿠가 타이요와 통합됐을 무렵에는 히로시마로 이적한 상태였기 때문에 훼일즈/베이스타즈 OB로 치기엔 무리다. 나름 일본프로야구의 족적을 남긴 강타자이긴 하나 쇼치쿠 팀의 항목이 없어서 일단 합병 후 잠시나마 함께 역사를 공존해 왔던 이 팀에 들어와 있다고 보는 게 좋다.
  • 콘도 카즈히코 (1958 - 1972)
  • 타카기 요시카즈 (1972 - 1987)
  • 야시키 카나메 (1978 - 1993)
  • 야마자키 켄이치 (1981 - 1993)
  • 가토 히로카즈 (1983 - 1990)
  • 송재박(요시모토 히로시) (1983 - 1987)
  • 카를로스 폰세 (1986 - 1990)
  • 오카와 타카시 (1986 - 1995)
  • 짐 파치올렉 (1988 - 1991)
  • 요코타니 아키마사 (1988 - 1995)
  • 미야자토 후토시 (1989 - 1997)
  • 이노우에 준 (1989 - 2002)
  • 카와바타 카즈아키 (1990 - 2000)
  • 히라츠카 카츠히로 (1990 - 1993)
  • 하타야마 히토시 (1991 - 1999)
  • 스즈키 타카노리 (1991 - 2008)
  • 코노 준키(홍순기) (1992 - 1993)
  • 오사나이 타카시 (1992 - 1993)
  • 사에키 타카히로 (1993 - 2010)
머신건 타선의 일원 중에서는 비교적 늦게까지 팀에 남아서 활약하던 선수. 입단 당시엔 1루수였고, 이후 외야를 겸업하였다. 1997년 4월 4일 주니치와의 경기에서 와일드피치 때 홈으로 들어오던 중 오심으로 아웃되면서 선동열에게 행운의 시즌 첫 세이브를 안겨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특이사항으로 현역 시절 1루수로서 무려 3차례나 히든 볼 트릭을 성공시킨 바 있는데 그 중 마지막은 2006년 이승엽을 상대로 성공시킨 것이었다.
  • 글렌 브랙스 (1993 - 1996)
  • 하루 토시오 (1994 - 2001)
90년대 후반 이시이 타쿠로와 더불어 머신건 타선의 테이블 세터진을 이뤘던 타자. 주 포지션은 중견수이며 1998년 일본시리즈에서 태그 논란이 있었던 선수 중 한명이다.
  • 타무라 히토시 (1995 - 2006, 2013 - 2015)
  • 이시이 요시히토 (1997 - 2002)
  • 아라이 유키오 (1998 - 2000)
  • 나카네 히토시 (1998 - 2003)
  • 킨죠 타츠히코 (1999 - 2014)
  • 다나카 카즈나리 (1999 - 2006)
  • 후루키 카츠아키 (1999 - 2007)
  • 코이케 마사아키 (1999 - 2008, 2012 - 2013)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함께 요코하마 고교의 고시엔 제패를 이끈 동기 선수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나름 한국계 외국인 선수.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편집]



[1] 정확히는 있었긴 했다. 1997년부터 2012년까지 등번호 100번을 구단에 큰 공헌을 한 저명한 인물들의 영구결번으로 삼았지만, 2013년부터 육성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한 이마이 킨타에게 이 등번호가 주어지면서 영구결번이 해체되었다. 이후 2015년 이마이가 방출된 후엔 그 해 이마이와 똑같이 육성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한 아미아 케이쇼가 이 등번호를 쓰는 중.[2] 소속팀이 강팀이었거나 선수생활을 좀더 했더라면 최소한 200승은 찍고 명구회 갔을지도 모르는 성적이다.[3] 일본 한정으로만 타이요-요코하마에서 뛴 선수로 사사키 카즈히로도 있으나 이쪽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이 있다.[4]NFL 캔자스시티 치프스 주전 쿼터백 패트릭 마홈스의 아버지.[5] 정확히는 동료 왕징차오와 같이 입단했다. 왕징차오 역시 1군에 못 올라오고 2010년 방출.[6] 당초 벳토 이전 타이요의 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 당시 킨테츠 감독이 이적을 권유했지만 쿠와타가 퍼시픽 리그를 꺼려서 성사되지 않았다.[7] 3대 타격 타이틀(수위타자, 홈런, 타점)을 수상하지 못한 선수로는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예도 있다. 대신 기요하라는 최고출루율을 수상한 적은 있다.[8] 2천안타를 치고도 아무런 상도 못 받은 인물은 마츠바라가 유일하다. 다만 베스트나인으로 한정하면 딱 1명 더 있는데 바로 주니치, 닛폰햄 출신의 오오시마 야스노리. 그러나 오오시마는 1983년 카케후 마사유키와 공동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을 수상한 바 있기에 마쓰바라만 더욱 작아보인다(....)[9]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해당 포지션에서 가장 좋은 수비를 보인 선수'에게 골든글러브가 수여된다.[10]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닛폰햄의 에나츠 유타카를 상대로 대타 동점홈런을 날리는 등 맹활약했다.[11] 하지만 본인은 이적 회견장에서 울면서 "요미우리로 이적해도 전혀 기쁘지 않다. 다이요에서 우승을 맛보는게 내 목표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다이요 훼일즈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하긴 오랫동안 뛰었던 정든 친정팀에서 1번도 우승을 맛보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가게 되었으니 본인에겐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을 듯.. 이후 요코하마 구단에서 25번을 가장 기대되는 야수에게 부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드래프트 1순위로 기대를 받으며 입단한 우치카와 세이이치도 최초에는 25번을 받았으며 (다음 해에 곧 2번으로 변경했고 2011년에는 FA 선언하고 소프트뱅크로 튀고나서 틈만 나면 전 소속팀을 디스하는 등 배은망덕의 길을 걷고 있다.), 거인으로 이적하기 전의 무라타 슈이치, 또 지금의 츠츠고 요시토모까지 쭉 25번을 달게 하고 있다.[12] 히로시마의 레전드와는 발음만 같은 동명이인, 히로시마의 레전드는 한자로 山本浩二, 이 선수의 아버지는 山本功児로 쓴다. 이 선수의 아버지도 현역시절 다이아몬드 글러브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는 등 괜찮은 선수였지만 전자의 선수가 후덜덜한 업적을 남겨서 빛이 바랜 감이 있다.[13] 거포 유망주라면서 2군에서도 홈런을 못 쳤고, 커리어하이인 해의 2군 타율이 .213이었다.[14] 보스턴과 몬트리올 시절 김선우와의 악연으로도 한국 팬들에게 알려진 선수. 미국인들에게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봉중근이나 서재응이 Jung Bong, Jae Seo로 표기되었던 것처럼 메이저 시절에는 주로 '오카 토모'라는 약칭으로 이름이 표기되었기에 메이저 올드팬들은 그 이름으로 더 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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