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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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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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시리즈 우승 반지
1994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51번
토니 페레이라
(1985)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1988)


하비 풀리엄
(1991~1992)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9번
제이미 쿼크
(1986~1988)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1989)


바비 무어
(1991)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번호 17번
클레이 파커
(1990)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1991)


리카르도 인그램
(1994)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43번
미첼
(2000)

산토스
(2001)


문현정
(2002~2003)



파일:20010905223809721B4.jpg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쓰리런 홈런을 친 홍세완과 하이파이브 하는 모습
루이스 마누엘 데 로스 산토스 마르티네스
Luis Manuel de los Santos Martinez

생년월일
1966년 12월 29일 (57세)
국적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지
산크리스토발
학력
뉴타운 고등학교
신체
195cm, 102kg
포지션
1루수, 3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44번, KC)
소속팀
캔자스시티 로열스 (1988~1989)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91)
슝디 엘리펀츠 (1994~1996)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
가오핑 레이공[1] (1998~1999)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2] (2000)
해태-KIA 타이거즈 (2001)
디아블로스 로호스 델 멕시코[멕시코] (2002)
개리 사우스쇼어 레일캐츠 (2002)
게레로스 데 오아하카[멕시코] (2002)
다네시 카페 네투노[3] (2003)
응원가
동요 산토끼[4][5]

1. 개요
2. 선수 시절
2.1. MLB 데뷔 전
2.2. MLB 시절
2.5. 대만 대연맹 리그 시절
2.5.1. 가오핑 레이공 시절
2.6.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
2.7. KBO 리그 시절
2.8.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
2.9. 이탈리아 야구리그 시절
3. 은퇴 이후
4.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용병 타자이자 마지막 경기의 4번타자이며, KIA 타이거즈 인수 후 첫 용병 타자. 주포지션은 1루수이다.[6] 또한 해태의 마지막 승리에서 결승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7]


2. 선수 시절[편집]



2.1. MLB 데뷔 전[편집]


드래프트에서 잠재력을 인정받아 전체 44순위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지명되었다.


2.2. MLB 시절[편집]


1988 시즌에 첫 데뷔를 했다. 11게임에 출장하여 22타수 2안타 0.091이라는 별 볼일 없는 성적을 거뒀고, 그 다음해인 1989 시즌에는 28게임에 출장하여 87타수 22안타 0.253의 성적을 거뒀다. 1990 시즌에는 한 경기도 콜업되지 못하고 결국 10만 달러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이적을 한 1991 시즌에는 30타수 5안타 0.167의 성적을 거두고 그 후로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1993 시즌에는 플로리다 말린스 산하 마이너 팀으로 들어갔으나 메이저리그 콜업을 다시는 받지 못하고,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없게 된다.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타율 0.209에 홈런은 기록하지 못했다. 왠지 숀 헤어의 해태시절 성적과 비슷하다.


2.3. 대만 프로야구 리그 시절[편집]



2.3.1. 슝디 엘리펀츠 시절[편집]


더 이상 미국에서 뛰기 힘들다고 판단한 산토스는 대만으로 진출하여 1994 시즌부터 슝디 엘리펀츠에서 뛰게 된다. 대만에서의 포지션은 3루수. 첫 해부터 .358/.389./562라는 타출장 기록을 남기고, 홈런 14개에 타점도 64개를 기록했다. 이런 좋은 활약에 힘입어 팀은 1994 시즌 전기, 후기리그에서 1위를 하며 타이완 시리즈가 열리지 않고 통합우승을 이뤄낸다.[8] 시즌이 마무리 된 후, 베스트 10에도 들게 되며 대만 프로야구 리그 데뷔 첫 해부터 최고의 활약을 하게 된다.

1995 시즌에는 .352/.395/.526의 타출장과 14홈런 72타점을 기록한다. 직전 해와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고, 1996 시즌에는 포텐이 만개하여 .375/.430/.645라는 좋은 타출장을 기록하고 22홈런 78타점을 기록한다.

대만에서의 기록은 홈런보다 2루타가 2배 이상 많은, 평균 2루타 27개 이상을 기록하며 하이 애버리지 중장거리 타자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그 활약을 토대로 산토스는 '대만의 스즈키 이치로'라는 찬사를 들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된다.


2.4. 일본프로야구 시절[편집]



2.4.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하지만 요미우리에서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37/.282/.307의 타출장을 기록했다. 특히 홈런은 하나도 치지 못해서 하위 리그의 한계를 보여주게 되며 결국 요미우리에서 방출된다.


2.5. 대만 대연맹 리그 시절[편집]



2.5.1. 가오핑 레이공 시절[편집]


급여 문제로 자신이 활약했던 대만 프로야구 리그슝디 엘리펀츠가 아닌 경쟁리그인 대연맹 리그의 가오핑 레이공을 선택하며 슝디 시절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998 시즌에는 .358/.395/.615의 타출장을 기록했고 143안타 27홈런 96타점을 기록했다. 이 성적으로 타점왕과 골든 글러브를 획득하게 된다.

1999 시즌에는 .317/.368/.526의 타출장에 11홈런 58타점을 기록한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갈수록 수비가 막장이 되가면서 더 이상 3루수를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2.6.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편집]


2000년에는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로 이적을 한다. 당시 리그에서 52년 째 이어지던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깨고 36경기 연속 안타를 새롭게 갱신한다.[9]


2.7. KBO 리그 시절[편집]



2.7.1. 해태-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멕시코 리그에서의 활약과 망하기 직전의 해태의 상황과 맞물려, 당시 35세의 노장이었던 산토스는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연봉 15만 달러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원래 3루수로 활용을 하려다가 수비가 안되고 주루도 상당히 느리던 당시 해태의 4번타자 겸 지명타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직전해에 개막장이었던 타선의 기둥이 되어 해태의 중위권 수성에 앞장섰다. 똑같이 타선의 기둥이었던 장성호가 초반에 부진함에 따라 그의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10] 6월 중순까지만 해도 타율 .376 13홈런 45타점을 기록하며 도루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 상위권에 랭크하며 리그 최고의 타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타율이 2할까지 떨어지면서[11] 김성한 감독은 산토스를 방출하고 대체 용병으로 다니엘 리오스를 데려오려고 계획하게 된다.

리오스를 영입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산토스는 김성한 감독을 찾아가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눈물을 흘렸고, 마침 리오스가 방광염에 걸려서 입국을 거부하게 되자[12] 구단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산토스를 계속 활용하게 되었다. 팀이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로 바뀌고 난 뒤 9월에는 다시 3할이 넘는 타율과 7개의 홈런을 추가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13][14] 결국 시즌 초반에 비하면 스탯이 많이 떨어졌지만 결국 타출장 .310/.365/.510 26홈런 107타점 wRC+ 121.2 WAR 2.38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팻 딘 타자버전 하지만 당시 36세라는 선수 치고 많았던 나이와 시즌 중반 눈에 띄게 체력 저하를 보였던 것, 그리고 사실상 지명타자밖에 볼 수 없었던 수비 포지션 문제 등이 겹쳐 시즌 후 재계약에는 실패했다. 산토스를 대체할 선수로는 좌투좌타 외야수였던 워렌 뉴선이 영입되었다.[15]

그리고 그의 성적이 체감상 굉장히 낮아보였는데, 다름이 아니라 2001년도는 타이론 우즈, 펠릭스 호세, 제이 데이비스, 틸슨 브리또[16], 매니 마르티네스 등 쟁쟁한 타자들이 대부분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면서 경쟁했었던 것. 그보다 못한 타자는 톰 퀸란과 LG에서 조기 퇴출당한 로마이어가 전부였다. 이게 준수한 클래식 스텟을 남겼음에도 재계약을 할 수 없었던 것.

산토스의 단점은 위의 문단에서 기록했듯이 수비를 볼 수 없어서 지명타자로 활용해야 했고 주루 능력이 상당히 안좋다는 것과 영입 당시 노장이었던 나이 때문에 체력이 받쳐주지 못한 점이다. 반대로 장점을 뽑아보자면 밀고 당기고 타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구 분포도가 그라운드 어느 쪽이든 타구가 고르게 분포되었다는 것. 게다가 말많고 탈많은 다른 해태 용병과 달리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아주 성실한 선수였다. 또한 외국인 선수로는 드믈게 안경을 착용한 선수로 이로 인해 지적인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많았고 매너도 뛰어나서 신사답다는 평가도 있었고, 노장의 나이에 수비는 안되고 주루도 느렸지만 최선을 다하고 끈기 넘치는 플레이에 괜찮은 타격을 보여주며 많은 타이거즈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타이거즈팬들이 붙여준 별명은 검은 호랑이[17]산토끼[18]. 많은 팬들은 응원가도 동요 산토끼를 개사해서 불러주며 산토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비록 노장의 나이에 수비 포지션의 문제와 여름 이후의 하락세까지 겹쳐서 재계약엔 실패했지만, 많은 타이거즈팬들의 기억에는 역대 타자 용병 중에 괜찮았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게다가 기아에서 방출된 후 고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 돌아가서 쉬고 있는 와중에 몇 년 후 김성한 감독과 스카우트가 용병을 알아보려고 도미니카로 찾아오자, 기아 시절에 시즌 도중 방출을 할 것이라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성대하게 대접하며 용병감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캡션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 감독이 밝힌 바로는[19] 발이 원체 느리고[20] 나이도 많았지만 성실하고 순해서 도미니카 공화국 전담 스카우터로 채용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시즌 이후로도 도움을 많이 줬었다.


2.8.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편집]


기아에서 재계약을 포기하게 되자 결국 다시 멕시코 야구 리그로 돌아가서 말년 야구 생활을 하게 된다.


2.9. 이탈리아 야구리그 시절[편집]


2003 시즌에는 다네시 카페 네투노라는 이탈리아 리그에 속해있는 팀에 들어가서 당시 한국나이 38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하며 리그 폭격을 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3. 은퇴 이후[편집]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의 언급에 따르면 퇴출 이후에도 기아타이거즈의 스카우트로 일했었다고 한다.

2006 시즌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코치를 짧게 경험했다. 2009 시즌에는 현역 시절 추억이 많았던 멕시코 야구 리그의 올메카스 데 타바스코에서 수석코치 역할을 했다. 2010 시즌부터 2012 시즌까지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산하 구단인 DSL 브루어스에서 감독을 하고, 2013 시즌부터는 감독이 아닌 코치로서 활약 중이다.

2015년에는 중신 브라더스의 레전드로 초대되어 대만에서 친선 게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88
KC
11
.091
2
1
1
0
1
1
1
4
0
4
.231
.227
.458
1989
28
.253
22
3
1
0
6
6
0
5
0
14
.293
.310
.6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1
DET
16
.167
5
3
2
0
0
1
0
2
0
4
.219
.233
.45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01
해태 / KIA
130
.310
150
19
0
26
107
74
1
46
1
66
.365
.510
.875
KBO 통산
(1시즌)
130
.310
150
19
0
26
107
74
1
46
1
66
.365
.510
.875
[1]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존재했던 대만 대연맹 리그의 팀이다. 대만 프로야구 리그와는 다른 리그이다.[2] 메이저리그 산하 트리플A에 속해있으면서 독립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멕시코 태평양 리그와 달리 이 리그의 이름은 멕시코 야구 리그 Liga Mexicana de Béisbol(Mexican League)이다.[멕시코] A B 멕시코 야구리그에 속한 팀이다.[3] 이탈리아 야구리그에 속한 팀이다.[4] KBO 등록명이 산토스였는데, 어감이 산토끼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팬들이 붙인 별칭이다. 덕분에 응원가도 동요 산토끼를 사용했다.[5] 산토스 토스야 어디를 가느냐 홈런 홈런 치면서 어디를 가느냐.[6] 하지만 대만에서는 3루수로 활약했고, 기아에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했다.[7] 해태의 마지막 승리는 2001년 7월 25일 사직 롯데전으로 당시 2:0으로 최상덕이 완봉승을 거두었는데, 팽팽하던 0대0의 균형을 깨는 솔로홈런을 터뜨린 타자가 산토스이다.[8] KBO 리그로 비유하자면 삼성 라이온즈1985년 통합우승과 똑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9] 이 기록은 2012년에 결국 다른 선수에 의해 다시 깨지게 된다.[10] 신동주,이동수의 가세와 홍세완, 김상훈의 성장으로 해태의 타선은 리그 상위권 아니지만 충분히 투수를 위협할 만한 타선으로 변모하였다.[11] 공교롭게도 산토스의 부인이 따로 떨어져 살다가 같이 살게 되니 성적이 곤두박질쳤다.[12] 결국 리오스는 바로 다음 02시즌에 영입해 기아의 새로운 외국인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13] 이종범(시즌 중반 합류)-김종국-장성호-산토스로 이어지는 상위타선은 당시 강타선으로 유명한 삼성, 현대, 두산에 결코 꿇리지 않았으며, 당시 이종범-김종국-장성호는 모두 전성기였다.[14] 사실 당시 나이를 생각해보면 여름에 약한건 그리 이상한게 아니긴 했다. 그리고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름에도 잘했던 외국인 타자는 약쟁이로 판명났다.[15] 하지만 산토스와 재계약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로 데려온 뉴선은 정작 산토스보다 2살이나 많았다는 게 함정이다.(...) 결국 기대와는 달리 2002년 시즌 초부터 삼진만 적립해대다가 5월 말 웨이버 공시로 퇴출됐다.[16] 유격수임에도 불구하고 장성호와 비슷한 생산력을 보였다.[17]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던 펠릭스 호세의 별명이 검은 갈매기였는데, 그에 상응하는 별명으로 타이거즈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18] 이유는 단지 이름이 산토끼라는 어감과 비슷했기 때문.[19] 원래는 투수였던 루이스 안두하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산토스로 착각하고 말했다.[20] 어느정도였냐면 우익수 앞 안타성 타구를 치고도 아웃당했다고 한다. 김성한은 산토스에 비하면 황대인은 도루왕이라며 그의 느린 주루능력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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