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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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대의원 명단
3.1. 북한지역
3.2. 남한지역
4. 결과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1948년 8월 25일에 실시된 최초의 최고인민회의 선거로 이 회의에서 선거된 1기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 내각을 선거하여 9월 9일, 북한 정권을 출범시켰다.

2. 전개[편집]


1948년 7월 9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올리고 입법기관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는 8월 25일을 기해 대의원 선거를 한다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어 북조선인민회의 29차 상임위원회 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선거일의 결정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관한 규정의 승인에 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관한 중앙선거위원회 조직에 관하여> 등을 채택하였다.

7월 13일, 30차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북한 내부의 212개 선거구가 조직되었으며 7월 12일~7월 13일 사이에 개최된 북로당 2차 전원회의도 헌법 실시와 대의원 선거 문제를 논의하였다. 7월 18일에 김두봉태극기 폐지와 새 국기 제정 담화를 발표하였다. 북한 정권은 군중대회를 실시하는 한편, 무려 44만명의 선전원을 동원하여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7월 24일에는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흑연탄광 노동자들의 종업원대회에서 강동군 승호선거구 대의원 후보자로 추대되었다. 8월 6일까지 총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되었다.

투표 방법이 현재의 북한 선거와는 약간 달랐는데, 반대투표를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펜으로 X표를 해서 투표함에 넣어야 하는 현재의 선거와는 달리 찬성과 반대 두 개의 투표함이 있어서 둘 중 한 곳에 표를 넣으면 되고 투표함은 가려져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나마 민주적인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투표함이 가려져 있어도 어느쪽으로 손을 뻗어서 표를 넣는지에 따라 반대 투표를 했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비밀투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1] 또한 복수의 후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후보를 뽑는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와는 달리 애초에 북조선민전이라는 정부 단체에서 공천한 한명의 후보에 대해 찬반투표만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선거와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이 때는 212개 지역 중 15개 지역에서는 복수후보가 출마했다. 그나마 이후의 선거와 달랐던 점은 반대표가 1.5% 정도나마 존재했고 의석수 중 조선로동당의 비율이 낮고 무소속의 비율이 높았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권력이 확고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8월 25일 새벽 6시부터 투표가 시작, 오후 12시에 북한 전역에서 투표가 종료되었다. 총 452만 6065명의 선거자들이 등록되어 452만 4932명이 투표, 99.97%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52표가 무효처리 되고 445만 6621명이 찬성투표하여 98.49%의 찬성율을 기록했다. 8월 28일에 중앙선거위원회가 선거결과를 발표했다. 북로당 102명, 조선민주당 35명, 천도교청우당 35명, 무소속 40명 등 총 212명의 대의원이 선거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남한 지역에서 투표가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제헌국회를 친일파, 지주, 자본가들만 참여한 반인민적 반동기관이라고 비난하면서 남조선선거추진지도위원회를 조직, 7월 15일부터 8월 10일까지 공작원을 파견하여 지하선거를 조직하였다. 남한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거를 추진했고 대표자들을 월북시켰다. 8월 21일부터 8월 26일까지 해주 남산에서 월북한 인민대표자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으며 360명의 남한 출신 대의원들을 선거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 유권자 868만 1746명 중 77.5%인 672만 2407명이 투표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북한의 헛소리라고 공개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공박하였다.

3. 대의원 명단[편집]



3.1. 북한지역[편집]


  • 김상철, 최금복, 최숙량, 홍기황, 전정일, 리동영, 원홍구, 황일보, 김일성, 최승희, 강량욱, 박상순, 김정학, 강인규, 장시우, 김기주, 최월성, 김만수, 김두봉, 박준언, 허가이, 김선길, 김태봉, 엄영관, 박식, 김정주, 김재욱, 안신호, 김명석, 홍면후, 차지훈, 김낙도, 김득란, 문의식, 최용건, 리히붕, 리주연, 리유면, 석태룡, 홍기주, 최응려, 김성옥, 채기욱, 최흥선, 김윤절, 김황일, 리진숙, 박창옥, 김기남, 최경덕, 고준택, 최광, 백옥녀, 김룡국, 김세률, 허신, 정준택, 최윤옥, 원천준, 전찬배, 리강국, 방학세, 김복진, 오호석, 리지찬, 김길수, 조열, 한춘녀, 림정순, 조태우, 김응률, 김성률, 전언욱, 박윤길, 조재한, 박일영, 문태화, 김형건, 김보배, 오기섭, 오영자, 리병제, 강인걸, 김승현, 리붕년, 최용건, 리창규, 안영길, 남일, 김한일, 채배희, 김영환, 최산화, 박일우, 리청송, 최선비, 계동선, 김재록, 김책, 김호수, 태성수, 정신현, 최창익, 전윤도, 김응기, 김일, 오태영, 권녕주, 박정애, 김순일, 김필주, 림풍원, 김유영, 리문환, 박훈일, 송봉욱, 김창록, 황태열, 김제원, 오신남, 리식, 리숙려, 김만중, 김명리, 리기영, 리병호, 정성업, 원만수, 조금성, 전숙자, 라서운, 윤희구, 서병수, 김병주, 정일룡, 강준삼, 최봉수, 허정숙, 박근모, 리보열, 최용달, 송태준, 김한중, 리용덕, 리종권, 한일무, 권병철, 한영규, 림택, 김찬, 한장호, 김달현, 안시도, 리숙진, 리영, 주녕하, 신용복, 한양음, 박시운, 김수현, 채기남, 최관용, 리재영, 한도경, 김학종, 김열, 최기배, 김한웅, 최전자, 김덕흥, 리창하, 한도겸, 윤상남, 오제영, 주만술, 김업돌, 주황섭, 리면후, 고광한, 리홍렬, 주창선, 김현국, 김민산, 박선옥, 라청송, 현승갑, 리동화, 허만수, 김욱진, 고희만, 박보옥, 리붕남, 박용한, 김영수, 한설야, 강진건, 김정순, 장해우, 김태련, 리종완, 오옥별, 리원일, 장순명, 리진근, 김광준, 허남희, 리숙경, 김도성, 박영성, 전중학, 강건, 김란주화.

3.2. 남한지역[편집]


  • 박헌영, 리용, 허헌, 장권, 허성택, 리점순, 김성규, 김창준, 강순, 박문순, 함세덕, 홍명희, 김병제, 윤수, 유영준, 리영, 리병남, 리주하, 최성환, 리극로, 김원봉, 김기도, 리승엽, 리근우, 리선재, 김백동, 김점권, 조복례, 정주하, 탁창혁, 조희영, 김달삼, 정진섭, 리정열, 홍면옥, 박승극, 리인동, 박병직, 홍남표, 리기석, 박원준, 윤인영, 염정권, 신상동, 리여성, 리호제, 박찬혁, 김용호, 유용윤, 리두산, 김의순, 리만규, 우봉운, 김남천, 원효순, 홍선우, 홍철희, 강옹진, 손두환, 손종열, 강윤원, 문민운, 김순남, 리영준, 리규희, 유석균, 최한식, 박춘언, 김재율, 장우욱, 조원숙, 최선규, 박세영, 홍광준, 리상언, 길원팔, 리해수, 리상순, 윤용준, 유기섭, 김연필, 주해, 송준호, 리동선, 리상갑, 장상봉, 김봉순, 주진황, 황욱, 최인, 장길룡, 한장수, 김오성, 조중곤, 리상준, 구재수, 홍기문, 김계림, 백낙영, 김문환, 유금봉, 박봉우, 리종만, 정인석, 문두재, 리송정, 김용희, 임동욱, 리석하, 김일선, 박상준, 리욱, 함익록, 정운영, 윤병관, 리병노, 성주식, 리석보, 송완석, 김무산, 김흥기, 전영기, 송명헌, 리민용, 변기창, 박진홍, 리영주, 유진영, 조용세, 장준, 리재향, 리능종, 유형규, 김상주, 유동열, 조용래, 김삼룡, 리기환, 김용욱, 리종명, 하영숙, 문옥순, 노명환, 김광수, 정백, 양보현, 맹두은, 문동용, 리순저, 전갑순, 장기욱, 염의현, 김효원, 천성옥, 김용원, 김정애, 정주경, 안영묵, 장철, 리혁영, 임재영, 리용선, 송규환, 현훈, 김명환, 백남운, 정재철, 유용상, 양흥극, 윤행중, 훙증식, 리복기, 허준, 고창남, 리정구, 임상순, 양원모, 윤재봉, 김창한, 김영재, 조범구, 노석귀, 서갑순, 정세호, 신진우, 백병익, 유해붕, 채준석, 김탁, 박기호, 신남철, 문홍기, 정길성, 송금애, 배형한, 조동석, 최한철, 김선초, 리원일, 한상묵, 박건병, 김인배, 정상혁, 정세열, 김온, 리훈, 백응렵, 강문석, 선동기, 리창수, 고철우, 길진섭, 리칠성, 김영섭, 라승규, 김기수, 김동일, 조운, 정대석, 김호영, 최척순, 송종근, 나윤출, 송을수, 리상호, 송언필, 최익한, 리진, 김영윤, 김태홍, 오영, 박형욱, 최준영, 오기옥, 리동근, 한창교, 최원택, 정칠성, 리춘수, 정연태, 조중광, 곽주석, 한일수, 서창섭, 박철, 김의수, 문상직, 박문규, 박정현, 김진호, 김용담, 장하명, 김상순, 김시겸, 신현우, 리인규, 김일청, 신순직, 김은한, 박복조, 오철주, 박창구, 노진한, 신순례, 리상훈, 정종식, 안영일, 정로식, 박필환, 리정숙, 박은성, 조우방, 리한기, 조성규, 민기원, 허하백, 한종수, 리성백, 정재선, 김재용, 리동탁, 김태자, 안기성, 권오직, 성태래, 강신우, 김해천, 리경동, 리구훈, 리병일, 현보열, 신백현, 김기택, 리창빈, 전갑순, 정인출, 조영래, 리재영, 김시엽, 김수일, 김형태, 고석환, 윤형식, 박종태, 황운봉, 옥문환, 여문철, 김철호, 한경수, 김충규, 하만호, 고경인, 안희남, 김낙진, 백재섭, 윤징우, 박치호, 리서향, 리관술[2], 강철, 전봉화, 유명석, 권은해, 전병기, 한태성, 김완근, 리흥연, 오재열, 김철수, 리병희, 김병제, 리태성, 송재현, 강성재,조복애, 리철, 홍진, 강영순, 하필원, 김유태, 윤상열, 마종화, 김병문, 리두원, 정남조, 김승모, 김태성, 민혁조, 리강무, 김영은, 설병호, 정철, 박치화, 홍승극, 권태봉, 신상훈, 송성철, 백파, 안세훈, 김해진, 고진희[3], 강규찬[4], 백재섭.

4. 결과[편집]


총 57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으며 1948년 9월 2일, 572명의 대의원 중 528명이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 참석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허헌, 부의장으로 김달현리영이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김두봉, 서기장강량욱 등이 선거되었다.

9월 4일,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대의원 중 남자가 503명, 여자가 69명으로 출신성분을 따지면 노동자가 120명(20.9%), 농민이 194명(34%), 사무원이 152명(26.7%), 수공업자 7명(1.24%), 상인 22명(3.84%), 기업가 29명(5.1%), 문화인 33명(5.8%), 전 지주 1명(0.02%), 종교인 14명(2.4%)였다. 나이 구성으로는 20~30세가 73명으로 12.8%, 31~40세가 223명으로 39%, 41~50세가 174명으로 30.4%, 51~60세가 77명으로 13.4%, 61~70세가 21명으로 3.7%, 71세 이상은 4명으로 0.7%였다. 20~30대가 무려 과반을 넘는 북한 역사상 가장 젊은 최고인민회의였다.

학력으로는 대학 전문이 227명으로 39.6%, 중학교 졸업이 147명으로 25.8%, 소학교 졸업이 198명으로 34.6%였다.

572인 대의원의 소속 정당은 다음과 같다.
  • 북조선로동당 102석 (17.9%)
  • 남조선로동당 55석 (9.6%)
  • 조선민주당 35석 (6.1%)
  • 천도교청우당 35석 (6.1%)
  • 전국농민총동맹 28석 (4.9%)
  • 조선로동조합전국평의회 27석 (4.8%)
  • 인민공화당[5] 20석 (3.5%)
  • 근로인민당 20석 (3.5%)
  • 민주독립당 20석 (3.5%)
  • 사회민주당 11석 (2%)
  • 신진당 11석 (2%)
  • 민주한독당 10석 (1.8%)
  • 조선민주녀성동맹 9석 (1.6%)
  • 민중동맹[6] 8석 (1.4%)
  • 기독교민주동맹[7] 7명 (1.2%)
  • 근로대중당[8] 7석 (1.2%)
  •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7명 (1.2%)
  • 건민회 6석[9] (1.1%)
  • 민족자주련맹 6석 (1.1%)
  • 전국유교련맹[10] 6석 (1.1%)
  • 조선문화단체총련맹 6석 (1.1%)
  • 남조선청우당[11] 5석 (0.9%)
  • 한국독립당 3석 (0.5%)
  • 민족대동회[12] 2명 (0.3%)
  • 건국청년회 2석 (0.3%)
  • 학병거부자동맹 2석 (0.3%)
  • 전국불교도총련맹 2석 (0.3%)
  • 불교청년회 2석 (0.3%)
  • 애국부녀동맹 1석 (0.1%)
  • 조선농민당 1석 (0.1%)
  • 호국청년회 1석 (0.1%)
  • 무소속 114석 (20%)

조선로동당원은 남북로당을 다 합쳐서 의외로 상당히 적은 27.4%에 해당하는 157명(북한지역 122명, 남한지역 55명)에 불과했다. 천도교청우당이 35명, 조선사회민주당이 35명, 근로인민당이 20명, 민주독립당이 20명, 인민공화당이 20명, 기타 단체 171명, 무소속이 144명이었다. 다만 북한 지역만 국한한다면 조선로동당원이 우세하였다. 가끔 이 결과만 보고서 당시 선거가 이후의 북한 선거와는 달리 조선로동당에게 불리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로동당 남북로당 이외에 기타 민청과 같은 로동당의 관제 단체들과 이후 조선로동당에 합당될 사회주의 정당까지 합치면 40%대는 된다. 물론 그래도 과반엔 미다롸긴 하지만 북한 지역만 보면 60%정도는 된다. 조선로동당 혼자서 80% 이상을 먹어치운 다음 선거 이후 선거랑은 그래도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9월 8일 헌법 독회가 있었고 만장일치로 이를 채택했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내각을 선거함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수립하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북한 역사상 가장 많은 대의원을 선출한 선거였으며 해당 기록은 1977년 제6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7명 더 많은 579명을 선거한 후에야 깨지게 된다.

5.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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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두 손을 쥐고 동시에 투표함에 넣은 뒤에 손을 펴서 투표를 한 뒤에 빼는 규칙이 있었지만 북한 당국에서는 일부러 이 규칙을 알리지 않았다.[2] 당시 이관술은 소위 ‘정판사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돼 갇혀있던 때였다.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상징적으로 선출 명단에 이름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이관술의 유공자 심사를 보류한다는 결정서에 그 이유를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이관술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관술 연구자들은 "보훈처 심의위원들도 이관술이 북한 정권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관술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하게 된다면 야당의 정부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을 것이란 게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라며 반발했다.출처 법적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으면 서훈을 줘야 하는데 정판사 사건은 북한 정권 수립 참여라고 보기 어려워 이를 이유로 들 수도 없기 때문에 이 선거를 구실 삼은 것으로 보이며, 똑같이 대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김철수의 경우 건국훈장을 받은 바 있기에 차별적 처우이며, 이관술은 유족이 남한에 있기 때문에 이 선거가 유족들의 고통을 더하고 있다.[3] 강규찬의 아내.[4] 고진희의 남편.[5]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을 개칭한 이름이다 [6] 한민당 내에서 토지개혁신탁통치 문제로 인해 당 주류와 갈등을 빚고 탈당원세훈김약수 등이 모여 김규식을 지도자로 추대한 사회단체. 좌우합작운동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구를 천명했으며, 김규식이 의장을 맡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여당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마 뒤 내부 갈등이 격화되어 김규식은 총재 사퇴를 선언하고, 김약수계는 집단 탈당하여 조선공화당을 창당했으며, 원세훈계는 조선농민당을 창당하면서 해체되었다.[7]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 중 한 사람이자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기독교 사회주의 단체로, 해방 정국의 좌익 세력 중 유일하게 기독교 좌파에 속했다. 결성식장을 교회우익 단체 청년들이 습격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창당 과정에서 조직적인 방해를 받았다. 미군정을 비판하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하며 자신들이 반민족적 교회 지도자라 간주한 이들을 친일파와 싸잡아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며, 김창준 목사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 당 자체는 이후에도 지하에서 유지되었으나, 1949년 10월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다.[8] 1946년 11월에 강순, 이지탁, 황현철 등이 창당한 정당.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창당할 당시 포섭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2석을 배정받았으나, 남북연석회의 당시 지도부 다수가 월북하여 해산되었다.[9] 1946년 이극로, 권동진, 윤치형 등이 만든 사회단체. 청우당, 사민당 등과 함께 남북합작간담회를 주최했고, 일본재일교포 차별을 규탄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선언해 좌우 인사들 간의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극로가 민족독립당 및 민족자주연맹 창당에 합류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10]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통일국가수립운동을 위한 세력 확대라는 좌파의 조직적 목적과, 유교계 내부에서 김창숙 중심의 유도회총본부가 우경적 성향을 띄는 것에 불만을 가진 좌파 성향의 유림 세력이 결집되어 만든 사상 전무후무한 좌익 유림 계열 단체로, 영남원로 유림 김응섭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명륜학교(현 성균관대학교) 출신 좌익 성향 청년들과 사서연역회 출신자들이 참여했다. 유교 개혁평등 사회 구현을 외쳤으나, 사람들에게 두터운 인망을 가졌던 김창숙의 유도회가 이미 서울과 지역 향촌 사회를 장악한 상황인지라 크게 세를 확장하는데 실패하고 몰락하였다. [11] 김병세가 이끌던 남한판 천도교청우당.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도 참여하였으나 의석을 얻지 못했고, 얼마 안가 해체되었다. 이후 월북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천도교청우당과 합쳐진다. [12] 전신은 대동회로, 대동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 독서모임인 대동사를 모체로 해방 직후에 초기 유교계 통합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점차 좌파 정치단체로 변화하였다. 출범 시기 대동회는 일제하 명륜학원 출신들로 구성된 청년 유림 단체로서 해방정국 초기에 유교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발휘했다. 초기에는 유림 내부 통합의 추진력을 제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유교적 자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적 달성에 기여했다. 하지만 김창숙을 비롯한 유교계 독립운동 원로들이 유교계 통합을 주도하고 김구의 반탁노선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반발한 대동회 청년유림들은 표면적인 중간파 노선에서 이탈하여 1946년 하반기부터 민족대동회로 확대⋅개편하여 적극적인 통일국가수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분단을 피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대동회 주축 세력은 결국 북한을 택했고 그 결과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처: 이황직. (2014). 해방정국의 청년 유교단체 ‘대동회’ 연구. 사회이론, 45, 109-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