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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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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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張平
(? ~ 361)
오호십육국시대의 군벌. 자는 불명. 유주(幽州) 대군(代郡) 출신.[1]
혹은 예주(豫州) 초국(譙國) 질현(銍縣) 출신일 수도 있다고 한다.
2. 생애[편집]
무제 석호 재위기에 후조로 임관하여 장수가 되었다가 병주(并州)자사로 승진하였다. 대장군 염민이 정변을 일으켜 후조를 멸하고 염위를 건국하였을 때는 양국(襄國)의 신흥왕 석지가 아닌 염민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영흥 원년(350년) 8월, 전연 소속의 대군 사람 조합(趙榼)이 300여 호를 이끌고 후조로 투항해오니, 장평이 이들을 거두어 들였다.
영흥 2년(351년) 2월, 평제 염민이 양국에서 후조와 전연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수많은 장수와 참모들을 잃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장평은 당시 장안에서 전진 정권을 세운 저족 부건에게 사자를 보내 투항하여 대장군, 기주목(冀州牧)에 임명되었다.
황시 2년(352년) 10월, 전연이 염위의 수도 업(鄴)을 함락시킴으로써 염위를 멸망시켰다. 이때 장평은 전연에도 사자를 보내 칭번하여 연왕 모용준으로부터 병주자사 직책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수광 2년(356년) 9월, 동진의 대사마 환온에게 대패하여 낙양을 잃은 강족 요양이 패잔병을 거느리고 전진을 배반한 병주자사 윤적(尹赤)과 세력을 합쳐 양릉(襄陵)을 점령하였다. 요양이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양(平陽)까지 넘보자 장평은 요양을 요격하여 무찔렀고, 요양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와 의형제를 맞은 뒤에야 군대를 물렸다.
영흥 원년(357년) 7월, 장평이 이번에는 동진으로 사자를 파견해 투항해오니, 동진에서 그를 병주자사로 삼았다. 장평은 신흥(新興), 안문(雁門), 서하(西河), 태원(太原), 상당(上黨), 상군(上郡) 등 병주의 여러 군을 점거하면서 300여 개의 보루를 곳곳에 축조하였다. 또, 그는 휘하에 백성 10만 호를 보유하고 있어, 스스로 정진(征鎮) 이하의 백관을 두고 전진이나 전연처럼 아예 나라를 세워 이들과 맞서고자 하였다.
승평 원년(357년) 10월, 장평이 전진의 변경을 침공해 노략질을 자행하자, 천왕 부견은 진공(晉公) 부류(苻柳)를 병주목으로 삼아 포판(蒲阪)에서 이를 막게 하였다.
승평 2년(358년) 정월, 상당군의 상당태수 풍앙(馮鴦)이 장평에게 붙었다가 전연에게 붙었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이에 경소제 모용준은 사도 모용평을 보내 상당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승평 2년(358년) 2월, 천왕 부견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장평을 토벌하였다. 전진의 맹장 등강이 기병 5,000기의 선봉군을 이끌고 분수(汾水)에 진을 치니, 장평도 당시 용맹하고 날렵하기로 명성을 떨치던 자신의 양자 장자(張蚝)를 보내 등강과 맞서게 하였다. 장자와 등강은 10여 일간 공방을 주고 받았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승평 2년(358년) 3월, 천왕 부견이 이끄는 본대가 마침내 동벽(銅壁)에 이르자, 장평은 모든 병력을 내몰아 전진군에게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 장자가 단기로 큰소리를 지르며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진군을 벤 후에 물러나기를 너덧번 반복하면서 분전하였으나, 등강과 응양장군 여광이 협공을 가하는 바람에 결국 전진군에게 생포당했다. 이로 인해 장평의 군대가 크게 무너졌고, 장평은 두려워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천왕 부견은 장평이 반란한 죄를 사면해주고 그를 우장군으로 삼는 대신, 장자를 호분중랑장으로 삼아 전진군에 배속시키고, 휘하의 3,000여 호를 장안으로 이주시켰다.
영흥 2년(358년) 9월, 풍앙을 물리치고 상당을 빼앗은 사도 모용평이 이어서 장평을 쳤다. 그러자 장평의 정서장군 제갈양(諸葛驤), 진북장군 소상(蘇象), 녕동장군 교서(喬庶), 진남장군 석현(石賢) 등이 각자 보루를 들어 전연에 투항하였고, 이때 투항한 보루의 수가 도합 138개에 달하였다. 장평은 군사 3,000여 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들어가 전연에 항복하였다.
건희 2년(361년) 9월, 장평이 다시 전연을 배반하여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전연군을 습격해 평양태수 단강(段剛)과 독호 한포(韓苞)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안문을 공격해 안문태수 선남(單男)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군이 쳐들어와 공격하자 장평은 황급히 전연에 구원을 청했지만, 장평의 연이은 배반에 질려버린 전연은 구원해주지 않았다. 결국, 장평은 전진군에게 패해 살해당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였다.
[1] 혹은 예주(豫州) 초국(譙國) 질현(銍縣) 출신일 수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