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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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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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梁成
(? ~ 383)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약양(略陽)의 저족. 삭방환후 양평로의 아들.
2. 생애[편집]
건원 5년(369년) 12월, 전진 조정에 임관하여 건위장군을 지내던 양성은 보국장군 왕맹, 건무장군 등강과 함께 30,000 군사를 거느리고 전연을 정벌하여 전연의 낙주(洛州)자사 모용축(慕容筑)이 지키는 낙양을 쳤다.
건원 6년(369년) 정월, 전연 조정에서 위대장군 모용장(慕容臧)에게 100,000명의 정예병을 주어 낙양을 구원케 하니, 양성은 왕맹의 명령을 받고 등강과 함께 병력 중 10,000여 명을 선발해 형양(滎陽)에서 모용장을 요격하여 대파하였다. 이를 본 모용축은 낙양성을 들어 왕맹에게 항복하였다. 이 공으로 양성은 중루장군(中壘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7년(370년) 2월, 연주(兗州)자사로 부임하였다.
건원 15년(379년) 2월, 장낙공 부비가 양양(襄陽)을 함락시키자, 천왕 부견은 양성을 남중랑장, 도독형양주제군사(都督荊揚州諸軍事), 형주(荊州)자사, 영 호남만교위(領護南蠻校尉)로 삼고, 그에게 병사 10,000명을 배속시켜 양양을 진수케 하였다. 이후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19년(383년) 8월, 천왕 부견이 남벌을 선포하면서 100만 대군을 일으켰다. 이때 양성은 부견의 동생이자 이번 정벌에서 선봉군을 지휘하게 된 양평공 부융과 종군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0월, 부융이 동진의 용양장군 호빈(胡彬)이 수비하는 협석(硤石)을 공략하면서 양성에게 50,000 군사를 주어 양주(揚州)자사 왕현(王顯), 익양(弋陽)태수 왕영(王詠)을 거느리고 낙간(洛澗)에 주둔할 것을 명하였다. 낙간에 도착한 양성은 회수(淮水)가에 목책을 세워 동진군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상서복야 사석이 이끄는 동진군은 도하를 시도해보았지만 강가에 놓인 목책에 막혀 결국 실패하였고, 물러나 낙간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며 나아가지 못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1월, 동진의 관군장군 사현의 명령을 받은 광릉상 유뢰지가 정예병 5,000명으로 양성을 습격하러 하간으로 향하였다. 유뢰지의 군사가 10리에 못 미치는 거리에 이르렀을 때, 양성은 이미 준비를 마친 채 유뢰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강을 건너 양성의 진영으로 돌진하였으며, 용맹하게 싸워 양성의 철통 같던 방어를 허물어 그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때 유뢰지가 군사를 나누어 퇴로를 막는 바람에 15,000여 명의 전진군이 회수를 건너 도망을 시도하다가 익사하였고, 대장인 양성을 포함해서 그의 동생 양운(梁雲), 익양태수 왕영 등 10여 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전진의 양주자사 왕현, 장수 양타(梁他), 양제(梁悌), 모용굴씨(慕容屈氏) 등은 목숨은 건졌지만 모두 동진군의 포로가 되었고, 병장기와 군수물자는 역시 동진군에게 전부 빼앗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