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파노(1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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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테오파노
(영어: Theophano 그리스어: Θεοφανώ)
출생
941년
사망
미상
남편
로마노스 2세, 니키포로스 2세
자녀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안나 포르피로게니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니키포로스 2세의 황후.

2. 생애[편집]


941년경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지방의 여관집 딸로 출생했다.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는 당초 아들 로마노스 2세의 아내로 이탈리아 왕 우고의 딸 베르타를 들였다. 그러나 에우도키아로 개명한 베르타가 949년에 요절하자, 956년경 오토 1세의 조카딸인 바이에른의 헤트비히를 며느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로마노스는 테오파노와 만난 뒤 사랑에 빠져, 아버지의 뜻에 거역하고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만약 로마노스가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면,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와 동로마 제국은 인척 관계가 성립되므로 두 제국의 사이는 각별해졌을지도 모른다.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비천한 출신인 테오파노를 무척 싫어했고, 959년 콘스탄티노스 7세가 사망했을 때 그녀가 시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노스 7세가 몇달 전부터 지속적인 열병에 시달렸다며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로마노스 2세는 테오파노의 설득에 따라 어머니 엘레니 레카피니를 별궁에 보냈고 다섯명의 누이들을 수녀원에 보냈다. 또한 정부와 궁정의 원로 대신들도 무더기로 교체되었고, 시종장 바실리오스는 원로원 의장(Proedros)직을 얻어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환관인 요시포스 브링가스가 임명되었다. 브링가스는 시종장을 맡는 동시에 총리 대신과 해군 총사령관을 겸임했는데, 대단히 지적이고 명민했지만 한편으로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했다고 한다. 테오파노는 브링가스와 함께 황실을 확고히 장악했다.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는 2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테오파노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당대부터 파다했지만, 그녀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럴만한 동기도 부족하다. 역사학계에서는 로마노스는 황음을 일삼다가 몸에 무리가 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테오파노는 로마노스 사이에서 세 명의 자식을 낳았고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다. 그러나 남편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녀의 권력이 위태로워졌고 어린 자식들은 제위를 노리는 야심가들에게 위협받았다. 이에 그녀는 비밀리에 니키포로스 포카스에게 전갈을 보내 황궁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달려와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당대 실권자 브링가스는 그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지만, 민심은 니키포로스에게 쏠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종교계는 두 사람의 결혼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일단 테오파노를 황금뿔 상류에 있는 낡은 페트리온 성채에 가서 4달간 살게 하고, 자신은 황제의 침소에서 검약하게 생활했다. 그러다 963년 9월 20일 팔라딘 성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욱토스는 결혼식이 끝날 무렵 니키포로스가 관례에 따라 주제단에 입맞춤을 하기 위해 접근하자, 앞을 가로막으며 "재혼자는 먼저 참회부터 해야 하니 1년을 기다려라"라고 통보했다. 며칠 후 궁정 사제 스틸리아노스가 몇년 전 니키포로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잠깐 방문했을 때 테오파노의 자식 중 한 명의 대부가 되어준 일을 거론하자, 폴리에욱토스는 니키포로스가 테오도라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줬으니, 두 사람은 '영적인 인척'이므로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총대주교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체재하던 모든 주교와 교회, 국가의 유명인사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해결책을 의뢰했다. 그 결과, 폴리에욱토스가 내세운 교회법은 성상 파괴 운동을 주도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시대에 반포된 것이므로 무효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폴리에욱토스는 그 회의는 사안을 해결할 만한 권위가 없다며 황제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이에 황제는 다른 방식을 써먹기로 하였다. 며칠 후, 스틸리아노스가 교회와 정부의 공동 위원회 앞에서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바르다스도 아들이 대부를 서준 적은 없다고 단언했다. 결국 폴리에욱토스는 고집을 꺾고 파문을 취소했다.

이렇듯 니키포로스는 종교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테오파노와의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테오파노는 니키포로스의 외조카이자 빼어난 미남이었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니키포로스는 황후가 조카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요안니스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해 965년 말에 군대 사령관직을 박탈하고 아나톨리아의 자기 영지로 돌려보냈다. 이에 테오파노 황후는 남편에게 요안니스에 대한 처벌이 과하다고 설득했고 니키포로스는 이에 흔들려서 요안니스를 불려들었지만 대신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후 요안니스는 한밤 중에 해협을 건너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었다. 그후 두 사람은 니키포로스를 죽이자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지난날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하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한 미카일 부르체스도 포함되었다. 그 후 음모가들은 여자로 변장하고 옷 안에 칼을 숨긴 채 황후를 만나러 온 척하면서 황궁의 규방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그들을 여러 작은 방에 분산시키고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는 수십 명의 음모가들을 이끌고 황후의 협력에 힘입어 니키포로스가 머물던 부콜레온 요새에 침입해 황제의 침실에 난입했다. 그 후 그와 수십 명의 음모가들은 니키포로스 2세를 잔혹하게 짓밟고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

요안니스는 음모를 성공한 뒤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해 새 황제가 되려고 했지만 폴리에욱토스 총대주교가 막아섰다. 총대주교는 테오파노 황후를 먼 곳으로 보내고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에 오지 못하도록 해야만 요안니스의 대관식을 치를 수 있다고 못박았다. 사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를 단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다. 그는 총대주교의 요구에 승낙하고 황후를 황실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던 마르마라 해의 프로티 섬으로 추방했다. 테오파노는 몇 개월 후 프로티 섬에서 탈출해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서 더 먼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냈다. 다만 요안니스를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줬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와 만나는 데 동의했지만, 그 때문에 테오파노에게 온갖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다. 테오파노는 그후 바실리오스에게 화살을 돌려 그를 몇차례 때린 후 수행원들의 제지를 받아 끌려 나갔다.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뒤, 바실리오스 2세콘스탄티노스 8세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두 황제는 어머니를 망명지에서 불러들였다. 이후 테오파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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