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대권주자로서의 장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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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강점
2.1. 다양한 입법·행정 경험
2.2. 호남의 지지
2.3. 민주당 후보군 중 보수 진영의 낮은 반감
3. 약점
3.1. 얇은 코어 지지층
3.2. 당대표 시절의 각종 실책
3.2.1. 이명박, 박근혜 사면 발언
3.2.2. 재보궐선거 참패 책임론
3.3. 경선 불복 논란
3.4. 무리한 의원직 사퇴
3.5. 친명계의 비토정서
3.6. 고령의 나이
3.7. 사법리스크
3.8.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
3.9. 상대적으로 순탄했던 삶



1. 개요[편집]


이낙연 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의 대권주자로서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서술한 문서.


1.1. 20대 대선에서[편집]


이낙연은 국무총리 퇴임 후에도 이전의 국무총리 출신 대권주자들과 달리 큰 존재감을 보였다. 전남도지사 시절의 좋은 평판과 품격있는 언행, 호남의 열혈한 지지로 대권주자로 하마평에 올랐고 실제로 21대 총선 승리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일례로 2020년 4월 뉴스1이 엠브레인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30%를 돌파하며 1위 자리를 더욱 확실히 하기도 하였다.# 이 지지세는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한동, 고건, 정운찬등의 많은 국무총리 출신 정치인들이 대권주자로 입에 올랐으나 얼마 안가 나가떨어진것을 보면 정말로 대단한 기록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제21대 국회가 개원했고 2020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제4차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비록 7개월짜리라도 당대표[1]를 거칠지 아니면 책임감이 부족한 이미지가 씌어지거나 다른 거물급 인사와의 마찰이 생길 것[2]을 피해 대권으로 직행할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에서 당대표와 최고위원의 임기를 분리하는[3] 당헌·당규 개정안이 확정되면서 당 대표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결과는 더불어민주당 전국대의원 투표(45%)와 권리당원 투표(40%), 국민 여론조사(10%), 당원 여론조사(5%) 합산을 통해 당 대표를 선출하며 2020년 8월 29일, 이낙연 후보는 60.77%의 득표로 신임 당대표에 선출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는듯 했다.

그러나 당대표 취임이후의 행보는 당장 단기적인 요소에만 집착한 나머지 장기적인 요소를 외면하였고, 이는 이낙연의 대권가도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본인의 지지세력 확장을 위해 했던 이명박, 박근혜 사면발언은 정작 중도층에게선 뜨끈미지근했고, 되려 기존 지지층을 등돌리게 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 단체장인 박원순, 오거돈의 성추행으로 치러진 2021년 재보궐선거서울특별시장, 부산광역시장 수성에 눈이 멀어 당헌을 개정하는 꼼수를 쓰면서까지 후보를 내려해 많은 당시 야당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낙연 지도부로서는 여당으로서 수도 서울과 제 2 도시인 부산의 행정을 포기할 수 없었고 당헌 개정 또한 전당원 온라인투표로 동의를 얻었으므로 명분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참패하면서 결과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낙연 지지율 하락의 결정적 원인은 2021년 1월 한 언론과의 신년인터뷰에서 발언한 박근혜 사면론을 시발점으로 본다. 당시 청와대와의 교감설이 있는데 본인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지지율이 며칠만에 10여 퍼센트 하락해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실책의 연속으로 인해 이재명에게 밀려 대선후보가 되는데 실패하였고, 경선 결과 볼복을 넘어 부정선거까지 주장하면서 화룡점정을 찍고 말았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민주당 내 핵심 코어 지지층들 상당수가 등을 돌리게 된 점은 큰 숙제로 남은 상황이다.


2. 강점[편집]



2.1. 다양한 입법·행정 경험[편집]


5선 의원을 역임하며 입법 경험을, 전남도지사국무총리직을 역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일례로 제6회 지선에서 당선된 광역단체장 평가에서 광주광역시장 윤장현부산광역시장 서병수는 꽤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음에도 임기 중 평가는 꼴찌를 다투었다. 반면 이낙연은 꽤나 높은 도정 평가를 유지했었다. 이낙연이 전남지사로 재임 할 때 # 이낙연의 도정 평가 긍정률은 60%를 넘나들었으며, 김관용 경북지사와 함께 최상위권에 랭크됐었고, 여야에서 모두 50%를 넘는 지지율을 유지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된 뒤로는 안정감 있는 국정 운영 능력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야당 의원들을 향한 달변을 보여주며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호감을 쌓았다. 그리고 21대 총선 국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상임선대위원장을 맞아 본인의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은 물론이고[4] 당의 대승을 거두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는 평가가 있다.# #


2.2. 호남의 지지[편집]


일단 이낙연 본인은 호남 출신이며 전남에서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지냈고 전남지사까지 지냈던 만큼 호남지역 정계 및 주민들으로부터의 지지를 기본으로 가지고 올 수 있다고 평가된다. 특히 군사정권기를 지나서 현 체제인 6공 이후 호남 출신은 김대중이 유일하며, 민주당 내 대권주자들 중 이재명, 추미애 등 절반 정도가 영남 출신이다.

또 현재 친문 세력에서 이낙연 외에 유력한 대권주자가 없는 점도 있다. 기존에 범 친문 진영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던 안희정은 성추문 때문에, 박원순은 성범죄로 인한 자살 때문에, 그리고 조국은 가족 논란도 모자라, 조국 본인의 논란 때문에 대선 후보로 나서기 어려워진 상태이다. 또 김경수는 드루킹 사건에 연루되어 지사직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교도소에 수감되다가 겨우 사면되었다.


2.3. 민주당 후보군 중 보수 진영의 낮은 반감[편집]


그동안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에 향후 큰 논란이 되거나 잠재적으로 심각한 리스크가 될 만한 부분이 개인 레벨에서는 딱히 없고, 비록 문재인 정부의 초대 총리로서 막중한 책임을 졌지만 보수층에서도 '이낙연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평을 듣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5] 안티페미니즘 성향의 2030 보수 커뮤니티에서도 이낙연 정도면 민주당에서 가장 나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는 글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들은 추미애나 이재명을 이낙연보다 더 비판하는 경향이 크다.# [6] 이낙연의 비호감도 자체가 낮은 건 아닌데, 한국갤럽 2022년 9월 3주차 정치인 호감 여부 여론조사에서 이낙연의 비호감도가 57%로 나타나 비호감도 순위가 조사 대상 8명 중 3위를 기록했다. # 결국 비호감도가 낮다는 말은 보수 진영에서 극렬하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국민 통합 차원에서는 유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 약점[편집]



3.1. 얇은 코어 지지층[편집]


박근혜문재인과 같이 콘크리트라 불릴 만한 두터운 지지층이 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없다고 당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면 확실한 디버프가 된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이, 문재인은 노무현의 친구라는 점이 지지층들의 결집을 높이고 대통령 당선의 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현재 이낙연의 코어 지지층은 주로 강성 친문이다. 문제는 친문이 이낙연을 지지하는 것은 문재인에 대한 지지로부터서 나오며, 친문이 친노를 계승한 뒤 단순히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아닌 문재인에 대한 지지로서 독자적 세력을 공고히 구축한 것과는 달리 이낙연을 향한 정치적 결집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낙연 본인이 가진 매력이나 정치적 서사가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점으로 거론된 낮은 비호감도와 같은 선상에서 거론되는 점이다.

또한 이낙연은 총리 지명 전에는 친문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던 만큼[7] 단순히 정치적 연고와 인맥에 따른 구시대적 계파 분류에서는 친문 직계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명백한 비문 정치인들까지도 친문을 자처할 정도로 계파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만큼 사실상 친문 직계로서 수혜를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참여정부 시절 민주당 원내대표로 재직하면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논평을 내었던 점이나 노무현 탄핵 투표에는 반대표를 내었지만 민주당으로서 활동했던 점 등은 친명 세력에 의해 공격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당대표 이후의 행보를 보면 보수 야당과의 협치를 논하는 등의 태도가 민주당 지지층 내에 개혁과 선명성을 중시하는 세력 및 진보 야권에게는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이는 당내 지지층이 중요한 경선에선 약점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위 뮨파로 불리는 이낙연의 극단적 지지층 역시 민심과 괴리되어 외연확장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

3.2. 당대표 시절의 각종 실책[편집]



3.2.1. 이명박, 박근혜 사면 발언[편집]


이낙연 대표가 2021년 신년사에서 했던 이명박, 박근혜 사면 발언은 민주당 지지층에게 큰 반발을 샀고 이후 지지율이 급락하여, 결국 문재인 정부 내각에 있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 보다도 지지율이 밀리게 되었다. 이는 이낙연 대세론의 붕괴에 크게 일조했다.


3.2.2. 재보궐선거 참패 책임론[편집]


이낙연 대표가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지휘한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자당 소속 전임 서울, 부산시장추문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자당 소속 지자체장들의 실책으로 발생한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 당헌[8]을 따르지 않고, 전당대회를 열어 당원 투표에 따라 후보를 내기로 결정하는 무리수를 두었다.[9]

결국 두 도시에서 모두 압도적인 표차로 대참패하여 시장직을 국민의힘에게 넘기게 되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웠다고는 하나, 당시 당대표 이낙연은 LH사태 대응에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계속 이겨왔던 선거에서 민주당이 첫 패배를 맛보게 했고, 무엇보다도 수도인 서울의 시정을 다시 보수정당에 넘어가게 한 책임으로 이낙연의 대세론은 붕괴되며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출마하자, 민주당 내에서 이낙연에 대한 평가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날로 험악해졌다. 이러한 행위는 문재인이 만든 당헌을 지키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고 '죽어도 문재인을 지키겠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문재인 계승 포지션을 내세우는 명분에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박주민, 전재수가 이재명 캠프로 넘어갔고, 훗날 이재명 당대표 시기에는 친이낙연계로 여겨졌던 박광온 원내대표가 친이재명 행보를 보이는 등의 타격을 입어 계파 자체가 쪼그라들었다. 박지원을 필두로 한 민주당 내 보수계열조차도 이낙연과 활동을 같이 하지 않으며, 이낙연계는 지지자들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던 진짜 한줌이 되었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높은 지지율을 모두 깎아먹어버렸고, 자신을 지지하던 지지자들은 쪼그라 들었다. 당장 20대 대선 경선에서 전남만 진땀승으로 이기고, 광주는 석패하는 등, 자신의 지지 기반인 호남 조차 이재명에게 밀리는 등으로 자신의 지지도를 거의 잃어버렸다.

여기에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패배를 두고, 내로남불성 발언을 보이고 미국에 출국하자, 죽어도 문재인을 지키겠다더니, 문재인이 있는 곳이 아닌, 미국으로 도주했다며, 아예 오지말라는 민주당원들의 엄청난 비난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명이 당대표에 77.7%의 득표율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고, 최고위원 선거에서 본인 계열이였던 송갑석이 낙선[11]하는 등으로, 계파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4.7 재보궐선거 참패 책임론은 상당한 약점으로 와닿을 수 밖에 없다.


3.3. 경선 불복 논란[편집]


20대 경선시기 이낙연계 vs 이재명계 계파 간의 경선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양측 지지 세력간의 비방과 마찰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경선 후보였던 정세균김두관이 사퇴하며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무효표 규정 논란이 발생했다. 이낙연 후보 측은 해당 해석이 경선 조항의 상위법인 공직선거법이나 결선제도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중앙당의 유권 해석 검토를 요청했다. 이를 이재명 지지측에서는 경선 불복이라 비난하였으며, 언론들도 사실상 경선 불복이라고 보도했다.# 게다가 경선 결과 불복을 넘어 경선 규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결국 경선 결과에 승복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일련의 언행으로 인해 이낙연의 핵심기반인 호남마저도 서서히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후술할 친명계 지지자들은 경선불복으로 인한 배신자, 프락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점은 당내 코어지지층 결집이 중요한 대선 경선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될 수 밖에 없다.


3.4. 무리한 의원직 사퇴[편집]


20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대권을 위해 주위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원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게다가 사임 이후 첫 경선 유세를 전 지역구였던 종로구가 아닌 본인의 지역 기반이었던 전남에서 했는데, 이는 총선에서 자신을 지지한 종로구 유권자들을 외면한 결과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민주당은 보궐 선거에서의 패배를 의식하여 대선과 병행된 2022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에 후보 공천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국민의힘 최재형 후보가 손쉽게 지역구를 가져가게 되었다. 해당 선거에서 정의당배복주 후보는 선거비가 전액 보전되는 15% 득표율을 넘겼으며, "종로 지역구가 중앙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여겨지는 데에 염증을 느끼는 주민들이 많다"는 의견을 남겼다.# 반 국민의힘 성향 주민들이 상당수 그에게 투표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낙연의 행보는 자충수가 되어 호남기반도 잃고, 종로 기반도 잃는 최악수가 되었고, 덤으로 원내에 진입한 이재명에 대항하여 뭉칠 구심점마저 잃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대권에 도전하려면 지역기반과 원내 구심점 모두 필요한 만큼 이 부분 역시 상당한 핸디캡이 될 것으로 보인다.


3.5. 친명계의 비토정서[편집]


이낙연이 대권 도전을 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중 하나도 바로 친명계의 비토정서다. 이재명이 당대표로 선출될 당시 77.7%의 득표를 얻을 정도로 더불어민주당 당원의 대다수가 친명성향이라는 것이다. 당내 코어지지층 결집이 중요한 대선 경선에 상당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당장 친명 성향의 지지자들부터 당내 원외인사들까지가 정운현이민구, 이상이, 백광현 등 소위 뮨파, 똥파리로 지칭되는 최측근 인물들의 해당행위[12]뿐만 아니라 경선 당시 대장동 문제와 관련된 과도하리만큼 지나친 네거티브와 친낙계 의원들의 내부총질 등으로 인해 내부총질러에 배신자 등의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은 물론 이재명의 대선 낙선과 사법리스크를 초래하고 대선 이후로 이재명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게 만든 최대 원흉이자 장본인으로 여기고 있는 마당이다.

그런데다가 이후 2023년 2월 말에 이재명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자마자 민주당 청원게시판에 이낙연을 당에서 영구제명을 시켜버리자는 청원이 올라오고, 그 청원에 무려 7만 명이 넘는 당원들이 서명을 했었을 정도로 대선 이후로 이낙연과 민주당 내 비명계와 반명계, 더 나아가 이낙연계에 대한 친명 원외인사들과 친명 지지자들의 증오심과 적개심도 전반적으로 당 내외에 어마어마하게 막강한 수준으로 고착화가 되어 있다. 심지어는 친명 지지자들은 더 나아가 이번 22대 총선에서 비명계와 반명계, 그리고 이낙연계 인사들을 공천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해 버리겠다는 의지마저 결연해져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향후 이재명 대표가 공천권을 행사할 22대 총선에서 비명친낙 성향의 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이 공천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볼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인데, 만약 비명친낙 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이 정말로 대거 공천학살을 당하거나, 아니면 일부 몇몇 비명친낙 인사들이 공천을 받는데 성공하더라도 정작 본선에서 낙선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이미 대선 이후로 축소되어 있는 이낙연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자신의 당내 입지 등이 매우 더 쪼그라져버릴 여지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낙연 본인도 대선 경선에서 비롯된 자신을 향한 친명 진영의 이러한 비호감 정서를 알고 있는지 KBS의 한 방송에서 비호감 정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3.6. 고령의 나이[편집]


21대 대선 시점에서 만 74세로 상당히 고령이다. 취임 당시의 나이를 기준으로 이명박(만 66세)보다 8세가 많다. 김대중이 같은 나이에 당선되긴 했지만 김대중의 경우 이미 40대 기수론부터 시작해 수십년간 막대한 정치 경력을 쌓았고 확고한 기반[13]이 있었는데 이게 이낙연에게는 부족하다.[14] 적어도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당선될 뻔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낙선 되었다. 엄청나게 고령도 아니기에 득표율에 큰 영향을 줄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대선에서 낙마할 경우 다음 도전은 힘겨워질 가능성이 있다.[15] 이것이 '이번에 당선에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는 지지자들의 다급함을 결집하여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낙연 지지층의 외연이 얇디얇은 것이 문제.

미국의 경우 비슷한 시기에 조 바이든이 이보다 3살 더 고령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바이든 역시도 고령의 나이가 주된 약점으로 꼽혔다


3.7. 사법리스크[편집]


이낙연은 이재명과 다르게 본인이 완전무결하고 불안하지 않은 후보임을 강조하지만 정작 본인도 사법리스크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전라남도지사 시절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측근의 당비를 대납한 논란부터, 종로구 국회의원 시절 옵티머스 측에서 이낙연의 종로구 사무실 복합기 임대료를 대납해주고, 옵티머스 사태 연관의혹과 검찰수사 당시 수사를 받던 측근이 사망하기까지. 결코 본인도 사법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3.8.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편집]


상술하다시피,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에 김대중에 이어 새로운 호남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길 고대하는 전라도 민심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는 오랫동안 호남의 지지를 받는 영남 출신 후보를 내세워야 이길 수 있다는 영남후보론이 공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호남에서 단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압도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전라도 출신 대통령 후보라는 점은 정치공학상 크게 득이 되지 못한다는 반론이 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라도 출신이라서 호남에서 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희생에 그런 인물이라면 타 지역 출신이였어도 호남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보냈을 것이라고 본다. 정치적 이념은 신념의 문제이고,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으므로 이는 곧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한다. 영호남 투표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도 지역 감정을 기반으로 자기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밀어 준다기 보다는 정치적 신념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실제로 경선에서도 광주 및 전남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다른 지역에서의 열세를 뒤집기에는 부족했으며, 전북에서는 다른 지역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이런 출신지 요소는 이낙연의 경쟁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9. 상대적으로 순탄했던 삶[편집]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은 대권후보를 볼 때 과거에 역경을 견뎌낸 사람들을 선호하고 역경이 없던 사람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재임한 대통령들이 살아왔던 삶들을 보면 대체로 역경을 이겨낸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이낙연은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제외하면 삶 속에서 남들에게 인상을 남길 만한 부분이나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데 있어서도 특별히 주목할 만한 고난이나 역경 같은 것은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민주당계 출신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유독 어려운 삶을 살았다. 우선 김대중은 박정희와 전두환에 의한 오랜 정치적 탄압으로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고, 노무현은 1990년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민주당계 정당 깃발을 내걸고 부산에서 선거에 나갔다가 연전연패한 바 있으며[16] , 문재인은 다른 이들에 비하면 덜한 편이기는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분당 사태와 심한 내홍을 겪었고, 이재명은 소년공 시절 사고로 장애인이 되고 자살마저 시도할 정도로 험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이낙연은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하다가 민주당계의 텃밭인 호남에서 매우 손쉽게 국회의원과 도지사가 되는 레드카펫과 꽃길만 밟아온, 굉장히 순탄한 인생과 정치 생활을 보낸 편이었다. 그래서 이낙연은 좋게 보면 무난하고 안정적으로 살아왔지만, 나쁘게 보면 큰 도전 없이 현상 유지에만 몰두하는 기성 정치인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1] 더불어민주당 당헌·당규의 따른 당권·대권 분리 조항으로 당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려면 대선 1년 전인 2021년 3월 직을 사퇴해야 한다.[2] 전당대회 맞대결 경쟁자인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당대표 당선 시 대선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3] 원래의 당헌·당규에 따르면 당 대표 사퇴 시 최고위원들도 동반 사퇴해야 한다.[4] 이낙연은 21대 총선에서 종로구에 나와 대권 후보 1, 2위를 다투던 황교안 후보를 20% 가까운 득표율 차(이낙연 득표율 58.38%, 황교안 득표율 39.97%)로 압승을 거뒀다.[5] 이들은 이낙연을 민주당 주류보다 상식적이고, 덜 급진적인 정치인이라 생각한다.[6] 다만 2030보수들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낙연은 이재명, 추미애보다도 더 페미니즘에 우호적이다. 추미애는 페미니즘에 반대한다고 밝혔으며, 이재명은 20대 남성의 목소리도 참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낙연은 "남자는 아이 안 낳아서 철이 없다",'남성이 군복무에 따른 피해의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등 남성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물의를 빛은 전적이 있다.[7] 원래 이낙연은 손학규계로, 18대 대선 민주당 경선 국면에서는 손학규를 지지하였다.[8] 이 당헌은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에 당시 새누리당이 재보궐선거에 고성군수를 공천하는 걸 비판하며 제정한 것이다.[9]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민주당에게 엄청난 손실이고, 감내하기 어렵겠지만 공당이 문서로 규정까지 하고 국민과 약속했으면 약속을 지켜 무공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우려를 표명했으나, 내부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저는 서울, 부산시장 무공천을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라며 에둘러 입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결국 이재명의 우려는 선거결과로 현실이 되었다. [10] 여담으로 이 선거 이후 민주당은 20대 대선, 8회 지선에서 연이어 패하게 된다.[11] 전지역에서 진 것도 모자라, 전남/광주에서는 정청래한테 지는 등, 입지를 제대로 잃어버렸다.[12] 심지어는 이들의 행태들을 그저 방관방치하기만 했다.[13] 김대중의 기반은 호남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서울특별시와 충청권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괜히 DJP 연합이 결성된 것이 아니다.[14] 다만 김대중의 기반이 넘사벽인 것이지 이낙연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15] 경선에서 밀릴 것 같다기보다는 그 때쯤이면 고령으로 정계은퇴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에 가깝다. 21대 대선에는 74세가 되는데, 70대 중반의 5선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은퇴를 앞두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정계 원로이기 때문이다.[16] 노무현의 정치 인생 중 총 7번의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단 3번(13대 총선·1998년 보선·16대 대선) 뿐이다. 특히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출마했던 선거는 13대 총선 빼고는 전패했으며 13대 총선 마저도 PK의 대부 김영삼의 후광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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