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원/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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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유니콘스 ~ 넥센 히어로즈[편집]


파일:현대정명원.jpg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현대 구단은 노쇠화 기미를 보이던 그에게 은퇴를 종용했고, 정명원 역시 이에 불응하지 않고 좋게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2001년 한 해 동안은 일본으로 건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1] 코치 연수를 받았고, 귀국 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친정팀 현대 유니콘스의 2군 투수코치를[2]를 맡았다.

본격적인 1군 코치 데뷔는 2005년 1군 불펜코치로 시작하였고 2007년 시즌부터 1군 투수코치[3]의 첫 길을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전년도 정규시즌 2위 최종순위 3위로 막을 내린 팀은 2007년에도 잘 될 것이라고 예상됐으나, 시즌 초부터 범현대가의 팀 스폰서 철회 및 구단 매각이 힘들다는 기사가 뜬데다 기존 10년간 현대의 감독을 맡아오던 김재박 감독이 LG 트윈스 감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존 현대의 코칭스태프, 프런트 등이 죄다 김재박을 따라 같이 LG로 가버리는 등 인력난이 발생해 팀 분위기 자체가 어수선했다. 그야말로 개막전 4연패를 할때부터 투타 엇박자로 가면서 결국 최종순위 6위로 끝나면서 현대의 시작과 마지막은 그렇게 막이 끝났다. 한편 2006년에 지명 받고 1년간 2군에서 활약하고 1군으로 막 데뷔한 조용훈을 가장 신뢰 했던 것도 다름아닌 정명원이었다. 임태훈에 이어 신인상 투표 2위까지 한 것은 덤.[4] 현대에 코치로 몸담을때 여러 유망주들을 육성했는데 조용훈 외에 노환수, 파이어볼러 김영민, 장시환, 이보근 등 유망주들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2008년 시즌을 앞두고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들 및 프런트를 승계받아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도 팀에 남았다. 그러나 히어로즈에서는 이상하게 1군 코치 자리를 보장받지 못하고[5] 2군이나 재활군, 잔류군에만 있었는데, 2009년까지 재활군 코치를, 2010년부터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0 시즌에는 좋지 않은 팀 분위기에도 넥센 히어로즈에서는 유능한 투수 자원들이 속속 등장해서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데, 팬들 사이에서는 실질적인 1등 공신이 '정명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고원준의 등장과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정명원 코치가 2008년 아주 잠시 1군에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간 전적이 있다. 잘하거나 못했거나 떠나서 본래 있던 감독의 사단도 아니고 어디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인지라 팬들도 히어로즈의 프랜차이즈 코치로 남을거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시즌이 끝나고 2012년 두산 베어스로 옮기기 전에 넥선 히어로즈 2군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6] 대신 1군 투수코치를 맡고 싶다고 구단 측에 요청했다고 한다. 사실 그럴 만한 게 여러 번 1군 승격을 부탁했으나, 한양대 라인 챙기기에 벅찬 김시진 감독이 거부했기 때문. 그것 말고도 외딴 동네인 2군 강진에 구단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 보니 혼자서 유망주를 키우느라 벅찼다고 한다.[7] 거기에다가 정명원 코치가 키운 선수도 김시진 감독, 정민태[8] 코치가 키웠다고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보니, 위 각주에 링크된 인터뷰 기사에도 나와 있다시피 23년 간 있어 온 팀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본인은 굉장히 허탈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넥센 팬들은 이 같은 상황을 불러온 김시진 감독, 정민태 투수코치를 대차게 깠다.[9]


2. 두산 베어스[편집]



2.1. 2012년[편집]


2012년 시즌부터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서한규 2군 수비코치의 페이스북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두산 베어스 갤러리는 ''김태희(김상진) 바랬는데[10] 올리비아 허시(정명원)가 와서 부왘을 올리고 있다.

넥센으로 두산으로 이적 과정은 넥센의 차기 2군 감독으로 내정된 상태에서 2011년 10월 30일경에 두산측의 영입 제안을 받고, “이제는 1군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이유에서 옮긴 것이다. 본인 인터뷰 기사 그 와중에 김시진 감독에게 두산에서 투수코치 제의가 온 상황이지만 넥센에서 1군 투수코치를 맡게 해준다면 팀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김시진 감독은 그러면 두산 가서 잘해라고 답하며 끝까지 정명원의 1군 승격을 반대했다고 한다.

2012년 아직 10경기를 치렀지만 엠팍이고, 돡갤이고 정명원 코치에 대한 찬양이 가득하다. 지난 시즌 동안 윤석환 전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간 뒤로 털린 경우가 많았는데, 정명원 코치가 올라가면 마운드가 엄청나게 안정화된다고 카더라. 길게 믿고 던지게 하기에 지난 시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선발진이 엄청나게 안정화되었고, 선발 투수들이 던지는 시간이 늘어나 불펜 투수들도 작년보다는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는 분위기인 줄 알았으나 4월 초기까지는 그럭저럭 했던 투수들이 5월이 지나면서 갑작스레 난타당하기 시작했고 5월 30일 현재 평균자책점 6위, 볼넷 2위로 투수진이 썩 좋지 못하다.

특히 더스틴 니퍼트임태훈이 급격히 무너진 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우선 한 시즌은 끝나봐야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12] 그래도 6월부터 더스틴 니퍼트의 구위가 돌아오면서 평가가 다시 좋아지고[13] 있는 중인데, 선발들을 작년 시즌보다 길게 던지게 하고, 혹사를 자제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운드에서 흔들리는 선수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힘도 뛰어나, 두산 팬들은 명원갑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중이다.

현역 때 대표적인 포크볼러여서 포크볼 전수에 일가견이 있다. 2012년에 선발 에이스로 각성한 노경은, 역시 포크볼로 선발 10승을 달성하는 등 재미를 본 이용찬, 그리고 불펜 에이스로 다시 발돋움한 홍상삼 등이 그에게 전수받은 포크볼로 많은 재미를 봤다. 그 와중에 정명원 코치의 친정팀인 넥센 히어로즈는 그 해 같은 연고지의 모 구단 처럼 KBO 올스타전 이후 역대급 내리막길을 내려갔고 정명원은 친정을 나와 두산에서 첫 가을야구를 즐기게 되면서 서로 대조된 모습을 보여줬다.[14]

지도자로도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 그의 손을 거친 몇몇 투수들이 각성에 성공하였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탈탈 털리고 팬들한테 욕먹자 미니홈피에 카트라이더 하러 가야 한다고 키배를 떴던 선수.


2.2. 2013년[편집]


2013년 4월 코치로서 인터뷰를 했다. 지금껏 해온 선수 발굴과 육성에 많은 보람을 느끼는 듯. '나도 장인(匠人)이 되고 싶다’ 정명원 두산 투수코치

그러나, 별명답게 5월이 되면서 두산 베어스의 투수진이 무너지자 두산 베어스 갤러리 등에서 정석환이라고 까이고 있다. 그나마 후반기 들어와서 두산의 성적이 상승하면서 5월보다는 덜 까이는 중. 특히 두산 팬들에게 이해 가장 굴욕이자 대표적인 508 대첩때 투수들이 단체로 털리면서 그날 다른 팀들의 경기가 전부 묻히는 날이였다.

2013 시즌 종료 후 김진욱 감독이 경질되자, 구단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구단 프런트 또한 두산 투수들 사이에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의 위치에 있는 그를 잔류시키기 위해 사표를 반려하려 했으나, 김진욱 감독의 해임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거절했다고 한다.[15] 그가 떠난 후 김민재, 조원우 코치도 사표를 제출하고 팀을 떠났다.[16]

두산 팬들은 김진욱 감독 재임 시기 동안 투수진 안정에 크게 기여한 코치가 허망하게 팀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야기한 두산 프런트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중이다.

애제자 노경은김진욱 감독의 해임과 정명원의 사퇴에 대해, "두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픈 반응을 내비쳤다. 부모님 이상으로 이들을 잘 따랐던 노경은김진욱 감독과 정명원 투수코치가 떠난 후 이듬해 2014년에 무려 15패를 당하며, 최다패 투수로 거하게 말아먹었다. [17] 이후에도 노경은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고원준[18]과의 1:1 트레이드로 롯데로 이적한다.

두산에서도 나름 좋은 투수들을 키웠다. 2013년 1군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윤명준이나 신고선수인 옆구리 투수 오현택을 발굴하거나 성과는 나름 있었긴 했지만, 정작 정재훈이나 이재우 같은 베테랑들이 흔들릴때는 못잡아준게 나름 안타까운 케이스.


3. kt wiz[편집]


2013년 12월 16일에 같이 두산을 떠난 김민재 수비코치와 함께 신생 팀 kt wiz의 창단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어찌보면 현대 해체 후 7년 만에 수원으로 컴백한 셈.

kt의 리그 참가를 앞두고 2014 시즌 후 보호선수 외 전력보강선수 지명 때 넥센 히어로즈에서 사실상 포기하고 풀어 버린 장시환의 제구력을 끌어올리며 데뷔 첫 승[19]을 얻게 된다. 여담으로 kt의 1군 데뷔 역사상 첫 승 상대겸 팀의 연패를 끊는 타이밍이 하필 친정 팀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이 이상 3배 4배 그 이상의 빅엿을 먹인거나 다름없다. 장시환불펜의 한 축으로 바꿨다. 포수 출신의 조무근[20]과 김재윤을 리그 수준급 필승조 중간계투 투수로 키워 내는 등, kt에서도 명 코치 어디 안 가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발굴·육성했다고 알려진 선수들의 경우에 공통적으로 1군 안착 이후에는 성장이 정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진정 1군 투수코치의 성과인지는 의문이 있고, 유명세에 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과를 남겼는지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2016 시즌에는 한박자 이상 느리거나 선수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교체하는 짓을 남발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투수교체 타이밍,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신인 투수들 문제 등으로 인해 슬슬 비판의 목소리가 올라오고 있다. 사실 현대 1군 투수코치 시절에도 투수진 운영에서 그다지 평이 좋지는 않았다.[21]

1군에서 정명원 코치의 지도를 받는 투수들을 보면 공히 변화구를 중심으로 유인구 위주의 피칭을 하면서 타자와 정면승부를 하기보다는 상황을 피해가려는 경향이 드러난다. 흔히 2볼을 내주고 시작하고 2스트라이크 이후에 세번째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대개 스트라이크-볼 비율이 좋지 않고 풀카운트 상황이 쓸데없이 자주 발생하며, 그 결과로 투구수가 불필요하게 늘어나 선발 투수진의 이닝 소화 능력이 떨어지며 계투진도 사사구를 남발하면서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빠지곤 한다.[22]

투수진 운용을 보면, 길게 던질 투수와 짧게 던질 투수에 대한 배치 계획이 없이 당장의 상황에 급급해 여러 투수를 잇달아 투입하며 계속 실점하다가 결국 남은 투수가 없어 그대로 방치하는[23] 무계획한 행태[24]가 종종 나타난다. 결국 전체 투수진의 과부하를 초래하면서도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투수진 운용에 관한 최종 결정은 감독의 권한이므로 이것을 전적으로 투수 코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현상이 내내 지속되는 점에서 1군 투코로서의 보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한편, 두산에서 kt로 이적할 때 이미 kt 차기 감독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이 있었고 실제 2016 시즌 kt가 연거푸 최하위에 머무르자 조범현 감독의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정명원 감독을 주장하는 의견도 간혹 보인다.[25]

의아한 점은 투수진이 부진한 경우에는 대개 총책임자인 감독은 물론 투수코치도 함께 비판받는 것이 통례이나, 유독 정명원 코치의 경우는 그러한 비판 여론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조범현 감독은 본래 투수진 운용에 약점이 있다는 통설이었고, 정명원 코치의 위상으로 볼 때 투수 운용과 관련하여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정명원 코치만 비판을 면하고 있는 상황은 꽤 부자연스러운 형국이다.

성적부진에 대해 코칭스탭을 비판하는 경우에 보통은 거론되지 않는 수석코치나 심지어 1군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차명석 코치까지 뜬금없이 거론되는 경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1군 투수진에 직접 관계하는 정명원 코치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점은 정상적인 여론의 흐름인지 상당히 의구심이 있다.

굳이 이런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현대 시절부터 시작해서 수도권 팀인 넥센과 두산에서 워낙 평이 좋았고, 반대로 kt 팬들의 화력은 약한 반면 이들 사이에서도 NC에 비해 많이 얇은 kt의 뎁스에 대한 인식이 강해서일지도. 또 정명원 코치는 넥센과 두산에서 자신의 권한 탓이든 감독의 철학 탓이든 투수혹사와 조금 거리가 있었던 반면 조범현 감독 쪽은 전력이 있기도 하다.

김진욱 감독과 다시 만난 2017 시즌에는 초반이지만 지난 시즌과 달리 매우 정상적인 계투진 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범현 감독의 의견 반영이 크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런데 시즌 초를 지나며 서서히 선발진이 공략당하고 불펜 운용이 중요한 상황이 되자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계투진의 평균자책점이 급상승하였으며, 선발 에이스와 필승조모조리 투입하며 패배하는 경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상황에 따라 투수진의 짜임새로 지켜내는 안정적인 운용은 찾기 힘들고, 육성 측면에서도 전년에 비해 부진한 투수들은 여럿 보이지만 반면에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는 없는, 총체적 난국인 상태다.

결국 2018년 시즌 중에 가득염 2군 투수코치와 자리를 바꿔서 퓨처스 팀 투수코치로 보직이동을 했다. 한술 더 떠 2019 시즌부턴 잔류/재활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4. KIA 타이거즈[편집]


2021 시즌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현역 시절 입지 못했던 고향팀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지도자가 돼서야 처음 입게 됐다. 2020 시즌 1군 메인 투수코치였던 서재응 코치가 유망주 육성을 위해 2군으로 이동하면서 1군 메인 투수코치가 됐다.

시즌 초 평가는 영 좋지 않다. 쓸데없는 퀵후크로 투수진들의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음은 물론, 투수교체도 번번히 실패해서 팬들의 원성을 잔뜩 사고 있다. 거기다가 서재응 코치가 있을 때에 나온 박전문, 정해영, 하준영 등의 선수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이유 중 하나가 볼넷이 적고 자신 있게 던진 것이었는데, 정명원 코치가 부임하자마자 김유신, 이의리, 이승재 등 1군에 자리잡아가는 선수들은 물론 임기영, 정해영, 장현식 등 기존 선수들마저 볼넷이 너무 많아졌다. 투수의 제구를 무조건 코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해서 정명원 코치의 책임이 없다 보기는 힘들다.

5월 말에 들어서 평가는 바닥을 치고 있다. 팬들의 반응도 좋지 못하며, 조계현 단장, 맷 윌리엄스 감독[26], 최희섭, 송지만 두 타격코치와 함께 나가라는 반응이 많다. 계속되는 좌우놀이, 엉망이 된 투수들의 제구력, 계속해서 실패하는 투수 교체, 혹사 논란 등 서재응 투수코치의 1군 콜업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볼넷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 하였으나...2020시즌에 비해 KIA 투수들 볼넷이 더욱 더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다가 볼넷을 내주는 투수들에게 볼넷 하나당 일정 금액의 벌금을 걷는다는 내용까지 기사를 통해 공개되며 팬들은 신진급 선수들 돈 뜯어가냐며 잘못 가르친 투수코치도 벌금을 내라고 성토하고 있다.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었지만 17 시즌 방화불펜을 맡았던 이대진 코치 때 못지않은 KIA 최악의 투수코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육성, 개선, 교체 타이밍 뭐 하나 잘 하는게 없다.

2022년부터는 2군 감독을 맡게 되었다.[27]

그리고 2023 시즌을 앞두고 다시 1군 투수 코치로 복귀하였다. 2022 시즌에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던 서재응은 잔류군 코치로 이동했다. 물론 팬들의 반응은 거기서 거기(...)라며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21시즌에서 지적됐던 좌우놀이, 최악의 교체 타이밍등 문제가 참많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작년에 서재응보다 평가가 안좋으니[28] 이건 뭐 말다했다.

급기야 6월 16일 NC전에서 볼넷을 남발하고 있었던 이의리가 밀어내기 볼넷을 3개나 줄때까지 내버려두고 있다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인 투수인 곽도규로 교체해[29] 게임을 말아먹게 만드는[30]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오늘 당장 경질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며, 차라리 투수코치가 아예 없는 게 더 나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2일 후 상황 판단이 제대로 안됐는지 투구수가 82개밖에 되지 않았던 양현종을 강판시키고[31] 뜬금없이 필승조들을 갈아넣다가 경기를 말아먹게 만들었다. 만약에 불펜 투수를 등판시켜야 했다면 팀 패배를 각오하고 혹사당하지 않은 김기훈 or 윤중현을 등판시켰어야 했지만[32] 장기적인 팀 운영 자체를 생각하지 않은 정명원이 필승조들을 갈아버린 것이다.

6월 20일 갑작스러운 우천 중단 영향이 있긴 하나 투구수가 74개밖에 되지 않은 숀 앤더슨을 강판시키고, 7회부터 박전문 놀이를 시전했다가 한시적으로 마무리 투수로 써야 할 전상현은 물론 혹사로 인해 체력이 바닥난 박준표와 최지민까지 갈아버렸다. 경기는 이겼지만, 욕은 아낌없이 먹었다.

6월 28일 볼질만 하고 있던 장현식을 그대로 내버려뒀다가 동점을 허용하고, 이미 혹사당한 최지민을 더욱 혹사시키는 추태를 부렸다.

백번양보해서 이닝쪼개기나, 투수교체 실패등은 결과론이라고 치부할 수있다.[33] 하지만 정명원의 진짜 문제점은 전무한 불펜투수의 역할분담[34], "좋을 때 쉬지말고 계속 던져야 한다."이건 미친짓 이다. 같은 궤변으로 대변되는 투수혹사다. 당장 임기영과 최지민은 질때나 이길때, 접전, 크게 이길 때 다나오고 있다. 더불어 시즌 초 부터 메디나. 이의리가 흔들리는데 대체선발을 지난 주 에서야 가동했다. 지금 KIA가 부진한 이유 중 하나가 선발야구가 안된다는 점인데 정명원의 책임이 크다.

6월 29일, 결국 잔류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서재응 코치가 1군으로 다시 올라왔다. 둘 다 투수 교체를 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서재응은 보직을 명확히 하면서 관리를 해주는 유형이라서 혹사 논란은 덜해질 것으로 보인다.

6월 30일 서재응이 잘못된 투수 교체 타이밍으로 인해 게임을 말아먹었지만, 정명원만큼 욕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이는 서재응이 투수 운용을 잘 못해도 최소한 투수들의 보직 개념은 있고, 투수들의 혹사를 최소화 시키는데,[35] 정명원은 투수 코칭도 못 하는 주제에 경기 흐름에 상관없이 투수들을 갈아넣었기 때문이다.

서재응이 1군에 콜업된 이후 투수들의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면서 정명원의 평가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8월 22일 이의리가 왼쪽 어깨에 이상을 감지하고 4이닝만에 마운드를 내려가자, 정명원이 1군 투수코치로 있는 동안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혹사당한 것이 주요 원인이 아니냐는 의견이 KIA팬 커뮤니티 내부에서 대두되며, 그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정명원에 의해 갈려나간 임기영의 페이스가 최근 크게 떨어진 모습을 보이면서 정명원이 KIA 투수진 붕괴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한번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되었다.

시즌 후 KIA 측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전하며 팀을 떠나게 되었고 KIA 팬들은 그가 잘린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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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09:36:53에 나무위키 정명원/지도자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001년 시즌 직전 해외 진출을 추진하던 팀 후배 정민태가 요미우리로 임대됐는데, 이적 협상 과정에서 정명원이 요미우리에서 연수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 조건이 포함된 걸로 보인다.[2] 1군 투수코치는 어디까지나 김시진이 있었다.[3] 2006년은 조규제 코치가 2군 투수코치를 했다.[4] 조용훈은 신인상을 못받았지만 일구회에서 주는 올해의 신인상에 뽑혔다.[5] 히어로즈 창단 첫 해였던 2008년에는 윤학길이, 2009년에는 정민태가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6] 기사 참조[7] 이 시기에 2군에서 임창민전유수, 이태양 등 20대의 전도유망한 유망주들을 키워냈다 보니 지금도 히어로즈 팬들 사이에서는 정명원 코치의 평가가 좋은 편이다.[8] 사실 당시 1군 투수코치였던 정민태의 실적은 없었다. 1군에 올라오는 유망주들이 매경기 볼넷만 주면 인터넷 카페에서 온갖 비난은 김시진 감독과 배터리코치인 김동수가 먹었다.[9] 정민태와 정명원의 차이점이라면 정민태는 선수 은퇴 후 코치 연수도 안 거치고 현장으로 복귀했고, 반면 은퇴 후 1년간 해외 연수를 갔다왔다. 더군다나 정민태는 넥센 이후 롯데, 한화에서도 투수코치로 있었는데 실적을 쌓은건 한화 투수코치 시절인 2018년 1시즌 빼곤 없던데다 그 이전까지는 기존에 있던 투수진마저 제대로 활용을 못한다며 무능한 코치의 대명사로 까였다. 반면 정명원은 정민태보다도 코치 경력이 더 긴데다 2군 투수코치부터 시작해 지도자 경력을 차근차근 쌓고 1군으로 승격된 걸 보면 꽤나 대조적이다. 이 정도면 정명원이 1군 메인 투수코치로 있어도 할 말 없는 편이며 이 때도 넥센 팬들 사이에서 차라리 정명원을 1군 투수코치, 정민태를 불펜코치로 써보자는 의견도 있을 정도였다.[10] 김상진은 베어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90년대 베어스의 암흑기를 지탱하였으며 간만에 상위권으로 도약한 95년 OB베어스의 우승에 이바지했다. 또한 SK 코치로 있으면서 1군과 2군에서의 실적이 나름 있었던지라 팬들이 김상진의 복귀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상진도 2020년에 와서야 베어스로 돌아왔다.[11] 역시 전임감독의 무리한 등판으로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12] 두산 팬들은 등가교환이라고 치고 있다. 우선 조계현+윤석환 조합 때 빛을 발했던 김선우, 임태훈, 고창성[11]이 무너진 것에 대해 씁쓸해하면서도, 이용찬, 노경은, 김승회, 홍상삼 등이 환골탈태한 것을 보면 일단 투수진이 확실히 나아졌다. 특히 노경은이용찬은 그야말로 토종선발 개막장의 역사를 지닌 2000년대 두산의 빛이요 소금이 되었으니 그리고 앞의 셋은 투코보다 혹사와 나이 문제로 부진한 탓이 크다.[13] 사실 니퍼트는 더운 곳에서 잘했다. 추운 곳에서는 약간 성적이 나쁜편[14] 그리고 정명원을 내친 김시진 감독은 온갖 쌍욕을 먹고 8월 중순 경질당한다. 정민태 투수코치 역시 넥센과 재계약에 실패한 뒤 롯데로 이적했다.[15] 김진욱 감독이 경질된 이유가 가을야구에서의 투수 운용이었고, 이에 대해 프런트 및 팬들의 질책을 김진욱 감독이 전부 지게 되자, 투수 전권을 쥐고 있던 정명원에게 상당한 중압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넥센에 있었던 정명원을 적극적으로 1군 투수코치로 영입한 장본인도 김진욱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런트의 행보와 실제 투수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팬들의 비난이 김진욱에 집중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비난은 정명원이 생각했을 때 자신에게 향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16] 조원우는 친정팀인 SK를 거쳐서 고향 연고팀인 롯데 감독으로 갔으며, 김민재는 정명원과 같이 kt로 가버렸다가 고향팀인 롯데로 약 16년만에 컴백을 했다.[17] 사실 14 시즌 대부분의 두산 불펜들이 정명원이 떠나자 싸그리 방화범이 되긴 했다.[18] 고원준 역시 2군에서 친정팀의 은사인 정명원 코치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19] 사실 2012년에 선발로 몇 경기 나가서 퀄리티 스타트 나름 하면서 데뷔 첫 승을 할 수 있었는데 당시 넥센 빠따들이 심각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첫승을 올지 못했다. 이후로는 갑작스레 제구력 난조를 보이면서 완전 2군용 투수로 변해버린 건 일품.[20] 그 해 2015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로 뽑혔다.[21] 당시 코칭스탭들이 대거 LG 트윈스로 갔기 때문이다. 이유는 김재박이 LG 감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존 현대의 코칭스태프를 거의 다 빼가자 2군에 있던 코치들 및 연수한지 얼마 안 된 코치들을 올렸고, 또는 프런트였던 사람을 코치로 쓰거나 했었다. 그래서 준비도 못한 정명원이 1군 코치가 되었는데 의외로 신임 감독 김시진과 마찰이 꽤 있던 것으로 나온다.[22] 특히, 저런 상황을 즐기는 타입이라고 증명했다.[23] 본인은 혹사가 아니라고 자부했다.[24] 이듬해 이광환이 감독으로 오면서 몸이 망가져 버린다.[25] 근데, 이 낭설들을 퍼트린 기레기들은 이후 김진욱 신임 감독이 오니깐 정작 버로우를 탔다.[26] 다만 이쪽은 선수 풀이 워낙 엉망이라 어쩔 수 없다라는 의견과 아무리 선수풀이 엉망이라도 작년에 비해서 운영을 못하니 나가야 한다라는 의견이 갈린다.[27] 여담으로 2군 감독을 맡은 정명원의 등번호가 73번인데, 전 2군 감독이었던 박흥식이 사용했던 번호이기도 하다. 한편 박흥식 전 코치/감독은 KIA 시절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28] 사실 서재응은 잘못된 투수 교체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다.[29] 곽도규의 잘못은 없다. 단지 정명원이 잘못 등판시켰을 뿐이다.[30] 게임 자체는 이우성의 결승 홈런으로 승리했지만 심각한 불펜 투수 소모를 야기하였다. 만약에 패배했다면 팬들에게 죽어라 욕을 쳐먹었을 것이다.[31] 4실점을 했지만 불펜 소모를 최소화시키려면 8회에도 나왔어야 했다.[32] 다만 팀 승리를 고려했다면 양현종을 8회까지 던지게 하고, 9회에 전상현을 등판시켰어야 했다.[33] 어디까지 '백번'양보해서다. 28일 경기 이원석 타석에서 이준영을 장현식으로 교체했지만 장현식은 이원석에게 상당히 약한 투수이다.[34] 작년에 그렇게 욕먹었던 서재응은 최소 역할분담은 확실하게 했다.(그래서 2,3점차에 패전조를 내보내고, 부진한 정해영을 끝까지 신임했지만..)[35] 6월 30일 경기에서 최지민을 미출장 선수로 분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