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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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점 관련 논란
2. 역사 사실 관련 오류
3. 분량 관련 누락
4. 첨부된 자료 오류


1. 관점 관련 논란[편집]


단순히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차원에서라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나, 자칫하면 독재국가의 독재와 인권 탄압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는 주장이다. 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중국 편에서도 범한 문제점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독재자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 내놓은 주장을 엄연히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그것도 저연령층이 읽는 학습만화인 먼나라 이웃나라에 싣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국가 아닌 나라치고 국가를 이끄는 지도층들이 민주주의 국가보다 더 낫다고 보기 쉬운 면도 없다. 가령 독재 국가에서는 도둑정치나 폭압적인 정치적 탄압이 있는 경우가 잦으며, 민주주의의 대척점이 독재이며 독재란 것이 필연적으로 썩기 마련인데[1] 이런데도 민주주의가 정치적 선진국ㆍ후진국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2]

  • 그렇다고 소련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이 공정한가 하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소련의 몰락 과정을 설명하는 파트는 과거 "공산주의는 노동자들을 게으르게 만들어서 발전을 하지 못해 멸망했다"는 수준인데 이는 과거 송병락과 공저한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에서의 공산주의 비판보다도 퇴보한 수준이다. 소련의 경제 붕괴에는 산업구조의 기형화와 수요 예측을 실패한 관료제적 무능함과 냉전으로 인해 서구와의 교류가 단절되면서, 상대적으로 열화된 기술력과 독자 표준을 쓰는 문제 등이 결합된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 중국 편에서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느껴질 정도다.
또한 "러시아에는 차르가 필요하다"는 식의 서술도 공정성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이는 과거 제국주의, 냉전 진영논리가 강했던 시절 러시아를 아시아 유목민적 문명이라고 비하하는 뉘앙스가 강했기 때문이다.[3] 그리고 심한 경우 독소전쟁에서 독일의 소련 공격을 유럽 문명 수호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까지 나올 정도였다. 상당히 유럽 중심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냉전 논리 시각이라, 후대에는 국제정치학이 발전하면서 사장되고 있다.


2. 역사 사실 관련 오류[편집]


엄연히 동로마 제국에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존재했고, 정교회의 수장 역할을 했다. 무려 30년도 더 된 먼나라 이웃나라 초판에서 범한 오류를 여전히 범하고 있다. 이를 교과서에서도 황제교황주의라 하여 마치 제정일치처럼 황제가 교황까지 겸했다는 식으로 묘사하는데, 실제로는 동로마 황제가 종교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황제가 총대주교 임명에 강한 영향력 발휘가 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이지, 황제가 종교의 수장이어서가 아니었다. 황제교황주의는 현재 학계에서는 본격적인 사료 해석을 통해 완전히 부정되었다.

  • 교황이 세속 왕권을 누르고 모든 왕 위에 군림했으며, 왕권이 강력해지면서 교황의 권력이 도전받았다.
사실과는 완전하게 정반대인 거짓이다. 실제로는 왕권이 강력한 상황에서 교권이 점점 강성해져 카노사의 굴욕을 계기로 왕권에 도전, 이후 왕권보다 더 높은 교권을 이루기 시작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의 교황은 세속의 왕권을 누를 만큼 강하지도 못했으며 카노사의 굴욕을 겪은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교황을 3명이나 갈아치울 만큼 강력한 군주였다.

  • 슬라브의 어원이 노예(slave)에서 왔다는 학설을 소개하는데,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으로 이주한 스클라베니인들을 비롯, 많은 수의 슬라브인들이 유럽 각지에 노예로 팔리면서 슬라브, 스클라베니라는 단어에서 노예(slave)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소위 '노르만 학설' 연구가들과 러시아 역사가들이 키예프 공국의 건국 주체를 놓고 격렬하게 논쟁하고 러시아 역사가들이 '슬라브 중심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이는 단편적인 면만 서술한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노르만 건국설'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노르만 중심설'과 '슬라브 중심설'로 나뉘어 논쟁했다. 양파는 키예프 공국을 노르만과 슬라브 양대 민족이 함께 세운 것으로 파악하되, 건국의 중심이 어떤 민족이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으며 슬라브 중심설을 지지한 학자들도 노르만인들을 키예프 공국의 공동 건국 주체로 인정했다.

  • 블라디미르 대공과 안나 공주의 결혼
바실리오스 2세가 황실 법도에 따라 외국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황제의 적녀인 포르피로게니타는 외국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고, 실제로 안나 공주가 그 금기를 깬 첫번째 인물이긴 하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황실 방계 구성원들을 유럽 각국의 국왕이나 유력가들과 결혼시킨 바 있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황제의 적자를 이교도에게 시집보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야로슬라프 대공이 자기 형제인 스뱌토폴크, 보리스, 글렙을 죽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리스와 글렙을 죽인 것은 스뱌토폴크이다. 그리고 스뱌토폴크만 야로슬라프의 이복형인 것처럼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보리스와 글렙도 이복 형제이다. 각각 스뱌토폴크는 폴란드계 수녀, 보리스와 글렙은 동로마 제국 공주 안나, 야로슬라프는 폴로츠크 공녀의 소생이다. 또한 보리스와 글렙을 야로슬라프의 형으로 서술했는데, 야로슬라프는 978년생으로 추정하고 최대한 늦게 잡아도 983년생이지만, 보리스와 글렙은 아무리 빨리 태어나도 988년생으로서 야로슬라프가 보리스, 글렙 형제보다 나이가 많다.

  • 야로슬라프 현공 이후, 후계 문제가 발생, 150년 간 내전이 지속되었다.
실제 역사의 야로슬라프 대공은 자신의 후계자로 이쟈슬라프를 지명했고, 그는 권력을 이양받고 동생들과 협치를 해내가며 정국을 잘 이끌어 나갔다. 형제 간의 우애가 깨진 뒤부터 책에서 설명하는 내전이 터졌으며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를 비롯한 유능한 군주들이 중간 중간 등장해 루스 공국들을 잘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루스 공국들의 독립과 분열을 내전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단편적인 해석이다.

  • 키예프 루스의 중심은 수즈달 - 블라디미르 지방으로 옮겨갔다.
수즈달 - 블라디미르가 아니라 블라디미르 - 수즈달. 한국어 번역이든 영어 번역이든 모두 블라디미르 - 수즈달이라고 칭하며 본토인 러시아에서도 블라디미르 - 수즈달이라고 한다. 수즈달 - 블라디미르 라고 서술하고 나서 그 다음 페이지에 블라디미르 - 수즈달이라고 서술해놔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우구데이는 칭기즈칸의 3남이다. 게다가 유목민 말자 상속제를 오독해서 칭기즈칸 사후에 막내인 툴루이가 계승하게 되었으며 톨루이가 대칸의 지위를 사양하고 쿠릴타이가 우구데이를 대칸으로 추대하여 톨루이가 형에게 양위했다고 서술해 놨다. 실제로는 칭기즈칸이 우구데이를 대칸으로 삼겠다고 공표했으며 톨루이는 칭기즈칸 사후에 우구데이가 귀환할 때까지 임시로 대칸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쿠릴타이에서는 우구데이보다 톨루이에 대한 지지가 더 많았다.

추위가 아니라 라스푸티차라는, 봄이 오면 얼었던 땅이 녹아 진흙탕으로 변하는 현상 때문에[4] 진군에 곤란을 겪어[5] 회군한 것이다. 추위 때문이었다면 노브고로드 못지 않게 추운 나머지 러시아 영토는 어떻게 점령했을까? 그리고 애당초 몽골 고원은 겨울에는 우랄 산맥 서쪽의 러시아 지역들보다 훨씬 추운 동네이다.[6] 즉 추워서 정복하지 못한 게 아닌, 오히려 따뜻해서 정복하지 못한 것. 나폴레옹 전쟁이나 독소전쟁이 추위 때문에 점령하지 못한 거라 대충 상상한 듯한데, 이론적으로 봐도 몽골시베리아러시아 서부보다 훨씬 춥기 때문에 말이 안된다.

러시아의 농노제는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형성, 강화되어 갔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 제한도 이미 키예프 공국 시절부터 가하던 것이었다.

- 한국에서 이반 그로즈니를 뇌제로 번역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일본에서 번역한 단어이다.
- 오프리치니나를 치외법권 지대로 표현했는데, 국가 원수인 황제의 통치 지역을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비유이다.
- 노브고로드 학살을 계기로 그로즈니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서술했는데, 이는 심각한 중대 오류로서 그로즈니 칭호는 그의 폭정과 잔혹성 때문이 아니라 이반 4세가 카잔 칸국을 비롯한 러시아의 적들을 분쇄하고 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하는데에 고무된 러시아의 인민들이 바친 칭호이다.
- 그로즈니의 선위 파동을 변덕스러움에 기반한 행위로 평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태종이나 영조의 선위 파동처럼 신하들을 길들이고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기 위한 의도적인 '퍼포먼스'였다.

  • 니콘 총대주교의 종교 개혁
- 개혁 이전의 성찬예배 시간이 평균 7시간이나 되었다며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니콘의 개혁 이후로도 예배 시간이 무지 길었다. 니콜라이 2세의 통치 시기까지도 이런 장시간 예배의 전통이 이어져서 외국인들이 보고 놀랐을 정도였다.
- 니콘이 차르의 뜻도 묻지 않고 종교 개혁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알렉세이 1세가 니콘의 종교 개혁에 대해 지지를 표했다.
- 총대주교를 마치 교황처럼 묘사하여 황제의 위에서 개혁을 추진한 것처럼 설명하는데, 실제 역사의 니콘은 알렉세이 1세와 대립하다가 결국 차르의 명으로 실각했다.

실제로는 스타노보이 산맥(외흥안령)이었다. 아무르 강으로 정해진 것은 아이훈 조약이다. 이후 얼마 안가 베이징 조약으로 우수리강까지 국경선이 확장된다.

  • 표트르 대제는 물에 빠진 병사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대표적인 낭설. 실제로는 신장 질환으로 고생하다 죽었다.

  • 농노제 오류
- 농노노예라고 설명한다. 아니, 심지어 185페이지에서 "농노는 노예보다도 권리가 없다"면서 "농노는 노예보다 못한 처지에 있다"고 과장 설명까지 보태져있다. 농노는 노예와는 전혀 다르며, 노예보다 조금은 나은 처지에 놓인 신분이다. 주인의 소유물도 아니며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받는다. 농노를 물건처럼 매매한 것은 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같은 동유럽 문화권에서 이뤄지던 특수한 일이다. 서유럽에서는 농노 시장이나 매매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 지속적으로 농노제를 노예제와 동일시한다. 교황이 노예제를 비판하는 모습과 함께 '서유럽에서도 농노제가 존재했으나, 중세기 이후 사라지기 시작해~'라는 설명을 덧붙이는데, 농노제는 고대 말기부터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해 중세에 최고 전성기를 누렸는데, 중세 이후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다.
- 오스트리아의 농노제 폐지 시기를 1781년으로 설명하는데, 요제프 2세의 농노 해방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패하고 실제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농노제는 1848 혁명 이후에 폐지되었다.
- "농노 해방 이후, 농민들은 농촌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틀린 설명이다. 농민들은 국가에 속박되어 있긴 하지만, 생산 수단인 자기 토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산계급이 아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도 농민과 프롤레타리아를 구분했다.

포르투갈을 치는 척하며 뒤통수를 친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 점령 이후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와 왕세자 페르난도 7세의 권력 다툼에 개입하여 이들을 모두 쫓아내고 자신의 형을 왕위에 앉힌 것이었다. 작중에는 "스페인이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다"고 나와 있는데, 스페인은 이미 프랑스 혁명전쟁 초기에 잠깐 대프랑스 동맹에 몸담았다 이탈한 이후부터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나폴레옹 시기까지 쭉 프랑스에 협력적인 우호국이었고,[7] 포르투갈 침공 건도 포르투갈을 함께 공격해 갈라먹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 185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대부분이 부유한 귀족 자제.
실제로는 1850 ~ 60년대부터 소위 라즈노친지라고 부르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등장해서 귀족 지식인 중심이던 19세기 전기와의 대비를 이뤘다. 설명할 때에 부유한 귀족 자제에 모스크바 대학 출신 지식인이라고 한정짓기 보다는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왜 모스크바 대학 출신이라는 말을 붙였는지도 의문. 당대 러시아 최고의 대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러시아 제2의 도시이지만, 100년 전부터 페테르부르크에 정치, 경제, 문화 등 주요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내준 모스크바가 어떻게 러시아 전체 지식인의 산실이 되었는지 의문이다.[8]

- 젬스트보가 전국에 설치되었다고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유럽 러시아 50개 주 중에서 34개 주에만 설치되었다. 핀란드, 폴란드는 별도의 의회가 기능하고 젬스트보가 설치된 일부 지역을 제외한 시베리아, 카프카즈, 중앙아시아 전체 지역의 오블라스트에는 젬스트보를 설치하지 않았다.
- 젬스트보가 마을에도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도시, 농촌의 자치 기구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도시는 도시 두마, 농촌은 미르와 볼로스트가 자치를 하고 젬스트보는 주와 군 같은 행정 단위별 자치 의회로 기능했다. 게다가 미르와 볼로스트는 젬스트보와는 별도의 기관으로서 정부의 통제를 받았기에 젬스트보와 볼로스트의 연결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젬스트보와 볼로스트를 연결시켜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한 것은 2월 혁명이 지나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였다.
- 알렉산드르 2세가 보수와 진보 양대 세력의 위협을 받은 것처럼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완전하고 귀족들에게 유리한 농노 해방령, 1866년부터 황제가 보수화한 것에 불만을 품은 인민주의자들이 황제 암살을 시도했다.
- 그리고 이 책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를 대단히 고평가하고 개혁가 군주 프레임을 씌우는데, 그의 개혁이 '대개혁'이란 이름이 붙을 만큼 러시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지만, 명암이 매우 뚜렷한 것이었다. 개혁의 암적인 면은 농노 해방령에서만 설명하고 그의 보수화와 개혁의 문제점은 설명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를 못하게 만들 수 있다.
-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세력을 공화주의 테러리스트라고 서술했는데, 공화주의가 아니라 인민주의자들이었다.

- 무정부주의를 정부도 "신도 부정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 테러를 사용해도 정당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인민을 억압하는 기존의 정부를 부정하는 세력부터 시작해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부정하는 세력까지 무정부주의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마냥 이렇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와 테러리즘은 약간 떨어뜨려놔야 할 성질의 것으로서 무정부주의를 폭력과 테러를 사용해도 정당하다고 보기보다는 당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이 테러리즘을 흡수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을 독재와 선동, 폭력이 합쳐진 것으로 파악하고 벨린스키, 게르첸, 바쿠닌의 사상도 각각 독재와 선동, 폭력이라고 표현해 놨다.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이들에 대한 선입견과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 인민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한데 합친 것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념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심각한 중대 오류이다.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기반하며 만약 레닌 본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간 그 자리에서 폭언을 듣거나 결투 신청을 받았을 것이다.
- 브나로드 운동에 실패한 인민주의 운동가가, 자신들의 희망은 도시 노동자라고 한탄한다. 물론, 인민주의 계열 노조와 노동자 조직들이 매우 강력하긴 했지만,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인 농촌을 잊지 못해서 여러 차례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으며, 이러한 인민주의자들의 노력과 1900년대 농민들의 혁명화 덕분에 인민주의자들은 1905년 혁명 이후부터 농촌에서 커다란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 두마에 대한 오해와 거짓
- 1차 두마가 대부분 친황제, 자유주의 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왜곡했다. 그러나 총 497석인 1차 두마의 의석은 러시아 입헌 민주당(카데트) 184석, 농민의 지지를 받는 트루도비키를 위시한 좌파 세력이 124석, 10월당 38석, 소수민족 32석, 무소속 112석으로 좌파 세력이 전체의 약 20% 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카데트는 친황제 세력이라 하기 뭣하며 좌파 세력의 눈치를 봐서 일부러라도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이들은 자유주의 온건 우파, 온건 좌파들의 연합이었다.
- 10월당을 전제 군주제를 지지하고 반혁명 세력으로 서술했다. 사실 10월당은 니콜라이 2세의 10월 테제를 지지한다는 뜻을 당명에 명시한 당이다. 실질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10월 테제의 내용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입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에 명목상으로라도 10월당은 절대로 전제정을 지지한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10월당은 내부적으로 대자본가와 우파 지식인, 귀족 지주 등, 다양한 계파를 포함하고 있고 아무리 보수적으로 봐도 중도 우파이지, 극우라고 볼 수가 없다. 실제 극우 정당은 '군주당'이며 사회적으로는 극우 세력인 귀족 연합이 있다.
- 1차 두마가 거수기였다고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제1당을 차지한 카데트부터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개혁을 요구해서 정부와 마찰을 빚었으며 의원들은 두마를 거수기로 만드려는 정부의 통제에 저항하다 해산되었다.
- 3차 두마 역시 거수기로 표현했다. 물론 우파가 다수를 이뤘지만, 3차 두마는 다양한 개혁안을 준비, 통과시키고 스톨리핀 개혁과 산업 분야에 대한 정책들을 집행해 거수기로 표현하는 것은 3차 두마에 대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 1905년 혁명 이후에도 공포 전제정치가 강화되었다고 한다. 물론, 스톨리핀의 넥타이에 매달린 혁명가만 수천 명이 넘지만,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던 황권에 대해 견제 장치가 생긴 것, 아무런 권리도 받지 못하던 러시아의 국민들이 집회, 결사, 시위의 권리 등, 나름대로 다양한 권리를 부여받고 행사한 것, 정당 정치가 시작하고 노동자들이 일부나마 노동 3권을 행사한 것을 생각하면 전제 정치가 강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신설해서 반체제 군인들을 즉결심판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 당시나 현재나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절차상으로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제정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2세 시기부터 군사재판을 이용해 반체제 인사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편법을 쓰고 있어서 딱히 이를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가장 결정적으로, 이 시기의 군사재판은 불법이 아니라, 엄연히 당시 제정 러시아의 헌법인 국가기본법 87조에 기초해서 신설한 것이다. 87조는 두마가 해산된 상태에서 황제와 내각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법으로 정부가 두마의 견제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악용되었지만, 어쨋거나 합법은 합법이었다.

  • 전격전에 대한 왜곡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독일은 전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전격전 문서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전격전이란 개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2차대전의 낫질 작전을 전격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슐리펜 계획까지 전격전이라고 하는 것은 도를 넘은 것이다.

- "알렉세이가 3살 때, 그가 혈우병 환자임이 밝혀졌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밝혀진 사실이다. 탯줄을 잘랐는데, 아무리 지혈을 하려고 해도 피가 멈추지 않았던 것.
-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알렉세이의 넷째 누나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공주가 소개한 것처럼 서술했다.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의 나이 차이는 3살로, 만약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3살 때 인지했다면 당시 아나스타샤의 나이는 6살이다. 어떻게 궁전 안에서만 사는 6살짜리 공주가, 도시에서 용하다고 소문한 괴승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애초에 라스푸틴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에게 소개한 사람은, 황후의 친구인 안나 비루보바이다.

2월 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의 수장이 케렌스키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첫 수상은 르보프 공이었으며 케렌스키는 임시정부가 위기를 맞이한 여름 이후에 합류했다. 처음 케렌스키를 등장시킬 때는 케렌스키가 임시정부의 수장인 것처럼 묘사하다가 2월 혁명 파트에서 르보프 공이 임시정부의 의장이라 설명해 독자들의 혼란을 키우는 것은 덤. 아무리 케렌스키가 임시정부의 수장으로 유명해도, 이것은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라 하기 어렵다.

  • 영구혁명론에 대한 왜곡
지속적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자본주의를 건너뛰고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서 실제 레닌에게 이따위 이야기를 했다간 그 자리에서 폭언을 들었을 것이다. 러시아공산주의자들은 인민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자본주의는 필연이며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 혁명 이전부터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당대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거쳤다고 생각했으며, 레닌은 1899년애 집필한 자신의 저서에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서술했다. 대체 저자가 영구혁명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실제 영구혁명론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 이론으로서, 멘셰비키들이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레닌은 4월 테제에서 "즉각 사회주의 혁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 혁명 중에 시위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고 서술했으나, 실제로는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를 개사한 '노동자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노동자 마르세예즈'는 1875년에 러시아 인민주의의 대부인 표트르 라브로프가 개사한 것으로서 인터내셔널가만큼이나 사랑받은 곡이다.

  • 제헌의회의 결과
제헌의회에서 볼셰비키가 패배하자, 트로츠키가 무조건 폭력적이고 과격한 게 인민에게 잘 먹힌다며 제헌 의회에서 사회혁명당이 승리한 요인을 과격성과 폭력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사회혁명당은 오래 전부터 농민들을 대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농민들에 대해서는 볼셰비키들보다 지지도가 더 높았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사회혁명당 보다 더 농민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보수적인 농민들은 전통의 지지 세력인 사회혁명당에 표를 던졌다.

브레스트 -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인구 2억 4,000만 중에 6,000만이 이탈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대전 직전 러시아 인구는 1억 6,500만이었다.

  • 가위 위기에 대한 오해
레프 트로츠키가 제시한 가위 위기는, 공산품의 가격 상승과 농산물의 가격 하락으로 촉발되는 것이다. 소비에트는 이 때문에 도시에 곡물이 부족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그러나 서술된 것처럼 소련의 공산품이 저질에 가격만 높아서 이런 문제가 생긴 것만은 아니다. 공산품의 부족도 영향을 미쳤다. 농민들이 농산물을 처분하고 받은 돈으로 공산품을 사려고 해도 시장에 살만한 공산품이 들어오질 않았다.

  • 농업 집단화에 대한 왜곡
농업 집단화로 인해 쿨라크(부농) 1,000만 명이 처형당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쿨라크란 명목으로 처형된 사람의 수는 수만명이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 쿨라크의 수는 약 180만 명이다. 그를 제외한 다수의 쿨라크들은 모두 콜호즈나 소브호즈에 분산되었다. 실제로 1,000만 명의 농민을 희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농업 집단화 이후에 벌어진 기근이다.

  • 1931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했던 대표적인 연설 중 하나인 "서방이 50년 100년 걸린 것을 10년 안에 해야한다. 안그러면 서방이 우리를 압살할 것"이라는 연설을 10월 혁명 당시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하고 있다.

모스크바 전투가 독소전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 소련은 1941년 겨울의 반격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1942년에는 청색 작전에 스탈린그라드까지 밀렸다. 모스크바 전투는 소련 정권의 존망을 가른 전투이긴 했으나, 절대로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없다.

- 작가의 지리 정보 조사에 의문을 품게 하는 부분.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중하류에 위치한 도시로서, 단 한 번도 우크라이나에 소속된 적이 없는 러시아의 도시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중심 도시인 루한시크에서 300km 이상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우크라이나의 도시라고 서술했는지 의문. 키예프와 순간 헷갈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말이 안 되는 건 매한가지이다.
- 또한 스탈린그라드가 유럽 최대의 유전 지대에 있다고 서술했는데, 당대 유럽 최대의 유전 지대는 바쿠를 중심으로 하는 아제르바이잔이었다.

  • 227호 명령의 시점 문제
절대 사수, 퇴각 금지로 유명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227호 명령이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8월 21일) 이후에 내려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기 24일 전(1942년 7월 28일)에 포고되었다.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나 논란이 많다. 최소한 여기서 서술된대로 일본군의 사상자가 5천 명에 달할 정도의 대승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자세한 것은 청산리 전투 참고.

  • 할힌골 전투 당시 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이 할하 강이고, 승전해 국경을 할하 강으로 정했다.
이는 일본이 주장한 것이고, 몽골(소련)은 할하 강에서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노몬한 언덕을 국경선으로 주장했으며 승전해 노몬한 언덕으로 국경선을 정했다. 자세한 것은 할힌골 전투 참고

우주 개발은미국의 자존심을 짓밟고 소련 인민들의 자존감을 크게 드높였기에, 군부에서 반발은 해도 권좌를 놓을 문제는 아니었다. 흐루쇼프의 실각은 책에서 지적하는대로 쿠바 미사일 위기와 군비 감축에 따른 군부의 반발도 영향을 미쳤지만, 농업 정책 실패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리고 일관성 없는 정책에 따른 당, 관료, 인민의 피로감 누적, 민주화의 후퇴에 대한 지식인들의 불만, 고위층과 관료의 특권을 제한하는 개혁에 대한 반발도 영향을 미쳤다.

  • 소비에트의 생필품 부족 왜곡
소비에트 시기에 식료품이 부족하고 상점이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밀가루를 비롯해 식료품은 낮은 가격에 풍족하게 공급했고, 부족한 것은 고기나 달걀 같은 부식이었다. 그나마 그 부족하다는 고기나 달걀류의 부식도 동시대 남유럽 수준으로 어느정도 충분히 공급되고 있었다는 것이 소련 시기를 경험한 러시아인들의 증언이므로 이원복 교수가 냉전 말기 시절의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인데, 과거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무렵 한소수교로 한국인의 소련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던 시절 <만화로 보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집필을 위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답사를 다녀오면서, 무너지기 직전의 소련을 겪어보고 생긴 편견이 그 이전의 소련에 대해서까지 왜곡된 내용을 만들어냈다고 의심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그 시기를 경험했던 러시아인들이 부족하다고 증언했던 열대 과일 등은 냉장선의 보급 이후 80년대는 돼서야 북반구에 충분히 공급되므로 이상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생필품의 부족은 소련 해체 이후 소련 정부가 책임지고 운용했던 사회 인프라망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위축되었던 90년대 이야기다. 실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계획 경제 체제상,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운 소비재들이었다.

  • 소련 해체 당시 소속 공화국 15개 중 러시아를 뺀 14개는 모두 독립을 원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조지아, 몰도바의 6개국만 독립을 원했고 나머지 9개국은 소련 존속에 찬성하는 쪽이었다.[9] 소련의 중심 역할이였던 러시아도 소련 연방 중 가장 늦게 탈퇴한 나라가 아니다. 의외로 가장 늦게 탈퇴한 나라는 카자흐스탄. 이런데도 14개국이 독립한 이유는 보리스 옐친의 권력욕 때문으로, 자기 지지율이 낮을 것 같은 지역은 원하지 않아도 아예 다른 나라로 독립시켰다.


3. 분량 관련 누락[편집]


  • 쿠만족에 대한 언급이 없다. 후에 등장하는 몽골에 비하면 존재감이 적을지 몰라도, 이들은 거의 100년 가까이 러시아를 침략하고 괴롭히며 러시아 공국들의 국력을 깎아먹은 민족들로 러시아 역사에서 비중이 결코 적지 않다.

  • 스트렐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스트렐치는 이반 4세 시기 창설되어 표트르 대제 시기에 폐지되기까지 러시아군의 중추였으며, 표트르 대제의 개혁 당시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세력이므로 상당히 중요함에도 전혀 설명이 없다. 정작 같은 시기 창설되어 불과 몇 년만 존재했던 오프리치니크는 꽤 상세히 언급되었다.

  • 폴란드의 쇠락을 언급하면서 대홍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홍수는 폴란드가 동유럽의 강국에서 환자로 전락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 러시아-폴란드 관계를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저 "서쪽에서 프로이센이 대두하면서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서술했는데, 애당초 폴란드가 강하면 주변이 강대국으로 들어찰 여지부터 없었을 것이며, 프로이센과 폴란드와 같이 동유럽을 양분했던 스웨덴의 대두부터가 대홍수로 인한 폴란드의 몰락에 큰 반사이익을 본 것이었다.


4. 첨부된 자료 오류[편집]


  • 근현대편 182페이지의 레닌그라드 전투 당시 기근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 굶주리고 병든 채 누워있는 한 성인 여성을 굶주린 어린이라고 설명해놓았다. 극도의 저체중과 질병으로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므로 신체가 왜소해지고 허약해진 것은 맞지만, 신장이나 유방 등의 신체적 특징을 봤을 때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 여성이다.

  • 근현대편 238페이지에서 1993년 10월 3일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모스크바에 병력을 투입해 의사당을 포격했다고 하는 장면에서 2010년대에도 상용배치가 되지 않은 4세대 전차 T-14 아르마타가 사진 설명으로 선명하게 나와있다. 이 당시 사용된 전차는 당연히 아르마타보다 훨씬 구식이었다.

  • 이 부분은 좀 애매하지만 근현대편 195페이지의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위해, 연합국 수뇌부가 독일의 무장을 금지시키려 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신식 레오파르트 2 전차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물론 레오파드가 독일 전차인 것은 맞지만 아직 나치독일이 무너지기 전의 시점에서도 그런 자료를 첨부한 것은 많이 어색하며, 당장 나치독일의 국방군에게도 티거판터를 비롯해 뛰어난 전차들이 많았음에도 굳이 그런 자료를 사용한 것은 더더욱 납득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장 그 몇 페이지 앞 쿠르스크 전투 부분에서는 독일 전차로 판터 사진이 제대로 실려있었다. 다만 레오파르트 2가 독일제는 맞으므로 좀 애매할 수도 있고 무장금지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독자 입장에서 큰 오류는 아니다. 그러나 전차나 전투기 등은 세계대전 중에도 그 후에도 외형 변화가 많으므로 어린 독자들을 포함해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잘 모르는 독자들 대부분에게는 전쟁사에 대한 작지 않은 혼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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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재하에서는 민주정치 하에서의 견제가 없으므로, 독재자와 그 측근들은 뇌물을 받아도 상관이 없다. 간혹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겠다고 부패척결을 내세우는 정치인들도 나오지만, 그들도 집권을 하게 되면 독재자이거나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2] 물론 독재국가에서도 나름의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실제로 후진국에서는 개발독재가 잘 먹히며, 한국의 한강의 기적의 시작도 개발독재였다. 문제는 개발독재는 후진국이 중진국에 이르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중진국이 선진국이 되는데는 오히려 방해요소가 된다. 이 부분은 중진국 함정 문서 참조, 게다가 만에 하나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거나 마이너스가 되어버리면, 독재자는 어떻게든 끌어올리기 위해 별 쌩쑈를 다하게 되고, 그러면 더더욱 떨어지게 된다. 민주국가에서도 이런 일이 아주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지도자는 몇년 안에 교체된다.[3] 심한 경우에는 이 아시아적 정서 운운과 공산주의를 연계지었을 뿐 아니라, 서구와 다른 문명의 차이를 규정하는 잣대로 쓰이기도 했다.[4] 아직도 러시아의 길은 이런 진흙탕이 많고, 더하여 몽골군은 당연히 기병 위주이니 이런 진흙탕에서는 뭘 할 수가 없다. 당장 몽골군의 기병보다 더욱 현대적이고 조건이 좋았던 나치독일군도 이런 진창 때문에 진군이 늦어진 것이 독소전쟁의 패인 중 하나가 되었다.[5] 기병의 존재감 중 하나가 빠른 진격인데, 진흙탕이면 이런 장점이 사라진다. 아돌프 히틀러가 전격전으로 소련을 치는 것에 실패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6]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가 1월 기준 평균 -9.2도인데,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평균 -21.2도로 비교도 안 되게 춥다. 물론 시베리아와 비교한다면 몽골이 훨씬 따뜻하지만, 이 시기의 시베리아는 아직 러시아 영토가 아니었다.[7] 다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같은 부르봉 왕가였던 스페인 왕가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있던 점이나 당시 카를로스 4세가 국정을 내팽겨치고 왕비의 총애를 받은 고도이에게 국정을 맡기는 바람에 동맹은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고, 프랑스가 프로이센 전역에서 고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고도이는 프랑스에 두루뭉술한 말투로 "이런 식으로 가면 스페인이 프랑스와 적대할 수도 있다"는 성명서를 보냈는데, 그 성명서가 나폴레옹에게 도착한 날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승전한 날이었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외교적으로 끌려다니게 된다.[8] 사실 서울대학교, 도쿄대학, 베이징대학 등의 영향으로 최고 대학에 그냥 닥치고 수도 이름을 붙여버리는 몰상식한 경우는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 대학 이름이 워싱턴DC대학이 아니고 영국 최고 대학이 런던대학교가 아닌 것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9] 우크라이나도 반소감정이 심했으나, 이쪽은 서부 쪽 주민들이 아예 보이콧을 하여 결과적으로 찬성 측이 더욱 높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