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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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야구
4. 가족
4.1. 결혼 및 아들부자
5. 취향
6. 인맥
7. 기타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이승엽의 기타 사항 내역을 정리한 문서.


2. VS 타이론 우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 vs 타이론 우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땀과 눈물,

그리고 그 가치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보고 계시죠, 듣고 계시죠,

당신이 함께한 역사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승엽

한명재 캐스터의 은퇴식 클로징 멘트


요시! 그란도 시즌!

백인천



3. 야구[편집]


  • 등번호 36번은 장종훈이 썼던 35번에 1을 더한 것으로, 장종훈을 뛰어넘는 타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36번을 달았다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래 이승엽이 달고 싶어한 번호는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와 청소년 대표팀에서 쓰던 27번이었지만, 삼성에서 27번은 타자가 받는 번호였기 때문에 투수로 입단한 이승엽은 원래 투수가 받던 번호인 36번을 받았다. 그래서 이승엽 이전에 삼성에서 36번을 달았던 선수는 모두 투수. 이승엽에게는 등번호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에 본인은 별로 애착이 가지 않는 번호였는데, 36번을 달고 1997년에 MVP를 받고 나서야 정이 들게 되었다고 한다. ### 36살까지 야구하다가 은퇴하고 싶다는 말도 있었지만 41살이 되었던 2017 시즌을 풀타임으로 뛰고 은퇴한 것을 보면 근거 없는 말이다. 그의 36번은 한화에서 영구결번된 장종훈의 35번처럼 삼성에서도 영구결번 된다.

  • 잘 알려진 기록은 아니지만 한국 프로야구 1호 무관심 도루(무관심진루:Indifference advance) 기록자다. 야구 규칙에 무관심 도루와 관련된 조항이 있긴 했지만 그 판정을 내려야 할 기록원들이 판정하기를 주저하여 무관심 도루를 주는 경우가 없었다. 이유는 판단의 기준이 애매하기도 하지만 선수 개개인의 연봉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성적에서 일부를 헛된 기록으로 만든다는 게 기록원들로서는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부터 이승엽에게 1개 적용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첫 피해자가 하필이면 이승엽이 되긴했지만 덕분에 진기록을 하나를 추가한 셈이다.


  • 2003년,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세우고 시즌 종료 후, 12월 18일, 해피투게더에 직접 출연했다. 같이 출연한 도전자들은 장나라, 윤도현인데 가장 쉬운 5번 자리를 뽑았다. 그런데 저번 주와 마찬가지로 짧은 노래임에도 계속 틀리는 바람에 진도를 더럽게 나가지 못했고 이대로 실패하면 노래도 못 부르고 쓸쓸히 돌아가야 했지만 마지막 시도에서 4소절 장나라 파트의 가사가 기적적으로 맞았고 비로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또한, 지바 롯데로 이적한 후, 120회 방영분(2004년 2월 26일)에서는 전화기를 꺼놔서 못 받은 이효리의 대안으로 이승엽에 전화를 해서 이승엽이 쟁반 맞을 사람을 선정하는 찬스 도우미로 나서기도 했다.

  • 일본 진출 첫해인 2004년 극심한 부진을 보인 후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삼성 입단 당시 78kg으로 호리호리한 체형은 2003년 85kg, 2007년에는 95∼96kg까지 증량해 탄탄한 체형으로 변했다. 지방이 빠져나간 자리는 근육으로 채워 2004년 16%였던 체지방을 11%까지 줄였다. 웨이트 트레이닝 지도는 오창훈 세진헬스 관장이 맡았다. 모친의 49재를 위해 일본에서 잠깐 귀국했을 당시에도 묘소 참배 후 헬스장에 가 운동했다고 한다.

  • 주장으로 임명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는 특이한 케이스로 2016년도 주장인 박한이도 본인의 추천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물론 김한수 시절에 양준혁이 최고참+군기를 담당한만큼 본인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야구의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4번 타자로 등장해 결승 홈런으로 일본을 격침시켰는데 이후 일본을 향해서 사과를 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인들은 “왜 우리가 이승엽에게서 사과를 받아야 하지?” 라고 반응했다고 한다.[1]

  • 2014년 8월 24일 베이브 루스의 예고홈런에 맞먹는 예고홈런이 나왔다. 해당 기사 이날 경기 전 자신을 만나길 소원하던 시각장애 학생 공민서 군에게 큰 선물을 선사했다. 이승엽은 경기 전 이날 시구자로 나선 공민서 군의 시구 도우미로 나섰다. 이후 사인을 해주는 등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공민서 군은 이승엽에게 "이날 경기에서 꼭 홈런을 쳐달라"고 부탁했고 이승엽은 그 약속을 지키며 공민서 군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 2015 시즌 이후 2년 36억에 FA 계약을 체결하였고 2017 시즌 이후에 은퇴를 하겠다고 미리 예고를 했다.

  • 2017 시즌 후 은퇴 시점을 잡고 있는 듯하며, 그 안에 프로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 관련 기사 시점까지 통산 안타는 1757개. 그리고 2016년 9월 7일, 대구 KT전에서 역대 8번째로 2000안타를 달성했다.

  • 국민타자라는 별명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90년대 후반 IMF로 실의에 빠졌던 국내에서 엄청난 홈런 레이스로 분위기를 살렸고, 주요 국제 대회에서 중요한 순간 한 방을 쳐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삼성팬을 넘어서 90년대를 버텨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까지. 그는 야구인을 넘는 야구인이었다. 게다가 무리하다 싶었던 그 역할을 지금까지 훌륭하게 수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흠잡을 데 없는 자기 관리로 본받을 만한 스타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보여준다.


3.1. 유발 피해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유발 피해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족[편집]



  • 모친인 김미자 씨는 2007년 1월 6일에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김미자 씨는 2002년에 뇌종양을 진단받고, 5년 동안 투병생활 끝에 작고했다. 이승엽은 평소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은퇴식 때도 현장에서 상영된 과거 동영상에 모친의 얼굴과 목소리가 등장하자 오열하기도 했다.

  • 본래 서강대학교 출신 동갑내기인 신수경 씨와 약혼을 한 사이로 스포츠투데이 1면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한 사이였으나, 결국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도중 파혼하였다. 자세한 이유는 불명. 이후 만난 것이 지금의 아내 이송정 씨.


4.1. 결혼 및 아들부자[편집]



파일:이승엽 가족.jpg

2017년 이승엽 은퇴경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 아내는 고등학교 때부터 모델 겸 탤런트로 활동했었던 이송정(1982년생). 1999년, 이승엽(당시 만 23세)이 앙드레 김 패션쇼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이때 만난 파트너인 이송정(한국나이 18세)을 보고 대시했고, 2001년부더 1년간의 열애 끝에 대학교 1학년이던 2002년에 결혼했다. 당시 중앙대 연극학과에 재학중이었기에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 이후 인터뷰때 이송정은 "눈물나는데 참느라고 혼났다고"웃으면서 말했다. 반면에 이승엽은 결혼식 도중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 결혼 후에는 내조와 육아에 전념하며 남편 이승엽의 경기장을 종종 찾아 응원하는 모습이 포착되곤 했다. 2017년 이승엽이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공식 은퇴식에선 감격의 시구를 하기도 했다. 또한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이다. 현재 세 아이의 엄마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인데 스포츠스타 부인 중 가장 출중한 미모를 자랑한다는 평이 많다. 여담으로 이승엽이 아내를 부를때 "애기 엄마"라고 부르는데 이송정이 집사람, 와이프라는 말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아들로는 이은혁, 이은준, 이강유가 있다. 여담으로 첫째인 은혁이는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아이 욕심이 있어서 인지 셋째도 가지고 싶고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3] 그리고 2021년 1월 4일 셋째 아들 이강유가 태어났고, 1월 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셋째 아들의 탄생 소식을 전했다.


5. 취향[편집]


  • 취미로는 인터넷 장기 라고 한다.

  • 농구광이다. 비시즌에는 프로농구 경기를 직관하러 오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기도 했다. 한때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했던 오리온스 농구단의 홈 경기를 가끔 방문해 경기를 보고 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승엽이 직관을 오는 날마다 오리온스가 패배하는 징크스가 유명했다.#

  • 경북고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단순히 놀러오는 게 아니라 모교 야구부 후배들이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애정어린 조언도 제법 한다고.[4]

  • 숫자 7을 좋아해서[5], 지도자가 되면 77번을 달아보고 싶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고, 2023년을 앞두고 두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77번을 사용하게 됐다.[6] 참고로 이 감독은 선수 때에는 7과 관련 없는 등번호만 사용했다.[7]

6. 인맥[편집]


  • 김제동과 과거 대구구장 장내 아나운서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서 유명 스포츠 선수인 자신의 결혼식 사회를 수많은 연예인들을 다 뒤로 밀어 버리고 당시 듣보잡이던 김제동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김제동은 이것을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고마워하며 자신의 결혼식 사회를 꼭 이승엽에게 맡길 것이라고 했다. 워낙 방송에서 김제동이 이승엽과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김제동이 이승엽 이야기를 하면 ‘또 이승엽 팔이 하네.’라고 악플이 달릴 정도가 되자 언급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다만 친분은 여전해서 201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직후 힐링캠프에서 이승엽을 섭외할 수 있었다. 2017년 은퇴식 때도 김제동이 사회를 보았다.

  • 2012 시즌 후 SBS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아내 이송정과 함께 게스트로 출연했다. 때마침 힐링캠프 MC가 김제동이어서 섭외에 기꺼이 응한 듯한다.

7. 기타 이야깃거리[편집]


  • 야구선수 중엔 흔치 않은 비흡연자에,[8] 술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 내에서도 가장 몸 관리에 철저했다고 하며, 일찍이 MLBNPB식의 선진 훈련 체계를 접하면서 크게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이승엽의 롱런에는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도 한몫했다는 평을 받는다.


  • 이승엽은 삼성에는 투수로 입단했으나 코치의 설득으로 인해 타자로 전향했지만 1달동안 안타를 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지다가 해태타이거즈 에이스 이강철를 상대로 프로데뷔 첫 홈런을 터트렸다.

  • 본인이 따낸 병역특례 대상 타이틀만 무려 4개인 탓에[9] 병역특례자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5급 제2국민역 판정을 받은 상태.[10] 정확한 사유는 알려진 바 없는데, 척추 분리증이라는 설과 경북고 3학년 때의 팔꿈치 인대 부상이 원인이라는 설 2가지가 지배적이다. 다만 경북고에서 좌완 투수로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팔꿈치 부상으로 프로 무대에서는 타자만 했던 걸 보면, 아무래도 팔꿈치 인대 부상이 유력하다.

  • 일반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2007년 손가락 수술을 하고 팔에 깁스를 한채로 하네다 공항 비즈니스 대기실에서 당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기자회견을 보고 있었다. 약간 애잔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화면을 바라보는 이승엽의 얼굴에서 정말 메이저리그를 동경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11]

  • 주니치 드래곤즈의 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은퇴 후 해설을 하면서 해설 도중에 가장 무서운 타자 중 한 명으로 이승엽을 뽑은 적이 있다. 타율이 얼마건 간에 이승엽을 안 쓰는 건 바보짓이라고. 이승엽 같은 선수가 벤치에 앉아있으면 상대편 배터리로써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했는데, 캐스터가 이승엽의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자 이승엽 같은 대포[12]는 존재자체가 공포이기 때문에 성적과 아무 상관없이 포수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원초적인 공포이기 때문에 논리로 설명이 안 된다고. 카와카미 켄신이 위협구를 던졌음에도 나고야 돔 5층에 꽂히는 홈런을 이승엽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13]

  • 이승엽은 간첩도 안다. 사실 ‘모르면 간첩’ 이라는 표현이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는 인물’ 이라는 의미로 쓰는 말이긴 한데, 문제는 진짜 간첩이 자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서 한동안 개그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관련 기사

  • 2013년 6월 23일 대구 LG 트윈스전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시타를 맡았다. 이 당시 시구는 삼성 팬인 아들이 삼성 구단 마케팅팀에 아버지를 위해 보낸 사연에 따른 것이었다. 이날 시구자는 삼성 구단에 사연을 보낸 아들의 아버지였는데 평생을 대구에서 살면서 삼성을 응원한 이승엽의 열성 팬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시구 당시 폐암 투병 중이었다고 한다. 이 가족의 사연을 이승엽이 듣게 됐고 이승엽이 가족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시타를 자청했다고 한다. 아마도 병으로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이승엽 본인의 사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날만큼은 승빠, 승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폭풍감동이라며 이승엽을 칭찬했다. 관련 영상

  • 라이선스 문제로 이승엽의 본명을 야구게임들이 못 쓰고 있다. 때문에 장남식, 이태산처럼 간혹 본명 대신 게임 내에서 쓰이는 이름이 별명대신 불리고 있다. 이런 이름 중 가장 유명한건 이영웅과 이국민. 누가봐도 국민타자 또는 국민영웅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그러다가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2014년 4월 10일, 마구마구에서는 4월 16일 업데이트로 이승엽 선수카드가 본명으로 전환되었다.

  • 1999년 이승엽이 당시 한국타자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하자 MBC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승엽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14] 이때 이승엽이 양준혁은 이미 타격 기술이 최정상에 오른 선배인데도 한밤중에 타격 연습을 했다는 일화를 말하며 자신이 가장 많이 본받은 선수로 양준혁을 뽑았다. 당시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 방송을 보던 양준혁은 자신의 유니폼을 입은 대역배우가 한밤중에 배트를 휘두르며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놀랐다가 이후 이어진 이승엽의 인터뷰를 보며 상당히 뿌듯해 했다고 한다.관련 연상[15]

  • 한창 주가를 달리던 1999년 말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바로 거리의 시인들이다. 뮤직비디오 중간에 뒷골목에서 학생들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혼내 주는 청년 역할로 나온다.

  • 2014년 5월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누워있던 도중 병실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가족들이 TV로 야구 중계를 보고 있던 도중 이승엽 선수의 홈런 소식을 전하던 캐스터의 홈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례적으로 대표이사가 와서 이재용 부회장의 감사 인사를 구단측에 전했다. 해당 기사 덧붙히자면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두사람 다 야구광이다. 이재용 문서 참고. 이후에 이 기적을 두고 각종 드립들이 성행했는데 그 중의 백미는 승청가. 출처는 여기. 또한 대내외적으로 국민OO라는 별명이 많이 쓰이는 만큼 국민화타, 국민 제세동기라는 별명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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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 진로와 직업이라는 교과서로 오랜 기간 다양한 연령층의 팬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이승엽 선수의 인터뷰를 통해 프로야구 선수의 삶과 직업으로서의 모습 등 정보를 제공하고자 기획했다고 한다.

  • 삼성 선수 답지 않게 삼적화의 희생양이 되지 않은 흔치 않은 선수다.[16]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식사, 필기 등 일상생활을 오른손으로 하는 오른손잡이이다. 야구와 골프만 왼손으로 한다.

  • 2015년 초, 중학교 교과서에 이승엽의 인터뷰가 실렸다. 삼양미디어의 ‘진로와 직업’ 교과서에 나온 각계 직업 종사자 17명 중 한 명으로 뽑혀 실린 것으로 관계자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승엽을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2015년 12월 3일, 현역 프로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동상이 모교인 경상중학교에 세워졌다.

  • 2016년 성우로 등장 했다. 대구 도시철도 2호선대공원역 안내 방송을 맡게 된 것. 안내 방송은 2월 25일부터 열차 내에 방송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입니다. 이번역은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가 있는 대공원역입니다. 내리는 문은 오른쪽입니다. 야구장에 오셔서 힘찬 함성과 뜨거운 열정을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2017년부터는 안내방송이 중단되면서 원래 성우로 회귀했다.

  • 2009년에 서울의 에스콰이어 빌딩을 293억원에 구매해 건물주가 되었다. 당시 대출을 통해 샀으며 2014년에 모두 대출금을 모두 상환했다고 한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대부분이 일부 금액은 본인 돈으로, 나머지 액수는 대출을 받는 식으로 건물을 구매하는 일이 자주 있는데, 연예인(특히 아이돌이나 배우 등 비주얼로 활동하는 쪽)이나 운동선수는 직업 특성상 근무수명이 매우 짧기에 미리 노후를 대비하는 차원. 비슷한 케이스로는 서장훈이나 효린이 있다.

  • 燁(빛날 엽)이라는 한자가 일본에서는 상용한자가 아니라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엽' 부분만 가타카나로 표기한 '李承ヨプ'이란 표기가 표제어로 되었다. 참고로 북한 정치인 리승엽도 똑같이 표기한다. 원래는 NPB 내 구장 전광판에도 죄다 저런 식으로 가타카나 표기가 되어있었으나, 훗날에는 전광판 소프트웨어를 손봐서 제대로 '李承燁'이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 평소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잘 안하기로 한 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은 당시 이승엽 선수의 한시즌 아시아 최다홈런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시점에서 만약에 이승엽이 기록을 세운다면 하이파이브를 하겠다고 기자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승엽이 56호 홈런을 치고 이승엽 선수와 하이파이브하려고 앞으로 나왔는데 이승엽은 김응용 감독을 못보고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 현역 프로선수로 활동하면서도 석사학위를 따낼 정도로 학구열이 높은 야구선수다. 이승엽/선수 경력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으로, 고3 시절에는 한양대학교로 진학하려 했으나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프로 진출을 하는 쪽으로 선회한 적이 있다. 이후에는 아들이 대학진학을 했으면 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고자, 프로 데뷔 4년차인 1998년에 대구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한다. 2002년에 학부 졸업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 스포츠마케팅학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후 수료했다. 2005년에 영남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체육학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2012년에 졸업했다. 프로야구선수들은 일반적으로 공부와 담을 쌓고 야구만 하는 경우도 많으며, 고졸 야구선수들 중에는 군 문제 때문에 입영을 늦추고자 대학에 이름만 걸어두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이승엽의 경우는 군 문제와 전혀 무관한 상황에서[17] 자발적으로 대학 진학을 선택했으며, 프로선수로 활동하면서 석사과정까지 마치는 학구열을 보여주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공부하는 야구선수'의 귀감이 되고 있다.


  • 국민타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20여 년 동안 한 종목을 대표하는 국민적인 스타치고는 의외로 TV에 잘 나가지 않는다. 예능 출연프로그램이라곤 결혼 직전 서세원쇼 밖에 없었으며, 결혼 후에도 윤도현의 러브레터로 스타가 된 김제동의 고정출연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대부분 나왔다. 지상파 방송으로 해피투게더(KBS)-쟁반노래방, 일밤-불가능은 없다, 힐링캠프 등에 게스트로 출연하였으며, 다큐멘터리로는 성공시대, SBS 스페셜 등에 출연하였고 종편은 은퇴 후인 2017년 12월 7일 JTBC 뉴스룸이 돼서야 출연하였다. 2021년에도 예능 출연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후 2022년 예능 프로인 최강야구아는 형님에 출연하며 조금씩 예능 출연을 하는 모습이다. 다만 최강야구는 말이 예능이지 사실상 야구 다큐이기 때문에 아는 형님만 예능 출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 현역 시절에는 SNS를 하지 않았으나, 은퇴 후 본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오픈하여 SNS를 시작했다. 이승엽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은퇴 후 골프나 일상생활 등 본인의 근황을 자주 올려주는 편이며, 후배 구자욱이 본인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자, "인스타할시간에 스윙해라 난 은퇴해서 하는거다 ㅋ" 이라고 답글로 쓴소리를 해주기도 했다. 역시 국민타자라는 수식어 답게 계정이 오픈된지 1달도 안되는 시점에서 팔로워 수가 1만 명을 돌파했다. 다만 두산 베어스 선임 이후로는 인스타그램을 멀리할 것이라고 했다.

  • 향후 삼성 감독직도 고려하는 듯 하다. 허나 삼성 팬들은 레전드의 명성이 깎이는 것을 우려하는지 부정적이다. 삼성 구단도 이를 우려해서 인지 오퍼를 내지 않았으며, 결국 두산 감독으로 갔다.

  • 대구 출신임에도 원년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 출신이다. 관련 기사 원래 삼성 어린이 회원으로 신청하려 했으나 자리가 다 차서 OB 회원이 됐는데 공교롭게도 원년 OB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하면서 기념 선물로 맥주 컵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삼성 어린이 회원으로 갈아탔다고 한다. 어린시절 박철순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승엽의 어린시절 우상이자 투수로서의 롤모델이 박철순이었고[18], 박철순과 같은 투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이후, 먼 시간을 지나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것을 보면 묘한 인연.

  • 한자 이름까지 동일한 동명이인 선수 이승엽이 KBO 리그에서 활약한 바 있다. 선수로서 활동한 시기는 겹치나 이승엽 감독은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있었고 동명이인 이승엽의 선수 생활도 짧았기에 두 선수가 맞대결한 적은 없다. 공교롭게도 동명이인 이승엽의 소속구단은 두산 베어스로 2022년 이승엽 감독이 두산 베어스에 취임하면서 두 번째 두산 이승엽이 되었다.

파일:이승엽 평창올림픽.jpg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국기 전달자로 나왔다. 올림픽 출전 기록(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8 베이징 금메달)도 있다.

  • APBC에 주장 완장을 달고 출전하는 구자욱이 36번을 달려고 원 주인인 이승엽에게 허락 받으러 전화를 걸었는데, 안 달면 가만 안 둔다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 2018년 8월 16일, 4시 30분부터 5시 40분까지 능인고등학교 학교 체육관에서 특별 강의를 했다. 능인고등학교에 특강을 온 기념으로 본인의 두 번째 수능을 능인고등학교에서 치렀다는 TMI와 함께, 학생들의 질문을 추첨으로 뽑아 답변을 하고 본인의 친필 싸인볼을 총 12명에게 전달했다.

Q: 야구를 그만 둔 이유
A: 후배들과 한국 프로야구를 위한 것이고 현역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으며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를 다시 보내기 싫기에 다시 야구를 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Q: 야구를 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는 질문
A: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중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Q: 본인에게 삼성 라이온즈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
A: 본인의 꿈이었던 구단이며 앞으로 지도자가 된다면, 삼성 이외의 유니폼을 입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운동으로 성공하는데에는 재능과 노력,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 본인의 재단[19]을 통해 2월 26일,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코로나19 예방과 방역, 긴급생계지원 등을 위한 성금 5000만원을 전달했다.

  • 뺑코이다. 500원짜리 동전이 콧구멍에 그대로 들어간다고.

  • 이승엽 은퇴 이후 이원석과 구자욱이 중심타선을 이끌어간다. 장타 문제와 1루 자리를 대체 할만한 선수가 없어서 오재일을 영입해서 그의 빈자리를 매워주고 있다.

  • 오재일의 롤모델이 이승엽이고, 존경하는 선수도 이승엽이고 좋아하는 선수도 이승엽이다. 그 이유 때문에 FA로 4년 50억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 등번호도 이적 당시 이승엽의 만 나이인 44번으로 선택했다.[20]

  • 2021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가 2위권 전력이라고 예측했는데 삼성 팬들은 당연히 손사래를 쳤다. 역시나 시즌 초반부터 개막 4연패를 달리며 좋지 않은 출발을 했지만 그 이후로 각성하며 4월 28일 무려 2,031일만의 단독 1위를 달성했고 시즌 막판 kt와 1위 경쟁을 했지만 타이브레이커에서 아쉽게 패배하며 이승엽의 예언대로 삼성은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다![21]

  • 일본에서 꼭 성공해야 할 진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승엽의 종조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 가서 희생을 당했기 때문. 결국 완벽한 성공은 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NPB 내에서도 나름대로 좋은 타자였던 시점도 분명 있었으니 본받아야 할 정신과 마음이다.

  • 비록 일본 시절 말년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먹튀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일본의 야구팬들은 이승엽을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요미우리 최악의 시즌 2006년에서만은 리그 최상급 성적을 내며 혼자 타선을 멱살잡고 캐리한 점, 요미우리의 라이벌 팀인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강력했던 타자였던 점,[22] 또한 NPB에서 보기 힘든 한국 출신이 일본프로야구 리그의 주인공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주목도가 높은 자리인 교진 4번타자 자리를 꿰차고 단 1년이나마 리그를 지배하는 성적을 냈던 그 단기 임팩트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승엽이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 2007시즌 부터는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좋은 성적(1-1-1-3)을 냈기에 이승엽의 부진이 팀 입장에서는 공백이 크지 않았다. 또한 교진은 원래 돈이라면 썩어나는 팀이고 돈지랄로 FA 사 모으는 게 매년 연례행사인 팀이라, 비록 이승엽이 연봉값을 못했어도 그 돈 때문에 FA를 또 못 살 정도로 재정적으로 큰 부담은 없었다.[23] 게다가 교진 FA영입은 성공보다 실패작의 비율이 더 높은 게 유명하다보니 팬들도 익숙해진 데다가[24] 이승엽은 돈은 많이 먹었어도 어쨌든 한 시즌이라도 잘 했다는 점에서 교진의 기라성같은 먹튀들 사이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실제로 야후 재팬이나 유튜브등의 댓글조차도 이승엽에 대해서는 왕년에 뛰었던 홈런 많이 쳤던 용병타자라는 의견이 많고, 30억 엔 먹튀라는 댓글은 별로 없다. 사실상 커리어로 보면 비교자체가 실례인 마쓰이 히데키와 비견될 타자라는 고평가도 있으며, 타격코치로 요미우리에 와달라는 반응이 있을 정도이다. 선수 본인을 포함한 한국 팬들은 그의 일본시절을 실패라고 평가하는 것이 주류 의견인 반면, 일본 야구팬들은 대체로 B+정도에서 A급은 되는 거포 용병이라는 반응이 대세일 정도이다. 이에는 이승엽 본인이 팀에 녹아들기 위해 일본어를 적극적으로 배웠던 점, 홈런 안 나오기로 유명한 지바롯데 타선에서 30홈런을 기록했던 점, 요미우리 시절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 마지막으로 일본 야구계에 대해서 수차례 수준이 높다는 경의를 표한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 심지어 일본 야구인들의 평가는 팬들보다 더 좋은 경우가 많은데, 부진한 시절도 길었지만 처음에 워낙 임팩트 있는 시즌을 보였고, 인상적인 경기들도 많았으며 어찌되었건 2005 ~ 2007년까지 3년 연속 30홈런을 친 거포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니시게 모토노부는 방송에서 "이승엽이 벤치에 있는 날이 제일 좋았다. 자기가 감독이면 아무리 부진해도 이승엽을 벤치에 두지 않는다. 4타석 4삼진이라고 해도 상대 배터리에겐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숫자랑 아무 상관없다. 그냥 원초적인 공포이다. 타석에 서 있는 것 만으로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다." 라는 믿기 어려운 극찬을 했다.[25] 타니시게 자체가 진중하고 담담한 성격이기 때문에 농담조로 한 말도 아니었고 당시 한신 야노와 함께 후루타 이후 일본 최고의 포수라는 말을 듣던 선수였기 때문에 일본 동료선수들이 이승엽을 어떤 식으로 평가하는지 잘 알 수 있던 한 단면, 극단적으로 심한 말을 했던 노무라 감독 같은 사람도 있지만 노무라 감독은 원래 누구한테나 독설로 유명했고, 수 많은 감독이나 선수들이 이승엽을 나타난 수치 이상으로 높게 평가하는 건 일본에서는 팬들이나 야구계나 일반적인 정서로 자리잡혀 있다.



  • 2021년 SBS 연예대상에서 본인이 고정 출연하는 예능 편먹고 공치리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쇼•스포츠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 현재 키움 히어로즈의 코치인 강병식 코치와 등번호 사용 내역이 비슷하다. 강 코치는 25(현대), 36(현대, 넥센), 33번(넥센)을 사용했고 지도자 시절에는 77번을 사용한다.[26] 3번만 제외하면[27] 순서 상관없이 거의 비슷한데, 우연히도 두 명의 포지션 역시 1루수이며 좌타자이다.[28]

[1] 종목은 다르지만 이와 반대되는 케이스가 안정환이다. 안정환은 지금도 이탈리아에 갈 수 없다고 한다.[2] 결혼 생활 때문에 캠퍼스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어찌어찌 졸업은 했다고 한다.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이승엽을 따라 일본을 간 후 중앙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니혼대학교에서 1년 반 정도 학교를 다니며 졸업장을 땄다고.[3] 둘째 아들의 이름이 '은엽'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승엽의 마지막 올스타전 시타자로 나왔을 때 입은 유니폼 마킹은 '이은준'으로 되어 있었다.[4] 증언이라기보다는 경북고 문서에 기록된 부분을 인용.[5] 한국인 대다수가 행운의 숫자로 여겨 좋아하는 숫자이다.[6] 36번에 대해서는 이 감독이 36번을 감독으로서 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사했다.[7] 36, 33, 25, 3번.[8] 야구선수들이 운동선수치곤 유독 흡연자 비율이 높은 편이다. 경기시간 내내 뛰어다니는 종목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심폐지구력이 덜 요구되기 때문.[9]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8 베이징 올림픽. 참고로 WBC의 경우 2006년 대회 한정으로 병역특례가 적용되었다.[10] 비슷한 사례로 정대현이 있다. 정대현은 경희대학교 4학년 시절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혀 동메달을 목에 걸었기에 이때 병역특례를 받았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전에 제2국민역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11] 직접 옆 소파에서 보고 작성한 내용인데 당시 이승엽에게 사인 부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처연하고 인터뷰에 몰입해 있었다.[12] 일본에서 이승엽의 별명은 아시아의 대포였다.[13] 카와카미의 빈볼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하자면, 2005년 5월 20일 교류전 경기였던 주니치 대 롯데 경기에서 8회 2사까지 주자를 한 명도 내주지 않았던 카와카미는 이승엽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퍼펙트 게임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당시 빈볼은 이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결국 보복구도 통하지 않고 되려 큰 홈런을 얻어맞아 버렸다.[14] 여담으로 <성공시대>에 출연할 당시 만 23세로, 이 프로그램 전체로 통틀어 봤을 때 최연소 출연자였다.[15] 이런 이야기는 사실 과거 다른 유명 야구인들에게도 흔히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재일교포 스포츠인의 신화이자 위대한 야구인인 장훈과 한때 같은 팀에서 뛰었던 백인천 역시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 숙소에 있는 식당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장훈이 불 꺼진 식당 구석에서 속옷만 입은 채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걸 보고 “장이형, 뭐하우?”라고 하자 “오늘 훈련할 때 좀 스윙이 안 좋아서 잠깐 연습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최고의 타자였던 그가 자신의 위치에 자만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한다는 걸 알고 크게 감명을 받아 자신도 더 노력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16] 실력 때문에 부각이 잘 되지 않았고 야구 팬덤 자체가 남초 성향이 그렇지 사실 이승엽의 외모도 꽤 잘생긴 편이다. 김재현과 더불어 서울시장 오세훈과 닮았다는 말이 있다.[17] 군 면제를 이미 받아 놓고 대학을 갔다.[18] 타자로서의 롤모델은 이만수였다.[19] 이승엽야구장학재단[20] 두산 시절에서는 이승엽의 상징 번호인 36번을 달았었고, 삼성으로 이적할 때에는 36번이 영구결번으로 남아있으니 이렇게 된 것이라고.[21] 하지만 두산과의 PO에서 패하며 최종 순위는 3위를 기록하게 되었다.[22] 특히 2008년 한신과의 13경기차를 만회하고 역전 우승하는 데 기여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23] 게다가 이승엽이 요미우리 초창기 엄청나게 활약하자 한국의 방송사들이 요미우리 구단에 1년에 수십억 원을 중계권료로 지불하면서 연봉 보전을 성공적으로 해 주면서 금전적인 손해는 거의 없었다. 어차피 연봉만큼 중계권료를 받고 경기에서도 활약하면 데려온 값은 하는거다.[24] 사실 성적만 보면 그럭저럭 평타는 친 선수들도 많은데, 교진의 문제는 돈을 시세보다 너무 많이 준다는 점. 원래 잘하던 선수는 당연히 많이 주고, 이승엽이나 후일의 카타오카, 노가미, 게레로, 야마구치, 카지타니 등등 커리어 내내 시원찮다가 딱 한해 잘한 성적을 찍은, 누가 봐도 FA로이드인 선수들도 덮어놓고 비싼 값에 모셔온다. 이러니 당연히 먹튀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야마구치와 카지타니의 경우는 전성기가 지나서 요미우리에 들어온 이후 드러누우면서 그야말로 망해버렸다. 야마구치는 잠시 메이저리그에 진출 했지만 그 전에 쳐놓은 사고가 많아서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다.[25] 당장 다니시게는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홈런 두 방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 2007년에는 요미우리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당시 리그 최소 피홈런을 기록하던 아사쿠라가 이승엽에게 동점 홈런을 얻어맞아 리그 우승 타이틀을 요미우리에게 내줘야 했고, 바로 다음해인 2008년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는 당시 팀 에이스 가와카미 켄신이 이승엽에게 결정적인 역전 쓰리런을 얻어맞는 바람에 시리즈를 내준 바 있다.[26] 이승엽 감독은 현역 시절 36번(삼성, 지바 롯데), 33, 25번(요미우리), 3번(오릭스)과 감독 데뷔 후 77번(두산)을 사용했다.[27] 강병식 코치는 3번을 사용하지 않았다.[28] 강병식은 우투, 이승엽은 좌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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