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구(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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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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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趙俱
(? ~ 355)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진주(秦州) 남안군(南安郡) 일대에 존재하던 강족 추장.[1]
또는 천수군(天水郡) 출신의 한족이라는 설도 있다.
2. 생애[편집]
영화 6년(350년) 정월, 본래 포홍을 따르던 조구는 포홍이 대장군, 대선우,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자 종사중랑에 임명되었다.
영녕 원년(350년) 8월, 부홍이 독살당한 이후, 부홍의 세자 부건이 그 세력을 이끌면서 관중을 장악하기 위해 장안(長安)을 공략하러 출정하였다. 조구는 부건의 명령에 따라 하내(河內)태수로 승진하여 온(溫)을 진수하다가, 부건이 마침내 전진을 건국했을 때 광록대부에 제수받았다.
황시 4년(354년) 6월,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북벌에 실패하여 퇴각하자, 조구는 낙주(洛州)자사에 임명되어 의양(宜陽)에 주둔하였다.
수광 원년(355년) 11월, 경명제 부건이 붕어하고 황제로 즉위한 부생이 황후 양씨와 여러 대신들을 죽이면서 폭정을 시행하였다. 황제 부생이 조구의 사촌동생인 조소(趙韶)를 상서좌복야로 삼고, 조회(趙誨)를 사예교위로 삼아 측근으로 두니, 조구 역시 부생에게 살해당한 양릉을 대신해 상서령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소환받았다. 그러나 조구는 병을 칭하며 굳게 직책을 사양하고, 조소와 조회를 불러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으로 인해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너희들은 조종(祖宗)을 돌보지 않고 우리 집안을 멸문시키려 작정하였느냐! 모귀(毛貴)와 양릉(梁楞)은 대체 무슨 죄가 있어 주살하게 두었느냐? 내가 어찌 공이 있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나는 차라리 죽을 것이니 너희 알아서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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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천수군(天水郡) 출신의 한족이라는 설도 있다.