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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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남부 장쑤성의 지급시. 난징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 있다. 시가지는 장강 남안에 형성되어 있는데, 강 너머에 양저우와 접해 있다. 과거부터 난징의 위성도시로서, 난징이 수도가 되었을 때마다 경강(京江) 혹은 경구(京口)라고 불리며 중시되었다. 진강이라는 이름도 강의 방어진을 의미한다. 전장은 장강의 대표적인 항구로서 현재도 많은 선박들이 왕래하는 인구 350만명의 도시이다. 시내에는 진산(金山), 자오산(焦山)과 베이구산(北固山)의 삼산(三山)이 있는데 비록 100m 미만의 낮은 산들이지만 다경루(多景楼) 등의 누각과 정자, 사찰 등이 즐비하한 고적명승지이다.
진강은 7세기부터 대운하가 지나며 번영하였고, 장강 삼각주의 물산이 집결하며 세관이 설치되었다. 송나라 대에는 황제에게 진상되는 비단 등의 견직물을 생산하며 번영을 이어나갔다. 북송의 대학자인 심괄이 이곳에서 몽계필담 (夢溪筆談)을 저술하였다. 진강은 1275년에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원나라 시대에는 경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1356년 3월에 명나라의 서달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1645년 6월에는 청나라 군이 도시를 접수하였다. 청나라 때에 진강은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는데, 1차 아편전쟁 때인 1842년 7월에 영국군에 함락되었다. 진강의 함락으로 남경이 위협받자, 청 조정이 백기를 들어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1853년, 진강은 태평천국에게 점령되었고 1858년에 청에게 회복되었는데, 그해 체결된 톈진 조약에 의해 1861년에 개항되었다. 청-영-청-태-청의 함락을 거치며 진강의 50만 인구에서 10만 인구의 중소 도시로 전락하였다. 다만 중화민국의 성립으로 난징이 그 수도가 되자, 전장은 1928년부터 난징을 대신하여 장쑤성의 성도가 되기도 하였다.
1935년, 난징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가 1937년에 창사로 피신하였다.
난징 지하철의 S6호선이 전장시의 현급시인 쥐롱시를 지나간다.
출처
북고루 (北固楼), 춘추루 (春秋楼), 상서루 (相婿楼), 소장루 (梳妆楼)로도 불리는 다경루는 웨양의 악양루, 우한의 황학루, 난창의 등왕각과 함께 중국 3대 누각 중 하나로서, 당송 대에 구양수, 소식 (소동파), 육유, 미불 (米芾) 등의 명사가 시조를 남긴 곳이다. 다경루 동쪽에는 제강정(祭江亭), 임강정(临江亭), 또는 북고정(北固亭)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는데, 삼국시대에 유비와 결혼한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비의 부고를 듣고 장강으로 투신한 곳으로 전해진다. 청말의 지식인 캉유웨이 (康有为)는 이곳에서 바라본 경관에 감동하여 강산제일정 (江山第一亭) 이라 평하였다.
1. 개요[편집]
중국 동남부 장쑤성의 지급시. 난징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져 있다. 시가지는 장강 남안에 형성되어 있는데, 강 너머에 양저우와 접해 있다. 과거부터 난징의 위성도시로서, 난징이 수도가 되었을 때마다 경강(京江) 혹은 경구(京口)라고 불리며 중시되었다. 진강이라는 이름도 강의 방어진을 의미한다. 전장은 장강의 대표적인 항구로서 현재도 많은 선박들이 왕래하는 인구 350만명의 도시이다. 시내에는 진산(金山), 자오산(焦山)과 베이구산(北固山)의 삼산(三山)이 있는데 비록 100m 미만의 낮은 산들이지만 다경루(多景楼) 등의 누각과 정자, 사찰 등이 즐비하한 고적명승지이다.
2. 역사[편집]
진강은 7세기부터 대운하가 지나며 번영하였고, 장강 삼각주의 물산이 집결하며 세관이 설치되었다. 송나라 대에는 황제에게 진상되는 비단 등의 견직물을 생산하며 번영을 이어나갔다. 북송의 대학자인 심괄이 이곳에서 몽계필담 (夢溪筆談)을 저술하였다. 진강은 1275년에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원나라 시대에는 경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1356년 3월에 명나라의 서달이 도시를 점령하였고 1645년 6월에는 청나라 군이 도시를 접수하였다. 청나라 때에 진강은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는데, 1차 아편전쟁 때인 1842년 7월에 영국군에 함락되었다. 진강의 함락으로 남경이 위협받자, 청 조정이 백기를 들어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1853년, 진강은 태평천국에게 점령되었고 1858년에 청에게 회복되었는데, 그해 체결된 톈진 조약에 의해 1861년에 개항되었다. 청-영-청-태-청의 함락을 거치며 진강의 50만 인구에서 10만 인구의 중소 도시로 전락하였다. 다만 중화민국의 성립으로 난징이 그 수도가 되자, 전장은 1928년부터 난징을 대신하여 장쑤성의 성도가 되기도 하였다.
1935년, 난징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가 1937년에 창사로 피신하였다.
3. 교통[편집]
난징 지하철의 S6호선이 전장시의 현급시인 쥐롱시를 지나간다.
4. 관광[편집]
4.1. 베이구산 둬징러우 (다경루)[편집]
출처
북고루 (北固楼), 춘추루 (春秋楼), 상서루 (相婿楼), 소장루 (梳妆楼)로도 불리는 다경루는 웨양의 악양루, 우한의 황학루, 난창의 등왕각과 함께 중국 3대 누각 중 하나로서, 당송 대에 구양수, 소식 (소동파), 육유, 미불 (米芾) 등의 명사가 시조를 남긴 곳이다. 다경루 동쪽에는 제강정(祭江亭), 임강정(临江亭), 또는 북고정(北固亭)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는데, 삼국시대에 유비와 결혼한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비의 부고를 듣고 장강으로 투신한 곳으로 전해진다. 청말의 지식인 캉유웨이 (康有为)는 이곳에서 바라본 경관에 감동하여 강산제일정 (江山第一亭) 이라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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