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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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趙己淑[1]


출생
1959년 5월 14일 (64세)
경기도 시흥군 안양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소속
이화여자대학교(교수)
직업
대학 교수, 공무원, 정당인
재임기간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
2005년 2월 17일 ~ 2006년 2월 15일
소속 정당
경력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회
열린우리당 창당 정당개혁단장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회
열린우리당 총선기획단 자문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정당개혁추진단 단장
가족
아버지 조중완
친인척
고조부 조규순
증조부 조병갑
조부 조강희

1. 개요
2. 생애 및 활동
3. 논란 및 사건 사고
3.1. 참여정부 당시 활동 논란
3.2. 증조부 탐관오리 조병갑 옹호 논란
3.3. 좌파 구분 논란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교수. 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고,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을 역임했으며, 문재인 대선 후보 지원에 적극 관여하는 등 대표적인 폴리페서 중 하나로 여겨진다. 고부군수이자 탐관오리 조병갑의 후손(증손녀)이며 친일파 언론인 조강희의 손녀이다.

친노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한 명이었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청와대 홍보 수석을 역임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고, 유시민, 이해찬, 신기남 등 대표적인 친노이자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마저 노무현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당을 지켰고, 마지막까지 노무현을 옹호했다. 이후에도 친노를 대변하는 인물로 여겨져 왔고 문재인이 주류 정치인으로 부상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이후 문재인 정부와 그들의 강성 지지층의 행태에 비해 여러차례 비판적인 발언을 하였고, 이후에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강성 지지층을 파시즘, 홍위병 등으로 비판하는 등 민주당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편이다.

현재는 보수언론인 중앙일보에서 글을 쓰며 이준석 등을 옹호하는 기사#를 쓰는 등 과거와는 결이 확연히 달라진 상태이다.# 심지어 김건희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서도 국민대를 옹호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며 비판자들을 비판하였다.# 국민대를 옹호한 발언이 비판받기도 했다.#

2. 생애 및 활동[편집]


1959년 5월 14일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했다 (현 64세). 고부군수이자 탐관오리 조병갑의 후손(증손녀)이다.[2] 한성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아이오와대, 인디애나대에서 공부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인천대학교 조교수에 임용되었다.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에 참여했다. 1997년 이화여대 정치학과 교수에 임용되었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원래는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차기 유력 대선 주자였던 정동영의 측근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 토론회에서 노무현과 토론을 하며 노무현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기숙의 스탠스는 애매한데, 새천년민주당 16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이 정동영을 꺾고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본격적으로 노무현 캠프로 갈아탔다. 하지만 대선 과정에서도 노무현의 지지도가 추락하자 '죽는 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노무현 후보의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며 정몽준 후보로의 단일화를 종용하여 노사모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로인해 친노에서 매장되는 듯 했으나 대선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을 때 조기숙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며 자책하며 "배반과 변절의 끝을 보여주자"고 호소한 것이 유명해졌고, 덕분에 다음날 극적인 역전으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조기숙은 친노에게 면죄부를 받은 것은 물론, 오히려 친노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노무현 정부 출범 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열린우리당 창당 정당개혁단장을 맡아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특히 조기숙은 열린우리당 창당은 새천년민주당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여론 비판에 대해 개혁신당 창당이라는 논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창당 직후 열린우리당의 현실 주류 정치인들과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창당 직후 정당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을 한동안 멈추기도 했지만, 이후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 총선기획단 자문위원회 위원장, 정당개혁추진단 단장 등을 역임하는 등 열린우리당의 실세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또 이화여대 교수로서 언론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하며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며, 정부 비판을 방어하였고, 특히 보수 진영과 언론, 특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공격하는 총아로 활동했다.

2005년 2월 17일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 비서관에 발탁되었다. 당시 집권 후기로 들어서던 노무현 정부는 지지율 하락으로 야당과의 협치를 요구받던 시기이지만 꽤나 강성 성향으로 분류되던 조기숙을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임명하자 여야 협치는 물건너간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조기숙은 당시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던 상황에서 정권의 실정을 옹호하는 여러 무리수 발언을 하거나 야당 및 언론과 사사건건 날을 세우며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 지지율이 낮은 것에 대해 "국민은 아직도 독재시대의 문화에 빠져 있다"는 발언을 하여 국민모독, 국민비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심지어 강준만 등 진보 진영에서도 조기숙의 발언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의 억지스런 정권 옹호 발언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지자 열린우리당과 청와대 측에서도 조기숙의 무리한 발언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취임 1년만인 2006년 2월 15일 홍보수석에서 물러났다.

2006년 《월간조선》 11월호에 동학농민운동을 촉발시킨 탐관오리이자 친일파 집안인 조병갑 집안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보도가 실려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조기숙은 "증조부에 대한 사실이 오류일 수 있다. 증조부는 역사의 희생양일 뿐이다."며 증조부의 결백 가능성을 주장하며 옹호하여 논란에 휩싸였다. 아울러 조기숙은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최초 보도한 조선일보를 맹비난하였으며, 향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대해 일절 기고나 기고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 열린우리당이 지지율이 급락하며 해체되는 과정에서 여당 의원들에게 탈당하려면 의원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등 마지막까지 당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한때 친노를 대표하며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시민, 이해찬마저 등돌리고 노무현을 비판하며 제 살길을 찾는 와중에도 조기숙은 언론을 향해 마지막까지 노무현 정부를 옹호하였다. 하지만 여론과 동떨어져 지나치게 노무현을 찬양하는 일변도의 발언에 상당수 여론은 거부감을 보였고, 끝까지 반성할 줄 모르는 친노, 매사를 남탓으로 돌리는 노무현 정권의 독선과 아집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이후 조기숙은 친노를 대변하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노무현 정부가 처참한 지지율로 정권을 내준 후, 과거 친노를 자칭했던 인물들의 상당수는 노무현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 친노임을 부인했고, 남은 친노는 민주당 비주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조기숙은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한 친노가 다시 민주당에서 주류로 부활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조기숙은 민주당 내 여러 계파가 친노를 견제하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친노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친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거듭하였고 이러한 그의 호소가 먹히며 친노가 정치적으로 재기하여 민주당 당권을 장악하고 주류로 부활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또 조기숙은 이제 막 친노의 좌장이 된 문재인민주당에서 당권 경쟁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문재인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면서, 당내 타 세력 중진들을 비판하며 문재인이 민주당에서 당권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 2012년 대선 당시 야당 단일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안철수와 치열하게 경합하던 문재인을 돕기 위해 "문재인이 이긴다"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2017년 『왕따의 정치학』이라는 과거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한경오를 비롯한 좌파들과의 갈등을 주제로 한 책을 발간했다. 그 뒤 여러 방송과 팟캐스트 등에서 많이 인터뷰했다.

2020년 6월 28일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지지율이 높다고 정책이 올바르다는 자만하면 안 된다, 참여정부 당시에는 다주택 고위공직자가 없었는데 문재인정부대통령국토부 장관이 고위공직자들에게 다주택 소유하지 말라 해도 고위공직자들은 팔지 않았다"라고 발언하며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였다.[3] # 한달 뒤에는 감사원을 압박하는 여당의 태도가 박근혜 정부 시기의 데자뷔라고 질타하였다. #

현재는 보수언론인 중앙일보에서 글을 쓰며 이준석 등을 옹호하는 기사#를 쓰는 등 강성 진보 시절과는 결이 확연히 달라진 상태이다.# 심지어 김건희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서도 국민대를 옹호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며 비판자들을 비판하였다.# 국민대를 옹호한 발언이 비판받기도 했다.#

저서 '어떻게 민주당은 무너지는가'에서 문재인 정부를 두고 '노무현 실패론자들의 모임' 같다고 표현하면서 현재의 민주당은 포퓰리즘 정당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유시민관심법사에 빗댈 정도.


3.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3.1. 참여정부 당시 활동 논란[편집]


지난 십 수년간 친노 계열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칼럼이나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 및 2004년 참언모[4]라는 단체를 조직해 공동대표를 역임하면서 한겨레경향신문 구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친노 폴리페서의 아이콘 같은 인물로서 활동해 왔으나 그 와중에 부적절한 발언이 잦아 오래동안 공격받는 사람 중 하나이다. 화두가 될 만한 이슈들을 종종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내용 면에서 대부분 진영논리에 머물러 있어 공감을 얻지 못했다.

실제로 2009년 전 대통령 노무현박연차 게이트 연루 의혹이 드러났을 시 "생계형 범죄"한민구?라는 논리로 옹호하다 엄청난 비판을 초래했으며,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재직할 때에도 난감한 발언을 자주 내뱉어대는 바람에 청와대와 여당을 수시로 곤혹스러워지게 했다.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비판이 높아지자 노무현 대통령은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국민들은 독재시대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칼럼이 대표적인 사례였고 당시 합리적이던 정략적이던 간에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심지어 한경오를 비롯한 진보언론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문제가 있다는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참여정부와 언론과의 관계가 나빠지게 된 부수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이 조기숙 본인을 향한 비판으로 이어지자(...) "인간 조기숙은 인격적 죽임을 당했다"는 글을 올렸는데, 더불어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에 대한 인터뷰 금지 조치가 최소한의 자위권이라는 황당한 인식까지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2006년 2월 청와대 홍보수석을 사임하면서 "제가 떠나면 조용해지겠죠"라고 자조해대기도 했다.


3.2. 증조부 탐관오리 조병갑 옹호 논란[편집]


월간조선 2006년 11월호에 구한말 탐관오리조병갑이 조기숙의 증조부라는 사실이 보도되어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해당 기사가 보도된 후 조기숙은 한겨레 등을 통해 조병갑의 악행을 옹호하여 큰 논란이 일었다. # 또 조기숙은 해당 보도를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를 맹비난했다. 여론의 비난이 커지자 오히려 조기숙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부당하게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며 해당 언론사와 일체의 인터뷰와 기고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한겨레, 미디어오늘 등 진보 성향 매체들 역시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의 부당한 공격이라며 조기숙은 피해자라는 뉘앙스의 기사를 게재했다.

하지만 여론은 매우 좋지 않다. 보수층은 물론이고 열린우리당의 지지층 또한 조기숙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친 정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마저 조기숙을 맹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결국 12월 동학농민운동 유족들을 찾아가 후손으로서 죄책감을 밝히며 사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병갑의 결백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워낙 여론이 안좋아지자 사과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고 있다.


3.3. 좌파 구분 논란[편집]


조기숙은 정의당이나 진신류 등 비민주 계통 진보 좌파를 구좌파로, 민주당 같은 사회자유주의자들과 소위 '친노강남좌파'들을 신좌파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틀린 분류다. 세계 학계 어디서도 친노/친문 그룹 같은 사회자유주의자들을 신좌파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대한민국 정치 지형상 사회자유주의자를 중도 좌파 정도로 볼 수는 있지만 신좌파라는 분류와는 전혀 상관없다. 구 운동권 출신의 정치경제적 우경화를 또다른 좌익 사상의 표출로 완전히 왜곡하는 것에 불과하다.


3.4. 한국 기자단 폭행사건 언급 논란[편집]


2017년 12월 15일에 한국 기자단 폭행사건에서 중국 경호원에 맞은 것…자랑스럽게 받아들여라망언과 함께, 그동안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던 선진국 경찰을 칭송하던 언론들의 사례를 들면서 중국에 대한 무분별한 옹호와 한국 기자단에 대한 반어법과 조롱을 쏟아부어댔다. #

15일 오후 조기숙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SNS로 소식을 접하다 보니 기자가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


3.5.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 비판 논란[편집]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에 관해 그 과열이나 악용 여지 등에 다양한 비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비판론자 중에서도 많은 논란을 만들고 있다. 조민기 성범죄 사건의 가해자 조민기의 자살 원인을 언론에게 돌리거나# "일회적인 성추행(으로 느꼈던 행위), 그것도 당시 권력이 없는 사람의 미수 행위"라는 구절로 특정 인물을 옹호하려 한다는 의심을 사는[5] 모습# 등이 논란을 낳았다. 보수 정당의 여성 정치인에게 비판#받기도.

다만 본인은 본인의 주장을 언론이 왜곡 보도하고 있다며 법적 대응을 시사하였다. 이후로도 언론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2018년 4월 3일자 외부자들에 전화 출연하여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토로해대기도 하였다.


4. 기타[편집]


  • 가족으로는 남편과 아들 2명이 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 당시 아들 2명이 모두 미국에 유학 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2022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큰 아들은 원래 문재인 골수 지지자로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에 22회나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국민의 힘 이준석 지지자로 돌아섰다고 한다. 이준석의 성 상납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이준석 없는 국민의힘에 표를 줄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기된 성 상납 의혹으로 이준석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이준석에 대한 지지도 접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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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해년(己亥年)인 1959년에 태어났기에 이름에 기(己)가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2] 조병갑의 아들이자 친일파 언론인 조강희의 손녀이기도 하다.[3] 이에 관해 진중권은 강성 친노인 조기숙마저 돌아섰다면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고 호응했다.[4] 참언론을 지지하는 모임[5] 해당 구절에 해당되며 조 씨와 관련 있는 인물이 연루된 사건이 해당 시기에 일어났다.(당시 권력이 없었다는 해석에 관해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서 참조.) 참고로 해당 인물은 해당 사건으로 인해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