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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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성장
2. 교사 및 군인
3. 전역 후
3.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
3.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
3.2.2.1. 긍정론
3.2.2.2. 부정론
3.2.3. 최후 진술
4. 최후와 그 뒤


1. 출생 및 성장[편집]


1924년 4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마을 80-6번지에서 아버지 송음 김형철(金炯哲, 1907. 4. 23 ~ 1975. 8. 13)[1]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유금(權有今, 1906. 6. 8 ~ 2001#)[2] 사이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문리 80-6번지에는 김재규의 생가가 여전히 남아 있다.[3]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당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건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김재규도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1946년에는 선산중학교, 1952년에는 선산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4]를 졸업한 후, 대구농업전문학교[5] 중등교원양성소[6]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국내 웹상에서 김재규가 일본 제국 해군 요카렌 출신이란 잘못된 정보가 퍼져있는데 그는 일본국 특별 간부 후보생 출신으로 이는 해군 휘하의 간부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육군에서 운용하던 프로그램이었다. 즉, 김재규는 일본 제국 육군 출신이다.


2. 교사 및 군인[편집]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7]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때 동기생으로 입교한 박정희와 인연을 맺는다.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9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보다 앞서 1951년 9사단에서 박정희와 김재규 둘다 근무한 적이 있고 5사단 근무 당시에는 연대 보급창고에 불이 나서 보관중이던 군수물자가 소실되었는데 사단장인 박정희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인근 부대의 유류물자를 넘겨받아 부족분을 메꿔주었다.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도 거론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1946년 12월, 196명 중 14등이라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경비대 참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에게 한국군 장교에 대한 차별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며 충돌한다. 권총을 들이대는 미군 장교에 맞서 한번 쏴보라며 맞선 김재규는, 징계위에 회부되자 자진사임한다.# 그 후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8]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 후 복직,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3사단 22연대 제2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전쟁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여 의정부·대구·영덕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 전쟁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북진의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았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한 후 여수 제2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따라서, 6.25 참전유공자이다.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고[9],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며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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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사단장 김재규.

이후 6사단장과 6관구사령관을 거쳐 1.21 사태 후 방첩부대장에 취임하여, 방첩부대를 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초대 보안사령관이 되었다.[10]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3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건설부장관 시절에 지어진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는 삭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김재규의 출신부대에 사진이 걸려있다. 최근 5사단 36여단 역대 지휘관에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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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중장 김재규.


3. 전역 후[편집]


1973년 3군단장을 끝으로 육군 중장 계급으로 전역한 후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상하관계가 역전이 되어버린 셈이다. 결국 10개월가량의 불편한 동거는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승진하면서 끝나게 된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 이때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라며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에는 노동 및 종교의 추가탄압이 들어가있어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11]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12]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3.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편집]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13]

김재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읍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보충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언론에서 공개한 시점이 2012년 말, 즉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당시엔 찌라시 취급을 받으며 묻혀졌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최태민박근혜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위 항소이유서에서 보다시피 최순실박근혜와 함께 기업들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14] 40년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했던 사기행각을 딸이 그대로 2016년까지 써먹은 셈이다. 당연히 최태민의 범죄행각을 비판하는 민원이 빗발쳤으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에게 직언을 할 용기를 가진 관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소수만이 직언을 했다 핍박받는 실정이었다.

위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나왔듯이, 청와대 내에서 실세 권력이 높았던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 방법이 없어서 김재규에게 직접 하소연했다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당시 박근혜는 단순한 공주가 아닌 육영수의 분신이었고, 저격 사건으로 죽은 영부인의 딸이란 동정표까지 더해져, 당시 노인들은 박근혜만 보면 "공주님 오셨다"며 큰절을 올리며 눈물 흘릴 정도였다.# 더욱이 마음에 안 드는 경찰청장이나 도지사를 호출하여 호통칠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는 최태민에게 분노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놓으라고 직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의 직언을 듣기는커녕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직에 올리고 최태민을 명예총재직에 올리는 조치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절망감이 10.26 사건의 동기가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하였다.

당시 김재규는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의전상 부총리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지배하는 대통령의 왼팔이 일개 사이비 교주를 고자질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엄청나게 체면을 구긴 일이다. 2017년 기준으로 보자면 검찰총장이 사이비 교주 하나 기소했다고 대통령에게 친국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심한 꼴이다. 거기다가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정확히는 박근혜)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끝까지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어디서 굴러와 영애를 홀린 사이비 종교인을 더 신뢰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있던 충성심도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즉, 10.26 사건을 결심한 동기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겼다.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지속될 경우 벌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이를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기며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했지만, 그의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3.2. 10.26 사건[편집]



파일:김재규.png
파일:김재규 현장검증.jpg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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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공판에서

당시 최후 진술의 녹음본이 있다. 무려 4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들을 만한 음질이다. 유튜브 이 녹음본은 월간지 신동아 1996년 10월호에서 첫 공개가 되었는데, 이 녹음본을 듣고 감동한 독자들로부터 "김재규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신동아 편집부에 쇄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맥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차지철PPK 권총S&W M36[15]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이것이 이른바 10.26 사건이다.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로는 생각하지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결국 거사에 성공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대한민국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 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그럴 마음만 먹었으면,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무리하게 사건을 덮으려들다 국무위원 설득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암살자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 획득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 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 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 그리고 얼마든지 선동이 가능했음에도 많은 정보를 비밀로 하다 계엄 명분 확보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 ③ 김재규는 오로지 박정희의 암살로 말미암아 유신 정권의 붕괴로 도래하게 될 자유민주주의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이 탓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중정행이 아닌 육본행을 선택했다는 설. 김재규의 유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실제론 사건 조사를 담당한 전두환 군정이 널리 퍼트린 '욱하는 성격'과 '그에 따른 피해망상증 환자의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군에 오래 투신한 만큼 일상에서도 군기가 배어 있었으며, 8남매의 맏이로서 항상 동생들과 인척들에게 자상했고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사형 전날까지도 면회를 온 부모에게 큰절을 올리며 법정에서 증언한 "큰 뜻이 있어 했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동생들에게 "(자신 탓에 아버지를 잃은)근혜에게 나보다 먼저 기도해달라."고 말하는 등 자신이 벌인 행위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에 따른 여파를 알고 있었으며, 친모에 이어 친부까지 잃은 아이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최후진술에서까지 "부하들은 나의 명령으로 인해 계획에 참여하게 됐다"며 극형을 면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권력욕이라든지 우발적 행위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하고 정신이 없어 육본으로 갔다고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평소의 행실과 유가족들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김재규는 1번설과 2번설을 모두 부정하고 법정에서 진술한 대로 오로지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 이 추측들에 대해서는 10.26 사건에 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박선호, 유성옥, 김계원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어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에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법률적인 관점)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 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형사3부 판사인 양병호와 서윤홍은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암살 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 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이며, 최종판결 당시 민윤기 등 6명의 판사들이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냈다. 이로 인해 소수의견을 낸 판사 6명은 신군부의 보복으로 전부 법복을 벗어야 했으며, 특히 양병호는 보안사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훗날 양병호는 "김재규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당시 판결문은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으나[16], 훗날 공개되면서 당시 몇몇 재판관들의 용기있는 소수의견들이 밝혀졌다. 한홍구,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참조.

10.26과 관련한 김재규의 보다 자세한 입장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 되어있다.


3.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편집]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의사.[17]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 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 싱가포르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있다.[18] 박근혜가 만약 이 상태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박씨 일가가 다스리는 독재국가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독재자들과 같이 말년이 비참하고 후세의 평가가 좋지 못했을 수도 있다.[19]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다가 한국은 군주가 암살 당하는 일이 의외로 역사적으로 몇 번 있었다. 박정희의 말년은 백제동성왕과 비슷한데, 최측근들의 충언을 개무시한 끝에 결국 자신이 등용한 신진세력인 위사좌평[20]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 자리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이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는 이유로 김재규에게 더 포커스가 가는 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21]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정권조차도 5공화국 청문회 때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심판도 안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극적인 국민들의 성격과 견고한 기득권의 힘 때문인지 몰라도 근·현대사를 통틀어 당사자 개인에게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 사례는 실제로 흔치 않다. 또한 박정희 본인은 이승만이나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22] 또,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게 잡아도 수천, 많으면 수만에서 수십만의 애꿎은 목숨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을 대신 이루어준 것이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사안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실제로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구속되었을 당시 감방 동기였던 이해학 목사는 "당시 장준하가 '이제 민중투쟁으로는 안 된다. 양심적인 군인을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수 말고는 박정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참고로 이해학 목사는 김재규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이중배상금지 조차도 위헌 판결을 때린 대법관을 강제로 해고시켰던 전례가 있었으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23]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현재에 이르러서는 김재규를 긍정평가하는 의견이 점차 많아지면서, 김재규 비판 세력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이승만이야 스스로 물러났으니까 박정희보다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라도 했다는 옹호라도 있지, 박정희에 대해선 이승만과는 달리 그러한 옹호론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물러나라고 해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가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당장 총선에 패하자 그토록 경쟁하던 북한과 적대적 공생을 꾀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지지율을 올릴 정도였으며,[24] 설령 박정희 정부의 붕괴는 예상된 수순이었다고 해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게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김재규 외에 김형욱도 박 정권이 10월 유신까지 도입해서 영구 집권을 꿈꿨다고 증언했으니 만큼, 10.26 같은 비상한 계기가 아니고서는 박 정권이 좋게 좋게 권력을 내려놓을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고 본다는 주장이다.


3.2.2. 그게 최선이었을까?[편집]


당시 김재규는 박정희가 자신을 타도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많은 사람들(박정희를 찬양하는 극우파들 외에)이 김재규가 그를 저격하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더 독재 했을 거라는 주장이 많다. 따라서 10.26(십이육)사태는 김재규 입장에서 보면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3.2.2.1. 긍정론[편집]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를 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고[25] 자칫하다간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라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선 박정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김재규가 자신의 변호인인 안동일에게 털어놓은 내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정희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국민과 정부 사이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 말하였다.#

  •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마산 내의 시민들은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26]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 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제를 달았으며 부마민주항쟁 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27]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 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 건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김봉조의 회고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격려하며 김영삼은 한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고 앞으로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있게 잘 모시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 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 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윗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담긴 관련 출처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 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한홍구는 "김재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최상천 전 교수는 각종 문헌과 증언들을 근거로 "김재규의 10.26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의 1 강의 2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고 상당히 극단적으로 평가하였다.#

야권의 거물 정치인인 천정배 의원도 10.26 희생자 30주기 합동 추모제에 참석하여 "김재규 장군과 의인들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을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10.26 재판 때 인권변호사들에게 김재규의 변론을 부탁하기도 하였고, 훗날 김재규와 그 부하의 가족들이 구명 탄원을 위해 김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서의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사라 칭하며, "박정희는 절대로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기에 김재규의 거사가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최태민 문제 관련하여 '박근혜와 최태민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김재규의 충언을 무시하고 '김재규의 주장은 모함'이라는 박근혜의 말만 믿고 사건을 덮어 버린 박정희의 행태도 10.26의 원인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회창 전 총리는 김재규의 저격이 박정희 시대라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를 여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10.26 사건의 재판을 맡았던 양병호 전 대법원 판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였다고 평가하였다. 양병호 판사는 김재규를 내란목적 살인범으로 판결할 수 없다는 소신을 고수했고, 보안사로 연행되어 강제사직을 당하고 변호사 개업에도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이철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위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 때문에 10.26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하면서 10.26 사건을 의거로 지칭하였다.

자유총연맹 회장이자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친박 정치인 김경재는 저서 '쓰러지는 역사, 일어나는 역사'를 통해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여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씻었다면서 민주 인사들이 김재규의 거사를 폄훼하거나 냉소적으로 보는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소위 진보 및 민주인사들은 박정희 정권 말기 민중혁명의 성공이 눈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갑자기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해 버려 당시 끓어오르던 혁명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고 주장하는데, 김경재는 이들의 주장이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서 입으로 노동계급의 승리를 외치는 '안락의자 속의 급진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설사 그들의 주장대로 민중 혁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살상 당할 수백, 수천의 무고한 희생자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반문하였다.

보수언론인 조갑제는 “김재규는 박정희의 시의적절한 죽음에 기여했다. 만약 김재규의 결행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저승에서 박정희가 김재규를 만났다면 ‘고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2015년 박권흠 전 의원이 김영삼과 김재규가 단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한 언론매체에 공개하였는데, 당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상당히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79년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직 제명을 시도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양쪽을 중재하고자 김영삼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박권흠 전 의원이 공개한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이건 YS가 나한테만 한 얘기야. YS가 김재규를 만나고는 나를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박 의원, 김재규 그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전화를 걸어서는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하길래 내가 그랬지. 아니, 여기 기자들 우글거리는데 왜 여길 오냐. 내가 공관에 가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김재규랑 만난 이야기를 쭉 들려주더라고."

김재규- "총재님, '뉴욕 타임스 기사는 내 본뜻이 아니었다. 뉴욕타임스 기사가 잘못된 거다'라는 해명서 하나만 내 주면 제명 안 되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하겠습니다."

YS- "그 기사에 내 원래 취지와 맞지 않는 표현이 있는 건 사실이야. 내 취지와 다른 대목이 있으니 해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해명을 하면 박정희한테 굴복하는 게 되는 거야. 날 제명하라고 해. 나는 제명당할 수 있어."

김재규-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YS가 다시 상도동 집에 돌아가려고 공관을 나오고 있는데, 김재규가 대문 앞까지 나와서 YS를 배웅하더라는 거야. 그러면서 김재규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이러더래."

김재규- "김 총재님,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걸 보고 YS가 나한테 '그 사람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런 거지. 김재규가 YS에게 박정희에게 총을 쏠 것을 암시한 건지, 혹은 김재규가 속으로는 YS를 지지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지. 이건 정말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다고."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리콴유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라는 주장.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 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 봤을 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 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말 더 간단한 예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들이 다 멍청이라 3대 독재가 이루어졌나? 박정희는 헌정 사상 가장 군을 잘 장악한 독재자였다. 박정희는 공무원, 군인 등을 다룰 때 소위 '금일봉 정치'라는 것을 행하였다. 이는 누군가에게 포상을 줄 때, 훈장이나 공적 상금 등의 공식적 포상을 주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포상인 '금일봉'을 전달하여 포상을 주는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것을 부각,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치 행위였다. 이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 내탕금을 가지고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포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말 그대로 중세 수준의 정치 행위였지만 효과는 매우 굉장했다. 이런 금일봉 정치는 상당한 비자금을 필요로 해서 박정희 휘하 3, 4공 실세들은 정치 자금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특히 출처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중앙정보부의 돈이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활용되었고, 관행이 되었다. 당장 2010년대에만 해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돈을 개인 쌈짓돈마냥 써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박정희 당시,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던 '관례'가 고스란히 유지된 것임을 알 수 있다.[28]

박정희의 금일봉 정치는 단순히 금전을 제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에게 고급 자동차를 선물한 것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해당 군인에게 가지고 있는 '총애'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금일봉이라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다더라.'는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박정희가 그 '누구'에게 보이는 '총애의 정도'가 되었다. 돈 자체도 좋지만 금일봉의 액수는 박정희가 자신에게 보이는 총애와 관심이었고, 유신 정권 아래에서 이는 곧 자신의 발언권과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수뇌부는 충성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사실상 박정희의 사병(私兵)이 되었다. 국토를 수호하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이 마치 조선인민군마냥 독재자 개인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박정희는 군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의 독재 정치, 우상화를 통해 사회 곳곳에 자기 세력들을 확보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이승만, 전두환도 박정희만큼의 무소불위의 권력, 충성스러운 군대를 갖지 못했다. 그런 인물을 민중혁명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낭만주의, 모험주의적 시각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군사정권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박정희라는 머리가 사라지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은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유신 이전에 이미 대통령 직선제에서 내리 3선을 한 인물이었다. 이후 10월 유신을 하면서 완전히 타락한 바람에 잊혀지곤 하지만, 3선을 했다는 것 자체가 국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제거당하고 전두환이 직선제는 경험도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공고함이 확실히 헐렁해졌으며, 독단적으로 전방 병력과 특전사를 움직이고,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결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게 극도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3.2.2.2. 부정론[편집]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29] 출처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 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 뿐,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출처

유신정권의 3개의 권력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30],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 제4공화국 등 공화국 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실제로 쿠데타 이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장관들을 모아놓고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압박했는데, 이를 정권 탈취 시도로 보는 경우도 많다. 김재규 본인은 권력 장악을 의도하지 않았고, 유신의 잔재를 청산한 뒤 물러나 박정희 묘에 시묘살이나 할 생각이라고 했었지만, 이런 거야 자기만 아는 일이니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수 시간 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국가 원수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급진적 권력 교체를 시도한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치밀한 계획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10.26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한 계획이었다면, 단순히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이와 관계된 사람들과 철저하게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리고 난 이후 정권 교체 및 민주화까지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는 입장에서 김재규는 너무나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 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31]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규는 10.26 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 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 계엄령 확대를 구상했는데, 출처1, 출처2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JP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 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10.26 이후 JP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 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 #2

또한 체포되기 전까지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 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김재규는 10.26 이후 전국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출처1, 출처2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나 사리사욕은 없다고 부인하였다.[32]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세력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는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3.2.3. 최후 진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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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진술을 통해 박정희 정권 동안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고, 당시까지 정부나 대통령이 순리대로 선출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순리대로 하는 사례를 만들어보고 싶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문 앞에 왔으니, 받아들이기를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간다는 말과 함께 그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못하고 가는 게 아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을 따라준 부하에 대해 그들은 좋은 사람이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선처를 바라면서 극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특히 박 대령을 찝어 말했는데 이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흥주 대령이었다. 이렇게 김재규가 직접 간곡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흥주 대령은 재판부의 사형판결에 이은 초고속 사형집행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33]


4. 최후와 그 뒤[편집]


먹구름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 때
홀로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을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철색 무지개 되어
이 땅위에 길이 이어지리
- 김재규 묘비 윗면에 쓰인 추모시
그리고 8:6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적용돼 사형판결을 받는다. 80도306[34] 사형 판결을 받은 김재규는 사형 확정 나흘 후인 1980년 5월 24일교수형으로 숨진다. 사형집행일 김재규는 아침을 먹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는데, 이는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사형 집행 직전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참관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향년 54세.[35] 사형 집행 장면 그 비극은 김재규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져, 부인 김영희와 동생 김항규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산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당했으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인들 역시 갖은 고초에 시달려야 했다.

김재규는 죽기 전 아내 김영희 씨에게 자신의 남은 재산으로 부하 가족들을 돌봐 달라고 당부하였고, 김영희 씨는 김재규의 유언에 따라 부하 가족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김재규의 부하 자녀들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 있었다. 당초 그는 유언으로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 묘'를 쓰라고 했지만 신군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9년에 1월에야 광주/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박정희 지지자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의사' 와 '장군' 이라는 글씨를 훼손시켰고, 추모비를 굴러 떨어뜨려 금이 가게 만들었다.

이 추모비는 아직까지도 금이 가고 글자가 훼손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추모비를 새로 세우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재규의 유족과 송죽회가 현 상태 그대로 두겠다고 밝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추모비가 훼손되고 금이 가 있는 모습도 역사의 기록이라는 판단에서라고. #

2018년 국군기무사령부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김재규의 사진이 다시 걸린다는 기사가 났다. 결국, 복권이 되고 있는 셈.

[1] 자는 양길(兩吉).[2] 추밀공파(樞密公派) 권직현(權直鉉, 초명 권주팔(權周八), 이명 권직현(權直絃), 1873 ~ 1948. 12. 28)의 딸이다. 기사에 따라 1992년, 1999년으로 사망일이 오락가락하고, 1998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생존 정황 확인.[3] 김재규의 딸이 잠시 귀국해서 몇 년 전에 담을 복원하기도 했고, 2019년에는 보수공사를 진행했다.[4]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5]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학교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6]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 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7] 당시 체육교사였다.[8]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9] 당시 총장은 김계원이었으며 교통사고를 당한 김재규를 김계원이 구해줘 인연을 맺는다.[10] 이 시절 재일교포 서승 형제 간첩단 사건에 관여한 흑역사가 있다. 이 형제는 방한 전 재일교포 신분으로 북한에 방문하고 선물까지 받아온 전력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고문을 동반한 고강도의 조사를 받았는데,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되고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훗날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서승은 조사도중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분신 자살을 하기 위해 난방용 등유를 붓고 자살을 기도했다. 지금도 서승의 얼굴과 온몸에 화상 자국이 심하다.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이 건에 대해서는 옹호하지 않는다. 기사 [11] 출처 [12] 그리고 여기에 책임을 진다는 구실로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했으나 거절당했다. 출처 이는 그가 권력욕에 취해 10.26 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논거로 쓰인다.[13] 한국과 같이 유교 문화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나라에서 사람의 성을 아무 호칭도 없이 그냥 부르는 것은 범죄자에게나 쓰는 표현일 정도로 격낮은 행위이다. 그만큼 김재규가 최태민이라는 이를 거의 범죄자와 동격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의미이다.[14] 완전히 같지는 않다. 아래에서도 언급된 이 기고에 따르면 최태민은 권력형 개인 비리를 저질렀고, 최순실은 한술 더 떠 총체적 국정농단을 자행했다고 한다. 기고문을 쓴 한홍구 교수는 "적어도 최태민이 돈을 뜯을 때는 (최순실 때처럼-편집자 첨기) 청와대 수석이 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따위의 행동은 없었다. 호가호위하는 최태민 앞에 기업이 알아서 기거나, 최태민에게 선을 대 더 큰 이익을 보려고 스스로 갖다 바친 것이 대부분이었다."라고 밝혔다.[15] 가장 먼저 쏜 발터가 유명하지만, 확인사살 때 격발 불량으로 옆에서 총을 빌려 뒤통수를 마지막으로 쐈다.[16] 80도306 판결 참조. 내란죄에 있어서 목적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미필적 인식, 즉 자신의 행위가 범죄발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만 돼도 행위자가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구성요건이 충족된다. 즉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일 때 국헌문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은 없었으나, 대통령의 사망이 국헌문란을 가져올 것을 미필적이나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국헌문란에 대한 목적의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소리다.[17] 열사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약 칭호를 붙인다면 무력을 사용했으므로 열사가 아닌 '의사(義士)'라고 해야 맞다. 열사는 보통 자신의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를테면 전태일 열사)을 의미하는 반면, 의사는 무력을 통해 의거를 한 사람을 뜻하므로 '김재규 의사'가 의미에는 좀 더 부합한다. 김재규 묘비에도 의사(義士)로 적혀 있다.[18] 학계에서 늘 논쟁되어 오는 이야기가 "북한처럼 8월 종파사건 같은 숙청을 박정희라고 안 했겠느냐?"는 것이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곁에 두고, 박근혜와 최태민의 추태는 묵인하면서까지 김재규를 거의 버려진 사람 취급을 했기 때문. 걸핏하면 탄압받던 야당인 민주당까지 안 가더라도, 정부 여당이였던 민주공화당 의원이 박정희를 비판했었다거나 박정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김종필 조차도 고문을 당하고 그랬었으니.. 무엇 보다 자신이 남로당을 입당해서 국가전복을 지휘했다는 사실도 철저히 숨겨서 윤보선을 포함한 경쟁자들을 상당히 많이 탄압하던 박정희였으니까 말이다.[19] 당장,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보자. 자업자득이긴 했으나, 정말 그렇게 비참한 죽음도 없을 것이다.[20] 현재의 대통령경호처장 정도 된다.[21] 사실 민주주의를 의해 투쟁해온 이들과 김재규를 동일시할 수 없다. 애초 김재규는 박정희와 친형제 같은 사이였고 중정부정이라는 대통령 다음 가는 2인자였다. 그러나 10.26 단행 이전 그의 행보를 보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유신정권 역시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박정희는 말년에 20년 절대 권력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고, 그로 인해 유신정권 역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최소한 그는 차지철, 이후락 같은 여타 유신 인사들과는 달리 나라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22] 재밌는 점은 딸인 박근혜도 하야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탄핵당해서 쫓겨났다는 것. 다만 이건 민주화가 이뤄진 대한민국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을 상기하자.[23] 그러나 이렇게 말하던 한홍구조차도 하단의 긍정론에 서술되어 있듯 2013년을 기점으로 김재규에 대한 견해가 바뀌었다.[24] 비슷한 예로 딸인 박근혜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지지율이 역대 최저 지지율인 4%까지 떨어진 것도 모자라,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줄기차게 "퇴진하라, 하야하라" 등의 박근혜 퇴진 운동을 했었지만,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거기다가 계엄령 문건까지 만들어 검토까지 했으니...[25] 애초에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본인이 직접 부산에 내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26]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를 폭행하거나 주한미국대사관 침입을 하는 등, 한미관계가 역사적으로 안 좋다 어쩐다 하지만, 이 시기 박정희 정부는 정부가 나서서 주한미군 철수 같은 반미 시위를 대학생까지 동원하면서 주도했다.[27] 김재규는 이 당시 부마민주항쟁을 보며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28] 다만 노무현, 김대중의 경우 특수 활동비에 대한 사적 유용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두 대통령과 달리 박정희 이후의 나머지 대통령은 다 받았다.[29] 대표적으로 김재규는 그가 교사 시절 제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가까웠는데, 10.26이 터지기 전 이만섭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출처1 [30]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무능하고 유약한 중정부장을 보면 알듯이 폭주하던 중정을 제어한 것을 보면 이런 비난도 무색하다[31] 물론 시간이 배로 걸린다는 전제가 붙는다. 실권을 쥐고 있는 핵심 요직원들과 군부쪽 인사들은 확고한 박정희 지지자이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다는 부분도 걸리긴 하다.[32] 김재규 본인은 소위 설거지론을 얘기하며 5개월간 유신의 잔재를 처리하려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자신이 담당하는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다만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권력을 인수하겠다는 정도를 생각했다고 밝혔다.[33] 암살에 참여한 다른 인물들과 달리 박흥주는 현역 육군 대령 신분이었기 때문에 단심제인 군사재판에 의거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34] 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이렇게 6명은 그냥 살인이라고 소수의견을 냈다.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지 않은 정태원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고초를 겪다가 사표를 써야했다. 특히 양병호 대법관은 서빙고문실로 끌려가 고문까지 받았다. 그 당시 법원행정처장 서일교가 당시 이영섭 대법원장에게 대법원장이 사표를 수리해 주셔야만 양병호가 풀려날 수 있다면서 친필 사표를 내밀었고 결국 사표를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한 시간 정도만에 양병호 판사가 대법원장실에 나타났고 양병호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슴과 와이셔츠를 적시는데도 그것을 모른 채, 정신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풀려있었다고. 특히 양병호는 풀려나서도 고문 후유증으로 3년간 중풍과 실어증에 시달렸다. 헌법학에서는 저항권의 법원성을 부정한 대법원 판결로 소개된다.[35] 1924년생이라는 본인의 최후 진술이 맞다면 5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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